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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쿠크 전투를 묘사한 그림. 우측 하단에 쓰러진 사람이 토팔 오스만 파샤(...). 그 위에 말 탄 사람이 나디르 샤다. 다만 실제로는 토팔 오스만 파샤가 전사했을때는 페르시아군이 그림처럼 그의 시신을 곱게 가져다 주지 않고 참수하여 목을 나디르에게 바쳤다.
1. 개요
몇달 전의 승부를 재결정 짓는 리벤지 매치피로스의 승리가 암시했던 나비효과
키르쿠크 전투(Battle of Kirkuk)는 나디르 샤와 토팔 오스만 파샤 사이에서 두번째로 벌어진 전투이다. 사마라 전투에서 패배한 나디르 샤가 다시한번 토팔 오스만 파샤의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나디르 샤는 잠시동안 병력과 장비를 재정비하고 물자를 확보하는데 주력하였으며, 토팔 오스만 파샤는[1]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있던 페르시아군 3만을 격퇴시키고 바그다드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당시 바그다드는 몇 달간의 포위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났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죽은 상태라 도시 자체를 복구하기도 바빠 오스만 파샤의 대군을 수용해줄 처지가 되지 못했다. 별 수 없이 토팔 오스만 파샤는 군대를 이끌고 키르쿠크(Kirkuk) 지역으로 북상하여 거처를 잡았다.나디르 샤는 1733년 8월 4일에 하마단(Hamadan)에 도착하여 2달간 재정비를 한 뒤 10월 2일에 키르쿠크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내에서 반란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디르 샤는 군대를 퇴각시키는 대신 자신의 사람을 보내 협상으로 반란세력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으면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할 심산이었다.
토팔 오스만 파샤도 사정이 안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사마라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던지라 손실을 채워야 했는데, 질 낮은 시리아계 병사로 대충 채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토팔 오스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의 전투력 감소가 불가피해졌다.
3. 전투 경과
키르쿠크 전투의 배치도. 붉은색이 오스만 제국군, 파란색이 페르시아군.
급하게 시리아계 징집병으로 보충받은 오스만 제국군의 규모는 10만에 달했다. 그러나 질 낮은 시리아계 병사들로 채워진 상태라 상태는 더 안좋았을 것이다.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 규모는 제대로 알려진 수치가 없으나, 적어도 오스만 제국군의 규모보단 작았을 것으로 본다.
3.1. 다시 나타난 토팔 오스만 파샤의 장기
1733년 10월 24일의 전초전 이후[2], 토팔 오스만 파샤는 다시한번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고자 하였다. 그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후방에 예비대로 두고 나머지 주력군을 전진배치 시켰다. 이미 지형파악을 끝낸 나디르 샤가 중앙에 보병대와 포병대를, 양익에 기병대를 배치해놓은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군과 페르시아군 사이에서 2시간동안 격렬한 총격과 포격이 오갔다.3.2. 두번이나 당하지는 않는다
토팔 오스만 파샤는 페르시아군과 싸우던 오스만 주력군에게 퇴각명령을 내렸다. 지난번 사마라 전투때와 같이 주력군을 서서히 뒤로 물리다가 예비대와 합세시키려는 속샘이었다. 그러나, 나디르 샤는 두번이나 당해주지 않았다.나디르 샤는 이미 사전에 양익에 배치해놓은 다수의 기병대[3]로 퇴각하던 오스만 제국 주력군의 양익을 공격하게 하였다. 양익 기병대의 측면공격이 제대로 들어가면서 퇴각하던 오스만 제국 주력군은 순식간에 아비규환 상태가 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적장 토팔 오스만 파샤가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총격 2방을 맞고 전사함으로서 오스만 제국군의 지휘체계 자체가 붕괴되어버렸다.[4]
4. 결과
키르쿠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사상자는 2만에 달했으며 대포 상당수를 잃었으나, 페르시아군의 손실은 별로 없었다. 이로서 나디르 샤는 지난번의 참패를 어느정도 만회하는데 성공하였다. 더불어 가장 훌륭한 적수였던 토팔 오스만 파샤까지 전사시켰으니 확실히 복수한 셈이었다.
[1]
여기서 토팔은 오스만 파샤의 별명인데 튀르키예어로 절름발이라는 뜻이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었냐면 오스만 파샤가 젊은 시절에 이집트의 오스만 해군에 복무하면서 스페인 사략선들과 전투를 벌였을때 전투 도중 발에 상처를 입어 한쪽 발이 불편하고 절게 되면서 절름발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2]
이때 전초전은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나면서 승부가 나지 않았었다.
[3]
양익 기병대는 총 15000명이다
[4]
사실 토팔 오스만은 퇴각하면 살수 있었지만 본인이 패배의 책임을 지며 죽겠다고 하여 퇴각하라는 부장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최전선에서 지휘하다가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것이다. 그래서 나디르 샤도 이를 알고는 토팔 오스만을 높이 평가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키르쿠크의 모스크에 매장시키는 배려를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