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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04:42:25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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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국왕
미에슈코 2세
Mieszko II
'''
파일:Mieszko_II.jpg
출생 990년
사망 1034년 5월 11일 (향년 43~44세)
폴란드 왕국 포즈난
재위기간 폴란드 국왕
1025년 6월 17일 ~ 1031년
폴란드 공작
1032년 ~ 103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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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어머니: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의 엠닐다
배우자 로타링기아의 리체차
자녀 1남 3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로마 국교회)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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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 국왕, 폴란드 대공국의 대공. 그의 조부는 비록 공작이었으나 폴란드 최초의 기독교 군주 미에슈코 1세였기에 그의 넘버링을 이어서 미에슈코 2세가 되었다.

2. 생애

990년경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 귀족 도브로미르의 딸 엠닐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레겔린다, 오토 볼레스와비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 2명이 있었고, 이복 형제로 베즈프림이 있었다. 1013년 아버지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메르제부르크에서 양자간의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 협약을 맺었을 때 참석했다. 이후 로렌의 팔라틴인 에존과 오토 2세의 딸 마틸다의 딸인 리체차와 결혼하면서, 그의 지위는 크게 높아졌다.

1014년 아버지에 의해 보헤미아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를 설득해 하인리히 2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임무는 실패로 끝났고, 올드르지흐는 미에슈코를 투옥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2세가 아버지를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은 그를 가상하게 여겨 풀어주라고 지시하자, 올드르지흐는 이에 따라 미에슈코를 석방했다. 이후 미에슈코는 하인리히 2세의 궁정이 있는 메르제부르크에 가서 황제에게 자신을 풀어준 것에 감사를 표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1015년, 그는 아버지가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폴란드군 사령관을 맡았다. 하인리히 2세는 오데르 강에 군대를 집결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는 데다 미에슈코의 저항이 거세자, 그에게 사절을 보내 "폴란드 땅 일부를 가지도록 해줄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고, 하인리히 2세는 그를 물리치지 못하자 다도세사니[1]의 영역을 통해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미에슈코의 추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미에슈코는 뒤이어 마이센을 공략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양자간의 평화 협상이 이어졌지만 결렬되었고, 1017년 제국군이 크로스노 오드찬스키에에서 오데르 강을 건너 주요 도시를 우회해 니엠차 방향으로 진격했다. 미에슈코는 이에 맞서 기병 10개 부대를 이끌고 하인리히 2세와 동맹을 맺은 보헤미아 공국을 향해 모라비아 방면에서 공격했다. 니엠차 공방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하인리히 2세는 적이 보헤미아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018년, 양자는 바우첸에서 최종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1세는 미스코와 루사티아를 더 이상 황제에게 부여받은 봉토가 아닌 자신의 재산으로 삼을 수 있었고, 키예프를 향한 원정을 벌일 때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대신, 하인리히 2세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이탈리아 원정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이 시기의 주요 연대기 작가인 티에트마르가 1018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1018년부터 미에슈코가 왕위에 오른 1025년까지의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3세기에 편찬된 <대폴란드 연대기>에서는 1018년 볼레스와프 1세가 루테니아를 복속시켰을 때 아들 미에슈코가 통치할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형제 한 사람을 루테니아의 영주로 삼았다고 기술했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1025년 4월 18일[2], 볼레스와프 1세가 폴란드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불과 2개월 후인 6월 17일에 사망했고, 그가 폴란드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12월 25일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히폴리트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가 두 형제인 베즈프림과 오토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두 사람을 추방했다고 하고, 또다른 연대기에는 두 사람이 숙청을 당할 것을 우려해 국외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오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를 추종했다가 추방되었지만, 베즈프림은 루테니아에 머물렀다고 한다.

1026년 콘라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자, 슈바벤 공작 에르네스트 2세와 로렌 팔라틴 프리드리히 2세를 중심으로 콘라트 2세에 대항한 반란 움직임이 일었다. 그들은 볼레스와프 1세로부터 강력한 세력을 물려받았고 하인리히 2세를 상대로 잘 싸워서 군사적 역량도 입증된 그에게 콘라트 2세에 대항한 반란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027년 슈바벤 공작 헤르만 2세의 딸이며 로렌 팔라틴 프리드리히 2세의 아내인 슈바벤의 마틸다가 그에게 보낸 기도서와 서신이 현존하는데, 마틸다는 서신에서 그가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처럼 기독교 전파에 헌신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갖췄다고 칭송했다. 그는 에르네스트 2세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반란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027년 중반, 콘라트 2세가 독일로 돌아와서 에르네스트 2세를 격파하고 생포한 후 영지를 박탈하면서, 반란군은 지리멸렬해졌다. 하지만 미에슈코 2세는 원정을 감행하기로 하고, 1028년 작센을 습격해 수많은 포로를 납치했다. 작센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콘라트 2세는 1029년 가을 루세티아를 침공해 바우첸을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이때 콘라트 2세는 벨레티 부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도와주면 그들이 폴란드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벨레티 족이 좀처럼 지원해주지 않는데다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1세가 바이에른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030년, 미에슈코 2세는 헝가리 왕국과 동맹을 맺은 뒤 다시 한 번 작센을 침공해 또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콘라트 2세는 이에 대항해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야로슬라프 1세는 루테니아를 침공해 국경 도시 벨츠를 공략했다. 1031년,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의 아들 브르제티슬라프가 폴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모라비아를 공격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이후 콘라트 2세는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결한 뒤, 그 해 가을에 루세티아와 미스코를 공격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여기에 야로슬라프 1세가 이끄는 루스군이 폴란드 중심부로 밀려들어왔고, 미에슈코는 수도 포즈난을 버리고 도주했다. 루스군은 포즈난에 입성한 뒤 그의 이복형제인 베즈프림을 권좌에 앉혔다.

미에슈코는 루스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정처없이 떠돌다가 보헤미아로 이동했지만 올드르지흐에게 체포되었다. 1014년에 올드르지흐에게 잡혔을 때는 하인리히 2세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황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올드르지흐는 과거에 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3세를 크라쿠프로 유인한 뒤 체포 후 실명형에 처했던 것을 보복하고자 그를 거세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배신하여 붙잡은 뒤 그가 더 이상 자손을 낳을 수 없도록 그의 성기를 가족끈으로 묶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왕이 그들의 왕자와 삼촌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후 미에슈코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다시는 아내를 알지 못했다."

한편, 폴란드의 새 통치자가 된 베즈프림은 왕관과 왕복을 콘라트 2세에게 보내고 대공을 자처했으나, 폭정을 일삼다가 1032년에 자국민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풀려난 그가 폴란드로 돌아와서 새 대공이 되었지만, 콘라트 2세가 메르제부르크에서 폴란드 원정을 다시 벌이려 하자, 도저히 대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직접 메르제부르크로 가서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형제 오토 볼레스와비치, 그리고 디트리크[3]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고 콘라트 2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소 폴란드와 마조프셰를 받았고, 오토는 실레시아를 접수받았으며, 디트리크는 대폴란드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또다른 학자들은 그가 포즈난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받고 나머지 지역은 오토와 디트리크에 의해 분할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폴란드의 분열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033년 오토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망하자, 그가 오토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물려받고 디트리크를 추방해 폴란드를 통합했다. 그러나 이교도들이 혼란을 틈타 일으킨 반란 진압에 애를 먹다가 1034년 5월 10일 또는 1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외아들 카지미에시 1세가 뒤를 이어 폴란드 대공에 올랐으나, 이교도들의 대반란과 이웃 세력의 침략에 직면해야 했다.

3. 가족



[1] 현재 폴란드 남서부 지역의 슈프로타와와 글로구프 사이의 보브르 강 중앙 지역에 거주하는 슬라브 부족 [2] 일반적으로 알려진 날짜. 다만 19세기 폴란드 역사학자 타데우시 보이치에호프스키(Tadeusz Wojciechowski, 1838 ~ 1919)는 1024년 12월 24일에 거행되었다고 주장했다. [3] 미에슈코 1세의 세 아들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미에슈코비치, 람베르트 중 한 명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