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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슈테판 3세 | 카롤 1세 | 미하이 에미네스쿠 | 미하이 2세 |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이온 안토네스쿠 | 미르체아 엘리아데 |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콘스탄틴 브랑쿠시 | 나디아 코마네치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블라드 3세 | 조지 비칼리 | 헨리 코안더 | 게오르게 하지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 니콜라에 이오르가 |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 제오르제 에네스쿠 |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미렐 러도이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 페르디난드 1세 | 미하이 1세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데케발루스 | 트라이안 버세스쿠 | 게오르그 뮤레산 | 이온 I. C. 브라티아누 | 러즈반 루체스쿠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 이울리우 마니우 | 이울리우 호수 | 에밀 시오랑 | 아브람 이안쿠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부레비스타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 페트레 투테아 | 코르넬리우 코포수 | 아우렐 블라이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이오시프 트리파 | 니키타 스터네스쿠 | 이온 크레안거 | 마델리나 마놀 |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트라이안 부이아 | 루치안 블라가 | 조지 에밀 퍼레이드 | 아나 아슬란 | 아드리안 무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플로린 피에르시크 | 미하일 코갈리차누 | 야노스 코뢰시 |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 일리에 너스타세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게오르그 잠피르 | 기카 페트레스쿠 | 엘리사베타 리제아 | 불라 | 암자 펠라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차시 1세 | 미르체아 1세 | 티투 마이오레스쿠 | 토마 카라지우 |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안드레아 마린 | 에밀 라코비차 | 빅터 바베슈 | 니콜라에 발체스쿠 |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온 일리에스쿠 | 마린 프레다 | 외젠 이오네스코 |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 알렉산드루 토데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투도르 게오르게 | 이온 티리아크 | 일리에 클레오파 | 아르세니 보카 | 바넬 니콜리타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 그리고레 모이실 |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 플로렌틴 페트레 | 마리우스 모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 로라 스토이카 | 커털린 흘단 | 안겔 살리그니 | 이반 피차이진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마리아 터나세 |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 옥타비안 팔러 | 무명용사 |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니쿠 코바시 |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 후녀디 야노시 | 콘스탄틴 노이카 | 바데아 카르탕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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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33년경 | ||
몰다비아 공국 보르제슈티 | |||
사망 | 1504년 7월 2일 (향년 71세) | ||
몰다비아 공국 수체아바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457년 4월 14일 ~ 1504년 7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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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보그단 2세 어머니: 마리아 올테아 |
|
형제 | 요아킴, 이온, 시르스테아, 마리아, 소라 | ||
배우자 | 키예프의 에브도키아, 망고프의 마리아, 마리아 보이치타 | ||
자녀 | 보그단, 페트루, 엘레나, 일리아슈, 보그단, 보그단 3세, 마리아 크네아즈나, 페트루 5세 라레슈( 사생아), 슈테판 5세(사생아) | ||
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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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19대 보이보드. 몰다비아 공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는 명군으로, 후세 사람들, 특히 루마니아인으로부터 '위대한 자(cel Mare)'라는 칭호로 불렸다.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에서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2. 생애
2.1. 기원과 초년기
아버지는 몰다비아 공국 제10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1세의 사생아인 보그단으로, 그가 출생할 당시 보르제슈티 영주로 군림했다. 어머니 올테아는 바카우 인근의 보야르 가문 일원으로, 보그단의 정부였다. 두 부부는 슈테판 외에도 세 아들 요아킴, 이온, 시르스테아와 두 딸 마리아, 소라를 두었다. 슈테판 3세의 생년월일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체로 1433년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슈테판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는데, 아마도 가족 거주지에서 함께 보냈을 것이다.1449년 가을, 아버지 보그단이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고 몰다비아 제16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그해 10월 12일, 보그단은 시레트 강 인근의 타마세니 전투에서 알렉산드루 2세를 격파하고 몰다비아 제17대 보이보드 보그단 2세로 군림했다. 1450년 2월 11일, 보그단 2세는 로만에서 후녀디 야노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모든 원정을 돕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했다. 이때 그는 서신을 지지한 증인들을 나열했는데, 그 중엔 "내 사랑하는 아들 슈테판 보이보드"가 있었다. 이로 볼 때, 보그단 2세는 슈테판을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51년 10월 15일, 보그단 2세는 루세니에서 알렉산드루 1세의 또다른 사생아인 페트루 4세 아론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슈테판을 비롯한 모든 가족은 트란실바니아 및 왈라키아로 망명했다. 어머니 올테아는 남편이 죽은 뒤 마리아로 개명해 수체아바의 프로보타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지내다 1464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슈테판은 왈라키아 공국으로 망명한 뒤 그곳을 다스리던 블라드 3세와 친분을 맺었다. 1457년 4월, 슈테판은 블라드 3세가 제공한 왈라키아인 1,000명이 포함된 6천 병력을 이끌고 몰다비아 공국에 들어선 뒤 시레트 강을 따라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 수체아바로 전진했다. 페트루 4세 아론은 서둘러 군대를 모은 뒤 4월 12일 시레트 강변의 돌제스티에서 슈테판을 요격했다. 하지만 슈테판은 이를 거뜬히 격파했다. 뒤이어 4월 12일 오르비치에서 페트루 4세와 재차 맞붙어 또다시 승리를 거뒀고, 페트루 4세 아론은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슈테판은 시레트 계곡의 디렙타테아에서 몰다비아 대주교 테옥티스투의 주관하에 대관식과 기름 부음을 거행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이리하여 몰다비아 역사상 최고의 군주는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2.2. 통치
2.2.1. 외치
2.2.1.1. 초기 원정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등극한 직후, 슈테판 3세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가 그 나라로 망명한 페트루 4세 아론을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몰다비아-폴란드 국경지대를 연이어 습격했다. 하지만 그는 폴란드 왕국과의 장기적인 갈등은 몰다비아 공국의 안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1459년 4월 4일 드니스테르 강에서 폴란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카지미에시 4세의 종주권을 개인적으로 인정했고, 타타르에 맞서 폴란드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슈테판 3세가 적과 맞서 싸울 때 돕겠으며, 페트루 4세 아론이 몰다비아로 돌아오는 걸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페트루 4세는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해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란트에 정착했다. 1461년, 슈테판 3세는 세케이란트를 여러 차례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다. 페트루 4세 아론은 그를 피해 헝가리의 수도 부더로 이동해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의 보호를 받았다.당대 사료에 따르면, 슈테판 3세와 블라드 3세의 관계는 1462년 초부터 악화되었다. 1462년 4월 2일, 카파(현재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아)의 제노바 공화국 총독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에게 블라드 3세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슈테판이 왈라키아를공격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비서이며 메흐메트 2세에 관한 연대기를 집필한 투르순 베그는 블라드 3세가 메흐메트 2세의 침공에 맞서는 동안 몰다비아군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왈라키아-몰다비아 국경 인근에 7,000명을 배치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1462년 6월 말, 슈테판 3세는 블라드 3세와 메흐메트 2세가 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킬리야 시와 체타티아 알바 성이 있는 부자크 일대를 탈환하려 했다. 이 지역은 원래 왈라키아에 속했지만 14세기 후반에 몰다비아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몰다비아가 혼란에 빠진 동안 왈라키아에 돌아갔고, 킬리야는 헝가리와 왈라키아가 공동 통치했다. 슈테판 3세는 오스만 분견대와 함께 요새를 8일간 포위했지만, 헝가리와 왈라키아 수비대 7,000명에게 격파되었다. 이때 그는 왼쪽 종아리 또는 왼쪽 발이 파편에 박히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고, 평생 왼쪽 다리를 절어야 했다.
1465년 1월 24일, 슈테판 3세는 다시 킬리야를 포위 공격해 이틀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1467년 8월 18일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이 세금 면제 특권을 회수한 마차시 1세의 결정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지카, 슈테판 3세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세케이란트로 진군했다. 하지만 마차시 1세는 그해 9월 군대를 일으켜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반란군을 복종시키고 주동자들을 처벌한 뒤, 슈테판 3세를 반란의 주동자로 낙인찍고 보복을 결정했다. 1467년 11월, 마차시 1세는 대군[1]을 일으켜 브라쇼브를 떠나 오이투즈 고개를 거쳐 몰다비아로 향했다. 이에 맞서는 슈테판 3세의 병력은 12,000명이었다.
11월 19일 트로투술을 공략하고 바카우 목조 요새를 정복하고 불사른 마차시 1세는 시레 계곡을 지나 수체아바로 진군했다. 11월 29일부터 12월 7일 사이에 로만, 타르구 네암츠를 점령했고,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성별, 나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후 3일간의 행군과 약탈 끝에 1467년 12월 14일 당시 색슨족과 헝가리인이 거주했던 도시이자 가톨릭 주교좌의 소재지였던 바이아를 점령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12월 14일 밤에 헝가리군을 기습 공격해 15일 새벽까지 전투를 치른 끝에 헝가리군을 물리쳤다.( 바이아 전투) 이후 슈테판 3세는 헝가리군에 호응해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거나 마차시 1세를 잡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은 보야르 20명과 지주 40명을 사로잡은 후 처형했다.
1468년 7월 28일, 슈테판 3세는 수체아바에 찾아온 폴란드 사절 앞에서 카지미에시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후 1469년 슈테판 3세가 파견한 필리프 팝(Filip Pop)의 몰다비아군이 세클러란트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으며, 페트루 4세 아론을 체포해 참수형에 처했다. 1470년 여름, 킵차크 칸국의 아흐메트 칸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의 동부 영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군했고,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양자간엔 여러 차례 소규모 접전이 있었고, 이어진 2차례 전투에서 몰다비아군이 모두 승리했다.
이에 킵차크 칸국군은 여성과 어린이 수천 명과 소, 말, 그리고 양떼 수백 마리를 데리고 후퇴했다. 슈테판 3세는 이들을 우회해 리프니치 인근의 라임나무 숲에 매복한 뒤, 숲에 들어선 그들을 습격했다. 이후 벌어진 리프니치 전투에서, 수많은 타타르인들이 전사했고, 많은 이가 도망치다가 드네스트르강에 빠져 익사했다. 여기에 칸의 아들을 포함한 수많은 타타르인이 생포되었고, 칸의 형제는 전사했다.[2] 슈테판 3세는 킵차크 칸국의 침략을 격파한 뒤 드네스트르 강변을 따라 여러 방어 시설을 건설했고, 올드 오르헤이와 소로차에 새로운 요새를 세웠다.
2.2.1.2. 왈라키아 쟁탈전
1471년,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라두 3세가 킬리아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슈테판 3세는 왈라키아 공국을 복속하기로 마음먹고, 1472년 바사라브 3세를 섭외했다. 하지만 라두 3세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와 무척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를 축출했다간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게 자명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헝가리 왕국에 화해를 제안했고, 마차시 1세도 이에 응했다. 여기에 1472년 메흐메트 2세가 백양 왕조의 샤한샤 우준 하산이 제국 동부 영토를 침략하는 걸 막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가자, 그는 아예 오스만 제국에게 바치던 공물을 끊어버리고 왈라키아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로 했다.1473년 11월,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과 바사라브 3세가 고용한 용병대가 밀코프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그 해 11월 18일에서 20일 사이, 라두 3세는 프라호바의 게르기차 인근에서 침략군과 맞섰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한동안 농성하던 그는 보이보드들이 대거 침략군에 가담했다는 걸 알게 되자, 11월 23일 밤에 다뉴브 강변 오스만 제국 요새인 지우르지우 요새로 피신했다. 11월 28일, 라두 3세는 13,000명의 오스만군과 함께 왈라키아를 탈환하려 했지만 몰다비아군과 6,000가량의 왈라키아군이 연합한 바사라브 3세 휘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12월 23일, 라두 3세는 다시 30,000 가량의 오스만군의 선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넜다.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바사라브 3세는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1474년 3월,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라두 3세는 몰다비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반격해 바사라브 3세를 도로 몰아냈다. 1474년 여름,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재차 몰아냈다. 바사라브 3세는 라두 3세가 재차 공격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재빨리 왈라키아로 진군했지만, 바사라브 3세가 아닌 그의 사촌 바사라브 4세를 옹립하려 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바사라브 3세와 2차례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격파했다. 한편,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은 라두 3세를 지지하던 텔레아젠 요새를 며칠만에 함락하고 수비대를 학살하고 성채를 불태웠다.
슈테판 3세가 이렇듯 충실한 봉신인 라두 3세를 계속 축출하고 바사라브 3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앉히려 들자, 메흐멘트 2세는 몹시 격분했다. 그는 보복을 결심하고, 1474년 슈테판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왈라키아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철페하고, 킬리야를 오스만 제국에 넘길 것이며, 납부하지 않은 공물을 당장 납부하라고 요구했다. 슈테판 3세는 이를 거부했고, 유럽 각지에 서신을 보내 오스만 제국이 몰다비아를 침공하려 하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2.2.1.3. 메흐메트 2세와의 전쟁
2.2.1.3.1. 바슬루이 전투
1474년 10월 20일, 라두 3세는 오스만군의 지원을 토대로 바사라브 3세와 바사라브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또한 메흐메트 2세는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슈코더르에 대한 공방전을 치르던 하딤 술레이만 파샤에게 포위를 풀고 소피아에 군대를 집결한 뒤, 몰다비아로 진격해 슈테판 3세를 굴복시키라고 지시했다. 5월 17일부터 8월 15일까지 3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힘겨운 공성전을 치르느라 지쳤던 오스만군은 슈코더르에서 몰다비아까지 한 달간 이동하며 악천후와 험난한 지형에 고통받았다. 1474년 9월 소피아에 집결하여 휴식을 취한 뒤, 왈라키아로 진군했다.슈테판 3세가 나중에 교황청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오스만 기병대는 총합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오스만 중갑 보병대와 크림 칸국과 발칸 반도의 여러 가신들이 보낸 군대가 가담했고, 불가리아 농민 2만 명이 동원되어 물 위에 다리를 건설하고 도로에서 눈을 치우며, 보급 마차를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 평원으로 가서 2주간 휴식을 취했고, 왈라키아 병사 17,000명을 추가로 확보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기독교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헝가리 왕국에서 1,8000명, 폴란드에서 2,000 기병대만 가세했을 뿐, 다른 데서는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슈테판 3세는 세케이 군인 5,000명을 고용했고, 몰다비아 병사 30,000명(이중 상비군은 10,000 ~ 15,000명)을 동원했으며, 대포 20문을 갖췄다. 그는 이 정도 병력으로는 적과 정면 대결을 벌이면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계략을 통해 적군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1474년 11월 몰다비아로 진군한 오스만 제국군은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이 파괴되고 농경지는 불살라졌으며, 우물이 독을 타서 마실 수 없는 등, 적군이 청야 전술을 대대적으로 단행한 걸 확인했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신속한 승리를 위해 몰다비아로 깊숙이 진군했지만, 적 경기병대의 유격 전술로 인해 많은 군수물자가 피해를 봤으며, 오스만 장병들의 피해와 피로도 누적되었다. 한편, 슈테판 3세는 오스만군의 움직임을 정찰병을 통해 확인한 뒤, 바슬루이 시 인근 라코바 강 하구의 발라드 계곡과 숲 사이에 갇힌 습지 지역에 군대를 집중 배치한 뒤, 오스만 제국군이 이쪽으로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1475년 1월 10일 아침, 오스만 제국군은 몇 걸음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에서 발라드 계곡으로 진군했다. 당시 날씨는 추웠고, 눈이 녹기 시작해 발라드 초원 전체가 웅덩이로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과 말이 같은 곳을 지나가고 있었기에, 계곡은 진창이 되어 전진하기 매우 힘들었다. 슈테판 3세는 계곡 바닥에 병사 수천명을 배치해, 오스만군과 교전한 뒤 계곡 깊숙이 유인하도록 했다. 오스만군 선봉대가 나무 다리를 통해 발라드 강을 건너 진군하던 그 때, 계곡에서 적군 악공이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리더니, 몰다비아군 수천 명이 그들을 덮쳤다. 이후 격투가 한동안 벌어지다가, 몰다비아군이 짐짓 전투력에서 열세를 보인 척하며 후퇴했고, 오스만군 선봉대는 그들을 궤멸하기 위해 계곡 깊숙이 진군했다.
한편, 후방에서 뒤따라가던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저 멀리서 북과 나팔 소리 및 전투 함성이 들리는 걸 보고, 적군이 계곡에 전부 집결했다고 여겼다. 그는 즉시 병사들을 독촉해 다리를 서둘러 건너서 아군과 합세하게 했다. 이윽고 충분히 많은 오스만군이 다리를 건넜다는 생각이 들자, 슈테판 3세는 포병대에게 다리를 향해 발포해 끊어버리도록 했다. 뒤이어 숲에 숨어있던 몰다비아 궁수들이 세 방향에서 계곡으로 밀려든 적을 향해 사격했다. 그들은 안개 때문에 적이 보이지 않았기에, 발소리를 따라 화살을 쐈다. 여기에 몰다비아 경기병대는 습격과 도주를 반복하면서 오스만군이 계곡으로 계속 밀려오도록 유도했다
이후 오스만군이 계곡에 배치된 몰다비아군 수천 명을 몰아붙일 때, 오스만 제국군 좌측면 인근 숲속에서 몰다비아 악공들이 돌연 나타나 전투 개시를 알리는 노래를 연주했다. 이에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적이 아군 좌측면을 공격하려 들 것이라 여기고, 공세를 잠시 중단하고 그쪽을 막기 위해 진형을 개편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오스만군 좌측면에서 나타난 이들은 악공들 및 소규모 병사 뿐이었고, 슈테판 3세와 몰다비아 주력군은 발라드 강 너머 오른쪽 숲에 매복했다. 오스만군이 자기들 좌측면을 지키기 위해 진형을 한창 짜고 있는 틈을 타, 슈테판 3세는 주력군을 이끌고 적의 우측면을 향해 돌진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공격당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공포에 휩싸였다. 많은 이가 순식간에 전사했고, 더 많은 이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주했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어떻게든 군대를 수습하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후 몰다비아군은 다뉴브강까지 적군을 추격해 대거 살육했다.
슈테판 3세는 바슬루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면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는 그를 "우리가 존경하는 다른 전쟁 영웅들보다 절대로 뒤지지 않으며, 튀르크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세계 통치자들 중 최초의 동시대 인물이다. 내 생각에 그는 튀르크에 대항하여 기독교 연합을 이끌기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다."라고 극찬했다. 여기에 바사라브 3세가 그의 후원에 힘입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고, 바슬루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 8,000명이 왈라키아로 진입할 때 습격해 격파했다.
2.2.1.3.2. 발레아 알바 전투
슈테판 3세는 바슬루이 전투에서 사로잡은 고위급 장성들과 막대한 전리품을 폴란드 국왕이자 자신의 주군인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에게 보내 승전보를 알린 뒤, 군대와 자금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교황청과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서신과 포로 몇명, 튀르크 군기를 보내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돈과 인력이 모두 부족하다며 지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교황청은 아슬레타 크리스티(Athleta Christi, 그리스도의 승리자)라는 칭호를 수여하면서도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마차시 1세는 슈테판 3세가 보낸 장교와 깃발들을 내세우면서, 자기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고 홍보할 뿐 슈테판 3세에게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렇듯 슈테판 3세가 완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이, 메흐메트 2세는 패전 소식에 격노해 며칠 동안 누구에게도 접견을 거부하고 복수할 계획을 구상했다.1475년,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3세가 메흐메트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반 오스만 연합에서 이탈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슈테판 3세는 바사라브 3세에게 등을 돌리고, 그때까지 블라드 3세를 감금 중이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블라드 3세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 1세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트란실바니아 남부의 수비를 블라드 3세에게 맡겼다.
1476년 봄, 메흐메트 2세가 90,000 ~ 15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여기에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3세도 10,000명을 오스만 제국군에 가담시켰고, 크림 칸국의 멜리 1세 기라이가 이끄는 타타르군 15,000명도 동쪽에서 몰다비아로 진격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먼저 타타르군부터 격퇴하기로 하고, 프루트 강 유역에 있는 슈테파네슈티 마을 인근에서 타타르군을 요격해 격파했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진 타타르군이 자기 고향을 파괴할 것을 우려한 많은 장병이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자, 슈테판 3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로 인해 슈테판 3세에게는 12,000 ~ 15,000명 가량의 병력만 남았다. 이후 예정된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기 위해 청야 전술을 단행했다.
1476년 6월 하반기, 오스만 제국군이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시레트 계곡을 따라 수체아바로 진군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수체아바 요새에 잘 훈련된 전사들을 보내 수비를 강화했고, 경기병대를 파견해 적 보급로를 유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후스 전쟁 시기에 후스파가 쓴 전법에 따라 참호, 울타리, 마차를 연결하여 요새화한 높은 고원, 발레아 알바에 진지를 세웠다. 7월 25일, 슈테판 3세는 루멜리아의 베일러 베이이자 지난해 바슬루이 전투 때 격파했던 하딤 쉴레이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선봉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오스만 주력군이 도착하자 요새화된 진영으로 후퇴했다.
7월 26일, 오스만 제국군은 적 진영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몰다비아군도 이에 대응해 포격을 퍼부었다. 이때 슈테판 3세는 4,000 가량의 기병대를 적 진영으로 돌격하게 했고, 1,000명으로 구성된 또다른 부대를 숲속에 매복시켰다. 몰다비아 기병 4,000명은 적군을 한 차례 들이친 뒤, 즉시 말머리를 돌려서 요새가 있는 쪽으로 후퇴했다. 오스만군 경기병대가 이들을 추격했다가 언덕에 진을 치고 있던 몰다비아 궁수대 및 석궁병의 일제 사격을 받은 데다, 사전에 숲에 숨어있던 몰다비아 병사 1,000명이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바람에 혼란에 빠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메흐메트 2세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예니체리에게 몰다비아 진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다비아 포병대와 궁수대의 공격을 받고 한 시간 만에 퇴각할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경비병 및 시파히를 전장으로 투입시키는 한편, 자신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로 했다. 파디샤가 전장에 뛰어들자, 예니체리의 사기가 고조되어 적진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이윽고 황혼이 가까울 무렵 몰다비아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1,000명을 남겨서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게 한 뒤 어둠을 틈타 후퇴했다. 아군의 후퇴를 엄호한 몰다비아군 1,000명은 대부분 생포되었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오스만군은 이 전투에서 30,000명을 상실했다고 한다. 반면 몰다비아군의 정확한 피해는 불분명하다. 그 후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 북서부로 후퇴해 또다른 군대를 편성했고, 오스만 제국군은 몰다비아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했지만 슈체아바, 네암츠, 호틴 등 요충지들을 공략하지 못했으며, 몰다비아 분견대들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았다. 그 결과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기아에 직면했고,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중 이슈트반 바토리가 트란실바니아에서 반 오스만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흐메트 2세는 1476년 8월 본국으로 철수했다.
2.2.1.3.3. 이후의 분쟁과 불완전한 화해
메흐메트 2세가 철수한 뒤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한 슈테판 3세는 헝가리군과 함께 블라드 3세를 앞세워 왈라키아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1476년 11월, 25,000명에 달하는 헝가리-몰다비아 연합군이 트르고비슈테로 진군했다. 바사라브 3세는 이에 대항해 18,0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트르고비슈테 인근에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격전 끝에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에 갇혔다. 15일 간의 공방전 끝에 11월 16일 함락을 면치 못하게 되자, 바사라브 3세는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왈라키아로 복귀했다. 이때 블라드 3세는 사망했는데, 오스만 제국군에게 살해되었다는 설,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 한 보야르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1477년 11월, 슈테판 3세가 재차 왈라키아로 쳐들어가서 바사라브 3세를 축출하고 바사라브 4세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이후 슈테판 3세는 교황청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기독교 세력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설득했다. 여기에 킵차크 칸국도 반 오스만 연합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폴란드 왕국이 타타르족이 자국 영토를 통과한느 걸 허용하지 않으면서 좌절되었다. 슈테판 3세는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1479년 1월 22일 폴란드와 새로운 조약을 맺고, 카지미에시 4세가 특별히 요구한다면 콜로메아(현재 우크라이나의 콜로미아)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약속했다.
1479년 1월,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이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해 4월, 헝가리와 폴란드가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슈테판 3세가 옹립했던 바사라브 4세 마저 메흐메트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슈테판 3세는 오스만 제국과 화해를 모색했다. 1480년 5월, 그는 1473년부터 납부를 중단했던 연례 공물을 갱신하고 메흐메트 2세를 주군으로 받들겠다고 제안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평화가 성립되었지만, 슈테판 3세는 평화기를 왈라키아군을 회복해 반격을 가할 준비를 갖추는 데 보냈다.
2.2.1.4. 바예지트 2세와의 대결
1481년 5월 3일, 메흐메트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두 아들 두 아들 바예지트 2세와 젬 술탄이 파디샤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4세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이 끊어지자, 슈테판 3세는 이 때를 틈타 그해 6월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람니쿠 발체아에서 바사라브 4세를 격파했다.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블라드 4세가 슈테판 3세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481년 11월,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블라드 4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1482년 3월 23일 고르지 글로고바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일으킨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슈테판 3세가 블라드 4세를 복위하기 위해 침공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이후 블라드 4세가 재차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지만, 곧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슈테판 3세는 젬 술탄을 물리치고 입지를 굳힌 바예지트 2세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왈라키아와의 국경을 요새화했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동맹을 맺었다. 1483년 10월,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는 바예지트 2세와 5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몰다비아는 헝가리의 봉신국이었기에,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 역시 침공할 수 없었다. 단, 킬리야와 케타테아 알바를 비롯한 부코비나 일대는 휴전 적용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1484년 7월 6일, 바예지트 2세가 파견한 오스만 제국군 20,000명이 킬리야 요새를 포위했다. 그들은 9일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킬리야를 공략하고 그곳의 교회를 모스크로 전환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가신인 크림 칸국의 칸 멜리 1세 기라이도 몰다비아를 침공해 8월 3일에 케타테아 알바를 점령했다. 두 항구가 공략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흑해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슈테판 3세는 새로 동맹을 맺었던 이반 3세가 별다른 지원을 할 움직임이 없고, 마차시 1세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바예지트 2세를 직접 찾아가서 경의를 표했다. 바예지트 2세는 그가 킬리야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몰다비아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걸 인정한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 얼마 후, 마차시 1세는 키세우와 체타테아 데 발타를 포함한 트란실바니아 일부를 슈테판 3세에게 하사했다. 여러 학자들은 슈테판 3세가 두 항구 도시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이 영토를 줬을 거라고 추정한다.
1485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가 오스만 제국이 드니에프르 강과 다뉴브 강 하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것에 위협을 느끼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그는 20,000 병력을 이끌고 콜로메아로 진군했고, 슈테판 3세는 콜로메아로 즉시 달려가서 9월 12일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사흘 후, 카지미에시 4세는 슈테판 3세의 동의 없이 오스만 제국이 킬리야와 체타테아 알바를 점령한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바예지트 2세는 몰다비아에 군대를 파견해 수체아바를 약탈하게 했으며, 페트루 호르노다라는 사칭자를 보이보드로 앉히려 했다.
폴란드로 갔던 슈테판 3세는 조국이 침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온 뒤 11월에 카틀러부가 호수에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 후 1486년 3월에 다시 슈체이아에서 오스만군과 맞서 싸웠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첫 전투에서 낙마해 중상을 입고 시신들 사이에 묻혔고, 사칭자 페트루 호르노다는 그가 전사했다고 선전하면서 몰다비아 보야르들에게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두 보야르가 슈테판 3세를 구출했는데, 푸레체 지역 출신인 한 보야르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 보야르는 훗날 숱한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배출한 모빌라 가문의 시조로 간주된다. 판테체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또 다른 보야르는 페트루에게 귀순한 척하면서, 이미 승리했으니 전장을 떠나 수체아바로 이동하라고 권고했다. 페트루 호르노다는 여기에 속아 그대로 따랐다가, 병력을 재건한 슈테판 3세가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완패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전승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참칭자 페트루 호르노다가 전사했지만 슈테판 3세는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추정한다. 이후 슈테판 3세는 이 이상 전쟁을 치르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오스만 제국과 3년 평화 협약을 맺고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코비나를 탈환하고 싶었던 그는 1486년 후반에 폴란드 세임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단행할 계획을 발표하자 사절을 파견해 십자군 내 몰다비아의 역할을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1489년 3월 21일에 슈테판 3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약으 맺으면서, 킬리야와 체타테아 알바의 손실을 인정했다. 슈테판 3세는 폴란드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기고,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2.2.1.5. 폴란드와의 갈등과 코즈민 숲 전투
1490년 4월 6일, 마차시 1세가 사망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두 아들인 얀 1세 올브라흐트, 울라슬로 2세를 포함한 여러 후보가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슈테판 3세는 트란실바니아 영주들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막시밀리안 편을 들었지만, 대다수 헝가리 영주와 성직자들은 9월 21일에 울라슬로 2세를 새 군주로 받들었다. 그 후 얀 1세 올브라흐트가 형제 울라슬로 2세를 몰아내고 헝가리 왕이 되려하자, 슈테판은 헝가리와 폴란드의 동군연합이 성사되면 자국에 대한 압박이 가중될 것을 우려해 울라슬로 2세를 돕기로 하고, 폴란드로 쳐들어가서 포쿠치아를 점령했다. 포쿠치아의 수입은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데 전용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자기를 지지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키세우와 체타테아 데 발타에 대한 슈테판 3세의 권리를 인정했다.1492년 6월 7일, 카지미에시 4세가 사망하고 셋째 아들 얀 1세 올브라흐트가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1494년, 얀 1세 올브라흐트와 슈테판 3세는 레보차에서 헝가리 국왕 라슬로 2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하난 시세로와 접견한 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원정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부코비나로 진군해 킬리아와 케타테아 알바를 공략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얀 1세 올브라흐트에겐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몰다비아 공국을 정복한 뒤, 영지가 없는 막내 동생 지그문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세우겠다는 숨겨진 목표가 있었다.
1497년, 얀 1세는 40,000 병력을 동원해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하지만 슈테판 3세는 정보원들을 통해 얀 1세의 진짜 목표를 사전에 확인한 뒤, 즉시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오스만 제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 500명을 파견하는 동시에, 또다른 봉신국인 왈라키아 공국과 크림 칸국에게 몰다비아 공국에 원군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두 나라는 총합 10,000명을 몰다비아에 파견했고, 슈테판 3세는 폴란드군의 진군로 주변을 초토화하는 청야 전술을 감행하고 주요 요충지에 수비대를 배치하면서 폴란드군이 몰려오길 기다렸다.
1497년 여름, 호틴에서 몰다비아 공국에 진입한 얀 1세의 폴란드군은 요새를 하나씩 공략하지 않고 몰다비아의 수도인 수체아바로 직공하기로 했다. 여러 신하는 슈테판 3세가 슈테판 3세가 지난날 바슬루이 전투 때 효과적인 청야전술을 단행해 오스만 제국군을 약화시킨 뒤 완승을 거둔 적이 있음을 상기하며 요새를 하나씩 공략하면서 신중히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묵살되었다. 그렇게 얀 1세는 수체아바로 직공했지만, 현지 조달은 청야 전술로 인해 불가능해진 데다 보급 물자를 수송하던 부대가 몰다비아 유격대에게 번번이 공략되면서 원정군의 군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497년 9월 26일 수체아바에 도착한 폴란드군은 10월 16일까지 포위 공격했다. 그들은 대포 200문을 동원해 포격을 가했지만, 슈테판 3세가 공들여 강화한 성벽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식량이 바닥나 버리면서 굶주림이 만연했고, 전염병 마저 창궐했으며,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압박감이 심해졌다. 결국 수체아바를 공략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얀 1세는 슈테판 3세에게 휴전 협상을 요청했다. 슈테판 3세는 폴란드군이 수체아바로 진군할 때와 같은 길로 폴란드로 돌아가야 하며, 그들이 퇴각하면서 자국의 다른 지역을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안전한 통행흘 허락했다.
얀 1세는 공식적으로는 슈테판 3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슈테판 3세의 조건을 따르게 되면 굶주린 폴란드군이 청야 전술로 황폐화된 지역을 통과하면서 그대로 죽어갈 것이라 여기고, 약속을 위배하고 딴 길로 가기로 했다. 그는 부코비나를 거쳐 스니아틴으로 이동하는 익숙하지 않은 길을 택했다. 그러자 슈테판 3세는 저들이 약속을 위반했으니 휴전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하고, 폴란드군이 다시는 자국을 노리지 못하도록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슈테판 3세는 정찰병들을 통해 폴란드군의 진군을 살펴본 끝에, 시레트 계곡과 프루트 계곡을 분리하는 코즈민 숲에 군대를 매복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주력군을 숲속에 매복시킨 뒤, 소규모 경기병대를 파견해 폴란드군을 도발하게 했다. 폴란드군은 그들이 소규모 파견대일 뿐이라고 믿고, 추격하면 적 본대와 마주칠 수 있다고 여겼다. 폴란드 기사들은 중갑으로 완전 무장했고, 야전 경험이 풍부했기에, 무장 수준이 열세한 몰다비아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폴란드군은 기사들을 선봉에 내세워 적군을 추격했다.
슈테판 3세가 지휘하는 몰다비아군은 숲에 숨어서 적군이 숲길을 지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적군이 숲이 우거지고 언덕이 많아서 행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진군하면서 숲길에 깊숙이 진격했을 때, 몰다비아군은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며 나무 여러 그루를 쓰러뜨려서 적의 행군 대열을 여러 조각으로 쪼갠 뒤 사방에서 덮쳤다. 몰다비아군은 창과 칼을 사용해 폴란드 농민군을 학살했으며, 기사들을 말에서 끌어내린 뒤 큰 망치, 곤봉을 마구 쳐서 죽였다. 폴란드군은 이에 맞서 싸우려 애썼지만, 숲길이 워낙 좁고 험준해서 몰다비아군의 매복 공격에 맞서 전투 대열을 짤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결국 폴란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막대한 무기와 군기, 갑옷 등을 내동댕이치고 도주했다. 프루트 강에 겨우 닳은 도망자들은 재편성할 시도도 하지 않고 서둘러 강을 건너 코드리 플로니니에 이른 뒤, 포쿠치아를 거쳐 르비우로 이동했다. 이 전투에서 슈테판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보그단 3세도 참여했는데, 전투 도중에 폴란드 기사의 창에 스치는 바람에 한쪽 눈을 잃었지만, 고함을 힘껏 내지르며 계속 싸워서 몰다비아군의 전의를 끌어올렸다고 전해진다.
코즈민 숲 전투는 폴란드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폴란드군 5,000명이 죽거나 다쳤고, 수레 6,000여 대를 상실했다. 여기에 크라쿠프, 르비우, 산도미르 일대의 군기 3개와 지방 깃발 9개, 상당히 많은 폴란드 귀족 가문의 깃발들이 노획되었다. 몰다비아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몰다비아 원정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뒤, 주변 국가들이 이 기회를 노려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1498년, 오스만 제국 실리스트라 에얄레트의 파샤 발리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몰다비아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루테니아로 쳐들어가서 그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사노크, 프셰보르스크에 입성한 뒤 100,000명에 달하는 주민을 본국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았다. 그 해 여름엔 크림 칸국 소속 타타르인들이 포돌레와 볼린을 공략해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돌아갔다. 그해 가을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삼보르까지 쳐들어가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슈테판 3세 또한 이 시기에 포쿠치아를 몰다비아 공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얀 1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1499년 4월 15일에 슈테판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2.2.2. 내치
2.2.2.1. 정치, 사회적 기반 공고화
슈테판 3세가 재위 기간 동안 내부적으로 추진한 정책은 보이보드 및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 사회 평화를 보장하는 걸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위해 왕실이 토지를 점유하고 특권을 확보해 권력 기반을 다지고, 군사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귀족 계급(소 보야르)를 창설해 군사력 강화를 꾀했다. 또한 옛 보야르 가문과 화해하고 망명자들을 소환했으며, 군사 총독(pârcălabii)의 비중을 높이고 상당한 수의 그의 가족 구성원을 도입함으로써 왕립 의회의 충성심을 보장하고자 했다. 특히 대 보야르 계급에 대한 정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보야르와 자유 농민의 증진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다.자유 농민은 본래 자기들이 소융한 땅을 영주로부터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 복무를 수행할 의무가 없었다. 슈테판 3세는 이제 그들에게 군 복무를 강요하면서, 그 대가로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의무를 독점했던 대 보야르들은 이로 인해 특권적인 지위를 위협받았다. 또한 영주 바로 아래에 지방 행정 지도자인 파르칼라브(pârcălab)를 배치해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때 그는 파르칼라브에 친척 및 믿을 수 있는 보야르만 앉혔으며, 파르칼라브는 국가의 내정을 맡은 총리 격인 보르니치(Vornic)를 제외하고 항상 궁정 관리 앞에 배치되었다. 한편, 슈테판 3세는 해외에서 몰다비아로 이주한 이들을 환대했다. 그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착촌을 최초로 건설했으며, 오스만 노예 무역에서 탈출한 이탈리아인들도 받아들였다.
슈테판 3세는 보이보드 궁정에서 일하는 고위 관리들의 지위를 가능한 한 보장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같은 지위를 유지했고, 이는 국가 행정의 안정을 보장했다. 이 결과, 슈테판 3세는 47년이라는 긴 통치 동안 단 2차례의 보야르 음모에 직면했다. 하나는 1471년 처남인 이사야가 세 보야르와 함께 마차시 1세와 손잡고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고, 또 하나는 1504년 슈테판 3세가 죽기 이틀 전에 그의 아들 보그단 3세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음모자들이 대거 처형된 것이었다.
2.2.2.2. 경제
슈테판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몰다비아의 교통 인프라는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다. 이는 교통을 편하게 했다간 오스만 제국 등 외부 침략자들이 이를 활용해 몰다비아를 철저하게 짓밟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강을 건널 때는 일반적으로 여울목이 이용되었고, 너무 깊을 경우에는 도개교가 이용되었다. 고정된 다리는 큰 강 위에는 나무로, 개울 위에는 돌로 세워졌다.몰다비아의 주요 수입원은 다뉴브 강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독점하면서 벌어들인 수익과 상품에 매긴 관세였다. 보이보드는 소금과 은의 채굴과 거래를 독점했고, 생선, 밀랍, 모피 거래도 독점했다. 세관은 주요 무역로에 위치했으며, 관세제도에는 국경에 위치한 외부세관과 국내세관이 포함되었다. 수입 관세는 수체아바에서만 납부되었고, 수출 관세는 체르니브치(폴란드 왕국), 킬리야(오스만 제국), 체타테아 알바(크림 칸국), 아주드(헝가리 왕국), 푸트나(왈라키아 공국) 등 외부 세관에서 납부되었다. 다만 1480년대에는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가 각각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에 넘어갔다. 또한 라푸스나, 로만, 바카우, 바슬루이, 발라드 및 테쿠치에는 운송세를 납부하는 내부 세관이 있었다.
슈테판 3세는 그로스 몰다비다(gros moldovenesc)라는 자체 동전을 발행한 몇 안 되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중 한 명이었다. 동전은 직경 13mm의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국가의 문장이 찍혀 있고 앞면에는 MONETAMOLDAVIE , 뒷면에는 STEFANVSVOIEVODA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러나 화폐 공급량은 적었고, 동전 주조는 주로 정치적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 주로 보야르나 용병에게 군사 서비스에 대한 지불을 할 때 쓰였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될 때는 별로 없었다. 무역에 쓰이는 화폐는 이웃의 강력한 국가들이 발행한 동전이 주로 쓰였다.
2.2.2.3. 군사 정책
슈테판 3세는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에 따라 전략적 방어와 전략적 공격 전략을 모두 사용했다. 전략적 방어는 일반적으로 국경 방어, 괴롭힘, 결정적인 전투 및 추격을 주요 단계로 삼았다. 전략적 공격은 병력을 은밀하게 동원해 집중 공격하여 적을 물리친 뒤 추격하는 전술을 활용했다. 전략적 방어는 몰다비아를 침공한 외국군과의 전투에 활용되었고, 전략적 공격은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들을 축출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보이보드를 새로 선임하기 위해 군사 활동을 벌일 때 활용되었다.몰다비아군은 무력 충돌이 있을 경우에만 동원되는 비영구군이었다. 군대는 '소군'과 '대군'으로 구성되었다. 슈테판 3세의 군사적 행동 대부분은 보야르와 궁중 부대로 구성된 '소군'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그 수는 수천 명이었다. 파르칼리브는 평상시엔 자기가 맡은 영지를 관리했다가, 소집령이 떨어지면 보이보드가 정한 집합 장소로 사병들을 이끌고 갔다. '대군'은 몰다비아의 주권이 위협받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동원되었다. 대군에는 '소군' 외에도 농민, 마을 주민들, 귀족 및 수도원에 속한 토지 없는 농민들, 경비병 및 기병이 포함되었다. 슈테판 3세는 1475~1476년 메흐메트 2세와 대규모 전쟁을 치를 때만 대군을 동원했다.
슈테판 3세의 군대는 15세기 후반 유럽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주요 무기를 사용했다. 방어 무기는 방패, 사슬 갑옷, 판금 갑옷 등으로 구성되었고, 군대에 소집된 농민들은 두꺼운 솔기나 보호용 가죽 껍질 이 달린 3-5cm 두께의 누비 린넨 옷을 입었다. 공격 무기는 근접 무기와 총기로 구성되었다. 근접 무기는 검, 단검, 창, 도끼, 미늘창, 쟁기, 곤봉, 활, 석궁 등으로 구성되었다. 총기류는 산탄총, 화승총, 화포 등으로 구성되었다. 바슬루이 전투에 동원된 몰다비아 화포 20문은 각각 포탄 7발을 발사했다고 전해진다. 근접 무기는 대군조차 적절하게 무장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대부분 국내에서 제조되었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는 슈테판 3세가 화살, 활, 칼 없이 군대에 입대하지 않은 자들을 가차없이 참수형에 처했다고 밝혔다. 총기류는 해외에서 수입되었다.
슈테판 3세는 국가 방어 전략의 핵심 요소로서 영구 요새 시스템 구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국경 방어(특히 드네스트르강 여울목), 내부 교차점, 수도인 수체아바 방어를 위한 요새 체계를 설계했다. 그는 수체아바, 네암툴루이, 호티눌루이, 로마누 등 기존의 요새들의 방어력을 대폭 강화하고, 킬리아와 로만, 오르헤이, 소로카 등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그가 세운 요새의 방어 수준은 매우 강력해, 1476년 메흐메트 2세가 네암츠, 수체아바, 호틴 요새를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했고, 1497년 폴란드 국왕 얀 1세 올브라흐트가 수체아바 요새를 공격했으나 격퇴될 정도였다.
베네치아 의사 마테오 무리아노는 1502년 슈테판 3세의 주치의로 일하던 중에 슈테판 3세가 자기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기록했다.
"나는 이 나라의 보이보드가 된 이래로 36번 싸워서 34번 이겼고 2번 패했다."
2.2.2.4. 문화 진흥
슈테판 3세는 1487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12개가 넘는 석조 교회를 세웠고, 가장 부유한 보야르들이 그를 본받아 몰다비아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슈테판 3세는 수도원 공동체의 발전도 지원했다. 보로네츠 수도원은 1488년에 지어졌고 타즐라우 수도원은 1496년에서 1497년 사이에 지어졌다. 그의 시대에 세워진 교회들은 네오비잔틴과 고딕의 구성 요소를 빌려 지역 전통의 요소와 섞은 방식으로 세워졌다. 특히 별 모양을 형성하는 바닥이 있는 벽과 탑은 슈테판 3세 시대에 세워진 교회에 가장 특징적인 요소였다. 보이보드는 여기에 더해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에 교회를 짓는 데 자금을 지원하여 몰다비아 건축이 공국의 경계를 넘어 퍼지는 데 기여했다. 푸트나 수도원의 무덤은 슈테판 3세 가족의 왕실 묘지로 지어졌다. 슈테판의 묘지는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되었는데, 이는 다음 세기 동안 몰다비아 미술의 특징적인 장식 요소가 되었다.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의 역사학과 교회 슬라브 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몰다비아 공국 연대기 수집을 지시했으며, 그의 치세에 3개의 슬라브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또한 비잔틴 문학 의 관습을 없애고 새로운 스토리텔링 정경을 도입했다. 이러한 역사 기록의 일부는 슈테판 3세 본인이 수정하고 구술하기도 했다. 가장 오래된 몰다비아 연대기로 알려진 비스트리차 연대기는 1359년에서 1506년까지의 몰다비아 역사를 서술했고, 푸트나 연대기는 푸트나 수도원의 역사를 기록하는 동시에 1359년부터 1526년까지 몰다비아의 여사를 다뤘다. 이 연대기들은 슈테판 3세의 초상화와 그의 신하들의 초상화를 미니어처로 화려하게 담기도 했다.
2.3. 말년
1498년경부터 슈테판 3세의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보그단 3세가 아버지의 권력을 상당 부분 물려받고 루카 아르모레와 이오안 타우투를 포함한 보야르 및 행정가 집단들의 보좌를 받았다. 보그단 3세는 폴란드와의 평화 협약에 관한 협상을 비준했다. 1501년 2월, 슈테판 3세의 대표단이 베네치아에 찾아와서 그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으니 전문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베네치아 도제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는 당대 탁월한 의사인 마테오 무리아노를 몰다비아로 파견했다.1500년, 슈테판 3세는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걸 중단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오스만 제국 변경을 침공했지만, 킬리야나 케타테아 알바를 탈환하지 못했다. 1502년 킵차크 칸국의 타타르족이 남부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 3세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이들을 물리쳤다. 또한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헝가리에 지원군을 보냈다. 1503년 2월 22일,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도 포함된 새로운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슈테판 3세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 매년 조공을 바쳤다.
1503년 말, 마테오 무리아노가 사망했다. 이에 또 다른 몰도바 대표단이 베네치아로 파견되어 새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을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504년 6월 말, 슈테판 3세가 임종을 눈앞에 두던 그 때 보그단 3세에 반대하는 여러 보야르가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조리 처형되었다. 1504년 7월 2일, 슈테판 3세는 숨을 거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임종 직전에 보그단 3세에게 파디샤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푸트나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장남 보그단 3세가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3. 가족
- 키예프의 에브도키아(? ~ 1467): 키예프 공자 올레코의 딸이자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드미트리예비치 돈스코이의 외손녀.
- 보그단(1466 ~ 1479): 요절.
- 페트루(1467 ~ 1479): 요절.
- 엘레나(1464 ~ 1505):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의 아들인 이반 이바노비치 몰로도이와 결혼해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테포툴을 낳았다. 1490년 남편이 사망한 후 그녀의 아들은 1498년부터 1502년까지 이반 3세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이반 3세의 두번째 아내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는 자기 아들 바실리야말로 이반 3세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엘레나와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1502년 4월 11일, 이반 3세는 엘레나가 이교인 유대교를 신봉한다는 모함에 넘어가 엘레나와 아들 드미트리를 감옥에 가뒀고, 바실리에게 전 러시아의 데스포티스 칭호를 내렸다. 이후 엘레나는 1505년에 살해되었고, 드미트리는 1509년 옥사했다.
- 망고프의 마리아(? ~ 1477): 크림 반도 남부 테오도로 공국의 통치자 올루베이의 딸.
- 일리아슈(1473): 요절.
- 보그단(1473 ~ 1479): 요절.
- 마리아 보이치차(1457 ~ 1511):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3세의 딸.
- 보그단 3세(1479 ~ 1517): 몰다비아 공국 제20대 보이보드.
- 마리아 크네아즈나(? ~ 1518): 폴란드 귀족 표도르 비시니오비에츠키의 부인.
- 사생아
- 페트루 5세 라레슈(1483 ~ 1546): 몰다비아 공국 제22대 보이보드.
- 슈테판 5세(1496 ~ 1540): 볼다비아 공국 제23대 보이보드.
4. 후대의 평가
슈테판 3세는 숨을 거둔 직후부터 몰다비아 국민들로부터 '위대한 자(cel Mare)'라는 칭호로 불렸고,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군주 지그문트 1세는 1534년에 그를 "대왕 스테판"이라고 불렀으며, 바르미아 주교이자 폴란드 역사가 마르친 크로머(1512 ~ 1589)는 그를 "몰다비아의 위대한 영주"라고 밝혔다. 또다른 폴란드 역사가 마치에이 스트리코프스키(1574 ~ 1593)는 왈라키아인과 몰다비아인은 모두 슈테판을 기리는 발라드를 불렀고, 그의 초상화는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인 부쿠레슈티 궁정에 전시되었다고 밝혔다. 슈테판 3세는 생전에 왈라키아를 자주 침략했지만, 그가 사망한 뒤 수십년 후의 알라키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존경했다. 또한 루마니아 구전에서는 슈테판을 "황제" 또는 "몰다비아의 왕"이라고 일컬었으며, 슈테판이 귀족과 외국 침략자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고, 자유 농민들이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토지를 하사했다고 주장했다.19세기,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통합을 추구한 루마니아 민족주의에 맞서는 몰다비아 분리주의에서 숭배 대상으로 떠올랐다. 몰다비아 지역주의자 게오르게 아사치는 슈테판을 다룬 역사 소설을 발간해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며, 테오도르 발슈와 함께 왈라키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슈테판 대왕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성립 후 몰다비아의 독립을 주장한 니콜라에 이스트라티는 스티븐 숭배에 기여한 여러 연극 작품을 발표했다. 분리주의를 배척한 다른 몰다비아인들도 슈테판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알레쿠 루소는 슈테판 3세를 루마니아 역사에 대한 진실의 근원이라 믿고, 그에 관한 민속 전승을 수집하고 재출판했다. 러시아 제국이 몰다비아에서 강제로 분할한 베사라비아 주에서 러시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지식인 계층은 슈테판 3세를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다.
왈라키아에서도 슈테판 3세를 애국적 미덕으로 내세웠다. 왈라키아 출신 루마니아 학자 니콜라에 발체스쿠는 슈테판을 루마니아의 국가 영웅으로 묘사한 최초의 역사가였다. 그는 슈테판 3세의 통치가 루마니아인이 거주하는 땅의 통일을 향한 중요한 단계라고 주장했다. 루마니아 왕국이 건설된 후, 슈테판 3세는 블라드 3세, 미하이 2세와 함께 민족 영웅으로 확립되었다. 1883년 이아시에서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1904년 바르세슈티에 슈테판 3세의 사망 400주년을 기념하는 석조 기념물을 세웠다.
1947년 12월 30일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된 후에는 농민을 억압하고 보야르를 탄압한 압제자로 격하되었지만, 1980년대부터는 루마니아의 민족 영웅으로 재평가되었고,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루마니아 각지에 세워졌다. 오늘날 루마니아의 여러 학교와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마을과 도시의 주요 도로 역시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부쿠레슈티 중심부에는 슈테판 대왕 지하철 역이 있다. 또한 몰도바의 통화 몰도바 레우의 지폐의 전권종 앞면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으며, 루마니아의 국가, 루마니아인이여, 깨어나라!에도 등장한다.
5. 성인이 되다
슈테판 3세에 대한 숭배는 1570년대에 처음 등장했고, 푸트나 수도원장 아르티몬 보트니치는 1851년 그의 무덤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1587년 사제이자 언론인인 이라클리에 포룸베스쿠는 슈테판 3세의 무덤을 취재한 뒤 "푸트나의 거룩한 뼈"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으면서, 슈테판 3세가 성인으로 시성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정교회가 1950년대에 최초의 루마니아 성인을 시성했을 때, 슈테판 3세는 무시되었다. 하지만 공산 정권 붕괴 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한 슈테판 3세를 시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강력하게 제기되었고, 결국 1992년 6월 21일, 루마니아 총대주교 테오크리스트는 부쿠레슈티의 성 스피리돈 신성당에서 슈테판 3세와 다른 12명의 성인을 시성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슈테판 3세가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백성의 보호자였으며,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교회를 건설했다고 밝혔다. 슈테판 3세의 축일은 그가 사망한 날짜인 7월 2일이다.6. 대중문화
6.1. 영화
- 슈테판 첼 마레(STEFAN CEL MARE, 1975): 감독은 Mircea Dragan. #
6.2. 만화
- 소녀전쟁 외전 || 불을 잇는 자들 - 블라드 3세와 함께 후녀디를 찾아간다.
[1]
당대 사료에는 40,000 명에 달했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25,000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2]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아흐메트 칸은 아들의 몸값을 쉽게 지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슈테판 3세에게 사절 100명을 보내면서, 만약 슈테판이 아들에게 자유를 돌려주지 않거나 그를 털 끝이라도 건드리면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분노해 아흐메트 칸의 위협을 묵살하고, 사절들 앞에서 칸의 아들을 네 조각으로 자르고 코가 잘린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절을 꼬챙이에 꿰뚫었다. 그 후 코가 잘린 사절을 킵차크 칸국으로 보내 아흐메트 3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리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