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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4:15:16

벨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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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6C1><colcolor=#fff> 세르비아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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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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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елош}}}
출생 미상
사망 1198년 이전
재위 헝가리의 섭정
1141년 ~ 1146년
헝가리의 반
1146년 ~ 1157년
세르비아 대공
1162년
아버지 우로시 1세
어머니 안나 디오예니사
형제 옐레니, 우로시 2세, 데사, 마리아
가문 부카노비치 왕조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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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5대 대공.

2. 생애

세르비아 대공국 2대 대공 우로시 1세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4세의 손녀인 안나 디오예니사의 차남이다. 형제로 옐레니, 우로시 2세, 데사, 마리아가 있었다. 누이 마리아는 즈노이모 공작 콘라트 2세의 부인이었다. 형 우로시 2세는 1144년 또는 1145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으며, 데사는 1143년 또는 1144년에 두클랴의 영토였던 트라부니야와 제타의 통치자로 세워졌다.

그의 누이 옐레니는 1129년 헝가리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벨러와 결혼했다. 벨로시는 그녀를 헝가리로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131년 벨러 왕자가 헝가리 국왕 벨러 2세로 등극한 뒤, 벨로시는 헝가리 궁정에서 복무했다. 이후 10년간 벨로시의 황동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헝가리 연대기에서는 옐레니가 실명된 남편 벨러 2세를 대신해 여러 정적을 처단하는 등 국정을 좌지우지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벨로시가 국정 운영을 하는 누이를 옆에서 도왔을 거라고 추정한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에 따르면, 벨로시는 1130년에 벨러 2세와 옐레니 왕비의 아들로 태어난 조카 게저 왕자의 가정 교사였다고 한다.

1141년 2월 13일 벨러 2세가 사망한 뒤 게저 왕자가 게저 2세로서 헝가리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게저 2세는 아직 어렸기에, 옐레니와 벨로시가 공동 섭정을 맡았다. 남매는 게저 2세가 1146년 9월 성인이 될 때까지 헝가리 왕국을 통치했다. 벨로시는 아르파드 왕조의 외부 구성원으로서 처음으로 둑스(Dux)라는 칭호를 받았다. 벨로시는 섭정으로서 헝가리 왕국과 할리치 공국 사이의 동맹을 주선했다. 이후 할리니차 공작 볼로디미르코가 헝가리의 지원을 받으며 이웃 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하자, 키예프 루스 대공 프세볼로트 2세는 그를 조기에 꺾어놓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여기고 다른 루스 공작 및 폴란드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고 할리치나를 공략하기로 했다. 볼로디미르코는 헝가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벨로시는 군대를 이끌고 할리치나로 가서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볼로디미르코는 키예프 루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복종했다.

이 무렵, 자신을 전임 헝가리 국왕 칼만의 아들이라 칭하며 벨러 2세 치세 때 폴란드의 힘을 빌려 헝가리 왕위를 찾으려 했다가 패배한 뒤 조용히 지냈던 보리스는 벨러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음모를 꾸몄다. 1145년, 그는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로부터 헝가리 왕으로 옹립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보헤미아 공국은 헝가리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1140년 보헤미아 통치자 소베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블라디슬라프 2세가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을 몰아내고 공작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게저의 친척이었던 즈노이모의 콘라트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가 반란군을 지원했다고 여기고 이를 보복하고자 보리스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후 독일왕 콘라트 3세를 찾아가서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세워준다면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겠다고 제의했다. 당시 콘라트 3세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를 벨러 2세의 딸이자 게저의 누이인 소피아와 약혼시켰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피아를 아드몽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보냈다. 헝가리 궁정은 자국의 공주를 그런 식으로 대우한 것에 분노했다. 콘라트 3세 역시 헝가리가 자신을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참에 순종적인 사람을 헝가리 국왕으로 앉히기로 하고 보리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1146년, 보리스는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을 이끌고 헝가리로 쳐들어가서 포조니를 공략했다. 벨로시는 게저 2세와 함께 출진해 벨로시는 게저 2세와 함께 출진해 보리스를 격파하고 포조니를 탈환했다. 여기에 콘라트 3세의 정적인 바이에른 공작 벨프 6세와 접촉해 그에게 재정을 지원하여 콘라트 3세에 대항해 봉기하도록 부추겼다. 1146년 9월 11일, 벨로시는 게저 2세와 함께 라지타 인근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야소미르고트를 격파했다. 시토회 소속의 독일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 오토 폰 프라이징에 따르면, 벨로시는 세켈리스족과 페체네그족으로 구성된 2번째 대열을 이끌고 적의 방어선을 돌파했다고 한다. 14세기 헝가리 왕국의 중세 그림 연대기인 <일루미네이트 크로니클>에 따르면, 벨로시는 후방에서 병력을 이끌고 독일군 대열로 돌격해 수많은 이를 학살했다고 한다.

1146년 하반기에 게저 2세가 성인으로 선언된 후에도, 벨로시는 1146년부터 1157년까지 헝가리의 반으로 선임되었고 1146년 헝가리 왕국 최고 궁정 직위인 궁정백이 될 정도로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영주로 군림했다. 그 후 그는 동시대 문서에서 반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벨로시는 게저 2세와 키예프 대공 이지슬라프 2세의 누이인 에우프로시네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본인은 1150년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딸을 도로고부즈, 블라디미르와 볼린의 공작 블라디미르 3세 므스티슬라비치와 결혼시켰다.

1150년,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1세 세르비아 대공국을 침공하자, 벨로시는 조국인 세르비아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은 그해 9월 타라 강에서 헝가리와 세르비아 연합군을 격파했고, 결국 벨로시의 형이자 세르비아 대공 우로시 2세는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마누일 1세는 헝가리에 대한 보복 작전을 개시해 사바 강과 다뉴브 강 사이의 땅을 황폐화했고, 1150년 후반에는 자모니를 포위 공격했다. 당시 게저 2세는 할리치나에 출전했기 때문에 헝가리에는 벨로시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벨로시는 동로마군의 군세가 워낙 강력해 상대하길 꺼렸다. 하지만 마누일 1세는 자모니 공략에 실패하고 브라니체보로 후퇴했다. 여기에 보리스도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에 침입해 테메슈 강 계곡을 황폐화시켰다. 게저 2세는 헝가리로 돌아온 뒤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치 않아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150년 말 또는 1151년 초에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153년, 당시 헝가리 방면 동로마 국경 지역 행정관이었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황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표명했다. 안드로니코스는 헝가리 왕국에 자신을 도와준다면 자기가 소유하는 국경 지대를 전부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누일 1세는 이 계획을 간파하고 안드로니코스를 체포했고, 게저 2세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벨로시와 함께 도나우 강 하류의 동로마 제국 속주인 파리스트리온을 침공해 지난날 마누일 1세가 자국을 황폐화시킨 것에 보복하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을 눈치챈 마누일 1세가 도나우 강으로 진군하자, 게저 2세는 사절을 보내 사느디차[1]에서 새로운 평화 협약을 맺고 헝가리 전쟁 포로들을 돌려받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1157년 이후, 벨로시는 헝가리 측 자료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요안니스 킨나모스에 따르면, 게저 2세가 1162년 5월 31일에 사망했을 때, 게저 2세는 아들 이슈트반 3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이에 마누일 1세는 자국으로 망명한 게저 2세의 형제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새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게 했다. . 이슈트반 왕자는 곧 자신이 헝가리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상대적으로 인기가 많은 형제 라슬로를 헝가리 국왕 라슬로 2세로 추대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데다 황제로부터 뇌물을 듬뿍 받자 라슬로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 후 마누일 1세는 세르비아 대공국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우로시 2세를 폐위하고 벨로시를 새 대공으로 세웠다. 하지만 벨로시는 얼마 안가서 형제 데사에게 대공위를 넘긴 뒤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바노슈토르 시의 스렘에 성 스테판 수도원을 세운 사실은 전해진다.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칼로크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를 이전에 죽은 사람으로 언급한 것을 볼 때, 1198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1] 현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