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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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6년 | |||
왈라키아 공국 부쿠레슈티 | ||||
사망 | 1862년 1월(향년 66세) | |||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834년 4월 ~ 1842년 10월 7일 | ||||
왈라키아 카이마캄 | ||||
1856년 7월 4일 ~ 1858년 10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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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디미트리에 기카 어머니: 엘레나 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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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형제 | 미하이, 콘스탄체 | |||
이복형제 | 그리고레 4세 기카 | |||
자녀 | 이온 발라세아누 | |||
가문 | 기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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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93대 보이보드.2. 생애
1796년경 왈라키아 공국의 중심지 부쿠레슈티에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3세 기카의 형제인 디미트리에 기카와 엘레나 라주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미하이와 콘스탄체가 있었고, 이복형제로 그리고레 4세 기카가 있었다. 1828년 왈라키아 공국이 러시아군에 의해 장악된 이래, 왈라키아 공국은 몰다비아 공국과 함께 러시아 군사 행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그동안 그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포괄하는 다뉴브 공국의 제국 행정부 수장인 러시아 중장 파벨 드미트리예비치 키셀료프의 조언자로서 활동했다.1834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한 후, 그는 그해 4월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협의하에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왈라키아 보이보드 수여식은 1834년 5월 19일 코스탄티니예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그는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 미하이 스투르자와 함께 머리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잘게 다듬은 턱수염을 기른 채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에게 절하고 발에 키스했다. 이후 왈라키아로 이동한 그는 10월 14일에 부쿠레슈티의 성 스피리돈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알렉산드루는 1834년 루마니아 문테니아 텔레오르만 카운티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했으며, 1835년 10월 5일에는 교육 과정을 우등으로 졸업한 사람만이 국가 직책에 선임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했다. 1838년 8월 부쿠레슈티의 두데스티 병원 건물에 군사 학교를 설립했고, 스피릿 힐에 부쿠레슈티의 첫번째 병영을 건설했다. 또한 1838년 21월 19일에 필하모닉 학교 학생들이 부쿠레슈티에서 최초의 루마니아 오페라를 공연할 때 참관한 뒤 그들에게 국가 메달을 수여했으며, 1842년 초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한 니콜라에 A. 크레줄레스쿠(Nicolae A. Kretzulescu, 1812 ~ 1900)가 부쿠레슈티로 돌아와서 콜차 병원 옆에 수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는 걸 후원했다.
이렇듯 알렉산드루는 왈라키아를 잘 다스리려 노력했지만, 러시아 당국은 그를 통제하기 위해 그리스와 러시아 요원들을 왈라키아 정부에 대거 배속시켰고, 러시아 영사인 표트르 뤼크만 남작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왈라키아의 모든 내정에 간섭하도록 했다. 러시아 영사의 간섭은 왈라키아 의회에서 거센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 알렉산드루의 두 형제 미하이와 콘스탄체는 각각 육군과 민병대 수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무능한 데다 장병들의 급료를 갈취하는 짓을 저질렀기에 거센 비난을 받았다.
1838년, 표트르 뤼크만은 <유기적 규제(Органический регломент)>[1]에 왈라키아의 내부 독립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는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라고 요구했다. 국가의회가 받아들이지 않자, 러시아 당국은 오스만 제국에 압력을 행사했고, 왈라키아 의회는 해당 조항의 도입을 수락하라는 오스만 제국의 권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한편, 자유주의 성향의 보야르들의 대표자인 이온 캄피네아누는 차르와 파디샤가 직접 통치자를 임명하는 규정을 용인할 수 없다고 여기고, 알렉산드루를 타도하고 본인이 보이보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왈라키아 헌법 채택, 다뉴브 공국 통일 및 독립 선언을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왈라키아 헌법'은 헌법적이고 대의적인 정부 형태의 도입, 법 앞의 평등, 매우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 등을 강조했다. 캄피네아누는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이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했다. 그러나 1840년 3월 부쿠레슈티로 귀환했다가 체포되어 마르기네니 수도원에 투옥되었다가 1841년 3월 중병에 걸린 후 풀려났다.
1840년, 자유주의 보야르들은 드미트리에 필리페스쿠가 이끄는 새로운 음모를 조직했다. 이 음모엔 왈라키아 역사가이자 작가 니콜라에 발체스쿠(Nicolae Bălcescu, 1819 ~ 1852), 언론인이자 고고학자 세자르 볼리악(Cezar Bolliac, 1813 ~ 1881), 법학자이자 철학 교수 에프티미 무르구(Eftimie Murgu, 1805 ~ 1870)도 참여했다. 필리페스쿠는 캄피네아누와는 달리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개혁을 추종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강령은 계급을 폐지하고 자영농을 양성해 농업 침체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 역시 발각되었고, 필리페스쿠는 스나고프 수도원에 투옥되었으며, 참가자들은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1841년, 알렉산드루는 다뉴브 공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파괴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군사 개입을 촉구하려던 브라일라의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 조직원들을 대거 체포했다. 여기에 루마니아 필하모닉 협외에 제공되던 보조금을 철회하고 독일 밴드에 수여해, 루마니아 지식인들의 강한 분노를 샀다.
1842년, 국가의회는 그의 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게오르게 비베스쿠는 그를 "알바니아계 외국인"이라고 단정하며, 그의 통치를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의원들은 기카 가문과 더이상 협력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그들의 불만 사항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에 전달되었다. 양국은 알렉산드루는 더 이상 왈라키아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1842년 10월 7일, 오스만 제국은 그를 폐위한다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루는 브라쇼브로 피신한 뒤 15일 후 빈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10여 년간 살았다. 그 후 게오르게 비베스쿠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1856년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임기 만료 후 파리로 떠난 뒤, 알렉산드루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카이마캄(caimacam, 대리 통치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카이마캄으로서 1856년 7월 4일부터 1858년 10월 18일까지 통치했는데, 이 기간 동안 민간 및 군사 구급대 학교를 설립했고, 이 학교 책임자인 게오르게 코스타포루 교수에게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각지를 6개월간 연구 여행하도록 했다. 1858년 10월 18일 왈라키아의 세 귀족 이오안 마누, 에마누일 발라누, 이오안 알렉산드루 필리페스쿠에게 정권을 넘긴 뒤 나폴리로 은퇴했고, 1862년 1월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판텔리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그가 생전에 건설했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교회로 이장되었다.
그의 아들 이온 발라세아누(Ion Bălăceanu, 1828 ~ 1914)는 루마니아 왕국의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