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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17:17:52

소베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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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8대 공작
소베슬라프 1세
Soběslav I
파일:소베슬라프 1세.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소베슬라프 1세
(Soběslav I)
출생 미상
사망 1140년 2월 14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125년 ~ 1140년
자녀 블라디슬라프, 마리 체스카, 소베슬라프 2세, 올드르지흐, 바츨라프 2세
아내 아들레타 아르파도브나
형제 바츨라프,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 루드밀라, 볼레슬라프, 브라티슬라프 2세, 보르지보이 2세, 블라디슬라프 1세, 유디트 그로이치스카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2세
어머니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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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8대 공작.

2. 행적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의 딸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의 막내로 출생했다. 그의 유년기는 알려진 바 없지만, 프라하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07년 스바토플루크 2세에게 폐위된 형 보르지보이 2세와 함께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에게 망명했다. 1109년 스바토플루크 2세가 암살당하자 프라하로 돌아갔다.

1110년 보르지보이 2세와의 정쟁에서 승리하여 보헤미아 공작위를 차지한 형제 블라디슬라프 1세가 잠재적인 정적들을 대거 숙청하자, 소베슬라프 1세는 위협을 느끼고 폴란드로 망명한 뒤 볼레스와프 3세와 손잡았다.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는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기 위해 프라하로 진격했지만, 보헤미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났다. 1111년, 양자간의 협상 끝에 합의가 도출되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신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의 통치권을 얻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1115년에 브르노 및 즈노이모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1117년, 블라디슬라프 1세는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의 압력에 못 이겨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자데츠만 소유했다. 하지만 보르지보이 2세는 이후 3년간 홍수와 폭풍 등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고, 블라디슬라프 1세는 이를 틈타 1120년 정변을 일으켜 보르지보이 2세를 헝가리로 축출했다. 이후 소베슬라프 1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해 해외로 망명하게 만들고, 브르노를 오타 2세에게, 즈노이모를 콘라드 2세에게 양도했다.

1125년, 임종을 눈앞에 둔 블라디슬라프 1세는 사촌 오타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어머니 시비엥토스와바와 프라하 주교 오토 밤베르스키가 강력히 반대하자, 그는 마음을 바꿔 형제 소베슬라프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125년 4월 12일 블라디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소베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오타 2세는 이에 불복했고, 독일왕 로타르 3세의 지지를 확보했다. 로타르 3세는 보헤미아 승계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소베슬라프 1세를 불렀지만, 소베슬라프 1세는 함정을 의심해 가지 않고 별다른 권한이 없는 사절단만 로타르 3세에게 보냈다.

로타르 3세는 불충한 봉신을 정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1126년 초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했다. 당시 1125년 말과 1126년 초 겨울 날씨는 매우 혹독했지만, 로타르 3세는 이를 감안하지 않았다. 여기에 보헤미아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으지 않고 작센 공국 동부의 전사들만 동원했다. 소베슬라프 1세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성 오드리의 깃발과 성 바츨라프의 창을 병사들에게 보이며 다음과 같이 독려했다고 한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순교자인 바츨라프와 오드리의 공로로 우리 땅이 외국인들에게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노라."

1126년 2월 18일, 소베슬라프 1세는 눈 덮인 산기슭으로 이동 중이던 적군을 흘루메크 언덕에서 기습 공격했다. 당시 로타르 3세의 독일 기병대는 내리는 눈을 뚫고 나아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야 했고, 무거워서 눈밭을 헤쳐나가기 어려운 갑옷 역시 벗어야 했다. 그러다가 보헤미아군의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을 받자 크게 패해 달아났고,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던 오타 2세는 로타르 3세, 훗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될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근처 언덕으로 피신했다. 이후 보헤미아군이 언덕 밑에서 포위한 뒤 공세를 벌인 끝에, 오타 2세는 전사했고 로타르 3세와 알브레히트 1세는 생포되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즉시 로타르 3세와 알브레히트 1세를 풀어줬고, 로타르 3세는 그 대가로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고 독일 군주 선거에서 투표권을 가진 최고 시종 칭호를 내렸다.

신성 로마 제국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입지를 공고히 한 소베슬라프 1세는 입지 강화에 나넜다. 먼저 오타 2세의 자식들인 콘라드 2세와 브라티슬라프로부터 즈노이모, 올로모우츠, 브르노 등 영지를 몰수하고, 인드르지흐 즈디크 주교를 통해 올로모우츠를 직접 통치했다. 또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외아들인 브라티슬라프를 1126년에 체포해 도닌 성에 투옥했고, 1129년 데친 성으로 옮겼다. 1130년 여름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한 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실명형을 가했고, 주동자들의 사지를 4등분으로 절단하는 형벌을 가했다.여기에 데친 성에 갇혀 있던 브라티슬라프가 이 음모와 연관시켜 실명형에 처했다.

한편, 그는 로타르 3세의 충성스러운 가신으로서 활약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전쟁에 언제나 참여해 로타르 3세를 도왔고, 로타르 3세가 헝가리 내전에 개입했을 때도 힘을 보탰다. 1132년, 그는 로타르 3세의 지원 덕분에 헝가리 국왕으로서 입지를 굳힌 벨러 2세, 페레미실 공작 볼로디미르코와 함께 폴란드를 공격해 소폴란드로 진입하여 비실리카를 공략했다. 이후에도 폴란드와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르다가 1137년 크워츠코에서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와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다만 이 협약에 대한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1138년 독일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3세가 개최한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소베슬라프 1세는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수석 시종을 세습할 권리를 인정받고, 자신이 죽으면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보헤미아 공작위를 세습하는 것 역시 인정받았다. 그 해 6월, 그는 보헤미아 귀족들을 사드스카로 소환한 뒤 블라디슬라프의 계승을 확인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140년 2월 14일 소베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콘라트 3세는 약속을 뒤집고 전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의 아들이며 소베슬라프 1세의 조카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세웠고, 보헤미아 귀족들 역시 받아들였다. 이는 보헤미아 공작에 통제하기 쉬운 젊은이를 세우기 위한 조치였지만, 블라디슬라프 2세는 곧 자신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줬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