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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슈테판 3세 | 카롤 1세 | 미하이 에미네스쿠 | 미하이 2세 | 리하르트 부름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이온 안토네스쿠 | 미르체아 엘리아데 |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 | 콘스탄틴 브랑쿠시 | 나디아 코마네치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 블라드 3세 | 조지 비칼리 | 헨리 코안더 | 게오르게 하지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 니콜라에 이오르가 |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 제오르제 에네스쿠 |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미렐 러도이 |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 페르디난드 1세 | 미하이 1세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데케발루스 | 트라이안 버세스쿠 | 게오르그 뮤레산 | 이온 I. C. 브라티아누 | 러즈반 루체스쿠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 이울리우 마니우 | 이울리우 호수 | 에밀 시오랑 | 아브람 이안쿠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부레비스타 |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 페트레 투테아 | 코르넬리우 코포수 | 아우렐 블라이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이오시프 트리파 | 니키타 스터네스쿠 | 이온 크레안거 | 마델리나 마놀 |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트라이안 부이아 | 루치안 블라가 | 조지 에밀 퍼레이드 | 아나 아슬란 | 아드리안 무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플로린 피에르시크 | 미하일 코갈리차누 | 야노스 코뢰시 |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 일리에 너스타세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게오르그 잠피르 | 기카 페트레스쿠 | 엘리사베타 리제아 | 불라 | 암자 펠라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차시 1세 | 미르체아 1세 | 티투 마이오레스쿠 | 토마 카라지우 | 미하이 트라이스타리우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안드레아 마린 | 에밀 라코비차 | 빅터 바베슈 | 니콜라에 발체스쿠 | 호리아로만 파타피에비치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이온 일리에스쿠 | 마린 프레다 | 외젠 이오네스코 | 두미트루 스타닐로아 | 알렉산드루 토데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투도르 게오르게 | 이온 티리아크 | 일리에 클레오파 | 아르세니 보카 | 바넬 니콜리타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 그리고레 모이실 |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 플로렌틴 페트레 | 마리우스 모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니콜라에 스타인하트 | 로라 스토이카 | 커털린 흘단 | 안겔 살리그니 | 이반 피차이진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마리아 터나세 |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 옥타비안 팔러 | 무명용사 |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니쿠 코바시 |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 후녀디 야노시 | 콘스탄틴 노이카 | 바데아 카르탕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131230><colcolor=#fff> 나디아 코마네치 Nadia Comanec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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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나디아 엘레나 코머네치[1] Nadia Elena Comăneci ( 루마니아어) |
출생 | 1961년 11월 12일 ([age(1961-11-12)]세) |
루마니아 인민공화국 오네슈티 | |
국적 |
[[루마니아|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2] |
신체 | 163cm |
종목 | 기계체조 |
주종목 | 이단평행봉 |
은퇴 | 1984년 5월 7일[3] |
링크 |
[clearfix]
1. 개요
루마니아계 미국인이며, 前 기계체조 선수이다. 2번의 올림픽에 출전하여 전설적인 기록을 세웠다.2. 선수 경력
2.1. 1976 몬트리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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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표지 그녀는 완벽하다(SHE'S PERFECT)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
이 당시의 전광판이 최대 9.99, 즉 한 자릿수까지 밖에 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1.00으로 일부러 표기한 것이었다. 당시 체조 종목은 누구도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없다고 여겨져 9.99점을 만점으로 생각하고 전광판을 제작했기 때문에 두 자릿수 표기가 불가능했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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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아디다스의 Impossible is nothing으로 기억하는 이 광고는 실제 올림픽에서의 경기가 아니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가 연기한 평행봉 체조에, 광고가 방영 중이었던 2005년 당시 미국의 최고 유망주였던 나스티아 리우킨(Anastasia Valeryevna Nasta Liukin)[8]의 경기를 합성한 영상이다.
2.2. 1980 모스크바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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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운했던 삶과 행복한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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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녀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를 끌어내기 위한 구국전선의 행진이 한창이던 1989년에 루마니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여권도 비자도 없었지만,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이름 하나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목적지인 미국까지 일사천리로 망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설"과는 다른 싸구려 옷차림과 서투른 영어에다가, 살이 쪄서 후덕해진 얼굴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은 급속히 식어버렸다.[12] 그렇게 미국으로 망명 온 후 처음에는 엄청난 환영을 받았지만, 체조 요정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곧 퇴물 취급했고, 명성에 걸맞지 않는 싸구려 행사에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13]
그리고 코마네치가 미국에 오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세기의 연인이었던 체조 요정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망명을 도운 망명 브로커[14] '콘스탄틴 패니'라는 유부남과의 불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마네치는 세간에 도는 불륜설을 극구 부인하며 패니는 그저 매니저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패니의 부인이 남편이 집안을 돌보지 않고 코마네치하고만 돌아다닌다며 울며불며 인터뷰를 하는 등 여론은 코마네치의 망명을 불륜에 의한 애정 행각으로 몰고 갔다.[15]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국가에서 훈련만 받으며 자라왔던 코마네치가 콘스탄틴 패니에게 일종의 가스라이팅과 함께 말을 안들으면 감금, 폭행을 당했고, 번 돈의 대부분도 뺐겼다고 한다. 패니와의 불륜설도 코마네치에 대한 관심이 식을 조짐을 보이자 이슈를 만들 목적으로 부인과 둘이 짜고 한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콘스탄틴 패니의 이런 부부 공동 사기극은 미국으로 먼저 망명했던 벨라 카롤리에 의해 발각됐다. 어려서부터 코마네치를 봐온 벨라 카롤리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고, 패니가 코마네치와의 연락조차 차단하자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해 코마네치와 계약할 건이 있다고 접근하게 했고, 패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코마네치는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사기 행각이 들통나자 패니는 부인과 함께 그 동안의 코마네치 수입까지 챙겨 도망갔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30대를 보내고서 방황하던 코마네치는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와서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지금의 배우자이자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평행봉 금메달리스트 '바트 코너'를 만나게 되었다. 체조에 관한 모든 것과는 연을 끊고 살겠다고 다짐하던 코마네치에게 코너가 말하길, 스포츠에는 명예와 영광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고 설득했고, 코마네치는 이 말을 듣고 예전의 경험을 살려 체조 지도자로 재기했고, 두 사람이 함께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사업 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마침내 1996년에 루마니아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16] 여담으로 두 사람은 1976년 3월 28일 아메리칸컵 대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 대회에서 코마네치가 우승, 바트 코너도 우승했는데, 수상하러 단상에 올라서자 뉴욕 타임스 기자의 요청에 의해 바트 코너가 코마네치 볼에 키스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기부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2006년 무려 45살에 첫 아들을 출산했다. 현재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고, 스페셜 올림픽 부위원장, 국제 체조 스포츠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루마니아도 자주 방문한다고 한다. 영어 역시 악센트가 좀 있긴 해도 현재는 유창하다.
3. 수상 기록
<colcolor=#000> 올림픽 | ||
금메달 | 1976 몬트리올 | 개인종합 |
금메달 | 1976 몬트리올 | 이단평행봉 |
금메달 | 1976 몬트리올 | 평균대 |
금메달 | 1980 모스크바 | 마루 |
금메달 | 1980 모스크바 | 평균대 |
은메달 | 1976 몬트리올 | 단체전 |
은메달 | 1980 모스크바 | 단체전 |
은메달 | 1980 모스크바 | 개인종합 |
동메달 | 1976 몬트리올 | 마루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78 스트라스부르 | 평균대 |
금메달 | 1979 포트워스 | 단체전 |
은메달 | 1978 스트라스부르 | 단체전 |
은메달 | 1978 스트라스부르 | 도마 |
유럽선수권 | ||
금메달 | 1975 시엔 | 개인종합 |
금메달 | 1975 시엔 | 도마 |
금메달 | 1975 시엔 | 이단평행봉 |
금메달 | 1975 시엔 | 평균대 |
금메달 | 1977 프라하 | 개인종합 |
금메달 | 1977 프라하 | 이단평행봉 |
금메달 | 1979 코펜하겐 | 개인종합 |
금메달 | 1979 코펜하겐 | 도마 |
금메달 | 1979 코펜하겐 | 마루 |
은메달 | 1975 시엔 | 마루 |
은메달 | 1977 프라하 | 도마 |
동메달 | 1979 코펜하겐 | 평균대 |
유니버시아드 | ||
금메달 | 1981 부쿠레슈티 | 단체전 |
금메달 | 1981 부쿠레슈티 | 개인종합 |
금메달 | 1981 부쿠레슈티 | 도마 |
금메달 | 1981 부쿠레슈티 | 마루 |
금메달 | 1981 부쿠레슈티 | 이단평행봉 |
4. 여담
- 1984년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미국과 유고슬라비아 합작인 TV 영화 '나디아(Nadia)'가 미국에서 방영하였다. 유고 국영방송이 미국 스탭진들을 초청해서 만들 영화인데 루마니아에서 가장 먼저 TV 방영했고 첫 방영 후 루마니아 국민들이 방송국에 끊임없이 전화를 해댔고 결국 2번에 걸쳐 더 방영해야 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1988년 7월 30일에서야 서울올림픽을 얼마 안두고 갑자기 극장 영화로 개봉하더니만 겨우 2달도 안돼 1988년 9월 24일 토요명화로 <체조의 요정 코마네치>라는 제목으로 더빙되어 방영된 뒤로 더 방영된 적이 있으나 지금 더빙판을 구하기는 매우 힘들다. 영화 자체는 DVD까지 나와 구하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영화 내용에 왜곡이 많다며 나디아 본인이나 루마니아에서 엄청 분노했다. 나디아는 그야말로 나에 대하여 멋대로 소설을 쓰고 조작한 엉터리 영화라면서 이걸 보고 무척 스트레스를 받아서 운동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한다.[17] 그녀가 쓴 자서전인 '미래의 금메달리스트에게(한국 제목)'도 있으니 읽어보는 것도 추천
- 당시 공산권 국가였던 루마니아 선수인데도 철저한 반공 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전설의 10점 경기 이후 전국의 문구점에는 코마네치의 사진이 담긴 책받침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 6살 때부터 체조를 시작했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훈련을 했다. 여기저기 약간씩 통증이 있고, 발목을 삔 적도 있으나 큰 부상을 당한 적은 없을 만큼 자기 몸 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하며, 1984년 은퇴 후에도 매일 30분씩 역기 들기와 달리기 등 운동을 한다고 한다.
- 하하에 의해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상꼬마네티로 패러디가 되기도 했다.
- 현역 당시 체형 변화가 아주 빨리 이뤄졌었는데,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만 해도 14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152~3cm의 작은 체구였으나 올림픽이 끝나고 1977년 후반부터 매년 3cm 이상씩 크더니 성인이 되고 출전한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162cm에 이르러 4년 만에 10cm 가까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80년 올림픽에도 금메달 2개를 따냈다.
-
일본 예능 전국 공통의 필살기이자
비트 타케시의 상징인 코마네치!는 이 코마네치가 맞다. 1980년대 기타노 타케시가 코마네치를 보고 방송에서 그 어린 체조선수의
여성미를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코마네치가 입은 레오타드형 체조복의
하이레그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손을 양쪽 사타구니에 대면서 코마네치!라고 한게 꽂혀서 계속 써먹다보니 거의
이주일 선생의 "콩나물 팍팍 무쳤냐?"급의 유행어가 되었다.
초난강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때 일본식 개그를 보여주겠다며 따라 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강호동 등 한국 연예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참고로 코마네치에게 로열티로 200만엔을 줬다고 한다. 크레용 신짱 극장판인
액션가면 대 그래그래 마왕에서도 이 동작이 등장한다.
아기와 나의 발렌타인 에피소드에도 이 동작이 등장한다.
- 루마니아와 미국 국적 모두 가지고 있는 이중국적자다. 한국에는 1990년, 2004년, 2008년, 2010년 총 4번 내한했다.
- 아놀드 슈워제네거와는 절친인데, 절친이 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1991년 한 호텔에서 남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안에 아놀드가 있었고, 셋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갇혀버렸다. 이에 당황한 그녀가 슈워제네거에게 "당신은 터미네이터잖아요? 어떻게 좀 해줘요!"라고 외치자 슈워제네거가 양손으로 직접 고장 난 엘리베이터 문을 벌려 열어버렸다. 이에 프론트 직원들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아놀드가 문을 여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18]
[1]
관용적으로 '코마네치'라는 표기가 사용되나,
루마니아어 발음은 '[ˈnadi.a koməˈnetʃʲ\](나디아 코머네치)'에 가깝다. 미국식 영어로는 '[ˈkoʊməniːtʃ\](코머니치)'로 발음한다.
[2]
1989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2001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복수국적자가 되었다.
[3]
1981년에 열린 부쿠레시티 유니버시아드를 마지막으로 대회 출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1981년에 은퇴했다고 봐도 무방하나, 공식적인 은퇴 선언은
1984년에 했다.
[4]
체조 경기는 국제 대회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을 선보이면
본인의 이름이 그 기술명이 된다.
여홍철의 '여1' '여2',
양학선의 '양1'도 마찬가지다.
[5]
이게 워낙 상징적인 이미지로 남아서 코마네치가 연기를 마치고 몇 분 후 도마에서 신기술로 10점 만점을 받은 넬리 킴을 기억하는 사람은 체조 팬이 아닌 이상 거의 없다. 이 올림픽에서 넬리 킴은 단체전, 마루, 그리고 도마에서의 금메달과 개인종합 은메달을 땄다. 참고로 코마네치가 최초 만점으로 유명해 지기 전, 그러니까 올림픽 시작 전까지만 해도 넬리 킴과 코마네치는 라이벌로 대등하게 경쟁하는 수준이었는데 이 만점 이후로 인지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 되어서 코마네치가 은퇴할 때까지 넬리 킴이 고까워한 티가 인터뷰에서 많이 난다. 팬들끼리도 누가 더 잘한다고 서로 싸웠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둘 다 체조계의 레전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6]
이후 12년이 흐른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리듬체조 우승자인
마리나 로바치는 모든 경기에서 만점을 받았는데 이 말을 다르게 얘기하면 코마네치의 10점 만점 이후 기계체조에서 만점을 한 번이라도 놓치면 금메달은 물 건너가게 되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점수 체계가 바뀌어 10점 만점 제도가 폐지되고 난도 점수와 실시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점수의 상한선이 없어졌다.
[7]
올림픽 경기 당시에 경기를 할 때 무표정으로 일관해서 '작은 바윗덩어리', '냉정한 작은 벼룩'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대해 코마네치가 2010년 내한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하길, 공산주의 시절 루마니아의 사회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어린 시절부터 경기장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경기에 임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풍조가 고도의 집중력과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한 체조 훈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8]
러시아계 미국인이다. 아버지 발레리 리우킨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총 4개(금 2, 은 2)의 올림픽 메달을 따낸 선수였고, 어머니 안나 코체네바는 전직 리듬체조 선수 출신으로 1987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였다. 리우킨은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인종합 금메달리스트이자 이단평행봉, 평균대, 단체전 은메달리스트이다. 다만 이후로 기량이 부진했다.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는 2005, 2007 세계선수권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땄고, 2005 세계선수권 이단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땄다.
[9]
이때 코마네치는 개인종합에서 소련 선수인 옐레나 다비도바에 이어 은메달을 땄는데, 코마네치가 금메달을 땄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10]
그렇지만 유독 모스크바 올림픽 때에는 실수가 많이 나왔다. 도마 결승에서는 2차 시기에 넘어지는 실수를 해서 최종 5위, 이어 주 종목이었던 이단 평행봉(Team Optionals)에서는 자세를 바꾸는 동작을 하다 중간에 봉을 놓치고 떨어지는 큰 실수를 하면서 종목 결승에 진출하지 못하며 메달을 놓쳤다.
[11]
벨라 카롤리는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국가대표팀 코치, 총감독 등을 맡으며 오늘날 미국이 여자 기계체조 강국으로 올라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2]
망명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였지만, 명성에 어울리진 않는 옷차림과 장신구에 후덕해진 얼굴 때문인지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안타까운 미녀.
[13]
이때 찍었던 속옷 광고 사진은 지금도 회자된다.
[14]
딱히 한 일이라고는 루마니아 인접 국가인 헝가리 국경 검문소로 가는 길만 안내해 줬을 뿐인 브로커에게 당시 돈으로 5천 달러를 지불했다.
[15]
이 때문에 1990년대 초반 국내 신문에 보도된 코마네치에 대한 기사는 부정적인 기사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아직도 불륜설을 사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16]
루마니아 정부에서는 코마네치가 결혼하던 날을 공휴일로 선포했고, 그야말로 국가적인 행사였다.
[17]
영화에서는 1976년 대회 이후의 부진 때문에 그녀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특히 자신이 몸무게가 불어 방황하는 장면에서는 극노했다고 한다. 코마네치의 자서전에는 이를 해명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8]
1991년이면 그 불후의 명작
터미네이터 2가 한창 흥행을 하던 시기다. 당연히 현실에서 터미네이터가 문짝을 찢듯이 나오면 누구든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