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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9 20:32:16

바츨라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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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체코의 국영방송 체코 텔레비전 방송공사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체코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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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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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제6대 국왕
폴란드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초대 국왕
바츨라프 2세
Václav II
파일:Vaclav2_trun.jpg
제호 체코어 바츨라프 2세
(Václav II)
폴란드어 바츠와프 2세[1]
(Wacław II)
출생 1271년 9월 27일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사망 1305년 6월 21일 (향년 33세)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재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278년 ~ 1305년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변경백
1283년 ~ 1305년
폴란드 왕국의 국왕
1300년[2] ~ 1305년
배우자 합스부르크의 유타 (1285년 결혼 / 1297년 사망)
폴란드의 리체차 엘즈비에타 (1303년 결혼)
자녀 바츨라프 3세 외 10명
아버지 오타카르 2세
어머니 할리치나의 쿠니군다
형제 쿤후타, 아네슈카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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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6대 국왕, 폴란드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 초대 국왕.

2. 생애

1271년 9월 27일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와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손녀이자 갈리시아 공작 로스티슬라프의 딸인 쿠니군다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친누이로 쿤후타[3], 아네슈카[4]가 있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프르셰미슬 가문의 권세는 정점에 달해 있었다.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 외에도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프리올리를 무력과 외교를 번갈아가며 사용한 끝에 공략했고, 장차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러나 1273년 10월 1일 오타카르 2세의 라이벌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루돌프 1세가 독일왕으로 등극하면서, 오타카르 2세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에게 보헤미아를 제외한 모든 영역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오타카르 2세가 따르지 않자, 루돌프 1세는 제국 금지령(Reichsacht)을 선포한 뒤, 오타카르 2세의 세력 확대에 불안감을 품고 있던 독일 제후들을 끌여들어 공세를 개시했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맞서 실레시아 지방의 폴란드 영주들을 끌여들어 대항했다.

1276년 11월, 오타카르 2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루돌프 1세에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보헤미아와 모라바만 유지하며, 아들 바츨라프와 루돌프의 딸 중 한 명과 약혼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루돌프 1세와 오타카르 2세 양자간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협약은 곧 깨졌고, 양측은 전쟁을 재개했다. 1278년 8월 26일, 오타카르 2세는 마치펠트 전투에서 루돌프 1세의 군대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목숨을 잃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쿠니군다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토 5세는 루돌프 1세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루돌프 1세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모라비아의 즈노이모, 올로모우츠, 브르노, 흘루브치체, 이흘라바 등 여러 도시에 들러 충성을 서약받았다. 뒤이어 프라하에 도착한 오토 5세는 쿠니군다의 동맹자로 행동하지 않고 프라하 성을 강제로 점거한 뒤 부르주아지 및 귀족들과 연대해 이곳을 사유지로 삼으려 했다. 이에 경악한 쿠니군다는 브로츠와프 공작이며 어린 시절 오타카르 2세의 궁정에서 길려졌고 오타카르 2세의 원정을 도왔던 헨리크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헨리크 4세는 이에 응해 카슬라프로 진군해 동부의 보헤미아 귀족 일부의 지지를 받아냈다.

루돌프 1세는 이에 대응하고자 제국 내 동맹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뒤 보헤미아-모라비아 국경을 넘어 차슬라프스크로 진군했다. 쿠니군다는 루돌프 1세에게 자녀들과 함께 그의 보호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하면서도, 브로츠와프 공작이 어린 바츨라프의 수호자로 인정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오토 5세는 보헤미아의 동맹자들과 함께 콜린으로 이동해 루돌프가 프라하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 전쟁이 곧 벌어지는 듯 했지만, 양자가 합의를 맺으면서 무산되었다. 바츨라프 및 보헤미아 정부에 대한 후견권은 오토 5세에게 5년간 부여되었고, 루돌프 1세 역시 같은 기간 동안 후견권을 맡았으며, 헨리크 4세는 루돌프 1세로부터 크워츠크와 크로스노오잔스키에 대한 지배권을 인계받았다. 그리고 쿠니군다는 오파바 지역의 수입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바츨라프 2세는 5년 후 단독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통치할 예정이었다.

1278년 겨울, 바츨라프 2세는 루돌프 1세의 딸 유타와 약혼했다. 1279년 2월 초 프라하로 돌아온 후 베즈데즈로 옮겨졌다. 이후 쿠니군다는 아들 바츨라프를 브란덴부르크 공작 오토 5세에게 맡기고, 본인은 데디체의 밀로타(Milota z Dědice), 크라바르제의 볼크 1세(Vok I. z Kravař), 풀스테인의 허버트와 함께 남은 영지의 통치를 이끌었다. 1280년, 쿠니군다는 팔케슈타인의 자비쉬(Záviš z Falkenštejna)를 애인으로 삼고, 흐라데츠 나드 모라비치의 성관백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마치펠트 전투 당시 헝가리군에 사로잡혔던 미쿨라시 오파브스키가 돌아와서 오파바를 접수하면서, 그녀와 자비쉬는 오파바를 떠나야 했다. 1282년경, 쿠니군다는 자비쉬의 사생아인 예셰크를 낳았다.

한편, 바츨라프는 1279년 말 베즈데즈에서 지타바로 이송되었고, 나중에는 베를린을 거쳐 슈판다바로 옮겨졌다. <즈브라슬라프 연대기(Zbraslav Chronicle)>에 따르면, 그는 오토 5세에게 박대당했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당시엔 오토 5세의 어머니이며 바츨라프의 숙모인 베아트릭스가 아직 살아 있었고, 명목상 바츨라프의 후견인이기도 했기에, 오토 5세가 바츨라프를 무작정 학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오토 5세가 바츨라프를 최대한 붙잡아둬서 보헤미아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1280년, 루돌프 1세는 쿠니군다의 요청에 따라 보헤미아로 진군해 브란덴부르크군을 몰아내고 보헤미아 정부를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이 오토 5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제대로 된 협조를 하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바츨라프를 프라하 성으로 다시 데려오겠다는 오토 5세의 약속만 받아내고 돌아갔고, 오토 5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던 1282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기근이 닥치면서 민심이 악화되고 보헤미아 귀족들이 바츨라프의 귀환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브란덴부르크의 많은 귀족들도 바츨라프를 이만 귀국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오토 5세는 마침내 1283년 5월 바츨라프를 보헤미아로 보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바츨라프가 5월 24일에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많은 영주와 기사들이 그를 맞이하러 수 마일을 나왔고, 백성들은 성가를 부르면서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다고 한다. 오토 5세는 그 대가로 많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바츨라프 2세가 돌아온 후, 보헤미아 정부는 그가 억류에서 해방되는 데 기여한 귀족 집단들의 주도로 통치를 행사했다. 그러다 쿠니군다 여왕이 프라하로 돌아온 직후, 여왕의 애인 자비쉬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귀족들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을 요직에 앉혔다. 이에 권좌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루돌프 1세가 양자를 중재해 4년간 현 상황을 유지한다는 합의를 이뤄내게 했다.

1285년 1월, 바츨라프와 유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이후 바츨라프는 루돌프 1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루돌프는 딸을 다시 데려갔다. 이후 루돌프 1세는 일전에 오타카르 2세와 함께 자신에게 맞섰던 미쿨라시 오파브스키와 화해하고 먼 친척인 아델헤이다를 미쿨라시와 결혼시켰다. 그는 미쿨라시가 자비쉬를 견제하게 함으로써 보헤미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바츨라프 2세는 1285년부터 자신을 보헤미아 국왕이자 모라비아의 변경백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1285년 9월 쿠니군다가 사망한 후에도 쿠니군다의 애인이었던 자비쉬를 총애했고, 자비쉬와 쿠니군다의 사생아인 예셰크에게 보헤미아 동부의 넓은 영토를 하사했다. 그러던 1287년 6월, 바츨라프의 아내 유타가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그 후 유타의 측근들이 궁정에서 권력을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자비쉬는 궁정에서 영향력을 서서히 잃었다. 자비쉬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바츨라프의 허락을 받고 헝가리의 전임 국왕 이슈트반 5세의 딸인 엘즈비에타와 재혼함으로써 헝가리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1287년 말, 헝가리에 가서 결혼식을 하려던 자비쉬는 리히텐베르크의 보헤미아 귀족 인드르지흐가 파견한 습격대의 공격을 받고 오파토비체 수도원으로 도주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바츨라프 2세는 그가 헝가리로 무사히 피신할 수 있게 도와줬다. 이후 자비쉬는 엘즈비에타와 무사히 결혼한 뒤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유타 왕비를 비롯한 자비쉬의 정적들은 자비쉬가 보헤미아에 없는 틈을 타 왕과 자비쉬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바츨라프 2세는 왕국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보헤미아로 돌아오던 자비쉬를 긴급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바츨라프 2세와 유타 부부는 1290년 부활절에 에르푸르트에서 루돌프 1세를 알현했고, 루돌프 1세는 그에게 독일왕을 선출하는 선제후가 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바츨라프 2세의 요청에 응하여 아들 루돌프와 밤베르크 주교 아놀드 폰 솔름스에게 군대를 맡겨서 보헤미아에서 자비쉬의 투옥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비트코프치 가문을 토벌하게 했다. 루돌프 왕자는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사방했지만, 그의 전사들은 보헤미아에 남아서 반란을 진압했다. 여기에 자비쉬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폴란드 대공 헨리크 4세와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가 모두 이 해에 사망하면서, 친 자비쉬 세력은 해외에서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

자비쉬는 1290년 여름까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바츨라프는 루돌프 1세의 조언에 따라 비트코프치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남부 보헤미아의 성채들에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자비쉬를 처형하겠다"라고 위협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다가 자비쉬의 형제 비테크가 방어하는 흘루보카 성에 이르렀을 때, 비테크가 항복을 끝까지 거부하자, 바츨라프 2세는 그해 7월 4일에 자비쉬를 흘루보카 인근의 초원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비테크는 이에 분노해 인질로 잡고 있던 카메니체의 체네크를 처형했지만, 얼마 후 흘루보카 성이 함락되면서 목숨을 잃었다. 자비쉬의 유해는 그의 유족에게 인계되어 비슈슈이 브로트에 있는 비트코프치 가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자비쉬가 몰락한 뒤, 바츨라프 2세는 친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자비쉬와 관련 있는 인사들을 해임하고 친 합스부르크 귀족이나 반 자비쉬 인사, 자비쉬를 따랐다가 전향한 인사들을 기용했다. 또한 보헤미아의 평화를 해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집행되었고, 자비쉬가 그동안 불법적으로 획득한 재산을 회수해 바츨라프 2세의 충성스러운 귀족들에게 분할되었다. 다만 자비쉬의 형제 및 심복들이 처벌받거나 해외로 도주한 것 외에는 정치 보복이 딱히 벌어지지 않았고, 비트코프치 가문은 바츨라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헤미아 궁정에 합류했다. 이후 보헤미아는 수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1292년, 바츨라프는 즈브라슬라프에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기 위해 시토회 수도원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수도원은 1년 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바츨라프는 이 수도원에 종종 찾아와서 기도하곤 했고, 계약을 체결하거나 중요한 국정 문제를 논의할 때 수도원에서 행하곤 했다. 이후 즈브라슬라프 수도원은 프프르셰미슬 왕실의 묘지로 활용되었다.

한편, 바츨라프 2세는 1290년 6월 23일 폴란드 대공 헨리크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을 틈타 폴란드 국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자신의 숙모이자 폴란드 전임 대공 레첵 2세의 미망인인 그리피나를 통해 폴란드 대공국의 수도인 크라쿠프를 위시한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루돌프 1세 역시 인정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는 이에 맞서 헨리크 4세가 소폴란드를 자신에게 양도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고 주장하며 폴란드 대공을 자처했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측은 폴란드 대공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가 자국의 영역이라며 프셰미수 2세와 대립했다.

프셰미수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사력과 부가 막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힘만으로는 보헤미아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1290년 10월 14일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 스빈카가 주재한 공의회에 참석해 여러 귀족 및 사제들과 두루 논의한 끝에, 보헤미아 국왕에게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넘기고 금전적 보상을 받기로 합의했다. 1291년 1월 6일에 발행된 문서에서 '크라쿠프 공작'을 칭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폴란드 대공을 공식적으로 칭하지 않았고, 1291년 4월 10일 바츨라프 2세가 크라쿠프 공작을 칭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뒤이어 4월 하반기에는 밤베르크 주교 아눌프가 이끄는 체코군이 소폴란드의 핵심 요충지인 바벨에 주둔했다.

이 무렵,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는 폴란드 대공위를 놓고 헨리크 4세와 맞붙었다가 패배한 뒤 소폴란드에 속한 산도미에시 공국에서 할거하고 있었다. 프셰미수 2세는 헨리크 4세 사후 폴란드 대공을 자처하면서도 브와디스와프를 내버려뒀지만, 바츨라프 2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많은 소폴란드 귀족들이 그에게 그다지 충성하지 않고 브와디스와프를 두둔하는 기색을 내비쳤기 떄문이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 역시 크라쿠프를 탈환하고자 크라쿠프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 습격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야기했다. 크라쿠프 귀족들이 자기들 영지를 약탈하는 브와디스와프에게 반감을 품고 바츨라프 2세 지지로 돌아서 버린 것이다.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 문제는 일단 내버려두고, 루돌프 1세가 1291년 7월 15일에 슈파이어에서 사망한 뒤 독일왕을 새로 선출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먼저 보헤미아의 중요한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인 에거란트를 인수했다. 뒤이어 루돌프 1세의 아들이며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인 알브레히트 1세가 당선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2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와 손잡았고, 알브레히트 2세와 오토 5세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보헤미아 군주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고 공개 선언했다. 다른 선제후들 역시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일으킨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지 못하는 알브레히트 1세가 독일왕으로서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별로 지지하지 않았다.

1292년 4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열린 선거에 참석한 바츨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서 개발한 은광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을 가지고 여러 선제후들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선제후들은 나사우 가문의 일원이자 명망높은 용병이었던 아돌프를 새 독일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아돌프는 용병으로서 명성이 높긴 했지만 나사우 가문이 별로 유망한 가문이 아니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큰 영지를 보유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루돌프 1세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에 경계심을 품었던 선제후들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바츨라프 2세는 여기에 더해 아돌프의 아들과 자신의 딸 아네슈카와의 결혼을 주선해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확실히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아네슈카가 1296년 8월 6일에 사망해버리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 한편, 그는 오타카르 2세 치세 때 확보했다가 루돌프 1세에게 빼앗겼던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카린티아에 대한 영유권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뒷배를 얻게 된 바츨라프 2세는 본격적으로 폴란드 공략에 착수했다. 1291년 9월 1일 리토미슐에서 소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해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지원을 약속받았다. 뒤이어 1292년 브란덴부르크와 상부 실레시아의 지원군을 규합한 그는 산도미에시로 진격하여 우키에테크 시를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공략했다. 뒤이어 그 해 여름 시에리츠에 입성했고, 브와디스와프의 항복을 받아냈다. 바츨라프 2세는 뒤이어 엘베 강 하류에 위치하여 보헤미아 왕국에 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인 마이센에 변경백 자리가 비어있는 틈을 타 즉시 접수하고 심복인 카메니체의 버나드(Bernard z Kamence)를 그곳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버나드는 1294년 여름에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피르나 성과 그 주변 마을을 바츨라프 2세에게 넘겼다. 드레스덴 영주 프리드리히는 바츨라프 2세의 가신이 되었으며, 드레스덴 귀족들은 프리드리히가 사망할 경우 보헤미아 정부에 영지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프셰미수 2세는 대폴란드 공국의 코앞인 시에리츠까지 군대를 진주시킨 바츨라프 2세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맞설 준비에 착수했다. 1293년 1월, 프셰미수 2세는 브와디스와프와 형제 카지미에시 2세를 칼리슈로 불러들인 뒤, 크라쿠프의 지위를 계승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그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 대공을 맡고, 자신이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죽으면 브와디스와프가 뒤를 이어 맡고, 마지막에는 카지미에시 2세가 맡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로부터 소폴란드를 회복하는 걸 목표로 삼고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하기로 했으며, 그니에즈노 대주교에게 순은 300 그지브나(grzywna)를 매년 지불하고 첫 2년 동안엔 그 두배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와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도 동맹을 체결하고 실레시아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았다.

칼리슈 회의를 마친 뒤,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베르트 3세의 딸 마가레타와 결혼했다. 이는 장차 있을 보헤미아와의 무력 충돌 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지원을 확보하고,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공작위를 계승받을 때 이들의 용인을 받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1295년 6월 26일, 프셰미수 2세는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아내 마가레타와 함께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프셰미수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뒤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로 가서 올리바, 자르노비에츠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의 특권을 확인했다. 이후 그단스크, 트체프, 시비에 등 주요 도시들을 잇따라 방문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바츨라프 2세는 이에 대응해 "프셰미수 2세가 교황청의 허가도 받지 않고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대폴란드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주민들은 프셰미수 2세를 정당한 통치자로 여겼다.

그러다 1296년 2월 8일, 프셰미수 2세가 로고즈노에서 괴한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당대 연대기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암살을 주도했다는 설, 대폴란드 귀족들이 암살극을 주동했다는 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폴란드 귀족 가문들이 협력했다는 설을 제시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죽으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바츨라프 2세가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후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와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 레첵 지에모미슈비치가 서로 갈등을 벌이면서, 폴란드는 자중지란에 휩싸였다.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의 이같은 상황을 내버려둔 채 독일왕 아돌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간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돌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면서도, 알브레히트 1세와도 화해하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랜 관계를 유지한 외교관이자 마인츠 대주교인 페터 폰 아스펠트를 기용했다. 그러다 아돌프가 노골적으로 자신이 점거한 마이센을 노리자,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 편으로 돌아섰다. 1297년 6월 2일 프라하에서 친 합스부르크 인사들을 초빙해 알브레히트 1세를 새 독일왕으로 세우기로 합의했다. 이날 바츨라프 2세와 유타가 보헤미아 국왕과 왕비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타 왕비는 9번째 아이를 출산한 이후로 병을 앓던 중 호화로운 의식을 치르느라 몸을 혹사한 나머지 2주 만인 6월 18일에 사망해 프라하의 오타카르 2세의 무덤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후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 국왕을 칭했다가 피살당한 프셰미수 2세의 딸인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약혼해 폴란드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강화했고, 1298년 2월 빈에서 알브레히트 1세를 독일왕으로 추대하고 알브레히트 1세가 군대를 일으킬 때 필요한 군자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바이에른-보헤미아 국경에 위치한 여러 성을 넘겨받는 협약을 체결했다. 1298년 6월 23일, 선제후들은 마인츠에 모여 아돌프의 폐위를 선언하고 알브레히트 1세를 새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그 해 7월 초, 괼하임에서 아돌프와 알브레히트 1세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수적으로 불리했던 아돌프가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고, 알브레히트 1세는 1298년 8월 24일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왕으로 즉위했다.

1299년 8월, 바츨라프 2세는 클레카에 머물고 있던 대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프라하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그가 프셰미수 2세가 사망 후 확보한 영지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브와디스와프는 그의 요구를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에 바츨라프 2세는 1300년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반감을 품은 대폴란드 귀족 및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브와디스와프 대신 자신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 후 보헤미아군을 대폴란드 공국으로 파견했고, 대다수의 대폴란드 귀족과 튜튼 기사단이 호응하면서 삽시간에 대폴란드 대부분을 석권할 수 있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1300년 가을, 바츨라프 2세는 그니에즈노에서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제 그는 보헤미아 국왕이자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다만 대폴란드 일부 지역에서는 브와디스와프 1세를 추종하는 이들이 항거했다.

1301년 1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3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언드라시 3세 생전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던 나폴리 왕국 카로이 로베르트 왕자가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추대를 받으면서 헝가리 국왕이 되는 듯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교황이 지지하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교황의 간섭에 시달릴 것을 우려했기에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아닌 에스테르곰에서 대관식이 거행된 것은 무효라며 카로이 로베르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소집된 헝가리 의회에서, 바츨라프 2세의 아들이자 언드라시 3세의 딸 에르제베트와 약혼한 바츨라프 3세와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헝가리 귀족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안겨줬다. 이에 헝가리 귀족들은 바츨라프 왕자를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1301년 8월 27일, 바츨라프 3세는 아버지가 보내준 수행원과 보헤미아군과 함께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한 뒤 컬로처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쓰고 '라슬로'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를 '라슬로 5세'라고 칭하기도 한다. 헝가리 귀족들은 대부분 바츨라프 3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카로이 로베르트만을 왕으로 모셨다. 이에 1301년 8월 말,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에스테르곰을 공략했고, 카로이는 헝가리 남부로 피신했다. 하지만 카로이를 따르는 주들을 본격적으로 정벌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고, 헝가리는 카로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바츨라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나마도 강력한 권세를 떨치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고, 바츨라프와 카로이 모두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자신의 허락 없이 아들을 헝가리 왕으로 세운 것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301년 9월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황이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 카로이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 귀족들을 묶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큰 영지와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결과, 바츨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했던 컬로처 대주교 이슈트반을 포함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1302년 상반기에 카로이 지지로 돌아섰지만, 귀족들은 바츨라프 3세를 계속 왕으로 모셨다.

1302년 9월, 카로이가 바츨라프 3세가 있던 부더를 포위했다. 그는 부더 시민들에게 바츨라프 3세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끝까지 바츨라프를 지지했다. 그 사이,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를 풀었고, 카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가 부더에서의 성무 집행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자, 부더의 사제들은 교황과 헝가리의 주교들을 파문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로마로 출두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응하지 않자, 그해 5월 31일에 "바츨라프 왕의 헝가리 왕 선출은 무효이며 카로이야말로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도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카로이 편에 돌아섰고, 바츨라프 3세의 세력은 부더와 그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아들을 구하고 카로이를 무찌르기 위해 1304년 5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행진하며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에스테르곰을 공략하고 에스테르곰 주교 에호르를 생포했다. 그러나 카로이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들을 왕으로 받든 영주들도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고 자기들 권익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들이 헝가리에 계속 체류했다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들을 보헤미아로 데려가되 헝가리 왕위는 계속 유지하고 이반 쾨체그를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 통치자로 세웠다. 이때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보헤미아로 이송되면서, 헝가리 민심이 악화되었다.

1304년 9월, 카로이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가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바츨라프 2세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와 바츨라프 2세간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이 무렵 결핵에 걸려 건강이 악화된 바츨라프 2세는 1305년 4월부터 병상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다가 1305년 6월 21일에 사망했다. 보헤미아 왕국은 13세기부터 은광이 대대적으로 개발된 덕분에 매우 부유했지만, 그의 치세 말기엔 거듭된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재정적 의무를 지키고 빚을 갚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시토회 수도자 수도복을 입고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 유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유해는 왕의 예복을 입힌 채 즈브라슬라프의 시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후스 전쟁이 한창이던 1420년 8월 10일 후스파 무리가 즈브라슬라프의 시토회 수도원에 쳐들어와서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무덤 자체는 보전되었다.

3. 가족


바츨라프 2세는 여기에 더해 올로모우츠 주교인 얀 볼레크를 포함한 수많은 사생아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1] 폴란드에서는 이전에 바츠와프를 왕호로 쓴 이가 없었으나 보헤미아의 왕호를 그대로 따라서 바츠와프 2세이다. [2] 1291년부터 폴란드 국왕을 자처했으며, 1300년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3] 1265 ~ 1321, 마조프셰 공작 볼레스와프 2세의 부인 [4] 1269 ~ 1296,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2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