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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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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57년 10월 14일 | ||
폴란드 대공국 포즈난 | |||
사망 | 1296년 2월 8일 (향년 38세) | ||
폴란드 왕국 로고즈노 | |||
재위기간 | 폴란드 국왕 | ||
1295년 6월 26일 ~ 1296년 2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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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프셰미수 1세 어머니: 브로츠와프의 엘리자베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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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메클렌부르크의 루드가르다 (
사망) 스웨덴의 리체차 ( 사망) 브란덴부르크의 마가레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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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1녀 | ||
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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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의 국왕. 200년동안 분열된 폴란드를 재통일하고 국왕을 칭했다. 포즈난 공작이었던 아버지 프셰미수 1세의 넘버링을 이어서 프셰미수 2세라고 칭했다.2. 생애
1257년 10월 14일 폴란드 대공국 포즈난에서 포즈난 공작 프셰미수 1세와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의 딸인 브로츠와프의 엘리자베타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콘슈탄치어, 에우프로시네, 안나, 에우페미아가 있었다. 아버지 프셰미수 1세는 그가 태어나기 4개월 전인 1257년 6월 4일에 사망했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포즈난 공작이 되었다. 이후 어머니 엘리자베타가 삼촌인 칼리슈 공작 볼레스와프와 볼레스와프의 아내이자 헝가리 공주안 욜란의 도움을 받으며 섭정했다. 1265년 1월 16일 엘리자베타가 사망한 뒤에는 삼촌 볼레스와프에게 양육되었다.1272년 볼레스와프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상대로 원정군을 파견했을 때 명목상 사령관으로 선임되었지만, 실제 지휘는 포즈난 총독 프셰드페우크와 칼리슈 영주 얀코가 맡았다. 그 해 5월 27일에 시작된 원정군은 스트젤체 크라옌스키에에 새로 건설된 요새를 점령하고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속주인 뉴 마치를 황페화시키기로 했다. 원정군은 짧은 공방전 끝에 스트젤체를 함락시켰다. <대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수비대 전원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그와 동행한 기사들에 의해 구제된 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수많은 이들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원정대가 목표를 달성하고 많은 기사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소수의 독일 기사들이 드레스덴 요새를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소규모 병력만 보유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요새를 즉시 공격하기로 했고, 드레스덴 수비대는 스트젤체 수비대처럼 될 것을 우려해 자유롭게 떠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대가로 항복하기로 했다. 프셰미수는 드레스덴에 자신과 삼촌에게 충성하는 수비대를 남긴 뒤 귀환했다.
같은 해 삼촌과 함께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공작 메스트윈 2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보다 앞서, 메스트윈 2세는 형제와 삼촌들과의 내전을 치를 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게 그단스크를 넘겨주는 대가로 지원군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경쟁자들을 물리친 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간섭이 심화되자, 그들을 그단스크에서 몰아내기 위해 두 사람의 원조를 받기로 했던 것이다. 이후 포메라니아-폴란드 연합군은 그단스크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포메라니아 전역에서 브란덴부르크군을 몰아냈다.
이후 메스트윈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지만,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의 끊임없는 위협으로 입지가 불안한 포메라니아가 자신에게 군대를 지원해주지 못할 것이라 보고, 전쟁 발생 시 광범위한 도움을 제공할 새로운 동맹을 물색했다. 그 결과 서 포메라니아 공작 바르님 1세의 손녀이자 메클렌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인 메클렌부르크의 루드가르다와 결혼하고, 서 포메라니아 공작 바르님 1세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프셰미수 2세는 1273년 10월 1일에 발행된 문서에서 dux Poloniae(폴란드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289년 8월 25일에 발행된 문서에 따르면, 그는 그니에즈노 성에서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보답하고자 그니에즈노 인근의 두 마을인 와기우니체(Łagiewnice)와 벵기에나이스(Węgielnice)에게 그니에즈노 시의 특권을 함께 누리도록 했다. 문서에는 이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 문서들을 근거로 삼고 다음의 추정을 제시했다.
프셰미수 2세는 삼촌의 간섭을 오랫동안 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일부 대폴란드 귀족들을 포섭한 뒤 삼촌에게 독립을 요구했다. 볼레스와프는 그의 요구에 분개해 그니에즈노 성에 투옥시켰다. 프셰미수 2세는 모종의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해 한동안 와기우니체와 벵기에나이스에서 은신했다.
그는 그니에즈노에서 탈출한 뒤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의 보호를 받으며 하부 실레시아에 망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볼레스와프는 이러다 헨리크 4세까지 개입하면 위험하다고 여기고 그와 화해한 뒤 포즈난을 독자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허용했을 것이다. 그 대신, 그는 브로츠와프 공작과의 협력을 그만두고, 헨리크 4세의 동맹인 오폴레 공작 브와디스와프를 상대로 원정을 떠나는 볼레스와프를 따라가기로 했던 듯하다. 이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중세 기록은 전혀 없지만, 학자들은 두 문서와 정황 증거를 토대로 이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274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포즈난으로 쳐들어가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그는 포즈난 성채에서 버티면서 대폴란드 귀족들과 서부 포메라니아가 지원군을 보내기를 기다렸다. 침략군은 성채를 공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약탈에 열중하다가 서둘러 조직된 대폴란드 기사들의 반격에 밀려 철수했다.
1277년 2월 18일, 레그니차 공작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가 헨리크 4세를 납치해 레그니차 성에 가둬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그는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 브로츠와프 기사단과 함께 헨리크 4세를 구출하고자 레그니차로 진격했다. 1277년 4월 24일, 볼레스와프 2세와 아들 헨리크 5세가 이끄는 레그니차군과 브로츠와프-그워구프-대폴란드 연합군이 스톨레츠 전투를 벌였다. <실레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2세는 이 전투에서 패배를 두려워해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헨리크 5세는 포기하지 않고 레그니차군을 지휘했다. 이후의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프셰미수 2세와 헨리크 3세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볼레스와프 2세는 비록 승리를 거뒀지만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가 개입하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마침 오타카르 2세가 두 공작들이 루돌프 1세의 궁정에 넘겨지기 전에 실레시아의 상황을 정상화하고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의하자, 볼레스와프 2세는 곧바로 받아들였다. 이어진 협상 결과, 볼레스와프 2세는 헨리크 4세와 스톨레츠 전투에서 사로잡힌 이들 전원을 석방하는 대가로 스로다 실롱스카 등 브로츠와프 공국의 1/3을 받아냈다.
1277년 9월, 프셰미수 2세는 폴란드-보헤미아 국경 도시인 오파바에서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와 만났다. 학자들은 이 회담에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 대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레첵 2세, 오포예의 브와디스와프와 그의 아들들, 그워구프의 헨리크 3세도 함께 했을 거라 추정한다. 회담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왕 루돌프 1세와 맞서는 오타카르 2세를 지원하기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1278년 8월 25일 수체크루티 전투에서 루돌프 1세에게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1278년 중반,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 루돌프 1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낸 틈을 타 대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와 함께 브란덴부르크를 공격해 미실리 보르즈 등지를 파괴하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1279년 4월 13일 또는 14일에 대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가 남성 상속인 없이 사망했다. 볼레스와프는 죽기 전에 프셰미수 2세를 집으로 불러서 아내 욜란과 어린 두 딸인 야드비가와 안나를 돌봐달라고 요청하면서 모든 영지를 그에게 물려줬다. 이리하여 그는 포즈난 시와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공작에서 대폴란드 전역을 통치하는 공작으로 승격했다.
1281년 2월, 헨리크 4세는 브로츠와프 공국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상호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 브르주하티의 헨리크 5세, 그리고 프셰미수 2세가 참석했다. 그런데 헨리크 2세는 돌연 이들을 모조리 체포해 투옥한 뒤 정치적 양보를 햐도록 강요했다. 폴란드 대공 레첵 2세는 공작들을 구출하겠다는 명분을 걸고 브로츠와프 공국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헨리크 4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크라쿠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그후 프셰미수 2세는 헨리크 2세에게 비엘룬을 넘기고 풀려났고, 다른 공작들 역시 그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무장 병력을 지원해주겠다는 약조를 하고 풀려났다.
1281년경, 포메라니아 공작 메스트윈 2세가 대폴란드 공국으로 찾아와 루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방문했다. 프셰미수 2세가 수도원에 직접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포즈난 주교 얀 1세 및 여러 고위 인사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양자간의 협상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1282년 초, 메스트윈 2세는 바이알로가드 시의 소유권을 놓고 튜튼 기사단과 분쟁을 벌이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 특사 페르모의 필리포와 접촉하고자 대폴란드 남부로 향했다. 당시 특사는 브로츠와프 교구에 속한 밀리츠에 머무르고 있었다. 메스트윈 2세는 가던 도중에 케프노에 들러서 프셰미수 2세와 만났다.
1282년 2월 15일, 두 사람은 포메라니아와 대폴란드 공국간의 협약을 맺었다. 이 케프노 협약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서 현재까지 논쟁이 일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조약이 둘 중 한 사람이 상속인 없이 죽을 경우 다른 사람이 상대방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서로의 수도원에 기증하기로 했을 뿐이라고 추정했고, 폴란드 역사가 야누시 비에니악은 메스트윈 2세가 포메라니아의 명목상 통치자가 된 대폴란드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했을 뿐이라고 봤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폴란드 공국이 포메라니아의 명목상 주군을 맡되 포메라니아 측이 무제한적인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프셰미수 2세는 1282년부터 공식적으로 "dux Pomeranie"(포메라니아 공작) 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메스트윈 2세가 살아있는 동안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관례에 따르면, 조약은 양국의 귀족과 기사들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포메라니아 귀족과 대폴란드 귀족들은 1284년 9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나크워 마을에서 만나 그단스크 포메라니아에 대한 프셰미수 2세의 권리를 확인했다.
1283년 12월, 프셰미수 2세의 아내 루드가르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별거 중이었다. 여러 연대기에서는 프셰미수 2세가 아내를 독살했다고 주장했고, 15세기 폴란드 역사가 얀 드우고시는 그가 부하들을 시켜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학자들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 다만 당대에도 루드가르다의 죽음이 부자연스럽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가 루드가르다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의혹은 더욱 거세졌다.
1284년 상반기, 프셰미수 2세는 덴마크 왕국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동맹을 맺고 서부 포메라니아와 뤼켄을 상대로 한 전쟁에 병력을 지원했다. 1284년 2월 20일 시에라츠에서 폴란드 대공 레첵 2세과 만나서 회담을 가진 뒤 크라쿠프 영주 지고타에게 니에차이노, 비에르츠비차니, 룰린 마을을 제공하기로 했다. 7개월 후인 9월 6일 레첵 2세와 웽치차의 카지미에시 2세가 튜튼 기사단과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회담을 가질 때 참석했으며, 9월 13일에는 나크워 시에서 메스트윈 2세와 새로운 회담을 가져서 우호 관계를 돈독히 했다.
1284년 9월 28일, 칼리슈 성이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자렘바 가문의 가주이며 칼리슈 성을 관리하던 셍지보이 자렘바는 프셰미수 2세에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끝에 칼리슈 성을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프셰미수 2세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칼리슈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기사와 귀족들이 그를 위해 칼리슈 성을 목숨 걸고 탈환하려 하지 않자, 그는 자렘바 가문과 협상한 끝에 그들을 처벌하지 않는 대가로 칼리슈를 탈환했다. 이후 프셰미수 2세는 헨리크 4세에게 올로보크 성을 넘기는 조건으로 이를 공인받았다. 하지만 자렘바 가문을 마음 속으로 용서하지 않았던 그는 나중에 포즈난 총독 베니아민 자렘바와 셍지보이 자렘바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그렇지만 얼마 후에 그들과 화해하고 풀어주고 압수했던 재산도 일부 돌려줬다.
1285년 10월 11일, 프셰미수 2세는 스웨덴 국왕 발데마르의 딸인 리체차와 결혼했다. 이후 헨리크 4세가 브로츠와프 주교 토마시 2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파문을 선고받는 등 내홍에 시달리자, 그는 이를 기회로 삼고 1287년 6월 14일, 프셰미수 2세는 헨리크 4세에게 넘겼던 올로보크를 기습 공격해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탈환했으며, 뒤이어 1282년 헨리크 4세에게 납치되었을 때 풀려나는 조건으로 내줘야 했던 비엘룬도 탈환했다. 당시 내분 수습에 급급해야 했던 헨리크 4세는 프셰미수 2세의 이같은 행위를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
1287년 11월 23일, 프셰미수 2세는 스워프스크에서 서부 포메라니아 공작 보구스와프 4세, 그단스크의 메시보이 2세와 함께 만나서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펼치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와 뤼겐의 공작 비스와프 2세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협약문에는 메시보이 2세와 프셰미수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할 경우 보구스와프 4세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인수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 협약은 1291년 8월 나크워에서 열린 세 공국에 속한 귀족들간의 회의에서 확인되었다.
1288년 9월 1일, 프셰미수 2세는 아내 리체차와의 사이에서 딸 리체차 엘즈비에타를 낳았다. 리체차는 나중에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국왕이 될 바츨라프 2세의 아내가 되었고, 바츨라프 2세 사후에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루돌프 3세의 부인이 되었다. 아내 리체차는 이후로 별다른 정보가 전해지지 않는데, 아마도 얼마 안가서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프셰미수 2세는 리체차에게 깊은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1293년 4월 19일 포즈난 주교단에 리체차의 무덤에 등불을 영구적으로 켜주는 대가로 코미니키 마을을 넘겨주었다.
1288년 9월 30일, 폴란드 대공 레첵 2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크라쿠프를 위시한 소폴란드 일대에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2세와 헨리크 4세 지지자들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크라쿠프 주변의 기사들은 일반적으로 볼레스와프 2세를 지지했고, 크라쿠프 시민들은 헨리크 4세를 지지했다. 볼레스와프 2세는 친히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진군했지만, 헨리크 4세를 대공으로 옹립한 니에지에비츠의 수웨크가 농성하는 크라쿠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헨리크 4세가 파견한 실레시아군이 크라쿠프로 접근하면서 양자간의 충돌이 임박했을 때, 프셰미수 2세는 상황을 살펴본 끝에 볼레스와프 2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프셰미수 2세가 볼레스와프 2세를 도울 거라는 예측을 전혀 못했던 실레시아 귀족들은 대폴란드-쿠야비아-프워츠크 연합군을 상대하기에는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고 더 많은 병력을 모으기 위해 실레시아로 철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했고, 1289년 2월 26일 시웨리츠 인근에서 따라잡고 무차별적인 살육을 자행했다. 헨리크 4세를 지지했던 시치나와 공자 프젬코는 전사했으며, 오포예의 공자 볼코 1세는 브와디스와프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2세는 폴란드 대공을 계승하려던 것을 돌연 그만두고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에게 떠넘겼다.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도움을 받아 바벨 성을 공략하고 스칼라와 시비앵치체에 요새를 세우면서 크라쿠프를 압박했다. 이에 헨리크 4세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격했고, 1289년 여름 크라쿠프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를 격파했다. 이후 헨리크 4세는 크라쿠프 대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올린 뒤 자신이 폴란드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신의 메시지가 담긴 표징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는 포기하지 않고 산도미에시에서 계속 도전했다.
그러던 1290년 6월 23일, 헨리크 4세가 브로츠와프에서 돌연 사망했다. 아들이 없었던 헨리크 4세는 브로츠와프 공국을 사촌이며 자신을 충직하게 따라줬던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에게 넘겼고, 크워츠크를 보헤미아에 넘겼으며, 크라쿠프를 비롯한 소폴란드를 프셰미수 2세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그는 폴란드 대공이 되었지만, 1290년 6월에 크라쿠프를 잠깐 방문해 귀족 및 성직자 대표들을 만나 그들이 종전대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포즈난으로 돌아간 뒤에는 다시는 소폴란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포즈난으로 돌아갈 때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시절부터 크라쿠프 대성당 재무부에 보관되었던 대관식 휘장을 가져갔다.
한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는 자신의 숙모이자 레첵 2세의 미망인인 그리피나를 통해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독일왕 루돌프 1세 역시 인정한 바 있다며 소폴란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프셰미수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사력과 부가 막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힘만으로는 보헤미아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1290년 10월 14일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 스빈카가 주재한 공의회에 참석해 여러 귀족 및 사제들과 두루 논의한 끝에, 보헤미아 국왕에게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넘기고 금전적 보상을 받기로 합의했다. 1291년 1월 6일에 발행된 문서에서 '크라쿠프 공작'을 칭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폴란드 대공을 공식적으로 칭하지 않았고, 1291년 4월 10일 바츨라프 2세가 크라쿠프 공작을 칭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뒤이어 4월 하반기에는 밤베르크 주교 아눌프가 이끄는 체코군이 소폴란드의 핵심 요충지인 바벨에 주둔했다.
프셰미수 2세는 폴란드 대공을 맡았을 때 산도미에시에서 할거하던 브와디스와프를 굳이 공격하지 않고 내버려뒀다. 반면, 바츨라프 2세는 그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브와디스와프는 이를 눈치채고 헝가리 용병들을 고용한 뒤 크라쿠프 지역에 위치한 비실리카 시를 공격했다. 바츨라프 2세는 이에 반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1291년 9월 1일 리토미슐에서 소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해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와 상부 실레시아의 지원군을 규합한 뒤 산도미에시로 진격하여 우키에테크 시를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공략했다. 뒤이어 1292년 여름 시에리츠에 입성했고, 브와디스와프의 항복을 받아냈다.
프셰미수 2세는 대폴란드 공국의 코앞인 시에리츠까지 군대를 진주시킨 바츨라프 2세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맞설 준비에 착수했다. 1293년 1월, 그는 브와디스와프와 형제 카지미에시 2세를 칼리슈로 불러들인 뒤, 크라쿠프의 지위를 계승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그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 대공을 맡고, 자신이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죽으면 브와디스와프가 뒤를 이어 맡고, 마지막에는 카지미에시 2세가 맡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로부터 소폴란드를 회복하는 걸 목표로 삼고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하기로 했으며, 그니에즈노 대주교에게 순은 300 그지브나(grzywna)를 매년 지불하고 첫 2년 동안엔 그 두배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와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도 동맹을 체결하고 실레시아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았다.
칼리슈 회의를 마친 뒤,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베르트 3세의 딸 마가레타와 결혼했다. 이는 장차 있을 보헤미아와의 무력 충돌 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지원을 확보하고,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공작위를 계승받을 때 이들의 용인을 받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1294년 12월 25일 메스트윈 2세가 사망하자 친히 그단스크로 가서 장례식에 참석했고, 스스로 "폴란드와 포메라니아 공작(dux Polonie et Pomoranie)"이라는 칭호를 체택했다.
그 후 포즈난으로 귀환한 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로부터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 뒤, 1295년 6월 26일 일요일에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아내 마가레타와 함께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대관식에는 루부슈의 콘라트 주교, 포즈난 얀 2세 주교, 브워츠와벡의 위슬라프 주교, 프워츠크의 게드코 2세 주교 등 여러 폴란드 주교들이 참석했다. 프셰미수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뒤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로 가서 올리바, 자르노비에츠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의 특권을 확인했다. 이후 그단스크, 트체프, 시비에 등 주요 도시들을 잇따라 방문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바츨라프 2세는 이에 대응해 프셰미수 2세가 교황의 승인도 받지 않고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대폴란드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주민들은 프셰미수 2세를 정당한 통치자로 여겼다.
얀 마테이코(Jan Matejko) 작, <프셰미수 2세의 죽음>
그렇게 입지를 한창 다지던 1296년 2월 8일, 그는 로고즈노에서 카니발 행사에 참석하던 중 괴한들의 습격으로 인해 피살되었다. 12세기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쓰여진 대폴란드의 중세 연대기 모음집인 <비엘코폴스카 연대기>에 따르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와 프셰미수 2세의 조카인 콘라트의 아들 얀이 무장병들을 무방비 상태였던 로고즈노로 보냈다. 이들은 처음에는 프셰미수 2세를 브란덴부르크로 납치하려 했지만, 그가 끝까지 저항하고 중상을 입어서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죽였다. 암살의 동기는 폴란드 국왕을 자처한 것에 대한 독일인의 증오였다고 한다. <올리프스카 연대기> 또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과거에 전 아내 루드가르다를 죽인 대가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하트퍼드의 하인리히 연대기에 따르면,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와 대폴란드 간의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뤼벡의 디트마르는 프셰미수의 아내 마가레타도 가문의 의사에 따라 남편을 죽이는 데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워포스카 연감(Rocznik małopolski)> 등 폴란드의 여러 연대기와 1339년 폴란드-튜턴 기사단 전쟁 당시 포즈난 주교였던 얀 우치아(Jan Łodzia)의 증언에 따르면, 프셰미수 2세를 죽인 이들은 대폴란드 귀족들이라고 한다. 얀 드우고시 등 폴란드 역사에 주요 사료를 제공한 연대기 작가들 상당수도 이에 동의했고, 보헤미아 및 키예프 루스 등 해외의 몇몇 연대기에서도 이를 뒷받침했다. 마워포스카 연감은 일찍이 프셰미수 2세에게 처벌받았던 자렘바 가문이 암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했고, 얀 드우고시는 자렘바 가문과 나웽치 가문이 "몇몇 작센인"의 도움을 받아 암살을 주동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몇몇 연대기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폴란드 귀족 가문들이 협력하여 암살을 주동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죽으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바츨라프 2세가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향년 39세로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한 프셰미수 2세의 유해는 포즈난에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영역은 일전에 합의한 대로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에게 넘어가게 되었지만, 그워구프의 헨리크 3세가 대폴란드에 대한 권익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일으키면서, 대폴란드는 내전에 휩싸이는 듯 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1세와 헨리크 3세는 1296년 3월 10일 크르지빈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의 대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다. 또한 헨리크 3세의 장남 헨리크를 자신의 상속자로 받아들이면서, 헨리크가 성인이 되면 포즈난 공국을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가 이렇게 빨리 협약을 맺은 이유는 그의 조카인 레첵 지에모미슈비치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일대에 대한 상속권을 요구하며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피아스트 가문 일원들간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고,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는 이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밀어붙인 끝에 1300년 모든 경쟁자들을 축출하고 폴란드 국왕에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