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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00:30:58

스테판 라자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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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모라비아 세르비아 2대 공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초대 데스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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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라자레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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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тефан Лазаревић}}}
파일:스테판 라자레비치.jpg
출생 1377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크루셰바츠
사망 1427년 7월 19일 (향년 50세)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글라바
재위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
1389년 ~ 1402년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1402년 ~ 1427년
아버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어머니 밀리카
형제 부크, 마라, 옐레나, 드라가나, 테오도라, 올리베라
배우자 헬레나 가틸루시오
가문 흐레벨랴노비치 가문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바예지트 1세의 충실한 가신2.3.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선임과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대결2.4. 헝가리 왕국과 손잡다2.5. 부크 라자레비치의 반란과 무사와 쉴레이만의 내전 개입2.6.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화해2.7. 무사의 침공과 격퇴2.8.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2.9. 무라트 2세와의 대결2.10. 내치
2.10.1. 군사 개혁2.10.2. 경제 발전2.10.3. 문화 발전
2.11.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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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2대 공,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초대 데스포티스. 오스만 제국의 가신으로서 니코폴리스 전투, 앙카라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맹활약하다가 바예지트 1세 티무르의 포로로 전락하고 오스만 제국이 내전에 휘말리자 헝가리 왕국의 가신으로 들어간 뒤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면서 세르비아 대부분을 통합하고, 내치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세르비아의 중흥기를 견인한 명군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377년경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의 수도 크루셰바츠에서 모라비아 세르비아 초대 공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부칸 2세 네마니치의 아들인 드미타르 네마니치의 손자 브라트코 네마니치의 딸 밀리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부크 라자레비치, 마라, 드라가나, 테오도라, 옐레나, 올리베라가 있었다. 1389년 6월 15일, 아버지 라자르가 1차 코소보 전투에서 코소보 일대의 영주 부크 브란코비치, 보스니아 왕국 초대 국왕 트브르트코 1세가 파견한 보스니아군과 함께 무라트 1세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과 맞붙었다가 수많은 귀족 및 장병들과 함께 전사했다. 그 후 스테판은 새 공이 되었고, 어머니 말리카는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1차 코소보 전투 3주 후인 1389년 7월 7일,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지그문트는 헝가리 귀족 가라이 미클로시를 부크 브란코비치에게 파견해,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을 나눠 가지는 일에 관해 논의하도록 했다. 가라이 미클로시와 부크 브란코비치 모두 스테판의 여동생들과 결혼했지만,[1] 당대에는 가까운 친척들이 미성년자였던 적법한 상속인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협상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그문트는 그해 10월 군대를 파견했다. 헝가리군은 사바 강을 건너 크니치 인근에 있는 보라치 요새와 체스틴 요새를 함락하고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북부를 점령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헝가리의 침략에 대응하고자 세르비아 총대주교 스피리돈 1세의 제안에 따라 오스만 술탄국의 신임 술탄 바예지트 1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1390년 중순 오스만 제국군이 세르비아 남부 국경에 집결한 뒤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따르면, 스테판은 오스만 술탄에게 보조군을 보내고 경의를 표해야 하며, 남동생 부크와 여러 저명한 귀족과 함께 1년에 한 번씩 술탄의 궁정에 가서 바예지트 1세에게 복종을 서약하기로 했다. 바예지트 1세는 그 대가로 스테판을 외세로부터 보호해주기로 했고, 스테판의 막내 여동생인 올리베라를 첩실로 삼기로 했다.

1390년 여름, 세르비아군은 오스만 보조군의 지원을 받고 헝가리군에게 잃어버렸던 영토를 탈환했다. 오스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헝가리-세르비아 국경지대인 골루박을 장악하고 헝가리를 침공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그 후 세르비아-헝가리 국경 분쟁은 2년간 지속되었다. 1392년 여름, 지그문트는 코빈 인근에서 믈라바 강을 건넌 뒤 세르비아의 즈드렐로까지 침투해 약탈을 자행한 뒤 골루박을 탈환하려 했지만 격퇴되었다. 한편, 지그문트와 함께 세르비아를 나눠가지려 했던 부크 브란코비치는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받다가 1392년 스코페가 함락되자 그해 말에 바예지트 1세에게 귀순하고 스테판과 함께 바예지트 1세의 가신이 되었다.

2.2. 바예지트 1세의 충실한 가신

1393년, 스테판은 성년이 되어 친정에 나섰고, 어머니 밀리카는 수녀 '에우제니아'로 개명한 뒤 류보스티냐 수도원에 들어갔다. 같은 해, 바예지트 1세는 헝가리 왕국과 내통한 불충한 가신 이반 시슈만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트르노보를 점령하고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많은 불가리아 학자들이 주변 기독교 국가로 피난했는데, 그중에는 스테판이 다스리는 세르비아도 있었다. 1394년 초, 바예지트 1세는 기독교 가신들을 소집했다. 스테판은 여기에 참여했고, 테살리아와 테살로니키 공략전에 참여했다.

1394년 가을, 바예지트 1세는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를 복속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스테판은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벨부즈 데스포티스 콘스탄틴 드라가쉬와 함께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1395년 5월 17일 하류 다뉴브 저지대에 위치한 로비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패했다.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와 콘스탄틴 드라가쉬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스테판은 목숨을 건졌다. 바예지트 1세는 전투가 끝난 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테니 물러나달라는 미르체아 1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마르코와 콘스탄틴의 영지를 합병했다.

1396년 여름, 스테판은 바예지트 1세의 원정에 참여해 비딘과 바나트 공방전을 수행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고 헝가리에 충성을 맹세한 부크 브란코비치가 다스리던 영지 침공전에도 참여해 프리슈티나를 비롯한 영지 대부분을 석권하는 데 기여했다. 얼마 후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의 주도로 결성된 십자군이 헝가리에 집결한 뒤 다뉴브 강을 건너 비딘을 공략하고 오스만 수비대가 지키던 니코폴리스를 포위하자, 당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하던 바예지트 1세는 포위를 풀고 니코폴리스로 향했다. 스테판은 보조군을 이끌고 폴로브디프 인근에서 바예지트 1세와 합세했다.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스테판은 세르비아 중기병대를 이끌고 헝가리군 전선을 돌파했으며, 가라이 미클로시의 군기를 비롯한 헝가리군의 주요 깃발을 빼앗았다. 십자군은 헝가리군 군기가 쓰러진 걸 보고 지그문트가 전사했다고 믿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패주했다. 십자군이 무너진 뒤, 오스만 술탄국은 발칸 각지를 휩쓸었다. 이때 부크 브란코비치는 오스만군에 맞서다 생포된 뒤 1397년 10월 6일 감옥에서 병사했다. 이후 부크 브란코비치의 영지 대부분은 스테판에게 넘어갔고, 부치트른 등 일부 지역은 부크 브란코비치의 아내이자 스테판의 여동생 마라 라자레비치와 자식들에게 넘어갔다.

1398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은 보스니아를 침공했다. 스테판은 이 원정에도 가담했지만, 이번에는 극심한 추위와 폭설 때문에 큰 희생만 치를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세르비아 영주 니콜라 조이치와 노박 벨로크빅비치, 미하일로는 바예지트 1세에게 스테판이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와 내통했기 때문에 보스니아 원정이 실패했다고 고발하려 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스테판이 오스만 술탄국의 신임을 잃어버리고, 자기들은 그로부터 독립하려 했다. 그러나 미하일로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스테판에게 이 사실을 고해바쳤고, 스테판은 노박 벨로크빅비치를 자기 궁정에 소환한 뒤 처형하고 그의 영지인 토플리카와 흐보스노를 몰수했다. 니콜라 조이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루드비크 산 꼭대기에 있는 오스트비카 요새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면서 목숨을 건졌지만, 재산을 몰수당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니콜라와 노박의 고발이 바예지트 1세에게 전해졌고, 오스만군은 3월 하반기에 세르비아 국경에 진군했다. 이에 스테판의 어머니 밀리카가 바예지트 1세를 찾아가 아들이 무고하다고 호소했고, 뒤이어 스테판이 바예지트 1세를 찾아가서 그 앞에서 해명했다. 바예지트 1세의 하렘에 있던 스테판의 여동생 올리베라도 오빠가 무고하다고 호소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예지트 1세는 그애 대한 의심을 풀었고, 스테판은 1398년 11월에 세르비아로 돌아갔다. 이때 스테판은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 부르사에서 성 페트카의 유물을 가져와서 크루세바츠의 라자리카 교회에 전시했다.

1402년,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 술탄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공한 티무르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가신들을 대거 소환했다. 스테판은 동생 부크, 조카 주라지 브란코비치, 그르구르 브란코비치와 함께 세르비아 중기병대를 이끌고 여기에 가담했다. 1402년 7월 28일에 발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그의 5,000 세르비아 중기병대는 우익에 편성되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탁월한 활약을 펼쳤다. 그가 이끄는 기병대는 적군을 맹렬히 공격해 적의 대열을 여러 차례 돌파했다. 심지어 적장 티무르도 세르비아 기병대의 용맹을 개인적으로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출신의 튀르크 영주들이 대거 티무르 편으로 넘어가버리면서, 전세는 오스만 제국군에 급격하게 불리해졌다. 급기야 티무르의 군대는 오스만 제국군의 좌익을 돌파하고 바예지트 1세 본인이 예니체리 10,000명과 함께 있던 중앙 부대를 포위했다. 스테판은 포위망을 부분적으로 뚫고 바예지트 1세에게 달려간 뒤, 속히 전장을 빠져나가 패잔병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예지트 1세가 거부하자, 스테판은 할 수 없이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쉴레이만 첼레비를 데리고 부르사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스테판은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그르구르 브란코비치는 체포되었다가 나중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바예지트 1세의 첩실이자 스테판의 여동생 올리베라도 티무르에게 체포되었지만, 스테판이 사절을 보내 그녀를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스테판이 전투 중에 보여준 용맹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티무르가 특별히 몸값을 받지 않고 풀어줬다.

2.3.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선임과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대결

앙카라 전투에서 맹활약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의 패배를 막지 못한 뒤, 스테판은 동생 부크와 함께 귀환길에 올랐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렀다. 이때 서유럽 전역을 돌며 원조를 요청하던 마누일 2세를 대신해 제국을 다스리던 요안니스 7세는 1402년 8월 스테판에게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했으며, 피렌체 출신의 레스보스 영주 프란체스코 2세의 딸이자 자기 아내 이리니의 누이인 헬레나 가틸루시오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뒤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스테판의 요청에 따른 요안니스 7세에 의해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스테판이 조카를 가두게 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일로 스테판과 주라지 브란코비치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 후 스테판은 육로를 통해 세르비아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드리아노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생포되게 해놓고 도망친 것으로 오해한 오스만군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그는 동생 부크 및 260명 가량의 남은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세르비아로 떠나 레스보스에 잠시 머물렀다. 그들의 첫번째 목표는 스테판의 여동생 엘레나의 남편 주라지 발시치가 통치하는 제타였다. 주라지 발시치는 수도 울치니에서 스테판 일행을 맞이했다. 여기에 스테판의 어머니 말리카도 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한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자기를 가두게 한 스테판에게 원한을 품고 오스만군과 결탁한 뒤, 스테판의 귀환을 막기 위해 코소보와 메토히야 등지의 도로를 장악했다.

1402년 10월 말, 스테판의 군대는 바르에서 발시치 영지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를 거쳐 슈코더르로 이동한 뒤, 뒤이어 코소보로 이동했다. 그는 적군이 통제하는 주요 도로를 피해 산길로 이동하다가 그라차니차에 이동했다. 11월 21일, 트리폴리 인근에서 주라지 브란코비치와 격돌했다. 그는 어머니가 보낸 분견대와 합류한 뒤, 대부분의 병력을 형제 부크의 지휘하에 둬서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일부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분견대를 상대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사전에 스테판과 내통했던 우글레사 발코비치가 스테판의 편으로 넘어갔고, 그 덕분에 스테판이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반면 부크 라자레비치는 주라지 브란코비치에게 격파되었지만, 주라지는 오스만군이 무너진 걸 보고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전투가 끝난 후, 스테판과 부크는 노보 브르도로 이동했다. 이때 스테판은 동생이 군대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해 아까운 병력을 많이 잃었다며 질타했다. 한편 우글레사 발코비치는 중간에 그에게 가담해 승리에 기여한 공으로 브란예, 수르둘리차, 프레셰보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으며, 해당 지역은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영역이 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로 귀환한 스테판은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다시 찾았지만, 노보 브르도에서 공개적으로 질타당한 것에 반감을 품은 동생 부크가 그에게 대적할 마음을 먹었다. 1403년 여름, 부크는 세르비아를 떠나 쉴레이만 첼레비를 찾아가서 스테판이 자기에게 일부 영토를 양도하도록 강요할 군대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걸 알게 된 스테판과 부크의 어머니 밀리카가 급히 쉴레이만에게 찾아가 부크의 요청을 들어주지 말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낸 뒤, 두 아들을 화해시키고 스테판과 쉴레이만 사이의 관계를 원할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2.4. 헝가리 왕국과 손잡다

이 무렵, 쉴레이만은 오스만 술탄위를 놓고 자기와 대적하는 형제들을 물리치기 위해 갈리폴리에서 동로마 제국,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구호 기사단, 낙소스 공국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이 나라들은 유럽에서의 자신의 영지를 인정하고, 아시아에 거점을 잡은 형제들과 대적하는 쉴레이만에게 협력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국의 가신이 더이상 아니며, 술탄에게 조공을 바칠 의무에서 벗어났고, 테살로니키와 그 주변, 마르마라 해와 흑해 인근에 있는 여러 도시를 되찾았다. 이때 스테판도 이 조약에서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그는 이후에도 쉴레이만에게 계속해서 공물을 바치고 보조군을 보낼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오스만 술탄국의 내란을 틈타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403년,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가 피렌체 출신의 헝가리 기사 필리포 스콜라리를 세르비아에 파견해 동맹을 제안했다. 그는 니코폴리스 전투 이래 국내의 혼란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벌어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남부 전선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강력한 동맹을 찾던 스테판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403년 말 또는 1404년 초, 두 통치자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스테판은 지그문트를 자신의 주권자로 받아들였고, 그로부터 마츠바와 베오그라드를 수여받았다. 스테판은 이를 통해 사바 강과 다뉴브 강에 의해 형성된 북쪽 국경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14세기 내내 세르비아와 헝가리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과 손잡은 뒤, 스테판은 브란코비치 가문과 시트니차 강 주변의 오스만 제국 영토를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뒤이어 1405년 수도를 크루셰비츠에서 베오그라드로 옮겼다. 또한 그 해에 라구사 공화국의 무역 특권에 관한 협상이 이뤄진 끝에 그들이 역대 세르비아 통치자들에게 인정받았던 특권을 계속 인정하고, 그 대가로 그들이 가져온 우수한 상품을 공급받기로 했다. 그러던 1405년 초, 슈코더르 지역 주민들이 자기들을 지배하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스테판의 사촌인 제타 공작 발샤 3세 발시치는 이를 이용해 지난날 오스만 술탄국의 침입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 위해 베네치아에게 넘겨줬던 슈코더르를 되찾기로 했다.

발샤 3세는 쉴레이만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부크 라자레비치도 그를 도왔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은 소규모 접전만 이뤄졌을 뿐 결판이 나지 않았다. 스테판은 중재자로서 평화 협상에 개입했지만, 여러 차례 협상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8년 12월, 지그문트가 용 기사단을 창설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이때 용 기사단 명단 첫번째에는 스테판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그는 부더에서 열린 용 기사단 창립 기념식에 참석했고, 그의 궁정에 용을 묘사한 깃발이 걸렸다.

2.5. 부크 라자레비치의 반란과 무사와 쉴레이만의 내전 개입

1408년 말, 남동생 부크가 자신과 권력을 공유하고 일부 영토를 떼주지 않는 형 스테판에게 분노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심했다. 그는 쉴레이만 첼레비에게 달려가서 스테판과 싸우기 위해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쉴레이만을 주권자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테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주라지 브란코비치도 여기에 가세했다. 1409년 초, 쉴레이만은 이에 응하기로 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스테판은 이에 맞서 필리포 스콜라리가 이끄는 헝가리군과 합세한 뒤 코소보로 진군했지만, 그해 6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베오그라드로 도주했다. 쉴레이만은 베오그라드를 포위하면서, 서부 모라바 강 일대를 포함한 세르비아 남부 지역을 부크에게 넘겼다. 부크는 그곳에서 독립적으로 통치했고, 브란코비치 가문도 쉴레이만을 주권자로 인정했다.

이 무렵, 무사 첼레비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쉴레이만과 대적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진군했다. 스테판은 비트코를 무사에게 파견해 동맹을 맺고 쉴레이만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했다. 1410년 초, 무사의 군대는 갈리폴리를 점령했고 뒤이어 잠볼을 공략했다. 스테판은 그 덕분에 포위망을 풀고 세르비아의 최고 통치자로 돌아올 수 있었고, 부크와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무사를 주권자로 받들었다. 당시 아나톨리아에 있던 쉴레이만은 즉시 발칸 반도로 돌아가려 했다. 스테판과 무사는 쉴레이만의 군대를 수송하던 함대를 공격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들은 갈라타 인근에서 일부 선박을 파괴했지만, 쉴레이만군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는 걸 막지 못했다. 이에 부크와 주라지는 다시 쉴레이만 쪽으로 돌아섰다.

1410년 6월 15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육지 성벽 바로 앞에 있는 골든 혼 해안의 요새인 코스미디온 인근에서, 쉴레이만과 무사가 맞붙었다. 스테판은 이 전투에서 무사 편에 싸웠지만, 무사가 패배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그는 골든 혼을 따라 갈라타로 퇴각하다가, 도중에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가 보내준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그는 마누일 2세의 환대를 받고, 데스포티스의 직함을 확인받았으며, 데스포티스의 왕관을 수여받았다. 그 후 수행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세르비아로 돌아가 7월 말이나 8월 초에 흑해와 다뉴브 강을 거쳐 왈라키아 공국을 지난 뒤 골루박에 상륙했다.

코미스미디온 전투에서 승리한 뒤, 쉴레이만은 스테판을 몰아내려 했다. 그는 6월 말에 스테판의 동생 부크 라자레비치와 라자르 브란코비치를 세르비아로 보냈고, 자신은 무사를 계속 상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르비아로 가던 중 7월 4일 플로브디프에서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생포되었다. 부크는 곧바로 처형되었고, 라자르 브란코비치는 인질로 잡혀 있다가 7월 11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무사가 쉴레이만에게 또다시 패배하자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처형되었다. 스테판은 그 틈에 세르비아로 돌아온 뒤 형제 부크가 통치했던 남부 지역을 포함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전역을 장악했다.

얼마 후, 무사는 쉴레이만의 추격을 피해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이후 쉴레이만의 독선적인 행보에 반감을 품은 튀르크 영주들이 대거 무사에게 가담하면서 상황은 무사와 스테판에게 유리해졌다. 1411년 초, 무사와 스테판은 세르디카 인근에서 쉴레이만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쉴레이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으로 도주하다가 도중에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생포되어 그해 2월 17일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무사는 오스만 술탄국 유럽 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2.6.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화해

1411년 7월, 스테판은 부더에서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로부터 사트마라, 비하르, 사볼 등지의 광산 수입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 지그문트와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간의 평화 협약이 맺어질 때 참여했으며, 보스니아 도시인 스레브레니차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1412년 5월, 스테판은 대규모 수행단과 함께 다시 부더로 가서 지그문트와 폴란드 왕국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한편,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무사의 군대에 가담해 쉴레이만의 아들 오르한이 있던 마르마라해의 작은 마을 셀림브리아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런데 무사는 공방전 도중에 주라지를 죽이려 했고, 주라지는 급히 부하들과 함께 셀림브리아에 귀순한 뒤 테살로니키를 거쳐 1412년 가을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이후 스테판의 누이이자 주라지의 어머니 마라의 중재로 스테판과 주라지는 화해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에 분열을 야기한 두 사람의 갈등이 종식되었다.

2.7. 무사의 침공과 격퇴

스테판은 유럽 영토를 장악한 뒤 세르비아를 위협하는 무사 첼레비에 맞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사의 유일하게 남은 형제 메흐메트 1세와 연합했다. 1411년 말, 스테판은 스코페의 산작베그와 함께 무사의 영토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한 후 귀환했다. 1412년 초, 무사는 이에 대응해 브란예 일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고, 브란예를 통치하던 우글레사 발코비치는 겨우 탈출했다. 무사는 노비 브로도를 향해 진군하면서 주변의 여러 촌락을 약탈했다. 그러다가 스테판이 이끄는 강력한 세르비아 주력군이 접근해오자 세르비아를 떠나 테살로니키와 테살리아로 이동했다.

1413년 초, 무사는 소콜니차와 스브릴지그를 지배하던 함자 베이를 공격했다. 함자 베이는 생포된 뒤 처형되었고, 무사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보반과 리포나츠를 거쳐 모라비아 계곡의 일련의 마을들을 파괴한 뒤 스탈라치 요새를 포위해 몇 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함락하고 그곳 사령관을 체포해 처형했다. 무사의 군대는 여기에 더해 토플리카와 브라니체보를 황폐화했다. 스테판은 이에 대응해 지그문트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은 뒤 크루셰바츠에서 메흐메트 1세의 오스만군과 합세했다. 이후 토플리카 강 인근의 도브리치에서 무사에게서 이탈한 튀르크 영주들과 합세한 뒤 오브체 폴예로 이동했다.

1413년 7월 5일, 불가리아의 비토샤 산 아래 차모를루 마을 인근에서 바예지트 1세와 스테판의 연합군과 무사의 전투가 벌어졌다. 무사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도주하다가 이스크라 강변에서 생포된 직후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발발한 오스만 제국의 공위기는 10여 년만에 끝났다. 그 후 스테판은 메흐메트 1세를 주권자로 받들었고, 메흐메트 1세는 그에게 풍부한 선물을 제공하는 동시에 코프리잔 요새와 즈네폴예 지역을 포함한 일부 영토를 제공했다.

2.8.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

그 후 수년간 평화를 만끽하며 내치에 전념하던 스테판은 슈코더르에서 벌어진 전쟁에 다시 개입했다. 이보다 앞서, 스테판의 사촌인 제타 공작 발샤 3세 발시치는 1419년 슈코더르를 향한 전쟁을 재개했지만, 슈코더르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린 그는 1421년 초 스테판에게 찾아가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 제타 공국의 소유권을 스테판에게 넘기겠다고 밝힌 뒤 4월 28일 스테판의 궁정에서 사망했다. 이때 네레트바 강변 일대의 영주인 산달리 흐랴니치도 발샤 3세의 영지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했고, 제타 배후지를 지배하던 두라셰비치 가문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두라셰비치 가문과 산달리는 그에게 대적하지 않고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베네치아와의 전쟁을 맡겼다.

스테판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그들이 발샤 3세에게서 빼앗은 영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1421년 8월 군대를 일으켜 드리바스타를 점령했고, 두라셰비치 가문은 미홀스카 지협과 그발리를 점령했다. 11월 스테판의 군대가 바르를 점령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절단을 보내 협상한 끝에 반년 간의 휴전을 체결했다. 1422년, 스테판은 휴전이 아직 유효한 동안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비트코를 베네치아로 보냈다. 비트코는 슈코더르를 포함해 제타에 있는 발시치 가문의 모든 소유물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에 대해 스테판이 지난해에 점령한 도시와 지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교섭 과정에서 양측의 요구가 줄어들어 부분적인 합의가 이뤄졌으나 여전히 평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동시에, 슈코더르의 베네치아인들은 세르비아군의 포위 공격에 대비해 물자를 충당했고, 보자나 강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을 통제하기 위해 일련의 요새를 건설했다. 그 후 세르비아군이 슈코더르를 포위했지만 12월 철수했고, 베네치아인들은 반격을 가해 보자나 강변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1423년 초여름, 주라지 브란코바치가 스테판의 의뢰를 받고 8,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세르비아군 수장으로서 슈코더르를 포위했다. 주라지는 보자나 강을 따라 요새를 재건하고 보조나 강 입구에 슈코더르를 바다에서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사슬을 설치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베네치아 인들은 평화 협상을 요청했고, 양자는 8월 12일 슈코더르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스테판은 바르와 드라바스타로부터 연간 1,000 두카르를 받았고, 주라지를 이 도시들의 영주로 세웠다. 반면 코토르 울치니 및 슈코더르는 베네치아의 영토로 확인되었다. 이후 협상이 계속 논의된 끝에 1426년 4월 22일 부치트른에서 주라지 브란코비치와 슈코더르 총독 프란체스코 사이에 최종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스테판(1426년 7월 22일)과 베네치아 원로원(1427년 2월 3일)에 의해 비준되었다.

2.9. 무라트 2세와의 대결

1421년 5월 26일, 스테판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던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오스만 술탄국의 새 술탄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일전에 자신이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와 함께 티무르에게 생포되었던 무스타파 첼레비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메흐메트 2세에게 진압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던 자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풀려난 뒤 2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스테판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함께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지만, 스테판은 사절을 체포한 뒤 무라트 2세에게 넘겼다.

1423년 무스타파를 사칭한 인물이 전사하면서 반란이 진압된 뒤, 무라트 2세는 상호 관계에 관해 스테판과 협상하기 위해 사절단을 베오그라드로 보냈다. 1423년 여름, 스테판은 무라트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자기가 가진 영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스테판은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와의 협력도 이어갔다. 1412년 가을, 지그문트는 후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세르비아 기병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스테판은 타미스 총독 필리포 스콜라리에게 보조군을 맡겨 지그문트를 돕게 했다. 또한 스테판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부더를 방문했을 때 참석했다.

그러나 스테판과 무라트 2세의 관계는 1425년 여름에 악화되었다. 무라트 2세의 사절단이 세르비아에 방문했을 때, 스테판은 헝가리에 있어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사절단은 세르비아에 전쟁 준비가 한창인 걸 확인했다. 이에 사절단은 부르사로 돌아간 뒤 무라트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무라트 2세는 그가 서방에서 몰려오는 기독교군과 연합해 대규모 전쟁을 벌일 거라고 확신하고, 이를 응징하기로 했다. 그해 가을, 오스만군은 세르비아 국경으로 진군했다. 스테판은 사절을 급히 파견해 오해를 풀려 했지만, 무라트 2세는 이를 묵살하고 세르비아를 그대로 침공해 니스를 함락한 뒤 포모라블예 중심부를 관통하고 크루셰비츠까지 침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스테판은 지그문트로부터 지원군을 받았지만 사절을 계속 파견해 무라트 2세와의 갈등을 끝내려 노력했다. 그 결과 무라트 2세는 그의 협상 제안을 수락했고, 평화협정이 체결한 뒤 세르비아에서 철수했다. 한편, 보스니아의 국왕 트브르트코 2세는 스테판과 무라트 2세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하려 했다. 보스니아군이 스레브레니차 요새를 포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스테판은 군대를 이끌고 그쪽으로 달려가 보스니아군을 격파했다. 이후 보스니아로 약탈대를 파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도록 했다.

2.10. 내치

2.10.1. 군사 개혁

스테판은 아버지가 전사한 이래 주변 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 개혁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각지에 프로니아(Pronia: 특정 귀족이 해당 지역의 수비를 전담하는 대가로 수여받은 영지)의 수를 대폭 늘리는 동시에 방비를 자체 강화하도록 독려함으로써, 튀르크 약탈대의 습격으로부터 자체적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한 수도원 사유지의 군사 의무 면제를 부분적으로 폐지해 가용 군사력을 늘렸으며, 여러 도시를 자체적으로 다스리는 보이보다의 지위를 강화했다. 한편, 스테판은 '여름 공물세'와 '겨울 공물세' 개념을 도입했다. 두 공물세 모두 각집당 20디나르를 부과했으므로, 세르비아인들은 매년 40디나르를 그에게 바쳐야 했다. 스테판은 세르비아에 거주하던 라구사 공화국 사람들에게도 이 세금을 거뒀다.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을 군사비에 씀으로써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2.10.2. 경제 발전

스테판은 세르비아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자 광산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1422년을 기준으로 하는 라구사 공화국의 기록 보관소 데이터에 따르면, 당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에서 수입된 은의 양은 대부분 세르비아에서 생산되었으며, 당시 유럽 전체 생산량의 1/5를 차지했다. 주요 광산 지역은 노보 브르도, 코파오니 산지의 트레프차, 플라나, 코포리치, 오스트리차, 그리고 북부의 루드니크 산지 및 스레브르니차였다. 15세기 초 자플라니나와 리바제 광산이 개장되었고, 1420년경 아발라 광산이 개발되었으며, 보호리나, 크루프냐, 자야차 등지가 뒤따라 개발되었다.

광산의 발달은 무역의 증가 와 도심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은은 당시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중세 세르비아의 전통 수출품인 밀랍, 가축, 가죽 등의 수출도 이어졌다. 수출은 주로 아드리아 해안 도시, 특히 두브로브니크를 통해 이뤄졌고, 코토르, 드림, 보자나 강변 주변 도시를 통해서 이뤄졌고, 베오그라드를 거쳐 중부 유럽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수입품은 소금 등 일반 소비재 외에도 실크, 진주 등 사치품이 주류였다. 스테판은 일련의 법령과 특권을 통해 자국의 무역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무역 참여를 장려하는 동시에 라구사 공화국의 독점에 가까운 무역 지위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광업과 무역의 발전은 금세공 기술의 발전을 동반했다. 장인들은 장인이 이끄는 전문 길드 협회 로 조직되었으며 , 지역 장인 외에도 두브로브니크 장인도 도시에 있었다.

광산 개발은 그곳에 일하는 이들을 위한 도시 개발을 촉진했으며, 두브로브니크 및 기타 무역 거점으로 향하는 무역 경로를 따라 도시 개발 및 확장이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스테판 치세 때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도시는 단연 베오그라드였다. 1405년 스테판에 의해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수도가 된 베오그라드는 대규모 인구 유입 덕분에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 간의 무역 교류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 자체에는 교회, 빵집 및 공장, 부두, 세관 및 시장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기능에 필요한 일련의 건물이 세워졌고, 문화 육성 정책을 추진한 스테판에 의해 세르비아 문화와 문학 생활의 중심지로도 기능했다. 베오그라드 요새도 그의 치세에 대폭 강화되어, 다뉴브 강변 도시들 중 가장 강력한 요새를 갖춘 곳으로 탈바꿈했다.

2.10.3. 문화 발전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피해 자국으로 망명한 기독교 학자들을 베오그라드 궁정에 받아들였으며, 이에 더해 서유럽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이들에게 번역되지 않은 그리스어 작품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하고, 기존 번역을 수정하고 다시 작성하는 작업을 맡겼다. 번역 대상으로는 신학 및 교육 서적 외에도 철학적 저작물과 역사 및 시에 관한 책이 포함되었다. 그의 의뢰를 받고 번역 활동에 전념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역사 초록>을 번역한 그리고리제 힐란다락(Григорије Хиландарац)을 들 수 있다. 당시 세르비아의 번역 및 필사 활동의 중심지는 레사바 수도원이었는데, 그곳에서 세르비아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철자법 학교인 레사바 철자법 학교가 세워졌다.

문학 분야에서는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전기>를 집필한 코스테네츠의 콘스탄틴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 스테판 데찬스키의 생애>, 스테판 데찬스키에 대한 봉사>, <불가리아에서 세르비아로 성 페트카 유물 이전에 대한 설명> 등을 집필한 그례고리예 캄블락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스테판 본인도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형제 부크 라자레비치에게 여러 편의 시적인 서신을 보냈으며, 올드 슬라브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세르비아어로 번역하는 데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2.11. 말년

1426년경, 스테판은 여러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1402년 8월 피렌체 출신의 레스보스 영주 프란체스코 2세의 딸 헬레나 가틸루시오와 결혼했지만, 헬레나 가틸루시오가 이후 기록상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걸 볼 때 결혼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재혼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던 그는 루드니크 산 아래 스레브레니차에서 교회-영주 협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세르비아 총대주교 니코 1세와 영주 앞에서 사촌인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선언하고 그를 그들의 영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충실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그는 주라지에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지 않고 계속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1426년 5월, 스테판은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와 휴양지인 타타에서 접견한 뒤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지그문트는 베오그라드와 골루박, 마츠바 및 드리나 강 서쪽 지역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데스포티스로 집권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해 봄, 스테판은 지그문트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상호 관계 정상화를 논의하는 협상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베네치아인들과 무라트 2세간의 갈등을 중재할 테니 세르비아에서 회담을 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협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1427년 7월 19일, 스테판은 슈마디야의 여름 궁정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베오그라드로 돌아가는 중 크라구예비츠에 들렀다. 거기에 있던 수도원에 기부한 뒤 점심을 먹은 후, 코스마이 산지의 글라바로 가서 사냥을 벌였다. 이때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평소처럼 손을 앞으로 뻗어 가 자기 팔에 안착하게 하려 했지만, 손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곧 그의 몸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이내 낙마했다. 그는 천막으로 이송되었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었다. 사인은 뇌졸중 또는 심장마비였다고 전해진다. 코스테네츠의 콘스탄틴의 저서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전기>에 따르면, 유언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주라지에게, 주라지에게!"

스테판의 유해는 데스포토바츠 인근에 있는 레사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고 당시 그를 호위하던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그가 쓰러진 장소에 대리석으로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과 충심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의 사망 500주년인 1927년 8월 1일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의 축일은 8월 1일로 정해졌으며, 어머니인 성 에우제니아와 함께 기념되었다.


[1] 가라이 미클로시는 테오도라 라자레비치와, 부크 브란코비치는 마라 라자레비치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