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수부대와 영국군 간에 벌어진 전투에 대한 내용은 크레타 섬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크레타를 굽어보는 베네치아의 상징 성 마르코의 사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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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 공화국령 크레타 섬을 침공하여 장장 25년간(1645~1669) 벌어진 전투. 제5차 베네치아-튀르크 전쟁으로도 불린다. 오스만 제국이 해상에서 벌인 최후의 대규모 정복 전쟁으로, 이 전쟁으로 오스만은 크레타를 정복해 1898년까지 2백여 년 간 통치했다. 한편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국부를 퍼부었음에도 지난 400여 년 동안 동지중해의 여왕으로 있게해 준 보루였던 크레타를 잃으면서 위신상으로도 재정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백여 년 동안 농업, 수공업, 관광업 등으로 근근이 먹고 살다가 나폴레옹에게 멸망했다.
2. 발단
1644년 9월 28일,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순례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오던 오스만 선단이 로도스섬 근해에서 구호기사단(몰타 기사단)[2] 함대에 의해 나포되었다. 선단을 턴 기사단은 배에 타고 있던 대부분의 순례객들을 죽이고 남성 350여 명과 30여 명은 노예로 팔아치우기 위해 생포했는데, 본거지인 몰타로 돌아가는 길에 식수 확보와 구출한 그리스인 노잡이[3] 48명을 풀어주기 위해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 남부의 한적한 마을에 정박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불안한[4] 평화를 유지해 나가던 베네치아 당국은 20일이 지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고, 당장 기사단 함대를 추방하였다.하지만 베네치아 측이 간과했던 사실이 있으니, 바로 기사단이 턴 오스만 선단에 탄 승객들의 정체였다. 기사단이 죽인 사람들 중에는 오스만 황궁에서 일하던 전직 흑인 환관장이 있었고, 포로로 잡은 이들 중에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술탄의 하렘에 속한 여인과 그녀와 술탄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로 기사단이 추정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이다.[5] 이후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술탄 이브라힘[6] (재위 1640 ~ 1648년)은 격노하여 톱카프 궁전에 각국 대사들을 모아 항의하였다. 돌아가며 문책하던 술탄은 베네치아 대사 소란초에게 20일간 기사단 선박들을 눈 감아주고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점은 제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맹비난하면서 베네치아 측에서 기사단과 짜고 일을 꾸민 것이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혐의에 대해 베네치아는 극구부정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감시를 소홀히 한 장교를 총살형에 처하고 술탄에 용서를 구했지만 무슬림으로서, 남자로서 구겨진 그의 자존심은 회복되지 아니하였다. 이전부터 크레타를 노리던 조정 신료들 또한 이번 사건을 크레타를 정복하기 위한 좋은 명분으로 보고 술탄을 부추겨 주전론에 불을 지폈다.
베네치아에게 가혹했던 12월이 지나고, 1645년 새해가 밝자 1월 3일에 소란초가 시도한 교섭은 재상 세미즈 메흐메트 파샤의 문전박대 ('이미 모든게 정해졌으니 만나 얘기할 필요가 없다')를 당하며 무산되었고, 마침내 오스만 조정은 전쟁을 결정했다. 명목상의 정벌 대상은 몰타였지만 코스탄티니예의 외교관들은 이번 전쟁의 목표가 동지중해에 마지막 남은 '베네치아의 항공모함' 크레타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3. 전개
콘스탄티니예의 살벌한 기류를 감지한 베네치아령 크레타 총독 안드레아 코르나로는 기존 성채를 시찰, 보수하고 그리스 용병을 각지에 배치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베네치아 본국은 1월 4일에 식량과 엔지니어, 2천 5백의 군대를 크레타로 보냈고 2월에는 10만 두카트의 자금을 주었다. 한편, 3월이 지나 출정식 당일까지도 오스만 조정의 선전포고 대상은 그대로 몰타였다.[7] 4월 30일에 5만 대군을 이동시킬 80척의 갤리선단과 250척의 수송선이 콘스탄티니예의 항구를 떠나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났다.에게 해를 지나며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령 티노스 섬에 정박하여 물과 식량을 공급받았고, 6월 23일에 크레타 북해안에 나타났다. 긴장되는 상황에서 함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쪽의 나바리노 (180여년 후 해전에서 대패를 겪는 곳. 현재의 필로스)에 정박하였다. 나바리노는 그리스에서 몰타로 향하는 항구였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베네치아 당국은 오스만 조정이 진심으로 몰타를 공격한다 여기고 희망을 품었다.[8] 하지만 터키 함대는 항구를 나오자마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크레타 방면인 동남쪽으로 향하였고, 3일 후에 섬의 3대 요새 중 하나인 하니아(Χανιά)에 모습을 두러내었다. (6월 23일)
오스만 함대의 진로 (코스탄티니예→나바리노→하니아)
3.1. 하니아 포위전
하니아의 위치
17세기의 하니아
하니아는 예나 지금이나 칸디아 (이라클리오)에 이은 크레타 제2의 도시였고 베네치아는 하니아 항구를 요새화하고 부두의 수만 14개에 이르는 조선소를 세워놓았다. 따라서 오스만 함대는 현재까지도 '베네치아 항'이라 불리는 하니아 주 항구에서 서쪽으로 20여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하였다. 해안을 방어하던 크레타 민병대는 도주하였고 도시를 향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던 오스만 군대는 하니아를 5km 앞두고 행군을 멈추었다. 썰물 때만 육지와 연결되는 섬에 조성된 산 테오도로 요새가 거슬렸던 것이다. 한국의 돈대와 비슷한 시설로 여겨진다.
간조가 되자 2천명의 오스만 소총부대는 60명의 수비대가 배치된 작은 요새를 공격하였다. 곧 함락이 임박하지자 수비대장 플라시오 줄리아니는 화약고에 불을 붙여 성벽을 기어오르던 5백여명의 오스만 병사들과 자폭하였다. 장애물을 제거한 오스만 군대는 하니아를 포위하였고 56일에 이르는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나바제로가 지휘하는 1천에 이르는 수비대는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성공적으로 모든 공격을 격퇴해내었다. 하지만 땅굴을 파고 화약을 채워 폭파시키는 전술[9]에 성벽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하니아가 버텨내며 벌어준 시간동안 베네치아 당국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영국, 네덜란드 등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당시는 30년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얻지 못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만이 10만 두카트를 보내주었고 오히려 베네치아 공화국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교황청과 몰타 기사단, 나폴리 왕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이 지원 병력과 소수의 전함을 보내주었다. (교황청이 가장 많은 5척 파견) 하지만 지원군이 출항할 즈음인 8월 22일, 식량과 탄약이 고갈된 하니아는 수비대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두 달간 1만이 넘는 희생을 치렀지만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에 확고한 거점을 얻었다. 한편, 9월에 그리스 서남부의 자킨토스 (잔테) 섬에 집결한 지원 함대는 폭풍으로 오스만 함대가 흩어진 틈을 타서 하니아를 수복하려 하였으나 교황의 조카이자 사령관인 니콜로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실패하고 섬에 묶여버렸다. 10월 1일에 이르러서야 베네치아 해군이 합류하여 90여척이 모인 연합군은 하니아 수복에 나섰으나 지체된 한 달간 준비를 완료한 오스만 측의 방어에 막혀 격퇴되었고, 연합군은 서로를 탓하다가 와해되어 각자의 국가로 돌아가버렸다.
3.2. 수송 방해작전
왼쪽 사진 중앙 쪽에 밑으로 튀어 나온 섬이 수다이다. 면적은 대충 서울의 밤섬 크기의 작은 요새지만 견고하다. |
하니아를 함락한 오스만 군대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리스의 해군 기지로 쓰이는 수다의 육지 항구를 손에 넣었다. 오스만 군대가 다가오자 함대 사령관 카펠로가 절반의 함대와 잔테 섬으로 도주하여 별다른 전투도 없었다. 다만 만의 중간에 위치한 섬에 세워진 요새에는 여전히 40척의 갤리선과 4척의 갈레아차, 10척의 범선이 건재하여 해군이 약한 오스만 제국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후로도 수다 요새와 섬 동단의 스피나롱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버티게 된다. 한편, 여전히 서유럽 측의 지원을 못받은채로 크레타를 방어하던 베네치아 측은 해가 바뀌어 1646년 초엽이 되자마자 80세의 도제 프란치스코가 사망하는 악재를 맞는다.
73세의 나이로 신임 국가원수가 된 조반니 카펠로가 취임하는 것과 동시에 베네치아 수뇌부는 오스만 제국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크레타에 주둔한 3만이 넘는 오스만 군대를 말려죽이기로 하였다. 1646년 3월, 토마스 모로시니가 이끄는 22척의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의 테네도스 섬을 공격하여 해협을 봉쇄하려 하였다. 이에 오스만 측의 해군 제독 코자 무사 파샤가 80척의 전함을 이끌고 맞섰으나 패하였다. (5월) 그러자 코자 무사 파샤는 풍향이 바뀌길 기다렸고 6월 초에 강한 북풍이 불자 그대로 함대를 돌격시켜 봉쇄를 뚫고 크레타에 보급품과 군대를 내려놓는 데에 성공하였다.
베네치아의 도제 카펠로는 난국을 타개하고자 그해 8월, 하니아에 정박해 있던 오스만 함대를 공격해 보기도 했으나 격퇴당하였고, 여름부터 포위되어 있던 크레타 제3의 도시 레티모를 구원하려 했으나 그역시 실패하고 만다. 레티모는 결국 1646년 10월 20일에 함락되었고, 요새화 된 시타델은 한달을 더 버티다가 11월 13일에 항복하였다. 1646년 말 ~ 1647년 초의 겨울에는 역병이 돌아 양측 모두가 피해를 입었는데, 비슷한 수가 죽었지만 증원이 힘든 베네치아 측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게다가 1647년 1월, 베네치아의 해군 제독 토마스 모로시니가 오스만 함대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는 피해도 있었다.[10]
전염병으로 기세가 꺾인 오스만 군대는 서두르지 않았다. 1647년에는 6월에 수십명의 오스만 분견대가 지나가던 베네치아 측 토스카나 용병대 천여명을 격파한 일을 제외하곤 기록될만한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그 와중에도 칸디아를 제외한 나머지 베네치아령 요새들은 더디고 출혈이 컸지만 하나하나 함락되었고 1648년 4월에 이르면 칸디아 자체와 섬 몇개를 제외한 모든 크레타 요새들이 오스만 사령관 가지 휘세인 파샤의 수중에 있었다. 1648년에 이르면 전란과 역병으로 크레타 인구의 40%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 이어졌다.
3.3. 칸디아 공방전
22년간 이어진, 역사상 가장 길었던 공성전[11]
저건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25년간 죽은 베네치아 인들이 되살아나 유령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12]
1648년 초여름, 4만 대군이 6천 수비대가 지키는 칸디아 ( 이라클리온)를 포위하였다. 베네치아 측은 술탄 이브라힘 암살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648년 8월 모후 쾨셈 술탄의 쿠데타로 이브라힘은 폐위, 살해되지만 새 술탄 메흐메트 4세와 실권자 쾨셈 술탄은 전쟁을 중간에 어정쩡하게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스만 측은 달마티아를 통한 베네치아 본국에 대한 육로 공격까지 시도하였으나 그역시 격퇴되었고 오히려 성 몇 개를 빼앗겼다. 그리고 1653년과 1656년의 종전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다.
베네치아 해군은 크레타에 군량 및 지원군을 보내는 오스만 보급 함대와 세 차례 (1651, 55, 56년) 충돌하여 모두 승리하였으나[13] 오스만 주둔군은 스스로 농사를 짓고 원주민들과 잘 지내며 양식을 보급받아 버텨 내었다. 이미 칸디아를 제외한 섬 대부분은 오스만 행정력 하에 놓였고, 오스만 관료들은 상당히 관용적인[14][15] 통치를 하며 200년 넘게 이어질 크레타 지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편, 베스트팔렌 조약과 피레네 조약을 통해 유럽에 평화가 회복되자 10년 넘게 이교도와 싸우는 칸디아를 돕고자 프랑스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귀족 자제들이 의용군이 되어 도우러 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은 제한적이었고, 대부분 불편한 숙식 환경과 지지부진한 공성전에 지쳐 1년도 못되어 돌아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1667년, 20년을 끌어온 공성전을 끝내기 위해 5월 ~ 11월간 오스만 군대는 32차례에 걸친 총공격을 해왔다. 이에 수비군 측은 4천여명, 공격 측은 2만명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고, 겨울 휴식을 지나 1668년 봄이 되자 다시 격전이 벌어졌다. 프랑스에서 온 5백 기사들은 12월 16일에 출진했다가 절반을 잃으며 격퇴되었고 그해 한 해동안 베네치아는 440만 두카토에 달하는 거금을 투입하고 나서야 칸디아를 지켜낼 수 있었다.[16]
지금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요새를, 이슬람권의 그 어떤 술탄도 가지지 못할 소중한 진주를 내줄 찰나에 있다.
1669년 가을, 프랑스 등지에서 온 의용군이 본국으로 떠나자 25년간 칸디아 수비를 맡아온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회의를 통해 항복을 결정하였다. 1669년 9월 6일,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시를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의 크레타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다만 수다, 스피나롱가, 그람부사 등 크레타 주변에 떠 있는 3개의 요새화된 섬은 연공금 지불을 대가로 여전히 베네치아 수중에 남았으며 달마티아에서 베네치아군이 점령한 지역은 베네치아령으로 확정되었고 배상금은 없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칸디아 수비군은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안전히 챙겨 떠날 수 있다는 술탄의 명령이 내려졌다.
4. 결과
오스만 측은 크레타의 민중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칸디아 포위 때에 이미 크레타의 대주교를 임명하고 토지나 종교, 언어 등 개개인의 삶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많은 원주민들이 무슬림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고 동시에 그리스 정교 역시 존중받아 18세기 기준으로 크레타는 그리스 정교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었다. 다만 대놓고 간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 보니 크레타의 문화는 점차 튀르크화되었으며, 그로 인해 오늘날 크레타 문화는 그리스 본토보다는 터키 서부 및 키프로스와 더 비슷해지게 되었다. 굳이 그리스 내에서 크레타와 문화가 비슷한 곳을 찾자면 서 트라키아와 도데카니사 제도가 있는데 이 두 지역도 크레타와 더불어 그리스 본토에 비해 터키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후 크레타는 1898년 오스만의 자치국[17] 크레타 자치국이 들어설 때까지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으며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틈타 그리스가 크레타를 합병, 1913년 발칸 전쟁의 결과 크레타는 그리스의 영토로 확정되었다.칸디아 공방전 당시 서유럽 의용군들이 온 것은 2차 빈 포위 때의 신성동맹과 함께 마지막 십자군으로도 평가 받는다.
여담으로 1688년에 해군 원수이자 베네치아의 도제가 된[18] 노인 모로시니는 대튀르크 전쟁에서 신성동맹군의 한 축이 되어 오스만 제국에 일격을 날렸고 베네치아는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달마티아와 모레아 반도를 획득한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베네치아는 오스만에게 크레타의 마지막 베네치아령 요새인 수다와 그람부사, 스피나롱가, 모레아를 포함해 에게해의 마지막 거점이던 미코노스와 티노스까지 빼앗긴다. 이후 여세를 몰아 코르푸까지 공격해 온 오스만군은 막을 수 있었고, 이것이 3세기 동안 지중해를 진동시키며 이어져 온 양국간의 마지막 충돌이었다.
[1]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651년인데, 위의 그림과는 달리 1651년이면 중심 도시 칸디아를 제외한 섬 전체가 오스만의 손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2]
로도스 시절부터 함대를 육성하여 이슬람권 선박들을 상대로 해적질을 하였다.
[3]
오스만 선박에서 나포된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4]
레판토 해전 이후 회복된 양국 간의 평화는 1638년에 베네치아 함대가 알바니아의
발로나에 피신해 있던 바르바리 해적을 공격하며 끝날 뻔 했으나 배상금으로 평화가 회복되었다.
[5]
일단 기사단은 그렇게 추정했으나 이들이 진짜로 술탄의 여인과 아들이 맞는지는 현재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6]
오스만 제국은 1624 ~ 1639년까지의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에 즉위하여 새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있었다
[7]
따라서 베네치아 대사 소란초도 출정식에 참기해서 승전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인사를 해야 했다
[8]
비록 네그로폰테와 모레아, 키프로스를 상실했어도 번영하였던 15-16세기에 비하여 17세기는 베네치아의 쇠퇴기에 속하였다. 계속된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경제가 흔들렸고 대항해시대와 대사양 삼각무역은 기존 지중해 무역의 쇠퇴를 가져왔다. 1606년의 교황청과의 대립, 1615-1619년간의 우즈코키 해적 섬멸 작전에 이어 1628-1631년에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동맹하여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 & 스페인)와 벌인 만토바 계승전쟁은 베네치아를 더욱 약화시켰다. 거기에 1629-1631년간의 역병이 인구의 1/3을 잃은 것도 크나큰 타격이었으므로 17세기 중엽의 베네치아는 이전보다 더 저자세로 대오스만 외교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9]
적어도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부터 오스만이 즐겨 사용했던 공성 전술로, 아예 포병대에 속한 부대 가운데 "라음즈 오자으(Lağımcı Ocağı)" 라고 해서 땅굴을 파 폭파하는 것을 담당하는 공병부대가 따로 있었다.
[10]
다만 오스만 해군 제독 코자 무사 파샤 역시 전사하였다
[11]
당시 기준으로 최장기간이다. 이후
모로코군이
스페인
세우타를 1694년부터 1727년까지 무려 33년 동안 포위공격한
세우타 공방전이 기록을 깬다.
[12]
오스만 군중에 돈 소문
[13]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지도 못했고 대규모 해전도 아니었으니 별 의미는 없지만, 베네치아 함대의 분전은 주목할 만 하다.
프레베자 해전이나
레판토 해전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베네치아 혼자서는 오스만 함대를 당해낼 수 없어 어떻게든 교황령도 끌어내고 스페인도 끌어내고 해야 겨우 상대가 되었기 때문. 물론 이 무렵쯤 되면 오스만 제국 자체도 이전만 못했고 해군에 대한 관심도 크게 줄어들어 있었으나, 상술했듯이 베네치아는 번영하고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14]
밀레트 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오스만은 다른 종교에 대해 당시 기준으로는 꽤 편의를 많이 베풀어 주었는데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 자칫하면 베네치아에 붙을 가능성이 있던 크레타에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했다. 전쟁 중에 많이 죽어서 땅이 많이 남기도 했다
[15]
또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이탈리아 본토)과 이스트리아-달마치아를 제외하면 현지인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쥐어짜자는 식으로 속령을 가혹하게 통치하여 민심을 거의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수월한 감도 있었을 것이다. 키프로스나 후에 얻는 모레아도 민심을 얻지 못해 오스만에게 잃었다.
[16]
당시 베네치아 한해 수입이 300만 두카토
[17]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 실질적으로는 유럽열강의 개입으로 세워진
그리스의
괴뢰국이었다.
[18]
1694년에 사망할 때까지 임기 내내 대오스만 전선을 지휘하느라 본국에 오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