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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코소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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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코소보 전투
세르비아어: Косовска битка
파일:Battle_of_Kosovo,_Adam_Stefanović,_1870.jpg
아담 스테파노비치 작, <코소보 전투>, 1870년.
시기 1389년 6월 15일
장소 브란코비치 가문 영지 프리슈티나 인근 코소보 평원
원인 세르비아 전역을 복속하려는 무라트 1세의 공세와 세르비아 영주 연합 및 보스니아 왕국의 방어
교전국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오스만 제국
(오스만 술탄국)
파일:Flag_of_Moravian_Serbia.svg.png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파일:보스니아 왕국 국기.png 보스니아 왕국
브란코비치 가문
지휘관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무라트 1세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바예지트 1세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1383-1453).svg.png 야쿠프 첼레비 X
파일:Flag_of_Moravian_Serbia.svg.png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파일:보스니아 왕국 국기.png 블라트코 부코비치
부크 브란코비치
병력 12,000 ~ 20,000명 27,000 ~ 30,000명
피해 매우 큰 손실 매우 큰 손실
결과 무승부.
영향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의 오스만 제국 속국화.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및 영향

[clearfix]

1. 개요



1389년 6월 15일, 오스만 제국 술탄 무라트 1세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크냐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연합군이 세르비아의 패권을 놓고 프리슈티나 인근 코소보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전투 자체는 양측 모두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암살당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세르비아 전역을 제패하는 듯했던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2. 배경

2.1. 세르비아 제국의 분열

파일:Vukasin_ugljesa_1371_en.png

1346년 4월 16일 스코페에서 세르비아 총대주교 요아니키예 2세의 주관하에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차르"로 즉위해 세르비아 제국의 건국을 선포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이어간 끝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이톨리아, 아카르나니아, 테살리아, 드라마, 할키디키 반도 전역을 공략했다. 그러던 두샨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무섭게 확장하던 오스만 베이국을 인식하고, 오스만 베이 오르한의 아들과 자기 딸을 결혼하고 동로마 제국을 협공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351년, 오스만 군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얼마 후 동로마 제국에서 요안니스 5세 요안니스 6세 사이에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하자, 두샨은 요안니스 5세를 지지했고 오르한은 요안니스 6세를 지지했다. 1352년, 세르비아군은 디모티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격파되었다. 1354년 3월 2일, 트라키아에 대지진이 일어나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었다. 튀르크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최대한 거느린 채 트라키아로 이주, 버려진 도시들에 터전을 잡았다. 대다수는 페허가 된 갈리폴리로 갔고, 곧이어 더 많은 튀르크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합류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두샨은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청에 오스만 베이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조직하자고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355년 12월 20일,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 뒤를 이은 외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이복 동생이자 스테판 우로시 5세의 숙부인 시메온 우로시의 도전에 직면했다. 시메온 우로시는 이피로스와 테살리아에서 차르를 칭한 뒤, 제타(몬테네그로)로 북상하면서 귀족들에게 호응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르비아 귀족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옳고, 그의 어머니가 미하일 8세의 손녀 마리아 팔레올로기나이니 '반 그리스인'이라고 여겨서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시메온 우로시는 1358년 제타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숙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고, 일찍이 두샨에 의해 각지의 데스포티스로 세워졌던 신하들은 차르가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틈을 타 독자적인 행보를 꾀했다. 발시치 가문이 제타 및 라슈카(세르비아 중남부) 지역을 차지했고, 헝가리 왕국의 침공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던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는 드리나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의 세르비아 북서부를 지배했으며, 부카신과 우글레샤 브르냐브체비치 형제는 스테판 우로시 5세의 모후인 엘레나 황후의 총애를 토대로 프릴레프를 중심으로 마케도니아 서부와 스코페, 프리즈렌 등을 통치했다. 그리고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궁중 의전을 담당하는 관리였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노보 브르도로 이동한 뒤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와 협력하며 노보 브로도와 프리슈티나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외에도 스테판 두샨 시절 데스포티스로 임명되었던 요반 아센, 요반 올리베르, 스테판 우로시 5세에 의해 데스포티스로 임명된 데얀 드라가슈 등은 겉으로는 차르에게 충성했지만 실제로는 독립한 거나 다름없었다.

1365년, 스테판 우로시 5세는 1365년,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를 공동 통치자로 세우고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1369년에는 부카신의 장남 마르코 왕자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수도 라스, 마케도니아 서부, 스코페, 프리즈렌 등지에서나 통할 뿐이었고, 다른 지역의 통치자들은 중앙 정부의 어떠한 간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우로시 5세와 부카신의 공동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라구사 공화국의 역사가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1369년 라스 주판 니콜라 알토마노비치[1]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광산이 풍부한 코소보로 확장하려는 부카신에게 반감을 품고 연합군을 결성한 뒤 우로시 5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맞서 싸웠다. 므르냐체비치 가문과 연합군의 결정적인 충돌은 코소보에서 벌어졌다. 라자르는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철수했고,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우로시 5세는 여러 궁정 영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우로시 5세는 정계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부카신은 독립된 통치자로 군림했다.

2.2. 마리차강 전투

세르비아 영주들이 차르 스테판 우로시 5세의 무기력한 통치를 기회로 삼아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서로 분쟁을 벌이는 동안,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이 가시화되었다. 1362년, 오스만 베이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에디르네로 개명하여 서방 영토의 수도로 삼은 뒤, 발칸 반도로의 영역 확대를 계속 추진했다. 1371년,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는 헝가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세력을 재건한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를 도모하기 위해 슈코더르로 진군해, 니콜라의 영토에 속한 니식치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던 중 튀르크군이 제타 공작 주라지 발시치를 물리치고 트라키아와 로도피 산맥 일대까지 공략한 뒤 마리차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의 영지를 연이어 습격하자, 우글레샤는 형 부카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부카신은 니콜라를 향한 공세를 취소하고 동생을 돕고자 이동했다.

그러나 1371년 9월 26일 새벽, 랄라 샤힌 파샤와 에브레노스 베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가 마리차 강변 츠르노멘에 주둔하고 있던 세르비아 진영을 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부카신과 우글레샤는 전사했다. 1371년 12월 4일, 스테판 우로시 5세는 마리차 강 전투 패전 2달여 만에 사망했다. 향년 35세. 세르비아 영주들은 명목상으로나마 스테판 우로시 5세를 군주로 인정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난 뒤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을 칭한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를 아예 인정하지 않고 그의 영지를 앞다퉈 공략했다. 1372년 주라지 1세 발시치가 프리즈렌과 펙을 점령했고,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프리스티나를 점령했다. 1377년 부크 브란코비치가 스코페를 정복했고, 알바니아 출신의 영주 안드리야 그로파가 오흐리드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마르코가 지배를 유지한 유일한 지역은 프릴레프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서부의 작은 영토뿐이었고, 그나마도 남동생 안드리야시와 공유해야 했다. 결국 그는 생존을 위해 아버지와 숙부를 죽인 오스만 제국의 가신이 되어야 했다.

2.3.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세력 확장

파일:Central_balkans_1373_1395 (1).png
1380년 당시 세르비아

모라바 강변에서 세력을 일군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다른 세르비아 대귀족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갈수록 강성해지던 보스니아 반샤그의 반 트브르트코 1세와 우호 관계를 맺은 뒤, 그와 함께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를 협공하기로 했다. 1373년 가을,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보스니아군과 함께 공세를 개시해 니콜라를 격파하고 그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니콜라는 우지체에서 생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후 두 사람은 니콜라의 옛 영지를 나눠가졌다. 1377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이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확보했으며, 친할머니 엘리자베타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걸 근거로 삼아, 자신이 세르비아의 왕실인 네마니치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라자르는 그를 세르비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세르비아 공 칭호를 사용하는 걸 인정받았으며, 자기가 가진 영지의 지배권 역시 인정받았다.

그 후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비호를 받으며 다른 세르비아 귀족들을 압박했고, 루드니크 산지의 니콜라 조이치와 토플리카 강 계곡의 노박 벨로크비치를 복속시켰다. 1379년, 라자르는 헝가리의 가신을 칭하던 라스티슬라치치 가문으로부터 쿠체포와 브라니체포를 공략하고, 해당 지역의 영주로서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제 라자르의 영토는 옛 세르비아 제국 영토에 있는 다른 영주들보다 거대했으며, 군대와 행정망이 잘 조직되었다. 그는 수도를 크루셰바츠로 정했으며, 모라바 강 계곡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다뉴브 강과 사바 강, 북서쪽으로 드리나 강을 따라 이어진 영역을 지배했다. 여기에 니시와 우지체 등 주요 도시와 세르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 중심지인 노보 브르도와 루드니크를 지배했다. 또한, 라자르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는 지역에서 도망친 정교회 수도사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이전에 사람들이 살지 않아 경작되지 않았던 모라비아 일대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 이주민들을 그곳에 정착하도록 했다.

이렇듯 라자르는 트브르트코 1세의 비호 아래 갈수록 위세를 떨쳤지만, 제타 공국을 세운 발시치 가문, 코소보의 부크 브란코비치, 마케도니아 서부의 마르코 므르냐체비치, 마케도니아 일대의 콘스탄틴 드라가시, 라도슬라프 흘라펜 등은 라자르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중에서 마르코 므르냐체비치와 콘스탄틴 드라가시, 라도슬라프 흘라펜은 오스만 제국의 가신이 되었다. 1388년에는 제타 공작 주라지 스트라미로비치 발시치도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위협도 점점 거세졌다. 1381년, 가신들의 영토를 방해받지 않고 통과하던 튀르크 약탈대가 모라비아 세르비아에 침입했다. 이에 라자르의 가신인 크렙 부코슬라비치와 비토미르가 파라친 시 인근의 두브라브니차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1386년,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가 훨씬 많은 군대를 이끌고 니시를 탈취했다. 이에 라자르는 니시 남서쪽에 있는 폴로치니크에서 무라트 1세와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라자르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거세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했다. 1386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시슈만과 자기 딸 드라가나를 결혼시켰으며, 1387년 3월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 국왕 자그문트와 동맹을 맺고 딸 테오도라를 자그문트의 핵심 추종자인 가라이 미클로시와 결혼시켰다. 여기에 부크 브란코비치와 군사 동맹을 맺었고, 트브르트코 1세로부터 군사 원조를 약속받았다.

3. 전개

1389년 봄, 오스만 술탄국[2]의 무라트 1세는 일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세르비아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두 아들 야쿠프, 바예지트와 함께 플로브디프에서 대규모 병력을 집결한 뒤 이흐티만, 벨버즈드, 크라토보를 가로질러 코소보로 향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남모라바 강의 오른쪽 강둑에 있는 니시 인근에 군대를 집결한 뒤 프로쿠플리예를 건너 코소보로 향했고, 부크 브란코비치, 보스니아 국왕 트브르트코 1세가 파견한 블라트코 부코비치 휘하의 보스니아군이 가담했다. 여기에 테오도르 2세 무자카, 디미테르 조니마 등 알바니아 영주들과 헝가리인, 불가리아인도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가담했다. 양측의 규모는 기록마다 다르다. 15세기 초반 피렌체의 한 문서에 의하면 오스만 군은 14만, 세르비아 군대는 7만에 달했다고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당대의 과장법이라고 여기며, 실제 병력은 오스만 측 27,000 ~ 30,000명, 연합군 측 12,000 ~ 20,000명으로 추정한다.

1389년 6월 15일, 양군은 프리슈티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3마일 떨어진 코소포 평원에서 조우했다. 양측 모두 3개 부대로 나뉘었다. 오스만 제국군 총사령관 무라트 1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고, 아들 바예지트와 마리차 강 전투의 영웅 에브레노스 베그는 우익에 편성된 발칸 반도의 유럽 가신군을 이끌었다. 무라트의 또 다른 아들 야쿠프 첼레비는 좌익의 아나톨리아 튀르크 가신군을 이끌었다. 양익에 1,000명의 궁수가 배치되었고, 예니체리는 중앙 선두 대열에 집중 배치되었으며, 무라트와 그의 기병대는 그 뒤에 있었다. 오스만 측 기록에 따르면, 무라트는 세르비아 기병대에 혼란을 일으킥 위해 낙타 부대를 기병대 앞에 배치했다고 한다. 이에 맞서는 연합군 총사령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중앙군을 이끌었고, 부크 브란보키치는 우익 부대를 이끌었으며, 보스니아 장군 블라트코 부코비치는 좌익을 이끌었다. 세르비아 중기병대가 최전선에 섰고, 활로 무장한 경장 기병대는 측면에 배치되었다. 그들 뒤에는 보병대가 편성되었다.

세르비아 측과 오스만 제국 측의 전투 설명이 서로 엇갈리기 때문에, 사건의 진행 과정을 완벽히 재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이제껏 치렀던 전투 처럼, 오스만 궁수대가 적 기병대를 향해 화살을 쏘며 도발하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르비아 중기병대는 쐐기 진형을 결성한 뒤 튀르크군을 향해 돌진했다. 중앙과 우익에 대한 돌격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야쿠프 왕자가 지휘하는 오스만 좌익 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그러나 곧 튀르크 경기병과 보병이 반격을 가해, 좌익을 돌파하고 후방으로 돌진하던 세르비아 중기병들을 몰아냈다.

그 후 양측 보병대가 격돌했다. 세르비아 군인들은 중앙에서 튀르크군을 어느 정도 밀어냈다. 그러나 바예지트가 우익에서 반격을 개시해 적군을 밀어낸 뒤, 중앙에서 밀어붙이는 적 보병의 측면을 공격했다. 그 결과 세르비아 보병대의 대열이 흐트러지더니, 이내 탈주병이 속출했다. 민간 전승에 따르면, 부크 브란코비치는 사전에 오스만군과 내통하고 일부러 퇴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이를 근거없는 비난으로 간주하며, 그가 남은 군대를 구하기 위해 전장을 떠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뒤이어 블라트코 부코비치도 전세가 기울어졌다고 여기고 퇴각했다. 하지만 라자르의 부대는 끝까지 항전했다. 일설에 따르면, 라자르는 부하들에게 속히 피하라는 권고를 받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우리에겐 수치스러운 삶보다는 영광된 죽음이 낫다!"

결국 라자르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다. 한편, 무라트 1세는 전투가 끝난 직후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항복을 가장한 세르비아 귀족 밀로스 오빌리치가 술탄의 천막에 들어가 칼로 무라트 1세를 찔러 죽인 뒤 술탄의 경비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한다. 트브로트코 1세가 피렌체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무라트 1세는 전투 중에 튀르크 군인 대열을 돌파한 세르비아 귀족 12명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15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라오니코스 칼코콘딜레스가 인용한 익명의 튀르크인의 기록에 따르면, 무라트 1세는 전투가 끝난 뒤 전장을 살펴보던 중 죽은 척하고 있던 한 세르비아 장병에게 찔려 죽었다고 한다.

바예지트 왕자는 무라트 1세의 사망을 알게 되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던 형제 야쿠프에게 무라트 1세의 소환장을 보냈다. 야쿠프는 곧바로 술탄의 천막으로 달려갔다가 바예지트의 부하들에게 목졸려 죽었다. 그 후 바예지트 왕자는 무라트 1세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술탄 바예지트 1세로 등극한 뒤, 튀르크 귀족들에게 집권을 인정받기 위해 군대를 철수했다. 이리하여 코소보 전투는 종결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코소보 전투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으나, 양측 모두 막심한 손실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술탄 무라트 1세가 전투 직후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기독교 측이 승리했다고 여겼다. 보스니아 국왕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의 영토에 속한 트로기르 주민들과 우호 관계를 맺은 피렌체 공화국에 서신을 보내 기독교인이 이 전투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다. 반면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세르비아군이 막심한 피해를 입은 뒤 먼저 전장을 이탈했고, 라자르가 전사했으므로 자국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전투의 승자는 뚜렷하게 결정되지 않았지만, 한때 통합된 세르비아의 부활을 꾀했던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은 재기하기 힘든 손실을 입었다. 건국자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이 전사했고, 이 전투로 잃은 병력을 복구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뒤이어 크냐지에 오른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아직 어린 아이여서 어머니 밀리카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전투 5개월 후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지그문트가 북쪽 영토를 무력으로 탈취하자,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밀리카는 헝가리의 위협에 벗어나기 위해 1390년 남부 세르비아에서 작전을 재개한 오스만 술탄국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바에지트 1세의 충실한 가신으로서 니코폴리스 전투를 포함한 바예지트 1세의 수많은 전투에 최선을 다해 참여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던 그는 이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생포된 뒤 오스만 제국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해, 아버지가 생전에 차지했던 영토를 뛰어넘어 13세기 네마니치 왕조 시절 세르비아 왕국의 영역에 버금가는 대국을 이룩했으며, 내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세르비아의 중흥기를 이룩했다.

코소보 전투에서 전사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유해는 부크 브란코비치 영지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있는 승천 교회에 안장되었다가 1390년 또는 1391년에 라바니차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6월 15일로 정해졌으며, 오늘날 세르비아인들로부터 기독교 신앙과 세르비아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용감히 맞서다 장렬하게 전사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편, 무라트 1세의 영묘는 코소보의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몸통이 묻혔다. 나머지 부분은 당시 수도였던 부르사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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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의 조카로, 1363년 보이슬라프가 급사한 뒤 삼촌의 영지를 대부분 물려받았다. [2] 무라트 1세는 1383년부터 술탄을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