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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 지그문트 1세 스타리 Zygmunt I Stary |
|
|
|
별칭 | 원로왕 (Stary) |
출생 |
1467년
1월 1일 폴란드 왕국 코지에니체 |
사망 |
1548년
4월 1일 (향년 81세)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
재위 | 폴란드 왕국의 왕 |
1507년 1월 24일 ~ 1548년 4월 1일 | |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 |
1506년 10월 20일 ~ 1548년 4월 1일 | |
배우자 | 서포여이 바르바라 (1512년 결혼 / 1515년 사망) |
보나 스포르차 (1517년 결혼) | |
자녀 | 야드비가, 안나, 이자벨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조피아, 안나, 카타지나[1], 올브라흐트 |
아버지 | 카지미에시 4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
형제 | 울라슬로 2세, 야드비가, 카지미에시,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조피아, 엘즈비에타, 프리데리크, 엘즈비에타, 안나, 바르바라, 엘즈비에타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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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어: Zygmunt I Stary리투아니아어: Žygimantas Senasis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6대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국 21대 대공. 외국과의 전쟁과 국내 문제를 유능한 신하들과 함께 능수능란하게 대처하고 갈수록 약화되던 왕권을 어느 정도 강화한 명군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467년 1월 1일 폴란드 왕국 코지에니체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와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외증조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의 이름을 따서 세례를 받았다. 1492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막내였던 그는 어떠한 영지도 받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폴란드 국왕이자 셋째 형인 얀 1세 올브라흐트와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넷째 형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에게 영지를 제공해달라고 청원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 역시 그를 안쓰럽게 여겨 오스트리아 공작으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1497년, 얀 1세 올브라흐트는 폴란드의 봉신이었다가 오스만 제국에 귀순한 몰다비아 공국을 응징하고 지그문트를 몰다비아 공작으로 삼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원정군은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의 반격으로 수체아바 인근 코즈민 숲 전투에서 참패했다. 몇년 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맏형이 그를 그워구프와 오파바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비로소 영주가 될 수 있었다. 1504년에는 슬레스코와 저지 루지체[2]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1501년 얀 1세가 미혼인 채로 사망한 뒤, 알렉산데르가 폴란드 왕위를 겸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역시 자녀를 낳지 못한 채 1506년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지그문트는 알렉산데르가 사망한 빌뉴스로 간 뒤 1506년 9월 13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을 받고 10월 20일 리투아니아 대공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해 12월 8일 피오트르쿠프에서 열린 세임에서도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1507년 1월 20일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 도착한 뒤 1507년 1월 24일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대주교 안제이 보리셰프스키의 주관하에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다.
2.2. 외치
2.2.1.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
지그문트 1세는 리투아니아 대공 겸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직후인 1507년 2월, 리투아니아 의회를 설득해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인은 영토 1/3을 빼앗고 약탈을 자행한 모스크바 대공국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기꺼이 선전포고를 했다. 지그문트 1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에 1494년 이후 빼앗아간 모든 리투아니아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이것이 거부당하자 곧바로 전쟁을 단행했다. 리투아니아군은 알베르타스 고슈타우타스(Albertas Goštautas 1480~1539)가 지휘하는 스몰렌스크 방면 군대, 스타니슬라우 흘랴보비치(Станіслаў Глябовіч 1449~1513)가 지휘하는 폴라츠크 방면 군대, 리투아니아 대 헤트만 스타니슬로바스 키슈카(Stanislovas Kiška ?~1513)가 지휘하는 민스크 방면 군대로 나뉘었다.1507년 4월 모스크바군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침공했지만, 지그문트 1세가 폴란드군을 이끌고 베레지나 강을 건너 반격해오자 철수했다. 그 해 8월, 스타니스와프 카슈카가 드루크 인근으로 진군했고,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은 멩글리 1세 가라이 칸 휘하의 크림 칸국 군대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그 해 10월,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멩글리 1세를 물리친 뒤 리투아니아의 므스티슬라프와 크시세프 요새를 공격했지만, 스타니슬로바스 키슈카의 리투아니아군이 위협을 가하자 철수했다. 그러는 사이, 지난날 생포된 뒤 모스크바로 끌려갔던 리투아니아의 전임 대 헤트만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Konstanty Ostrogski 1460~1530)가 탈출해 리투아니아군에 복귀했다.
1508년 초, 리투아니아 왕실 원수이며 1506년에 쳐들어온 타타르족을 클레크 전투에서 크게 격파했던 미콜라스 글린스키스(Mykolas Glinskis 1460~1534)는 트라카이 총독 요나스 자베레진스키스(Jonas Zaberezinskis 1437~1508)로부터 알렉산데르 사후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탈취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글린스키스는 지그문트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지그문트 1세는 모스크바와의 전쟁이 급하다는 이유로 그가 억울한 지 여부를 가릴 재판을 연기했고, 왕실 원수 직임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글린스키스는 1508년 2월 2일 그로드노 근처에서 자신을 고발한 자베레진스키스를 살해했다. 이후 기병 700명과 함께 투로프로 이동한 뒤 지그문트 1세에게 자신을 사면시켜주면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7배나 더 봉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바실리 3세에게 전령을 보내 모스크바 대공국에 귀순하겠다고 밝혔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미콜라스 글린스키스는 마지르를 점거해 리투아니아에서 키예프를 고립시켰고, 형제 보실랴우스 글린스키스에게 오우루치와 지토미르 공략을 맡겼으나 실패했다. 이후 슬루츠크를 향해 진격했지만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쳘수했다. 모스크바군은 이 때를 틈타 민스크로 쳐들어가서 그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이후 리투아니아군이 반격해오자, 미콜라스는 점령지에서 물러난 뒤 다닐 오볼렌스키가 이끄는 모스크바군에 합류했다. 1508년 7월 13일,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과 다닐과 미콜라스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 및 리투아니아 반란군이 오르샤에서 격돌했다. 지그문트 1세는 콘스탄티에게 지휘권을 위임한 뒤 인근 언덕에서 상황을 살폈다. 오르샤 전투 결과 모스크바군이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입었고, 숙영지로 철수한 뒤 야간을 틈타 부상병들과 소, 장비들을 전부 버리고 두브로브나로 퇴각했다.
그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민스크, 오르샤, 슬루츠크를 포위했던 모스크바군을 몰아낸 뒤 스몰렌스크 주변의 영토를 전부 회복했다. 지그문트 1세는 바실리 3세를 좀더 압박하기 위해 스타니슬로바스 키슈카에게 수천 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압박하게 했다. 키슈카는 모스크바를 향해 전진하여 도로고부시, 뱌지마, 토로페츠 및 벨라를 점령하고 르제프, 모자이스크에 접근했다. 이에 바실리 3세는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고, 지그문트 1세는 즉시 따랐다. 1508년 10월 8일 모스크바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루베츠 등 드네프르 강 연안 지역을 포기했지만, 남은 점령지는 그대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그문트 1세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크림 칸국과 상호 방위 및 공세 동맹을 체결했고, 1512년 크림 칸국과 협의해 그들이 모스크바 대공국 남부 지역을 약탈하는 걸 지원했다. 타타르족은 랴잔까지 약탈한 뒤 전리품의 1/3을 키예프를 통해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에게 나눠줬다. 바실리 3세는 이 소식에 격분했고,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신의 누이이며 리투아니아 전임 대공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의 미망인인 헬레나를 박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를 근거로 삼아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1512년 11월, 이반 레프닌-오볼렌스키, 다닐 슈체니아, 이반 첼라드닌이 이끄는 모스크바군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스몰렌스크, 폴라츠크, 비쳅스크, 오르샤, 블라슬라프, 민스크 및 드루츠크로 진격했다. 1513년 여름, 미콜라스 글린스키스가 이끄는 모스크바군과 리투아니아 반란군은 스몰렌스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키예프 총독 유르기스 라드빌라(Jurgis Radvila 1480~1541)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의 역습을 받고 드비나 강으로 퇴각했다. 바실리 셰미아키치가 이끄는 모스크바 별동대가 키예프를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리투아니아군은 비에르슈치즈나 일대까지 반격했다.
1513년 9월, 바실리 3세는 스몰렌스크를 포위한 뒤 수많은 중 공성포, 박격포, 팔코넷을 동원해 성벽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6주간의 공세에도 성벽이 굳건히 버틴 데다,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이 오르샤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모스크바군을 본국과 차단하려 하자, 바실리 3세는 어쩔 수 없이 스몰렌스크 포위를 풀고 귀환했다. 이후 바실리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협상한 끝에 1514년 2월 상호 공격 및 방위 동맹을 체결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1514년 2월, 빌뉴스의 리투아니아 의회는 폴란드 용병 모집을 위한 새로운 전쟁세를 통과시켰다. 리투아니아인들은 트렘보블라의 스타로스타인 야누시 시비에르초프스키(Janusz Świerczowski 1460~1529)의 지휘 아래 용병 기사 8천 명을 모집했다. 1514년 4월, 미콜라스 글린스키스가 이끄는 모스크바군이 스몰렌스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뒤이어 그해 6월엔 바실리 3세가 스몰렌스크로 친정을 나섰다. 적의 군세가 압도적인 데다 구호품이 부족해지자, 스몰렌스크 총독 예지 소워후프는 7월 31일에 스몰렌스크 요새를 모스크바에 넘겼다. 곧 므스치슬라우, 크시세프, 두브로브나도 모스크바군에 항복했다. 모스크바군은 스몰렌스크에 살던 사람들을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역에 속한 루테니아 깊숙한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모스크바에서 온 이들을 스몰렌스크에 정착시켰다.
1514년 8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민스크 인근에 집결한 뒤 보리소프를 향해 진격했다. 지그문트 1세는 일부 군대와 함께 보리소프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8월 27일 베레지나 강을 건너 공세를 이어갔다. 그해 9월 8일,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오르샤에서 이반 첼라드닌이 이끄는 모스크바군과 격돌했다. 이때 병력이 약 1만 2천 명가량이던 연합군은 4만 남짓한 모스크바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고자 공세를 개시했지만, 모스크바군이 맹렬히 저항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스몰렌스크 주교 바르소노피예가 이끄는 반 모스크바 음모가 있었으나, 모스크바 사령관은 이를 적발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지자들을 성벽에 매달게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주력군은 므스치슬라우, 크시세프, 두브로브나를 포기하고 철수했으며, 뒤이어 도로고부즈를 불태우고 물러났다.
오르샤 전투 소식을 접한 막시밀리안 1세는 1514년 8월 4일 모스크바 대공국과 맺었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후 지그문트 1세와 협상한 끝에 1515년 빈에서 합의를 맺었다. 이에 따르면, 막시밀리안 1세는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맹세했고, 지그문트 1세는 막시밀리안 1세가 명시한 상속 및 결혼 계약을 인정했다.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자이며 지그문트 1세의 조카인 러요시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와 결혼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공주이며 지그문트 1세의 여조카인 언너 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과 화해한 뒤, 지그문트 1세는 모스크바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1515년, 야누시 시비에르초프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 용병부대는 모스크바 깊숙히 진격해 비엘키에 루키와 토로페츠를 약탈했다. 동시에 크림 타타르군이 리투아니아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시에비에르쉬나를 약탈했다. 이에 모스크바군이 반격을 가해 비쳅스크, 폴라츠크, 므스치슬라우 등지의 촌락들을 황폐화시켰다. 1515년 5월 30~31일 밤, 성 베드로 성당을 포함한 바르샤바 시 일부가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다. 바르샤바 법원 장부에는 모스크바 대공이 보낸 강도 집단이 이 일을 저질렀다고 기술되었다.
1516년 모스크바군이 비쳅스크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리투아니아군은 고멜을 포위한 끝에 함락에 성공했다. 1517년, 콘스탄티 오스트로그스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은 모스크바 대공국 깊숙히 진격해 오포츠카를 공략했다. 그 해 3월 10일, 모스크바 대공국은 튜튼 기사단과 공격 및 방어 동맹을 체결했다. 바실리 3세는 튜튼 기사단에 보병 1만 명과 기병 2천 명을 모집할 자금을 제공해주기로 했고, 튜튼 기사단이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호해주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그문트는 교황령에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면서, 기사단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모스크바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투르크족 및 타타르족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1518년, 모스크바군이 폴라츠크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알베르타스 고슈타우타스, 유르기스 라드빌라, 얀 보라틴스키가 지휘하는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이 반격을 가했고, 그해 7월 29일 폴라츠크 전투에서 모스크바군은 크게 패하여 본국으로 달아났다. 1519년, 크림 칸국의 새 칸 메흐메트 1세 가라이는 모스크바와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에 병력을 제공했다. 모스크바군은 이에 힘입어 빌뉴스에서 수십km 이내로 진격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파괴했다. 또한 타타르군은 소칼 전투에서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타타르군 역시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고, 기대했던 튜튼 기사단의 공세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자, 바실리 3세는 이러다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의 맹렬한 반격을 홀로 감당할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
1520년 2월, 모스크바군이 폴라츠크와 비쳅스크에 습격대를 보내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1세 가라이가 마음을 돌려 리투아니아와 손잡는 바람에 전세가 기울어졌다. 1521년 7월, 유스타키 다슈키에비츠가 고용한 카자크 부대는 메흐메트 1세 가라이의 타타르군과 함께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이들은 오카 강에서 모스크바군을 대파한 뒤 모스크바 성벽에 이르러 포위했다. 결국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실리 3세는 막대한 공물을 바쳐서 그들이 물러나게 한 뒤 평화 협상에 응했다. 1522년 9월 14일, 양자는 모스크바에서 5년간 평화 협약을 맺었다.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스몰렌스크와 그 주변 지역을 가지는 것을 인정했지만, 나머지 영토는 돌려받았다. 또한 모스크바 대공은 스몰렌스크 대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 휴전 기간은 1526년에 6년, 1532년에 1년 연장되었다.
1533년 12월 4일,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가 사냥 도중에 낙마해 입은 다리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반 4세는 고작 4살 밖에 안 되었기에, 모친 헬레나 글린스카가 보야르들과 함께 섭정을 맡았다. 지그문트 1세는 이 때를 틈타 스몰렌스크와 세베르시나(Северщина)[* 현재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에서 러시아 벨고로드 일대를 일컫는 역사적인 지명. 2024년 우크라이나 전쟁의 쿠르스크 전투가 펼쳐지는 전장 일대이기도 하다.]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534년 2월, 그는 리투아니아 의회로부터 모스크바에 대한 군사 작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해 동의를 얻어냈고, 폴란드 세임 역시 군대 모집을 위한 새로운 세금을 통과시켰다. 모스크바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스몰렌스크에 군대를 집결시켰지만, 크림 칸국이 침공 위협을 가하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1534년 8월,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 유르기스 라드빌라가 이끄는 4만 명에 달하는 리투아니아군이 3개 부대로 나뉘어 공세를 개시했다. 한 개 부대는 세베르시나를 공격했고, 한 개 부대는 스몰렌스크로 진격했고, 나머지 한 개 부대는 예비대로서 마힐료우에 주둔했다. 세베르시나로 진격한 안제이 야쿠보비츠 니에미로비츠는 9월 라도호슈치 전투에서 모스크바군을 격파하고 라도호슈치를 점령한 뒤 체르니히프와 포체프 주변 일대를 약탈한 뒤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이반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이끄는 스몰렌스크 직공 부대와 합류했다. 9월 13일,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스몰렌스크 공략에 성공했지만, 군자금이 바닥나버려서 급료를 줄 돈이 없어지자 마힐료우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지그문트 1세는 10월 1일 군대를 해산하고 국경 요새를 지킬 병력 3천 명만 남겨뒀다.
모스크바군은 곧바로 반격에 착수해 비쳅스크 주변을 약탈한 뒤 철수했고, 일부 분견대는 빌뉴스 외곽까지 이르러 무력 시위를 벌였다. 1535년 초, 모스크바군이 스몰렌스크와 오포치카 방향에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리투아니아로 쳐들어가 반경 100km 내의 마을을 황폐화시키고 모워데치노를 포위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군을 좀처럼 만나지 못하자 혹여 그들이 퇴각로를 끊어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오포치카로 후퇴했다. 그 사이에 얀 아모르 타르노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 1만 명이 세임으로부터 군자금을 지급받은 뒤 리투아니아로 진군했다. 폴란드군은 7월 16일 사흘간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고멜 요새를 공략했고, 7월 30일 모스크바 대공국의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인 스타로두브를 포위했다. 얼마 후 폴란드 광부들이 설치한 화약이 폭발하면서 성벽이 무너지자, 폴란드군은 요새 내부로 밀려와서 수비대를 제압했다. 타르노프스키는 항복을 끝까지 거부한 모스크바 수비대 1400명을 참수했다.
1536년 1월, 모스크바군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점령지에 자보워체 요새를 건설했다. 2월 27일, 리투아니아군 2만 명이 이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모스크바군은 6월에 벨리즈 요새를 추가로 건설했으며, 비쳅스크와 루베츠를 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모스크바군이 강력한 요새를 연이어 세우고 버티기 작전에 돌입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그문트 1세는 국고에 자금이 부족해 전쟁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1537년 2월 18일, 양자는 5년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고멜 요새를 그대로 가질 수 있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자보워체, 벨리즈 요새 등 리투아니아 점령지를 계속 가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은 1542년에 7년 연장되었고, 1549년에 재차 연장되어 1558년 양측이 리보니아를 놓고 전쟁을 벌일 때까지 이어졌다.
2.2.2.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
지그문트 1세는 얀 1세 올브라흐트 치세 말기 때부터 폴란드 국왕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 튜튼 기사단을 굴복시키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튜튼 기사단은 초기엔 신성 로마 제국에 기대어 폴란드로부터 독립하려 했고, 151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빈에서 지그문트 1세와 협약을 맺고 그들과 관계를 끊어버리자 다시 모스크바 대공국과 손잡았다. 이에 튜튼 기사단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오랜 반감이 폭발했고, 1519년 세임은 튜튼 기사단에 맞서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용병 모집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폴란드의 헤트만 미코와이 피를레지는 코워 인근 숙영지에 폴란드 용병 4천 명을 집결시켰고, 얀 지에로틴스키는 보헤미아에서 온 용병대를 이끌고 가세했다. 폴란드군은 포메른을 거쳐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해 진격했다. 1520년 1월 1일, 튜튼 기사단은 브라운스베르크(Braunsberg)를 점령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폴란드군은 이에 맞서 마리엔베르더(Marienwerder)와 프로이시슈 홀란트(Preußisch Holland)를 포위했으며, 단치히와 토룬이 동원한 폴란드 민간 함대는 튜튼 기사단의 항구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와 필라우를 봉쇄했다. 1520년 1월 18일, 폴란드군은 성밖으로 출격한 프로이시슈 홀란트 수비대를 격파했다. 뒤이어 4월 16일 바르텐슈타인(Bartenstein) 전투에서도 기사단을 격파했다.
그러나 폴란드군에는 공성포가 없었기 때문에, 공성전은 지지부진했다. 이에 지그문트 1세는 크라쿠프에서 공성포를 제작해서 가져오게 했고, 그 결과 마리엔베르더와 프로이시슈 홀란트 함락에 성공했다. 반면 브라운스베르크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마조프셰 방면 폴란드군은 남쪽에서 독일 기사단국을 공격했고, 단치히 소속 부대는 발가(Balga)와 메멜을 습격했다. 1520년 7월, 튜튼 기사단은 반격에 나서 마조프셰를 공격해 웜자 일대를 황폐화시켰고, 8월 24일 뢰셀(Rößel)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했다. 그들은 뒤이어 바르미아를 습격한 뒤 하일스베르크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1520년 9월, 볼프 폰 쇤부르크 지휘 아래 기병 1900명, 보병 8천 명 남짓한 란츠크네히트가 독일에서 도착했다. 그들은 대폴란드를 공격해 그해 10월 14일 미엥지제치(Międzyrzecz)를 점령했으며, 뒤이어 스크비에지나(Skwierzyna)를 파괴하고 투치노, 바우치, 레디체크 및 크라엔츠키를 점령했다. 지그문트는 이에 대응해 왕그로비에츠에 병력을 소집하고 단치히와 포즈난에 수비대를 강화했다. 1520년 11월 2일, 지그문트 1세는 총 4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비드고슈치로 진군해 단치히로 향하는 튜튼 기사단을 저지하려 했다.
튜튼군은 1520년 11월 8일 단치히 인근의 비쇼프베르크 언덕에 도착한 뒤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포격이 비효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성벽 파괴가 좀처럼 이뤄지지 못했다. 그 사이 칼리슈 총독 얀 자렘바가 11월 9일 그단스크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했다. 이후 폴란드군이 압박을 가해오자, 튜튼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한편, 다른 곳에서 군사 활동을 하던 튜튼 별동대는 11월 9일 미워믈린을 함락한 뒤 11월 15일 도브레 미아스토를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함락한 뒤 주민과 수비대 전원을 학살했다. 지그문트 1세는 이 소식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며 튜튼 기사단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부추겼고, 폴란드 귀족들은 비드고슈치 숙영지에서 열린 세임에서 오랜 협상 끝에 7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왕에게 추가로 지원하는 데 동의했다. 미코와이 피를레지는 이들을 이끌고 초이니체를 포위 공격한 끝에 튜튼 수비대 150명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후 보헤미아와 단치히 용병군이 디르샤우와 슈타르가르트를 동시에 포위해 각각 11월 28일과 12월 6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얀 자렘바가 이끄는 단치히군은 여세를 이어가 푸치히를 향해 후퇴하던 란츠크네흐트를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고, 폴란드 민중들도 민병대를 결성해 호응하면서 란츠크네히트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폴란드 국고가 바닥나서 더 이상의 전쟁이 어렵게 되자, 마조프셰 공작 스타니스와프와 안나 공자 부인을 대표로 삼아 튜튼 기사단국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는 협상을 좀더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공세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브라운스베르크에 4천 명을 집결시킨 뒤 도브레 미아스토를 향해 진격해 인근의 에지오라니 마을을 파괴하고 1521년 1월 루바와 성벽 앞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마조프셰로 진격해 주로민과 므와바 인근을 약탈했다. 한편, 볼프 폰 쇤베르크가 이끄는 또다른 튜튼 분견대는 올슈틴을 포위했지만 공략엔 실패했고, 1521년 3월 8일 엘블롱크를 기습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단치히 민간 함대는 3월 27일 짧은 해전 끝에 튜튼 기사단 소속 해병 75명과 용병대, 무기를 갖춘 튜튼 선박 '크나이프펜'을 나포했다. 그 후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양측에 적대 행위를 즉각적으로 중단할 것을 촉구하자, 양측은 4년간 휴전 협정을 맺고 분쟁을 카를 5세와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의 중재단에 맡기기로 합의했다.
<프로이센의 경의>, 얀 마테이코 작, 1879~1882.
1525년 휴전 기한이 만료되었지만, 당해에 루터교회로 개종한 알브레히트는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지원을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폴란드와 맞서는 것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더이상 벌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지그문트 1세에게 협의를 구한 끝에 1525년 4월 8일 크라쿠프 협약을 체결하고 4월 10일에 크라쿠프의 도시 광장에서 지그문트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튜튼 기사단국을 세습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시켰다. 프로이센 공국은 알브레히트의 남계 후손만 계승하기로 합의되었으며 쾨니히스베르크가 수도가 되었다. 또한 프로이센 공국은 자신들만의 군대, 폴란드에서 통용되던 굴덴 외 자체 화폐 주조권,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프로이센 지역 의회를 세워 주민들의 자치를 허용했다. 이리하여 오랜 세월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와 숱한 전쟁을 치렀던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 공국으로서 폴란드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2.2.3. 그 외의 외치
1524년, 지그문트 1세는 카를 5세가 모스크바 대공국과 연합해 폴란드를 협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수아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 앙리는 지그문트 1세 의 딸과 결혼하기로 예정되었고, 지그문트 1세의 장남은 프랑수아 1세의 딸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참패하고 포로로 잡히자, 지그문트 1세는 이 합의를 무효로 처리했다.1526년 마조프셰 공작 야노시 3세와 남동생 스타니스와프가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지그문트는 마조프셰 공국과 바르샤바 공국을 폴란드 왕국에 통합시켰다. 세간에서는 두 사람이 지그문트 1세의 아내인 보나 스포르차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그문트 1세는 이 소문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조사를 명령했고, 1528년 2월 9일 두 사람이 자연사했거나 질병으로 사망했음을 확인하는 특별 칙령을 선포했다. 역시 1526년에 조카인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러요시 2세가 가지고 있던 왕위 중 하나인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지그문트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느리게 반응하였고, 뒤늦게 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으나 이미 선거가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보헤미아 왕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갔다. 1527년, 헝가리의 대립왕이었던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원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이듬해에는 마음을 바꾸어 타르누프 성에 야노시를 숨겨주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야노시는 1539년 지그문트 1세의 장녀 이자벨라와 결혼했다.
폴란드 왕국과 몰다비아 공국은 1530년부터 포쿠치에(Pokucie)[3]를 놓고 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양자간의 상호 침략과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지그문트 1세는 몰다비아 공국의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이를 빌미 삼아 폴란드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몰다비아를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38년이 되어서야 몰다비아군을 물리치고 포쿠치에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에 쉴레이만 1세는 폴란드군을 막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몰다비아 공국에 오스만 제국군을 주둔시켰다. 한편 그는 크림 칸국과 손잡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합동 공격하는 등 타타르족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지만, 타타르족이 리투아니아를 빈번하게 습격해 많은 주민을 노예로 삼아 끌고 가는 걸 막지 못했다.
2.3. 내치
야기에우워 왕조 성립 이래, 역대 폴란드 국왕들은 튜튼 기사단 및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과 병력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폴란드 귀족들에게 특권을 연이어 내려줬다. 급기야 지그문트 1세의 손윗형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는 1505년 폴란드 국왕이 세임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함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니힐 노비(Nihil novi: 새로운 것이란 없다) 헌법을 승인했다.[4] 이로 인해 폴란드 국왕의 입법 권한은 크게 제한되었고, 국정은 폴란드 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지그문트 1세는 이러한 상황에 내심 불만을 품었지만, 당장 모스크바 대공국과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을 치르려면 귀족들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세임을 설득해 전쟁세를 승인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그러다 전쟁이 점차 폴란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지그문트 1세의 권위가 강화되자, 그는 이 기회를 살려 왕권 강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왕실 재무부에서 공공세 회계를 분리했고, 크라쿠프 조폐국의 활동을 강화했으며, 제염소와 광산 개발로 인한 소득을 왕실이 직접 관리하게 했다. 여기에 15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한 도시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 이민자들에 적용되는 특별법을 반포하고, 1523년 절차 규칙을 반포하는 등, 국왕의 입법 권한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523년 4월, 지그문트 1세는 맥주, 보드카, 꿀, 와인의 생산, 수입 및 판매에 대한 소비세인 초포웨(Czopowe)를 부과했다. 이때 세임의 동의 없이 이 세금을 부과했기에 반발이 상당했다. 급기야 그해 5월 5일, 바벨 성의 회랑을 걷고 있던 그를 향해 누군가가 총을 발포해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아들 지그문트 2세를 리투아니아 공동 대공에 선임했고, 1529년 선거를 통해 폴란드 공동 국왕으로 옹립했다. 지그문트 2세의 즉위식은 1530년에 거행되었다. 귀족들이 이를 세습으로 간주하고 불만을 제기하자, 그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1538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국왕 선거에 참가할 수 있다는 자유 선거법을 반포했다.
지그문트 1세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고가 종종 부족한 상황을 만회하고자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했고, 왕실에 속한 도시들의 경제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보나 스포르차 왕비는 왕실의 재산을 늘리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리투아니아에서 수많은 영지를 구입하고, 농민에 대한 통일된 관세와 면적 측정을 포함한 농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토마토, 브로콜리, 아티초크, 강낭콩, 콜리플라워, 배추, 당근, 상추, 시금치 같은 여러 야채 종자를 폴란드 농촌에 보급해서 농가의 소득을 개선시켰다. 지그문트 1세는 이렇게 확보한 왕실 재산을 토대로 1527년 영구 징병군을 창설하고 국가를 통치하고 군대에 자금을 조달하는 데 필요한 관료 기구를 확대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이전에 귀족에게 담보로 제공되거나 임대된 왕실 재산을 반환받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1537년 르부프 인근에 모여 왕을 위해 몰다비아를 정벌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대규모 사병대를 소집했다.[5] 귀족들은 이 군대로 왕실을 위협하면서 36가지 요구사항을 게재했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 귀족의 특권을 확인하고 확대한다.
- 가장 중요한 지역 공직에 지역 귀족 만을 임명하는 법률을 시행한다.
- 귀족은 통행료를 면제받는다.
- 귀족은 십일조를 면제받는다.
- 재무부를 더 이상 확장하지 말고, 지출을 줄여라.
- 보나 스포르차 왕비는 토지를 추가로 구입하는 걸 중단하라.
- 국왕에 대한 영구 고문단을 창설하라.
- 개인이 두 개 이상의 공식 행정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라.
귀족들은 여기에 더해 보나 스포르차 왕비가 지그문트 왕자를 잘못된 방식으로 양육하고 있으며, 폴란드 왕국에서 자신의 권력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곧 분열되어 자기들끼리 자중지란을 일으켰고, 나중에 지그문트 1세가 토벌대를 이끌고 접근해오자 협상을 요청했다. 지그문트 1세는 그들이 제시한 요구 대부분을 거부했지만, 개인이 두 개 이상의 공식 행정직을 맡는 것을 금지하라는 것만은 받아들였고, 왕이 통치하는 동안 차기 국왕의 선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귀족들은 이에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얀 드우고시 등 후대의 폴란드 역사가들은 귀족들이 이 반란을 통해 얻어낸 것은 그들이 르부프에 모여서 닭을 잡아먹은 것 뿐이라면서, "닭 전쟁"이라는 경멸적인 명칭을 붙였다.
1538년, 세임은 마을 주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법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1543년에 농민들이 농노제에서 자유로워질 권리를 박탈하고 영주의 동의 없이 마을을 떠날 경우 가해지는 처벌을 강화하는 법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폴란드 농민들은 한층 더 예속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가난해졌다. 지그문트 1세는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야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눈감아줬다.
한편,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 개혁의 열풍이 폴란드에 확산되자, 지그문트 1세는 1520년에 토룬에서 루터가 쓴 책의 수입, 판매, 사용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루터의 책에 교황청을 반대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공공질서의 혼란, 종교와 교회 질서를 훼손하는 내용도 많이 포함하였다며, 이를 읽음은 스스로가 신앙의 적임을 자인하는 짓이라고 강조했다. 1523년, 그는 루터의 주장을 설교하고 옹호하고 칭찬하는 자들을 루터의 저작물을 소개하는 자들과 함께 사형에 처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는 형벌을 내리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525년 1월, 그단스크 시민들은 에버하르트 페르버 시장이 도시 자금을 횡령한 것에 분노해 집단 항의했다. 페르버 시장은 사임했지만, 시청은 국민 대표들에게 도시 회계를 제시하는 걸 거부했다. 이에 루터교를 신봉하는 부르주아지들은 이들이 부패한 가톨릭에 찌들었다고 비난하면서, 금식, 미사, 교회 노래를 폐지하고 무료 복음 전파의 도입을 요구했다. 급기야 1월 22일 그단스크에서 폭동이 일어나 시청이 무너지고 민주적인 도시 체제가 도입되었다. 모든 가톨릭 수도원은 해산되었고 성상과 성찬은 모욕되었다. 본당 신부 직은 폐지되고 설교자로 대체되었다. 그단스크 시민들은 마르틴 루터에게 대표단을 보내 새로운 신앙의 교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도시 당국은 지그문트에게도 사절을 보내 자신들은 루터의 교리를 따르겠다고 알리면서, 그에게 계속 충성을 바칠 것이며 세금 납부를 지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1세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1526년 4월 17일, 그는 8천 명의 병력을 포메른 공작 게오르크 1세에게 맡겨 그단스크를 공략하게 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반란 지도자 14명이 아르투스 궁정 앞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그단스크를 탈출하지 못한 루터교 설교자들은 말보르크로 이송된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지그문트는 루터를 지지하는 자들은 14일 이내에 도시를 떠나야 하고, 성직자들은 24시간에 떠나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으며, 순결 서약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와 수도사 200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1534년에는 마르틴 루터를 방문하거나 루터교를 받아들인 국가에 머무른 폴란드 대학생들의 즉시 귀환을 명령했고, 향후에 폴란드 학생들이 다른 신앙을 가진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렇듯 루터교회에 지극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정교회 및 유대교에는 이렇다 할 간섭을 하지 않았다.
2.4. 예술 후원
지그문트 1세의 두 번째 왕비인 보나 스포르차는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딸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르네상스를 폴란드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명한 이탈리아 예술가, 건축가 및 조각가들이 보나 스포르차의 부름을 받고 폴란드로 갔고, 이외에도 해외의 여러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폴란드에서 활동한 해외 예술가로는 바르톨로메오 베레치,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 산티 구찌와 마테오 구찌 형제, 베르나르도 모란도, 지오바니 바티스타 디 쿼드로, 한스 뒤러 등이 있었다. 궁정에서 일하는 장식가의 대부분은 외국인, 특히 폴란드 건축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탈리아인과 독일인이었다.바벨 성
지그문트 예배당
이들이 이 시기에 건축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폴란드 군주의 소재지이자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인 크라쿠프의 바벨 성이다. 크라쿠프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요새화된 이 곳은 르네상스 방식에 따라 광범위하게 재건축되었다. 사각형 모양의 이탈리아 회랑형 안뜰 , 복도, 아치형 통로 등은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가 디자힌한 것이었다. 역대 야기에우워 군주들의 사냥 휴양지인 니에포워미체 성도 이 시기에 르네상스 방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바벨 대성당 내에 세워진 지그문트 예배당도 피렌체 출신의 바르톨로메오 베레치의 주도하에 1519년에서 1533년 사이에 건설되어, 야기에우워 왕실의 영묘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역사가 및 건축가들은 이 예배당을 "알프스 북쪽에서 토스카나 르네상스가 구현된 것 중 가장 아름답다"라고 평한다.
2.5. 말년
지그문트 1세는 말년에 통풍과 급성 류머티즘, 그리고 빈번한 열병에 시달렸다. 여기에 다량의 맥주와 미드(Mead)[6]를 무분별하게 섭취하는 나쁜 식습관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다. 종국엔 걸을 수 조차 없어서 가마에 실려야 했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건전한 정신을 유지했기에, 대내외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1548년 4월 1일 크라쿠프에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7월 7일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 뒤를 이어 유일한 적자인 지그문트 2세가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등극했다.3. 가족
3.1. 아내 및 내연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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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왕비 서포여이 바르바라(1495 ~ 1515): 헝가리 궁정백 서포여이 이슈트반과
피아스트 왕조 출신인 치예신의 야드비가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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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왕비 보나 스포르차(1494 ~ 1557):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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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녀 카타지나 텔니찬카(1480 ~ 1528)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서포여이 바르바라 (Barbara Zápolya) |
||||
1녀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비 헤트비히 (Hedwig, Electress of Brandenburg) |
1513년 3월 15일 | 1573년 2월 7일 |
요아힘 2세 헥토어 슬하 2남 3녀 |
2녀 |
안나 (Anna) |
1515년 7월 1일 | 1520년 5월 8일 | |
보나 스포르차 (Bona Sforza) |
||||
3녀 |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Isabella, Queen of Hungary) |
1519년 1월 18일 | 1559년 9월 15일 |
서포여이 야노시[7] 슬하 1남[8] |
1남 |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Zygmunt II August) |
1520년 8월 1일 | 1572년 7월 7일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9] |
바르바라 라지비우 | ||||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10] | ||||
4녀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부인 조피 (Sophia, Duchess of Brunswick-Lüneburg) |
1522년 7월 13일 | 1575년 5월 28일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5세 |
5녀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여왕 안나 야기엘론카 (Anna Jagiellonka, Queen of Poland-Lithuania) |
1523년 10월 18일 | 1596년 9월 9일 | 스테판 바토리 |
6녀 |
스웨덴의 왕비 카타리나 (Catherine, Queen of Sweden) |
1526년 11월 1일 | 1583년 9월 16일 |
요한 3세 슬하 1남 2녀[11] |
2남 |
보이치에흐 울브라흐트 (Wojciech Olbracht) |
1527년 9월 20일 | 1527년 9월 20일 |
- 정부 카타지나 텔니찬카(1480 ~ 1528):
- 얀(1499 ~ 1538): 빌뉴스, 포즈난 주교.
- 레지나(1500 ~ 1526): 치에신의 스타로스타
- 카타지나(1503 ~ 1548): 몽포르 백작 게오르크 2세의 부인.
4. 기타
폴란드 200 즈워티 지폐의 인물이다.
[1]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와 결혼하여
지그문트 3세를 낳았다.
[2]
현재 실레시아(실롱스크)와 루사티아(우지차) 대부분은 폴란드 영토이나 당시에는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였다.
[3]
현재의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남부.
[4]
헌법의 제목이 라틴어로 Nihil novi nisi commune consensu(공동의 합의를 제외하면, 새로운 것이란 없다)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5]
당대 기록에는 사병 15만 명이 그들 밑에 집결했다고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6]
꿀을 물과 혼합하고 때로는 과일, 향신료, 곡물 또는 홉과 같은 성분을 첨가하여 발효시켜 만든 알코올 음료
[7]
동헝가리 왕국의 국왕
[8]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9]
페르디난트 1세의 장녀.
[10]
페르디난트 1세의 5녀로 위에 나온 엘리자베트의 동생이다.
[11]
지그문트 3세 바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