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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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
사망 | 1377년 (향년 ?세) | ||
왈라키아 공국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364년 11월 16일 ~ 137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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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어머니: 마리아 락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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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엘리자베타, 안카, 안나, 라두 1세 | ||
가문 | 바사라브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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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3대 보이보드. 별칭은 블라이쿠(Vlaicu).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2대 보이보드 니콜라에 알렉산드루와 마리아 락피의 아들이다. 친누이로 엘리자베타[1], 이복형제로 안카[2], 안나[3], 라두 1세가 있었다. 136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왈라키아 제3대 보이보드가 되었다.1365년 2월, 러요시 1세는 새 보이보드 블라디슬라프 1세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걸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테메스바르에 군대를 집결했다. 하지만 블라디슬라프 1세가 복종 의사를 밝히자 방향을 바꿔 불가리아 쪽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는 1355년 후계자로 정했던 미하일 아센 4세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자 막내 아들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라 여겼던 또다른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가 반발하여 영지로 삼고 있던 비딘에서 외교권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중앙 정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요시는 그런 그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러요시는 1365년 5월 1일 비딘을 침공해 6월 2일 함락시키고 스라치미르를 사로잡았다.
1366년, 러요시 1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세베린 일대와 포가라스 백국의 통치권을 넘겨줬다. 1368년, 블라디슬라프 1세는 헝가리의 지배에 반기를 든 뒤 이반 시슈만과 동맹을 맺고 비딘을 포위했다. 러요시는 이에 맞서 그 해 가을에 도나우 강 하류로 진군하면서 에르데이 보이보드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왈라키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알로미차 강 계곡을 행진하던 중 왈라키아인들의 습격을 받고 괴멸되었고, 미클로시는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러요시는 본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블라디슬라프 1세는 1369년 여름에 귀순했다. 이후 러요시는 이반 스트라치미르를 비딘의 통치자로 복위시켰고, 스트라치미르는 그 대가로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두 딸을 인질로 보냈다.
1368년 1월 20일 브라쇼브 상인들에게 상품에 부과되는 관세인 트리세시마에 대한 특권을 부여했으며, 왈라키아 공국 최초로 은화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 1375년 세베린 인근의 보디차와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왕립 교회를 창건했다. 1377년경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에서 사망했을 때 자녀를 두지 못했고, 이복 형제 라두 1세가 뒤이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