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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06:33:14

우로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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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6C1><colcolor=#fff> 세르비아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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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시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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Урош II}}}
출생 미상
사망 1162년 이후
재위 세르비아 대공
1144년 또는 1145년 ~ 1153년
세르비아 대공 (복위)
1155년 또는 1156년 ~ 1162년
아버지 우로시 1세
어머니 안나 디오예니사
형제 옐레니, 벨로시, 데사, 마리아
가문 부카노비치 왕조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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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3대 대공.

2. 생애

세르비아 대공국 2대 대공 우로시 1세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4세의 손녀인 안나 디오예니사의 장남이다. 형제로 옐레니, 벨로시, 데사, 마리아가 있었다. 누이 옐레니는 헝가리 국왕 벨러 2세의 왕비였으며, 마리아는 즈노이모 공작 콘라트 2세의 부인이었다. 형제 벨로시는 누이 옐레니의 후광을 받고 1141년부터 헝가리 왕국의 궁정백이 되었으며, 데사는 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1143년 또는 1144년에 두클랴의 영토였던 트라부니야와 제타의 통치자로 세워졌다. 그는 1144년 또는 1145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으며, 1146년 동방 원정을 떠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를 돕기 위해 보조병 300명을 보냈다.

1143년에서 1149년 사이, 데사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두클랴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 크냐지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와 의 형제들을 밀어내고 두클랴 시를 점거했고, 라도슬라프와 두 형제는 코토르 주변으로 이동한 뒤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에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가 통합되면 제국에 우환이 될 것을 우려해 그전에 응징하기로 했다.

1149년, 마누일 1세는 아드리아 해안의 발로나에서 펠라고니아와 코소보 평원을 거쳐 우로시 2세가 통치하는 지역을 침공했다. 먼저 세르비아 대공국의 수도인 라스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뒤이어 이바르 강 상류의 니카바로 진군해 그곳을 문제 없이 공략했다. 다만 이바르 강 오른쪽 강둑에 있는 갈리치는 3일간의 포위 공격 후에야 함락되었다. 세르비아 포로들은 세르디카 인근에 정착하기 위해 보내졌다. 그 사이, 우로시 2세는 라스 인근에 주둔하던 동로마군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이에 마누일 1세가 방향을 틀어 쫓아오자, 우로시2세는 산악 지대에 몸을 숨겼다. 마누일 1세는 그를 잡지 못하자 여러 거주지를 불태운 뒤 철수했다.

1150년 여름, 마누일 1세는 재차 세르비아 원정을 개시해 니시에 이르렀다. 그는 헝가리 파견군이 루고미르 강 하류에 있는 롱고미르에 주둔해 세르비아인들을 도우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모라바 계곡을 통해 사바로 이동한 뒤 드리나 강을 따라 이동해, 헝가리군이 우로시 2세와 합류하는 경로를 차단했다. 그 후 드리나 강변에서 헝가리군을 상대로 소규모 접전을 치러 승리한 뒤, 동로마 군은 타라 강둑에 진을 쳤다. 다음날 새벽, 스렘 출신의 우가르족, 페네체그존, 하자르족으로 구성된 용병 기병대로 강화된 세르비아군이 강둑에 진영을 친 로마군을 급습했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몸소 전선에 나아가 분전하자, 사기가 오른 동로마군이 세르비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험난한 지형과 눈더미로 인해 동로마군의 행군이 막히자, 황제는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그 대신, 우로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당장 항복하라고 권고했다.

우로시 2세는 제국군의 압도적인 규모와 연이은 패전에 더 이상 저항할 엄두를 못 냈다. 그는 몸소 황제를 알현해 그 앞에 엎드려 영원히 로마인의 노예로 남겠다고 서약했다. 또한 미래에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황제에게 전사 2,000명을 보내고, 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전처럼 300명이 아닌 500명의 전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데사가 자신의 뜻에 반하여 제국을 적대했으니,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요청했다. 마누일 1세는 우로시 2세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줬고, 데사가 두클랴에서 물러나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달마티아의 통치자로 군림하는 걸 허용했다. 그 후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화려한 옷을 입은 세르비아 포로들을 전리품으로 내세운 개선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를 도운 헝가리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1151년부터 1155년까지 일련의 원정을 벌였고, 우로시 2세는 그런 황제를 도왔다. 그러나 세르비아 귀족들은 우로시 2세가 동로마 제국에 납작 엎드린 것에 반감을 품었다. 특히 그의 형제 데사는 동로마 제국의 압력으로 기껏 얻었던 두클랴를 내준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누이 옐레니가 헝가리 왕비였고 형제 벨로시가 헝가리 궁정백으로 활동하는 만큼, 헝가리 왕국이 동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는 걸 도와야 한다고 여겼다. 1153년, 데사는 반 동로마 성향의 귀족들의 후원에 힘입어 우로시 2세를 축출했다.

1155년 9월 헝가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은 마누일 1세는 1155년 또는 1156년 헝가리 귀족들을 압박해 데사를 축출하고 우로시 2세를 복위하도록 했다. 그 대신, 데사에게 니스 인근의 덴드라 일대를 영지로 수여했다. 1160년, 우로시 2세는 룸 술탄국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는 황제를 돕고자 보조군 500명을 파견했다. 1162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우로시 2세를 폐위하고 벨로시를 새 대공으로 세웠다. 그 후 우로시 2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전승에 따르면 우로시 2세는 쿠체비슈키 수도원을 세우고 거기에 들어가 여생을 수도사로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