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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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7년 | ||
사망 | 1569년 8월 19일 (향년 22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559년 9월 25일 ~ 1568년 6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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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르체아 5세 어머니: 치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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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스탄카, 라두, 미르체아, 안카, 마리나, 도브라 | ||
배우자 | 엘레나 체레포비치 | ||
자녀 | 테오도라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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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1대 보이보드.2. 생애
1547년경 왈라키아 제38대 보이보드 미르체아 5세와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의 딸인 치아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1559년 9월 25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보이보드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했기에, '셀 타나르(cel Tânăr, 어린 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어머니 치아나가 섭정을 맡아 나라를 대신 다스렸다.일찍이 미르체아 5세의 박해를 피해 달아났던 보야르들은 나이가 어린 그가 보이보드에 오른 틈을 타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로마네슈티 마을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는 보야르 측이 승리했지만, 세르바네슈티에서 벌어진 2번째 전투는 토벌군이 승리했다. 보이아누에서 벌어진 3번째 전투에서, 치아나가 친히 전장에 나와서 토벌대를 격려했고,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559년 10월 24일, 페트루 1세는 보야르들의 공인을 받고 보이보드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는 보야르들을 잔혹하게 대한 아버지와는 달리 성격이 온화했고 신앙심이 깊었다. 그를 대신해 나라를 이끈 치아나는 보이보드 직위를 노리는 자들의 음모와 트란실바니아 공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왈라키아를 공략하려는 음모를 모조리 분쇄했다.
그러나 1568년 5월, 오스만 제국은 왈라키아와 미르체아 5세 일가의 부를 확보하고자 페트루 1세와 그의 어머니를 코스탄티니예로 소환했다. 페트루 1세는 5월 31일이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뒤 7개의 탑 요새로 끌려갔고, 6월 8일에 모든 직위와 재산을 박탈당했다. 그 후 아나톨리아의 코냐로 보내졌다가 1569년 8월 19일 그곳에서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설에는 독살당했다고 하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의 유해는 코냐의 변형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 후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페트루 1세는 1561년에 루고이-카란세베슈의 반(Ban)인 니콜라에 체레포비치의 딸 엘레나 체레포비치와 결혼해 딸 테오도라를 낳았다. 페트루 1세가 끌려간 뒤, 엘레나와 테오도라 모녀는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제공한 데바 성채에서 조용히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