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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체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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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라브 1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블라디슬라프 1세 라두 1세
단 1세 미르체아 1세 블라드 1세 미르체아 1세
미하이 1세 라두 2세 단 2세 라두 2세
단 2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블라드 2세 미르체아 2세
바사라브 2세 블라드 2세 블라디슬라프 2세 블라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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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3세 바사라브 3세 라두 3세 바사라브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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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7세 미르체아 5세 라두 8세 미르체아 5세
파트라스쿠 첼 분 미르체아 5세 페트루 1세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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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아 2세 슈테판 수르둘 알렉산드루 3세 첼 라우 미하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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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10세 라두 9세 라두 10세 라두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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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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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에 파울레스쿠 이울리우 마니우 이울리우 호수 에밀 시오랑 아브람 이안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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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니쿠 코바시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후녀디 야노시 콘스탄틴 노이카 바데아 카르탕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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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
왈라키아 제6대 보이보드
미르체아 1세
Mircea I
'''
파일:Mircea_the_Elder.jpg
출생 1355년
사망 1418년 1월 31일 (향년 62~63세)
재위기간 왈라키아 보이보드
1386년 9월 23일 ~ 1394년
왈라키아 보이보드
1397년 ~ 1418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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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라두 1세
어머니: 칼리니키아
배우자 마라
도암나 앙카?
자녀 5남 2녀
가문 드라쿨레슈티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
2.1. 기원과 집권2.2. 외치2.3. 내치
2.3.1. 경제2.3.2. 행정2.3.3. 군대
2.4. 사망
3. 가족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가장 용맹하고 유능한 기독교 군주."
요한네스 뢰운클라비우스[1]

왈라키아 공국 제6대 보이보드. 행정 제도를 개편하고 군사 개혁을 단행해 왈라키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으며, 경제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공국의 번영을 일군 명군이다.

2. 생애

2.1. 기원과 집권

왈라키아 공국 제4대 보이보드 라두 1세와 그리스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칼리니키아의 아들이다. 이복형으로 단 1세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부저우의 키울리니타 마을을 스나고프 수도원에 기증한 주판 스타이코가 미르체아 1세의 친형제라고 추정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어머니 킬리니키아의 기원에 대해 주장이 엇갈린다. 17세기 세르비아 연대기는 그녀가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초대 공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넷째 딸이라고 기술했고, 루마니아 총리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 ~ 1940)는 동로마 제국의 공주라고 주장했으며, 올테니아의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라두 1세의 첫 아내 안나와 동일인물로 안나가 수녀가 된 후 칼리니키아로 개명했다는 설도 있다.

1386년 이복형 단 1세가 사망한 뒤 보이보드가 되었다. 단 1세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불분명하다. 아테네 출신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라오니코스 찰코콘딜레스(Λαόνικος Χαλκοκονδύλης, 1430 ~ 1470)에 따르면, 1386년 9월 23일에 미르체아 1세가 보야르들과 공모해 단 1세를 독살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불가리아 연대기는 단 1세가 1384 ~ 1386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타르노보의 이반 시슈만과 전쟁을 벌이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2.2. 외치

미르체아 1세는 왈라키아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동맹국을 찾았다. 1388년 다뉴브 강 하류 지역인 도브로게아를 합병했으며, 1389년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무샤트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페트루의 중재로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1404년과 1410년에 갱신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오스만 술탄국 발칸반도 확장 정책에 맞섰다.

1934년 가을, 오스만 술탄국 술탄 바예지트 1세는 다뉴브 강 남쪽의 기독교인들을 지원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게 하는 미르체아 1세를 정벌하기 위해 4,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켰다. 당시 12,000명의 군대만 이끌었던 미르체아 1세는 정면 대결은 자살 행위라고 판단하고 유격전을 택했다. 1394년 10월 10일[2], 미르체아 1세가 이끄는 군대는 다뉴브 하류 저지대의 숲이 우거진 로비네에서 궁수대를 이끌고 오스만군 선봉대를 향해 화살을 퍼부어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벨부즈 데스포티스 콘스탄틴 드라가쉬가 전사했다. 그러나 미르체아 1세는 오스만군의 추가 공세에 밀려 가족과 추종자들을 이끌고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했고, 블라드 1세가 오스만 제국군의 추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396년,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가신 자격으로 십자군에 참여했다. 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 프랑스 왕국을 주축으로 한 십자군은 남하하면서 라호브에 거주하던 무슬림을 학살하는 등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군주와 귀족들이 한데 섞인 십자군은 불분명한 지휘체계로 인해 작전 진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지기스문트와 미르체아 1세 등은 튀르크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낸 뒤 그동안 그들과 수많은 격전을 치러봤던 왈라키아 보병대가 전방에서 적을 묶어두는 동안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기사단이 출격해 적의 측면과 후방을 강타하는 전술을 제시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자기들이 먼저 튀르크군의 정면으로 돌격하겠다고 고집했다. 급기야 미르체아 1세와 지기스문트가 공적을 빼돌리려 든다는 비난마저 일었고, 결국 두 사람은 기사단의 뜻대로 하게 했다.

그 후 1396년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는 십자군의 재앙이었다. 기사단은 무작정 돌격했다가 압도적인 수의 적군에게 포위되어 궤멸되었고, 후방에 남겨진 십자군 역시 승기를 탄 튀르크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나마 미르체아 1세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기사단이 궤멸될 무렵에 전력을 보전한 채 전장을 빠져나갔다. 1396년 10월,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인 오스토야의 스티보르가 블라드 1세를 격파하고 생포했다. 블라드 1세는 포로 신세로 지내다가 1396년 12월 또는 1397년 1월에 사망했고, 미르체아 1세는 1397년 1월 왈라키아로 돌아와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1397년 다뉴브 강을 건너 약탈을 자행하던 오스만 습격대를 격파했고, 1400년 또다시 다뉴브 강을 건너 약탈하려던 오스만 습격대를 격파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참패하고 생포된 후 오스만 술탄국이 바예지트 1세의 아들들에 의해 내전에 휘말리자, 미르체아 1세는 이때를 틈타 영토 확장에 착수했다. 1404년 도브로게아를 재장악했으며, 오스만 술탄국의 내전에 참여해 무사 첼레비가 발칸 반도에서 술탄이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413년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을 수습하고 오스만 술탄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자, 1415년경 오스만 술탄국과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오스만 제국이 매년 3,000개의 금화를 받는 대가로 왈라키아를 속주("파샬리크")로 삼는 걸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2.3. 내치

2.3.1. 경제

왈라키아의 주요 통화는 은 두카트였다. 미르체아 1세 치세에 수많은 문구가 새겨진 은화가 대량으로 발행되었는데, 앞면에 통치자의 왕조 문장이 있고 뒷면에는 왈라키아 독수리가 그려진 헬멧이 새겨지거나 오른손에 창을 들고 동로마 제국 의상을 착용한 미르체아 1세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여기에 반(Ban)이라고 불리는 작은 동전 도 발행되었다. 앞면에는 왈라키아 독수리가 서 있는 투구가 찍힌 왕조의 문장이 그려졌고, 뒷면에는 똑같이 갈라진 팔이 있는 십자가와 다양한 수의 구체가 있는 십자가가 그려졌다. 주로 외국인과 상인들이 동전을 사용했고, 국내에서는 주로 현물거래가 이뤄졌다.

왈라키아의 주요 수출 및 수입품은 곡물(밀, 기장, 귀리, 보리) 및 야채로, 주로 트란실바니아와 다뉴브강을 통해 거래했다. 왈라키아 곳곳에 물이 침투하지 않도록 지어진 지하 곡물창고가 있었고, 방앗간도 전국에 퍼졌다. 이외에도 상당한 양의 와인과 과일도 왈라키아에서 생산되었으며, 호두 과수원 등 다양한 유형의 나무가 부동산 문서에 자주 언급되었다. 하지만 농업에서 가장 큰 부를 챙길 수 있는 상품은 단연 가축이었다. 주로 , , , 돼지, 이 사육되었으며, 소가죽, 치즈, 밀랍, 등이 상당량 수출되었다. 왈라키아의 강과 연못에서 풍부하게 살아가던 물고기들도 많이 수출되었다. 미르체아 1세는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목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그들이 왈라키아 산에서 양떼를 치고 그 나라의 초원과 연못을 방해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약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가 전쟁을 벌여도, 이들 목자의 마을은 특별히 파견된 보야르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광산에서 추출한 소금 구리 역시 상당한 수입원이었다. 소금은 주로 다뉴브강 남쪽으로 수출되어 큰 수입을 거두었다. 블라드 2세는 지우르주 성채에 대해 "이 성에는 내 아버지(미르체아 1세)의 소금 바위를 희생하지 않은 돌이 하나도 없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소금 판매를 통해 얻은 수입으로 지우르주 성채를 세웠음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한편, 미르체아 1세는 1392년에 바이아 데 아라마에 구리 광산을 건설하고, 이 광산의 수입의 십일조를 티스마나 수도원에 기증하도록 했다. 티스마나 수도원에서는 구리를 판매하거나 총, 양초 등 특정 제품을 제조하는 데 사용했다. 구리 또는 구리로 만든 물건은 트란실바니아 및 기타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왈라키아는 트란실바니아와 깊은 상업적 관계를 유지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공산품, 특히 무기가 수입되었고 전문 장인(건축가, 석공, 목수 및 목수 등)이 왈라키아로 보내졌다. 그 대신, 왈라키아는 막대한 농산물을 트란실바니아로 수출했다. 관세는 수출품(즉, 트란실바니아로 떠난 물품)의 경우에만 상인이 지불했다. 미르체아 1세는 트란실바니아와 브라쇼브 상인들이 판매하는 다양한 제품 범주에 대한 관세와 금액, 상인의 권리와 의무, 가능한 지불 면제 등 다양한 특권을 부여했다. 또한 미르체아 1세는 폴란드 왕국과도 상업적 관계를 맺었다. 그는 폴란드 상인을 유치하기 위해 그들에게 관세 면제를 허용했으며, 르부프 상인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상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또한 왈라키아는 이탈리아 국가들, 특히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와도 상업 교류를 유지했다. 왈라키아는 두 도시국가로부터 동양 상품(고가의 직물, 향신료, 향수 등)을 수입하고 밀랍, 꿀, 모피 등을 수출했다.

2.3.2. 행정

미르체아 1세는 행정 제도를 개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왈라키아를 최소 6개에서 최대 11개의 공국으로 분할하고, 보이니쿨(Vornicul)을 각 공국의 수장으로 세워서 해당 지역의 사법과 내정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바눌(Banul)은 보이니쿨의 행정 명령을 집행하는 동시에 군사 총독의 기능을 수행했다. 한편, 왈라키아 보이보드의 궁정의 행정도 체계적으로 개편되었다. 로고파트(Logofăt, 전령관)는 통치에 관한 기록을 보관하고 가장 중요한 헌장을 정성 및 봉인했으며, 비스티에(Vistier, 재무관)는 왕국의 수입과 지불을 관리했고, 스파타르(Spătar)는 잔치나 의식에서 보이보드의 검을 들고 전쟁시에는 군대의 수장을 맡았다. 스톨니치(Stolnic, 집사)는 보이보드의 식탁을 관리했으며, 파하르니치(Paharnic, 술잔 관리관)는 보이보드가 마실 술을 먼저 마시고 보이보드에게 술을 시중들었고, 피타르(pitar)는 보이보드가 먹을 빵을 관리했다. 마지막으로 코니술(Comisul)은 보이보드의 마구간을 관리했다.

지방 행정은 소규모 보이니쿨, 지방 보야르 또는 통치 사절에 의해 보장되었다. 오하바(면세 마을)의 경우, 경영권은 해당 마을, 장원 또는 수도원 소유자에게 속했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지방 보이니쿨과 보이보드가 파견한 관리가 행정부를 이끌었다. 도시는 뚜렷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는 도시가 위치한 토지의 소유자였지만 특별 허가를 받지 않고 박람회를 조직하고 토지를 경작하는 등의 자유를 부여했다. 세금과 판결에 관한 한, 왈라키아에는 세무서와 사법부의 순회 시스템이 있었다. 세금 수취관과 판사는 특정 날짜에 관할권이 있는 지역을 순회하며 엄무를 수행했다. 또한 보이보드가 제공한 "구호품/봉사 및 혜택"을 전파하거나 이행하기 위한 관리들도 자주 파견되었다. 미르체아 1세는 도브로게아를 공략한 후 그곳의 옛 지방 행정을 유지했다. 도브로게아 총독은 케팔리아(kephalia) 라고 불렸는데, 이 단어는 본래 대규모 토지를 보유한 이 중에서 선택된 총독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용어였다.

2.3.3. 군대

미르체아 1세는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군역 면제를 누구에게도 제공하지 않았고, 보야르, 자유 농민, 농노, 상인, 수도사들에게도 국난 시 소집령을 발동했다. 이렇듯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인구 전체로 구성된 국가군을 가리켜 '대 호스트'로 일컬어졌다. 영주가 평시에 대동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군대는 소위 '궁정군'으로 일컬어졌는데, 주로 귀족과 특권을 가진 마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가능한 한 빨리 무기를 가지고 영주의 처분을 받아야 했다. 이 군대에는 산 너머의 통로를 방어해야 하는 플라이에시(Plăiesi)와 노잡이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오파키나(opacinas) 등이 포함되었다. 용병도 미르체아 1세에 의해 고용되었다. 그들은 수백 가량의 기병 또는 보병들이었는데, 땅이 없고 손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나 농민 중에서 선택되었다.

미르체아 1세의 군대에서는 기병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모슈넨과 보야르들은 사망 시 또는 기타 상황(토지 거래 등)에서 말을 영지에 의무적으로 돌려줘야 했다. 그들의 말 외에도 특정 마을에서 관리하는 말도 있었다. 이 말들은 일반적으로 다뉴브 초원 에서 풀을 뜯기 위해 끌려가곤 했다. 기병들 중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단이 눈에 띄었는데, 이들의 존재는 미르체아의 아버지 라두 1세가 베네치아에 사슬 갑옷 1만 벌을 주문한 것에서 처음 거론되었다. 1412년 헝가리 부더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서 루마니아 기사가 언급되기도 했다.

미르체아 1세 시대의 주력 무기는 화살이었다. 익명의 불가리아 연대기는 로비녜 전투에서 루마니아 궁수대가 쏜 수많은 화살이 태양을 가려서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밝혔다. 또한 석궁과 창도 언급되었다. 왈라키아의 방패는 타타르의 것과 유사하게도 가죽으로 덮인 나무로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무기는 주로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들에게서 조달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대포 몇 문과 포대도 갖췄다는 내용이 있으나, 이들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미르체아 1세는 도나우 강변에 여러 요새를 새로 짓거나 보수했으며, 교회를 다수 건설하는 등 정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2.4. 사망

미르체아 1세는 29년간 통치한 끝에 1418년 1월 31일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2월 4일에 코지아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1391년부터 공동 통치자로 언급되던 미하이 1세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지만, 단 1세의 아들인 단 2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단 1세의 후손과 미르체아 1세의 후손간의 보이보드 쟁탈전이 격화되면서, 미르체아 1세가 오랜 치세 동안 안정시킨 왈라키아는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3. 가족

4. 대중매체에서


[1] 1533/1541 ~ 1594, 중세 독일의 오스만 제국 역사가이자 크세노폰, 디오 카시우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 편집자. [2] 일부 연대기에서는 1395년 5월 17일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