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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브릴 라도미르 (영어: Gavril Radomir, 불가리아어: Гаврил Радомир҃) |
출생 | 미상 |
사망 | 1015년 8월 |
직위 |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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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1제국 25대 차르. 부친 사무일과 함께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했고, 부친이 사망한 뒤 차르로 등극한 후 전쟁을 이어갔지만 1015년 8월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살해당했다.2. 생애
사무일과 아가타의 장남이다. 일찍이 부친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동행하였고, 바실리오스 2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배신하려 한 사무일의 동생 아론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976년 6월 14일 뒤프니차 인근에서 승리에 기여했다. 이때 사무일이 아론과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처단한 뒤 아론의 아들인 이반 블라디슬라프까지 죽이려 하자, "혈육끼리 더 이상 피를 봐서는 안 된다"라며 아버지를 간절히 설득해 그의 목숨을 건지게 하였다.996년 부친의 그리스 남부 원정에 참가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이르렀다. 불가리아군은 테살리아를 약탈하고 테르모필레 관문을 넘어 헬라스 테마로 진입해 코린트까지 유린하고 약탈했다. 니키포로스 우라노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했고, 사무일은 군대의 방향을 돌려 이를 맞이했다. 양군은 스페르케이오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봤는데, 마침 강이 범람해서 건너기 힘들었다.
그래서 불가리아군은 방심하고 있었으나, 우라노스는 996년 7월 19일 밤 극비리에 상류 쪽으로 강을 건너서 불가리아군을 급습했다. 사무일은 팔에 화살을 맞고 사로잡힐 위기에 놓였지만, 가브릴이 용맹을 발휘한 덕분에 겨우 소수의 측근만 거느리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후 아드리아 해의 주요 항구인 디라키움을 점령한 후 달마티아의 오지를 횡단하여 보스니아까지 행진해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사무일은 군대를 재정비한 뒤 1010년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하는 세르비아의 두클라 공국을 침공하여 굴복시키고, 딸 테오도라 코사라를 두클라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와 결혼시켰다. 가브릴 역시 이 원정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고,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자 하는 부친의 뜻에 따라 헝가리 대공 게자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 출신의 노예 이리니에게 관심을 돌렸고, 얼마 안가서 헝가리 아내와 이혼하고 이리니를 면천시킨 뒤 결혼하였다. 헝가리 대공은 이에 분노하여 불가리아와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1002년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의 비딘을 포위하여 불가리아군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틈을 타 사무일의 지지자인 트란실바니아와 공작 아이토냐를 공격했다.
동로마 제국은 1001년부터 매년 불가리아를 침공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고, 불가리아 역시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침입해 약탈을 벌였다. 하지만 국력이 동로마 제국에 비해 열세한 불가리아는 이러한 소모전을 벌일수록 불리했다. 급기야 불가리아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사무일이 일전에 임명했던 디라키움 총독 아쇼트는 사무일의 장인인 요안니스 크리셀리오스, 아내이자 사무일의 딸 미로슬라바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아쇼트와 미로슬라바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였고, 크리셀리오스는 동로마 제국 사령관 유스타시오스 다프노멜리스에게 디라키움을 내주었다. 이에 기회를 잡은 바실리오스 2세는 1006~1007년 불가리아 영역 깊숙히 침투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009년 테살로니카 근방의 크레타에서 사무일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황제는 이후에도 불가리아의 영토에 매년 침공하여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사무일은 이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한다면, 동로마 제국에 비해 국력이 현저히 약한 불가리아는 패망하고 말 것이었다. 매복 공격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바실리오스 2세가 영토를 침략하기 전에 길목을 차단하기로 했다. 1014년, 그는 클레이디온 협곡을 점거하여 두꺼운 나무 벽을 세우고, 적이 길고 위험한 우회로로 가도록 유도했다. 그해 여름 클레이디온 협곡에 도착한 황제는 나무벽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기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황제는 할 수 없이 철군하려 했으나,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장군이 일부 병력을 몰래 숲이 우거진 언덕 사면으로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능선을 따라 불가리아군의 뒤까지 가서 협곡으로 내려간 다음 후방을 기습하자는 것이었다. 황제가 승낙하자, 시피아스는 엄선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본진을 빠져나간 뒤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협곡의 반대편 끝, 즉 불가리아군의 후위까지 간 뒤 숲에서 나왔다. 7월 29일, 그는 공격을 개시했고 황제도 동시에 나무벽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불가리아군은 협공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이때 사로잡힌 병사는 14,000~15,000명에 달했다.
사무일은 한때 사로잡혔지만, 가브릴이 대단한 무용을 선보여 적병을 모조리 몰아내고 포박당한 아버지를 말에 태운 뒤 포위망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 후 바실리오스 2세가 바르다르 계곡을 완전히 공략하기 위해 파견한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의 동로마군을 상대로 스트루미치에서 매복 공격을 가하여 완승을 거두었고, 테오필락토스를 직접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적지 않았는지 바실리오스 2세도 스트루미차의 포위를 풀고 철군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1만 5천 명의 포로를 100명씩 150개조로 나눠서 99명은 두 눈을 모두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나머지 1명은 한 눈만 뽑은 뒤 애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인솔해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것은 과장되어 전해진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불가리아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건 사실이다.
사무일은 클레이디온 전투 직후 쇠약해졌고, 1014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뒤이어 차르가 된 가브릴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10월 24일 사무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바실리오스 2세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군의 방향을 돌려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크르나 계곡을 거쳐 가브릴이 있는 비톨라로 향했다. 비록 비톨라 요새를 공략하진 못했지만, 차르의 궁전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1015년 초, 가브릴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 앞으로 황제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이를 의심하여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와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장군을 모글레나로 파견해 적군을 섬멸하고 모시노폴리스에서 트리아디차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하고 보아나 요새를 점거하도록 하였다.
동로마군이 뒤이어 모글레나 요새를 포위하자, 가브릴은 구원군을 이끌고 요새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포위망이 워낙 견고하여 구원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가 압박을 가함으로써 적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지만, 동로마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수일 간 테오도시오스 성벽 주위를 맴돌다가 별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모글레나 요새는 함락되었고, 가브릴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차르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앞으로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넘어간 블라디슬라프는 1015년 8월 페트리스크 마을 근처의 숲에서 사냥하던 가브릴을 습격해 살해하였다. 그는 가브릴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차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