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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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20년 | |||
사망 | 1685년 3월 31일 (향년 65세) | |||
폴란드-리투아니아 르부프 | ||||
재위기간 |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665년 9월 ~ 1666년 5월 | |||
2차 | 1668년 11월 ~ 1672년 8월 10일 | |||
3차 | 1678년 11월 ~ 1683년 12월 25일 |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1차 | 1674년 11월 ~ 1678년 11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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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상 어머니: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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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아나스타샤 다비자 | |||
자녀 | 콘스탄틴 두카 | |||
가문 | 두카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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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65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50대 보이보드.2. 생애
그리스계 알바니아인으로, 본래 상인으로서 몰다비아 공국에서 활동하다가 몰다비아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 치세 때 궁정에 발탁되었고, 유스트라티에 다비자와 다피나의 딸 아나스타샤와 결혼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격상했다. 1665년 9월 유스트라티에 다비자가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한 뒤, 시어머니 다피나 등의 후원에 힘입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었다. 그러나 1666년 5월 오스만 제국이 공물을 제때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위했고, 일리아슈 알렉산드루가 그를 대신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었다.1668년 11월, 오스만 제국 궁정에 막대한 뇌물을 지불한 끝에 일리아슈 알렉산드루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이번엔 심한 가뭄으로 몰다비아 전역이 빈곤해졌고, 1671년 10월 미할체아 힌쿠와 아포스톨 듀락이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과도한 과세를 거두는 게오르게 두카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이아시를 점령하고 보야르와 상인의 안뜰과 집을 약탈했으며, 세금을 철저히 거둬들여 백성의 증오를 받던 그리스 세리들을 체포해 모조리 죽였다.
게오르게 두카는 일부 보야르와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너 달아났다가, 오스만 제국군과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 분견대의 도움을 받고 귀환했다. 이후 이에푸레니 전투에서 보야르 알렉산드루 부후슈가 이끄는 토벌대가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리하여 직위를 지켜낸 게오르게는 반란이 일어난 일대 사람들을 타타르인들의 노예로 삼거나 교수형에 처하거나 꼬챙이에 산채로 꽂히는 형벌을 받았다.
1672년 8월 10일, 게오르게 두카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출진한 파디샤 메흐메트 4세를 카메니타에서 접견했다가, 메흐메트 4세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폐위되었고, 슈테판 페트리세이쿠가 그를 대신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었다. 2년 후인 1674년 11월, 게오르게 두카는 왈라키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사하던 칸타쿠지노 가문의 추천에 힘입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게오르게는 초기엔 칸타쿠지노 가문과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칸타쿠지노 가문의 권세가 너무 강해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게 힘들자 그들에게 불만을 품고, 칸타쿠지노 가문과 적대하는 보야르들과 손잡고 그들의 권세를 약화하려고 했다. 그러자 칸타쿠지노 가문은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람을 잇따라 보내 그의 통치가 억압적이라고 비난하며 폐위해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 궁정은 1678년 11월29일에 그를 폐위하고 셰르반 칸타쿠지노를 새 보이보드로 세웠다.
그 후 게오르게 두카는 안토니에 루세트를 대신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막대한 공물을 보냈고, 오스만 제국은 그런 그를 기특하게 여겨 1680년에 드니에스터 강 건녀편의 네미리브, 소로카 강변의 시가나우카에 궁정을 둔 오스만 제국 치하 우크라이나 일대의 헤트만으로 선임해, 그곳에 거주하는 카자크를 통제하도록 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든든한 후원을 기반으로 삼아, 보야르들에게 딸의 결혼식 비용을 충당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막대한 세금을 뜯어내는 등 억압적으로 통치했다. 보야르들은 그런 그를 타도하려고 음모를 꾸몄지만 조기에 발각되어 숙청되었다.
1683년 4월, 게오르게 두카는 제2차 빈 공방전를 개시한 오스만 제국군을 돕기 위해 빈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빈 공방전은 오스만 제국군의 참패로 끝났다. 그 사이, 보야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지원 약속을 받고 반란을 일으켜 슈테판 페트리세이쿠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게오르게는 급히 귀국길에 올랐지만 1683년 12월 25일 체포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끌려갔고, 1685년 3월 31일 르부프 감옥에서 옥사했다.
게오르게 두카는 생전에 몰다비아 제59대 보이보드 유스트라티에 다비자의 양녀인 아나스타샤 다비자와 결혼해 콘스탄틴 두카를 낳았다. 콘스탄틴 두카는 1693년 4월부터 1695년 12월 18일까지, 17000년 9월 12일부터 1703년 7월 26일까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