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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4대 황제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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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
출생 | 1503년 3월 10일 | |||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알칼라데에나레스 | ||||
사망 | 1564년 7월 25일 (향년 61세)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1558년 2월 24일 ~ 1564년 7월 25일 | ||||
독일왕 | ||||
1531년 1월 5일 ~ 1564년 7월 25일 | ||||
오스트리아 대공 | ||||
1521년 4월 21일 ~ 1564년 7월 25일 | ||||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의 국왕 | ||||
1526년 8월 29일 ~ 1564년 7월 25일[1]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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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이름 | 스페인어 |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이 트라스타마라 (Fernando de Austria y Trastám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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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
페르디난트 폰 합스부르크 (Ferdinand von Hab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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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펠리페 1세 | |||
어머니 | 후아나 1세 | |||
형제자매 | 레오노르, 카를 5세, 이사벨, 마리아, 카탈리나 | |||
배우자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1521년 결혼 / 1547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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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엘리자베트, 막시밀리안 2세, 아나, 페르디난트 2세 대공, 마리아, 막달레나, 카타리나, 엘레오노라, 마르가레타, 바르바라, 카를 2세 대공, 헬레나, 요하나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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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국왕.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후아나 여왕의 차남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친동생이다.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실제로 1521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문제는 페르디난트 1세가 형을 대리하여 처리하였다.
1526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중부 유럽을 호령한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가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그의 재위 기간 중 합스부르크 왕가는 동유럽의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을 계승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스페인계 합스부르크가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중동부 유럽에서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 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제위를 준세습화했다.
친형 카를 5세에 가려졌지만 근대 유럽 판도 형성에 형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형의 실정으로 분열 위기에 처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잘 추스려 재건하고 유지한 것만 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커다란 업적이다.
2. 소개
유럽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에 가려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페르디난트 1세의 치적의 대부분이 기나긴 세월 동안 그가 황제의 대리인 또는 독일왕으로 있던 시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형 카를 5세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실제로 제1차 빈 포위전을 비롯하여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쟁은 카를 5세가 아닌 거의 전적으로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수행되었다. 카를 5세는 1530년 제1차 빈 포위전 당시 볼로냐로 황제 대관식을 하러 가던 도중 돌아가봤자 늦는다며 가던 길을 계속 가버렸고, 상황이 종료되고서야 지원병력을 보내 준 것을 제외하면 이쪽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페르디난트 1세는 아내 언너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보유한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물려받았는데[2], 카를 5세가 이 영토를 획득한 것으로 서술한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에서 종교 전쟁을 종식시킨 파사우 조약(1552)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는 카를 5세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페르디난트 1세의 결단과 의지로 이루어낸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많은 서적은 카를 5세의 업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파사우 조약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최종적으로 황제 카를 5세의 서명으로 체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카를 5세 본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루터파 신교도를 사탄을 따르는 이들로 보았고 따라서 타협할 뜻이 전혀 없었다. 되려 신교도라면 마지막 1인까지 지구상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기에 파사우 조약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명백히 반대했지만, 구교파와 신교파 제후들 모두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는데 뜻을 모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명했다. 파사우 조약으로 황권을 사실상 상실한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자 극도의 분노감과 무력감을 표출한 후 몇개월 후에 자진 퇴위하고 카스티야의 유스테 수도원으로 칩거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형 카를 5세의 존재로 인해 역사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될 뻔 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과 상황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능력, 타고난 친화력과 유화적인 성격을 이용한 원만한 통치술과 인맥 관리 등으로 마침내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형이 죽을 때까지 거의 평생을 철저히 2인자로서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는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 동유럽 영토는 카를 5세의 자손이 아닌 페르디난트의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졌고 형 카를 5세의 후손들은 근친혼 끝에 몰락했으니 어찌보면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진정한 승리자라 할 수 있다. 성공한 2인자로서의 전형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페르디난트 1세는 금수저 형과 대비되는 면이 적지 않았는데, 형 카를 5세는 자신이 신의 축복을 받아 이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 여기고 스스로 자신감과 오만함이 가득했다. 반면 페르디난트는 형과 달리 겸손하며 훨씬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처음에는 본의 아니게 형의 스페인 왕위를 위협하는 강력한 정적으로서 형의 강한 의심과 견제를 받는 처지였으나 이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형의 신뢰를 받는데 성공했다.
이후 황제인 형의 대리자로서 신성 로마 제국 문제를 떠맡았다. 카스티야 왕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처음에는 완전한 스페인 사람이었지만, 오스트리아를 다스리게 된 이후 빠른 속도로 독일어와 독일 문화를 습득하고 받아들였다. 카를 5세가 스페인 국왕이 되고 나서 남은 평생을 스페인 경영에 몰두했지만 죽을 때까지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는 대비된다.[3]
독일을 통치하면서 그는 황제의 대리자로서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 독일 내에서 독자적인 실권을 가진 영방 국가 군주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큰 틀에서는 형의 의중을 따르되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제국의 문제를 처리했고 1530년 후계자로 지명받았다. 한편 그는 아내를 통해 물려받은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에서는 적극적인 중앙집권화에 나서 자신의 통치에 반항하는 현지 세력을 직접 굴복시켰다.[4]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문제에 개입했으나 치열한 전쟁 끝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1/3만 확보했지만 이를 끝까지 지켜내 합스부르크 가문의 확고한 영토로 만들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형의 의중에 따라 제국을 통치했지만, 제국 내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던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론자인 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는 헝가리 왕국을 회복하기 위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신교도 제후들의 협력도 이끌어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1555년 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체결한 것에서도 현실주의자로서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카를 5세가 말년에 제위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려는 시도를 했지만, 페르디난트는 이미 30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독일의 종교 문제를 수습하여 독일 제후들의 신뢰를 받았다. 신교, 구교 가릴 것 없이 모든 제후들이 페르디난트를 지지하고 나서자 카를 5세는 결국 1553년 아들의 제위 계승을 포기하는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 유년시절
형인 카를이 부친의 영지인 플랑드르에서 나고 자란 반면, 페르난도는 카스티야 왕국의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태어나 외가인 트라스타마라 왕조[5] 왕실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아라곤의 왕 페란도 2세와 생일이 같아서 페란도 2세의 이름을 물려받았고 그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외할아버지 페란도 2세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첫째 외손주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성장한데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외손주인 페르난도를 더 좋아해 페르난도에게 아라곤 왕위를 물려주려 했고 아라곤 귀족들 또한 페르난도를 지지했다.한편 형제의 친할아버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추진했던 결혼 정책은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을 겸하고 있던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혼사를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를 괴롭혔던 마차시 1세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무력으로 헝가리를 병합하려 했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화정책으로 전환하여 양 왕가의 혼사를 추진했다. 1506년부터 시작된 막시밀리안 1세의 노력은 근 10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손자들이 어느정도 장성한 1515년에 결실을 맺었다.
당시 카를은 잉글랜드 왕국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고, 페르난도는 외할아버지인 아라곤 왕국 국왕 페란도 2세와 함께 스페인에서 양육되고 있었기에 막시밀리안 1세로서는 두 손자 중 누가 신랑이 될 것인지 확정짓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 최종적으로 결혼하게 될 두 손자 중 한 명을 대신하여 보헤미아·헝가리의 왕녀 언너와 대리 결혼식을 거행[6]하였고,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울라슬로 2세의 막내동생인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의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상속 가능성을 차단하여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하였다.
이후 무효가 된 잉글랜드와의 혼사와는 별개로, 스페인에 정착할 생각이었던 카를이 보헤미아·헝가리 왕녀와의 약혼을 오스트리아를 다스리게 될 남동생 페르난도와 성사시키면서 페르디난트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결혼 당시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가 물려받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 러요시 2세가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1526년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전사하게 되면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한편 1516년 페르디난트의 외할아버지인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가 죽자 후계자를 두고 스페인 현지에서는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상황이었으나, 친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직접 나서 교통정리를 하여 형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당시 페르난도는 아직 13세로 성년(15세)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카를은 장남인데다가 나이도 이미 성년을 넘겨 이미 부르고뉴 공국의 저지대 지역을 직접 다스리고 있었다.
카를 본인도 스페인 토착 세력이 이방인 자신보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동생 페르난도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카를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1년 반이 지나도록 스페인 땅을 밟지 않고 플랑드르에 머물고 있었다. 카를은 자신의 스승인 아드리안 데달 주교를 먼저 스페인에 보내 현지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야 스페인 땅을 밟았다. 모친인 후아나는 명목상 스페인 공동왕이었지만 정신병 때문에 오래전부터 유폐된 상황이었다. 공동왕인 어머니가 동생 페르난도를 지지하여 왕으로 옹립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카를은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유폐된 어머니부터 찾아가 페르난도가 아닌 자신이 스페인의 국왕임을 확인하는 서명부터 받아냈다. 그리고 고생해가며 스페인 전국을 순방하며 지방세력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한편 막시밀리안 1세는 카를을 스페인의 왕위에 앉힌 뒤 1518년 페르난도를 플랑드르에 있는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에게로 보냈다. 플랑드르는 막시밀리안 1세 본인이 젊은 시절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한 이후 독일왕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며 또 그곳에서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친형 카를이 나고 자랐던 곳이었다. 이를 두고 막시밀리안이 이미 오스트리아를 페르난도에게 물려주려고 조치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스페인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페르난도가 카를의 스페인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일단 페르난도를 그의 아버지(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의 영지로 보낸다는 명목하에 스페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려는 의도가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오스트리아 대공국 상속과 독일왕 - 신성 로마 제국 대리 통치
1519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페르디난트의 형 카를은 할아버지 영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할머니 영지인 부르고뉴 저지대 지방, 프랑슈콩테 등을 물려받았고, 할아버지의 후계자를 뽑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그러나 카를이 선거를 치르기 위해 독일에 머무는 사이 스페인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은 황제선거와 대관식,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문제로 인한 보름스 제국의회,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 등의 잇따른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2년 동안은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스페인의 반란은 진압되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가 끝나고서야 카를 5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서둘러 돌아갈 수 있었는데, 카를은 자신이 스페인으로 가 있는 동안 독일에서 마찬가지로 권력 공백으로 인한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를 대신 맡겼다. 카를은 동생 페르디난트를 제국통치평의회 의장으로 임명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이자, 제위의 근거인 오스트리아 대공국까지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어 사실상 분가했다.[7]스페인으로 돌아간 카를은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한 후 스페인을 근거지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 등지에서 프랑스, 교황청 등과의 전쟁에 집중했고, 신성 로마 제국 문제는 페르디난트가 전담했다. 카를 5세는 평생 거의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에 머물렀고 독일에 머문 기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수개월 이상 독일에서 머물렀던 경우는 황제선거와 대관식, 보름스 제국회의가 있었던 1519년~1521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 차기 황제선거, 슈말칼덴 동맹 성립 등의 사건이 있었던 1530년 전후, 슈말칼덴 전쟁기인 1546년~1548년 정도였다. 신성 로마 제국 의회에도 카를 5세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회의를 주관했다.
1520년대에 걸쳐 카를 5세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 연이어 직면했다. 스페인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으며, 동시에 합스부르크령 이탈리아 영토를 노리는 프랑스와 싸워야 했다. 1524년에는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독일 농민전쟁이 일어났는데, 황제는 여기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에서 한숨돌리는가 했더니 1526년에는 갑자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여 개발살내면서 전운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간신히 프랑스를 제압했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와 비밀리에 코냑 동맹을 맺었고, 이를 알게 된 카를 5세는 격분하여 교황을 응징하기 위한 군대를 이탈리아로 급파하여 이에 로마 대약탈 등의 사건이 벌어진 끝에 교황을 굴복시켰다. 그러는 사이 헝가리의 지배권을 두고 페르디난트가 있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1529년 오스만 제국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카를 5세는 지원군만 보내줬다. 오스만과의 전쟁 와중에도 독일에서는 신교가 급속도로 확산되며 제국의 분열이 가중되고 있었다. 1529년 2차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황제는 개신교 인정을 철회했고, 이에 작센 선제후 요한, 헤센 방백 필리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8] 등을 주축으로 한 신교도측이 슈파이어에서 황제에게 항의[9]를 했지만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황제는 가톨릭의 일방적인 수용을 강요했다. 이에 분개한 신교도측은 1531년 군사 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고 카를 5세가 다른 전황이 정리된 1540년대에 직접 진압에 나서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제 종교 개혁은 종교 전쟁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카를 5세는 종교 개혁의 확산을 저지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고 아울러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자신을 대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다 확실한 힘을 실어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를 5세는 조기에 차기 황제선거를 실시하여 페르디난트를 독일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심했다. 카를 5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1519년 황제 선거 당시 프랑수아 1세와 경쟁하면서 제위 세습을 포기한다고 공약했고, 1520년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도 재차 공약 준수를 선언했는데 이것 때문에 페르디난트를 바로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명분이 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가 1526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3국의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1526년부터 지속된 지속된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서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1529년 1차 빈 포위를 방어내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가톨릭 세계를 수호한 공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1531년 1월 차기 황제선거가 실시되었고 페르디난트가 단독 출마로 당선되면서 독일왕(로마왕)위에 오르게 되었다.[10] 페르디난트 1세는 이미 1521년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물려받으면서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쭉 독일 영토를 다스려 왔는데다가, 1531년에 열린 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사실상 독일의 군주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형 카를 5세는 10년, 15년씩 독일 자리를 비웠고 1552년 이후에는 독일에 온 적도 없었다.
5.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선출
1526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중동부 유럽에서 막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던 러요시 2세가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의 침공을 맞아 헝가리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다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의 아내 언너가 러요시 2세의 누나이며 여동생 마리아가 러요시 2세와 결혼하였고, 러요시가 생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면 자신에게 왕위를 넘기겠노라고 약속했다는 사실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러요시 2세의 왕위는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에서 별도로 계승된 동군연합 군주의 성격이었다. 때문에 러요시 2세의 여러 왕위는 왕국마다 별도의 선거를 통해 페르디난트 1세가 선출되면서 계승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동유럽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를 제외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왕위 승계가 이루어졌다.
보헤미아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작센 선제후, 보헤미아 여러 귀족들이 후보로 떠올랐으나 모두 명분이 부족했다. 한때는 러요시 2세의 숙부인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도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지그문트 1세가 망설이는 사이에 보헤미아 국왕 선거가 진행되면서 지그문트 1세도 후보자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와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4세&루트비히 10세 형제의 대결로 진행되었는데 보헤미아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후광과 막대한 군사력을 지닌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또한 1527년 1월 1일, 세틴 성에 있는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크로아티아 국왕[11]으로 선출되었다. 세틴 의회에서 페르디난트는 크로아티아를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지키고 크로아티아인의 역사적인 권리, 자유, 법, 풍습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러요시 2세의 비서인 니콜라우스 올라우스가 스스로 페르디난트 1세의 편에 가담했다. 그리하여 1526년 포조니에서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의 헝가리 왕위 계승은 헝가리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고, 당시 헝가리 귀족 대다수는 에르데이의 귀족으로 중앙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1487?~1540)를 국왕 야노시 1세로 옹립했다.
야노시 1세의 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페르디난트는 헝가리를 침공했고, 1527년의 타르칼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야노시를 헝가리 전역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야노시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쉴레이만 1세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포위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났다.
1532년에 쉴레이만 1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향하여 헝가리 동부와 중부에서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내고 재차 빈으로 진군했으나 도중에 쾨세그(Kőszeg)[12]라는 마을에서 발목이 잡혀 퇴각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황가와 오스만 제국은 1533년에 코스탄티니예 조약을 체결하여 야노시를 헝가리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고 헝가리 중부 및 동부를 그가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며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서부만을 통치하기로 했다.[13] 단, 그나마도 오스만 제국에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페르디난트 1세가 차지한 헝가리의 서부는 왕령 헝가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군주로서 그는 중앙 집권 정책을 펼쳤으며, 이 시대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절대 군주정을 추진했다. 1527년 헝가리 왕위에 오른 뒤에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영토에 헌법을 발표했고, 헝가리의 포조니, 보헤미아의 프라하,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에 오스트리아 방식의 관료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 영역에서 일어난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페르디난트가 추진한 중앙 집권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고 페르디난트에게 1559년에 오스트리아의 감독으로부터 기관들이 독립하는 것을 인정했다.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고, 1538년에 너지바러드에서 조약을 체결. 아들이 없는 야노시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뒤를 잇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540년 7월 7일에 야노시의 아들인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Szapolyai János Zsigmond 1540~1571)가 태어났고, 서포여이 야노시는 그로부터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야노시 2세로서 즉위했지만, 눈 뜨고 왕관을 도둑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페르디난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헝가리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쉴레이만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는 바람에 충공깽. 결국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은 1545년에 강화를 맺었고, 2년 뒤에 체결된 에디르네 조약으로 야노시 2세가 헝가리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1547년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의 신교도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군을 보낸 다음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로부터 스페인군을 불러 진압한 다음에 보헤미아 도시들의 특권을 제한했고 도시의 권한을 제어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 체제를 도입했다.
1554년에는 사절인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이 페르디난트의 사절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파견되어 헝가리 영토에 대한 국경 조약에 대해 상의하기도 했다.[14]
6. 종교 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루터파 제후들과 분쟁이 벌어진지 10년째인 1530년, 제국내 루터파인 5개 영방의 제후와 14개 제국도시들은 루터파 교리 선언에 해당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제출하며 자신들의 신앙이 이단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했고 각 제후들이 영지내에서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cuius regio, eius religio )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회의에서 건의했다. 그러나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제국의회에선 이를 거부했다.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기본적으로 루터파와 맞서는 입장이었지만, 1531년 독일왕 선출시에 신교도 제후들에게 지지를 얻은 바 있었고,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극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탄압책은 펴기 어려웠다. 그는 1534년에 신교도 제후였던 뷔르템베르크 공작 울리히와 화해하여 몰수한 영지를 돌려주고 공작위 복위를 허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제후와 제국도시에도 카를 5세가 내린 루터파 제국 추방령을 유보해주었다. 사실 당시 신교도 제후들의 세력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다. 작센 선제후와 헤센 방백을 제외하면 나머지 신교도 제후들은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위해 과세 협조를 얻어야 할 제국 도시들 중에 신교도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원만한 성격의 페르디난트 1세는 신교도 제후들과도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1546년 형 카를 5세가 16년만에 독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황제 카를 5세는 트리엔트에서 열리고 있던 공의회가 대책없이 길어지는데 실망을 느끼며 자신만의 구상대로 제국 내 종교 일원화 정책을 강요했고 루터파 제후와 제국도시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황제에 대항했다. 페르디난트는 작센 선제후 가문인 베틴 가문의 방계인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와 동맹을 맺어서 합류했고 신교도 동맹은 세부족이라 박살이 나서 미리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와 제국추방령을 받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전 독일은 일시적으로 통일 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카를 황제의 종교 강압책은 일시적으로나 통했다. 프랑스의 비밀 지원과 원래 신교도였던 작센 선제후 모리츠는 신교도 동맹을 복구하여 인스브루크에 있던 황제를 기습 공격했고 카를 5세는 패하여 이탈리아를 통해 도망쳤으며 트리엔트에 있던 공의회도 아작이 났다. 결국 카를 5세는 1552년 이후 독일에 다시 오지 않았고 페르디난트가 형의 뒷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형인 카를 5세는 황제이긴 하나 1521년 이후 독일의 일은 페르디난트 1세에게 일임했고 1531년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 된 후에 실질적인 독일 통치자는 페르디난트였다. 카를 5세는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제국내 신교도들에게 전혀 관용적이지 않았으며 가톨릭 위주의 제국 종교 일원화 정책을 강요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의 종교 일원화 정책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고 페르디난트 1세를 인정치 않는 친 야노시파 헝가리 귀족들과도 싸우기 위해서는 신교도 제후와 제국 도시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교도 세력과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구교파 제후였던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도 제국내 종교 통일 문제는 실행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았다.[15]
결국 신교도 대표인 모리츠[16]와 파사우에서 1552년에 강화했고 제국의회를 열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파 신앙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허가되었으며 루터파 제후와 제후령에 한하여 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스페인으로 도망친 카를 5세는 이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1556년 퇴위를 선언했다.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카를 5세의 임기때 나온 것이지만 페르디난트가 독일왕 자격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당사자들은 3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합의했다. 각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영지의 공식적인 종교로 지정할 수 있으며, 다른 교파를 따르는 신도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다른 영지로 옮길 수 있었다. 세 번째는 기사와 자유도시들은 이 결정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페르디난트의 선언이라 불린다.
1555년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은 제국에서 루터파와 가톨릭의 공존을 관리하는 정당한 법률 문서가 되었으며 가톨릭 교도와 루터파 신도간의 많은 갈등을 해소했지만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우선 페르디난트 1세는 토론을 통해 종교상의 예외를 성급하게 결정지었다. 철저하게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논의가 널리 받아들여지지도 못했고, “영주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 ”는 원칙을 지원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잠재적인 법률 문제마저도 그러했다. 또 루터파 처우는 일견 해결되었지만 제국에서 신교도 탄압은 여전했고, 새롭게 칼뱅파로 개종한 신교도 지역[17]의 법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또한 제국 내 제국 도시들의 문제였다. 1560년대 이후 제국 내 60여개 제국 도시중 50여개는 완전히 루터파나 칼뱅파로 돌아섰고, 나머지 도시중에서도 레겐스부르크 등 2개 도시를 제외하면 신교도가 우세했는데 신교도가 우세한 도시에서는 가톨릭 교도들은 공존할수 있었으나 가톨릭 도시에서 신교도들은 도시를 떠나야 했다. 여러 복잡한 문제는 결국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7. 황제 즉위
페르디난트는 1547년까진 카를 5세와 거의 트러블이 없었는데, 그때까지는 형의 의중을 전적으로 따랐다. 그런데 1546~1547년에 카를과 협력해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슈말칼덴 동맹을 무찔러 뷔르템베르크를 탈환한 뒤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카를 5세는 뷔르템베르크에서 페르디난트 1세가 갖고 있던 권리를 회복시키지 않았다. 머지않아 페르디난트를 토사구팽하고, 자신의 장남인 필리프에게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비롯한 모든 영지를 물려주려고 시도한 카를 5세의 의도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다.이때부터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카를 5세는 애초에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동생에게 제국의 통치를 위임했지만,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형에게 고분고분하는 순둥이로만 보였던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가 생각했던 것만큼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지난 30년간 독일을 통치하며 쌓아온 페르디난트의 덕이 이때부터 빛을 발휘했다. 성공한 2인자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인생을 살았던 페르디난트 1세는 상사인 자신의 형 카를 5세에게뿐만 아니라, 명목상 자신의 하급자인 독일 제후들에게도 권위를 내세우는 방식 대신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방식을 택했다.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며 제후들을 강압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했던 카를 5세에 비해[18] 페르디난트는 그 사이에서 대리인이자 중재자로서, 형 카를 5세의 의지를 수행하면서도 독일의 현실을 직시하고 형의 강경책을 완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카를 5세는 신교도에 대해 자비없는 탄압을 명했지만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등을 위해, 신교도 제후들에게 결코 적극적인 탄압을 실행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도 협력을 구했다. 페르디난트 1세가 이러한 덕을 쌓은 덕분에 카를 5세가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독일의 제후들은 신교, 구교 가릴 것 없이 모두 펠리페 2세를 반대하고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미 오래 전에 페르디난트 1세가 선거에서 차기 황제로 선출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카를 5세가 황제의 권위로 구실을 갖다 붙여 페르디난트 1세를 독일왕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선거를 실시한다 하더라도, 결국 황제 투표권을 지닌 것은 선제후들이었으므로 이미 제후들의 여론이 돌아선 상황에서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를 5세는 1553년 아들의 제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황제로서 사실상 실권을 모두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카를 5세는 1556년 1월 제위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동생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이어 8월에는 스페인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그의 아들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로 즉위했다. 네덜란드 지방은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지만 카를 5세의 마지막 강력한 의지[19]에 의해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이로써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이는 단순히 스페인계와 분가한 수준이 아니라,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광대한 영토가 새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국이 분단되며 가문의 재출발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영토를 통칭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퇴위한 형 카를이 스페인에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선제인 형을 존중하여 대관식을 미루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 의회도 카를 5세의 퇴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페르디난트 1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카를 5세의 퇴위 승인은 2년 넘게 미루어지다가 1558년 초에야 이루어졌다. 1558년에 형 카를이 스페인의 은둔지 유스테 수도원에서 사망하자 비로소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양위를 선언한 시점부터 페르디난트의 제위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황제로서의 공식 통치 기간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8년 남짓 이어졌다.
재위 기간에 페르디난트는 조카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과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와 재건에서 서로 우호적이며 협력하는 긴밀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미 노년에 접어들은 페르디난트 1세는 1560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기침과 고열에 시달렸다. 나중에는 누워 지낼 정도로 악화되자 장남 막시밀리안이 섭정으로 아버지의 업무를 대신했다.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1564년에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사후 시신은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성에 있는 성 비타 대성당에 먼저 사망한 왕비 언너의 곁에 매장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의 사망 이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막시밀리안 2세는 빈을 포함한 하오스트리아와 상오스트리아를, 페르디난트 2세는 인스브루크를 포함한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20]를, 카를 2세는 그라츠를 포함한 내지오스트리아[21]를 상속받았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들은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고, 페르디난트 2세에게는 티롤 분가를 이을 적법한 아들이 없었기에[22] 카를 2세의 내지오스트리아 분가에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상속받았다. 본가가 된 내지오스트리아 분가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3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오스트리아 전역을, 그의 남동생 레오폴트 5세가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를 상속받으며 재차 갈라졌다.[23]
8. 가족
8.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colbgcolor=#fff3e4,#331c00>
펠리페 1세 (Felipe I) |
<colbgcolor=#ffffe4,#323300>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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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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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레오노르[24] (Leonor of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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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의 마리 (Marie of Burgun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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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작 샤를[25] (Charles, Duke of Burgun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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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의 이사벨 (Isabel of Bourb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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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나 1세 (Juana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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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란도 2세 (Fernando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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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안 2세 (Juan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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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나 엔리케스 (Juana Enrique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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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Isabel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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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2세 (Juan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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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이자벨[26] (Isabel of Portugal) |
8.2. 아내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의 왕인 울라슬로 2세[27]와 그의 세번째 아내인 푸아-캉달의 안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자녀 중 장녀이다. 동복 남동생인 러요시 2세는 남편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인 마리아 여대공과 결혼하면서 겹사돈을 맺었다. 언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차가 28살이나 났고 앞선 2번의 결혼에서 후계자를 얻지못한 아버지 블라디슬라브 2세는 세번째 결혼에서 겨우 언너와 후계자 러요시를 얻었다. 언너의 어머니는 남동생 러요시 2세를 낳고 출산 합병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언너는 13살 때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10살의 어린 남동생 러요시와 함께 막시밀리안 1세의 빈 궁정에서 자랐다. 언너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들 중 한명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었고, 러요시 역시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 중 하나인 마리아 여대공과 결혼하기로 했다. 이렇게 언너는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지냈다. 언너는 12세에 손자를 대리하여 참석한 막시밀리안 1세와 빈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고, 18세에 린츠에서 막시밀리안 1세의 둘째 손자인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또한 언너의 남동생인 러요시 2세가 정식 남자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경우, 언너를 통해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계승권이 간다는 협약이 맺어졌다.[28] 페르디난트 1세와 언너 부부는 정략결혼으로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좋았다. 언너는 결혼한 이후로 무려 4남 11녀에 달하는 많은 자식을 낳았다. 자녀들 또한 유아사망율이 높았던 당시에 드물게도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아기를 지나서까지 성장했다.
언너는 남편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9년 전인 1547년에 사망했다. 언너 사후에도 페르디난트는 재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홀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후계자가 있으니 더이상 결혼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고, 추가적인 지지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내와의 관계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아내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8.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폴란드의 왕비 엘주비에타[29] (Elizabeth, Queen of Poland) |
1526년 7월 9일 | 1545년 6월 15일 |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
1남 |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
1527년 7월 31일 | 1576년 10월 12일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30] 슬하 6남 3녀[31] |
2녀 |
바이에른 공작부인 안나[32] (Anna, Duchess of Bavaria) |
1528년 7월 7일 | 1590년 10월 16일 |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33] 슬하 5남 2녀 |
2남 |
외지오스트리아[34] 대공 페르디난트 2세 (Ferdinand II, Archduke of Further Austria) |
1529년 6월 14일 | 1595년 1월 24일 |
필리피네 벨저[35] 슬하 2남 |
안나 율리아나 곤차가[36] 슬하 3녀[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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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녀 |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아[38] (Maria, Duchess of Jülich-Cleves-Berg) |
1531년 5월 15일 | 1581년 12월 11일 |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 빌헬름[39] 슬하 2남 4녀 |
4녀 |
마그달레나 여대공 (Archduchess Magdalena) |
1532년 8월 14일 | 1590년 9월 10일 | |
5녀 |
폴란드의 왕비 카타지나[40] (Catherine, Queen of Poland) |
1533년 9월 15일 | 1572년 2월 28일 | 만토바 공작 프란체스코 3세 |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 ||||
6녀 |
만토바 공작부인 엘레오노라 (Eleonore, Duchess of Mantua) |
1534년 11월 2일 | 1594년 8월 5일 |
만토바 공작 굴리엘모 1세 슬하 1남 2녀 |
7녀 |
마르가레테 여대공 (Archduchess Margaret) |
1536년 2월 16일 | 1567년 3월 12일 | |
8녀 |
페라라 공작부인 바르바라 (Barbara, Duchess of Ferrara) |
1539년 4월 30일 | 1572년 9월 19일 | 페라라 공작 알폰소 2세 |
3남 |
내지오스트리아[41] 대공 카를 2세 (Karl II, Archduke of Inner Austria) |
1540년 6월 3일 | 1590년 7월 10일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42] 슬하 4남 8녀[43] |
9녀 |
헬레나 여대공 (Archduchess Helena) |
1543년 1월 7일 | 1574년 3월 5일 | |
10녀 |
토스카나 대공비 조반나 (Johanna, Grand Duchess of Tuscany) |
1547년 1월 24일 | 1578년 4월 11일 |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슬하 1남 3녀[44] |
9. 매체에서
스페인의 방송사 rtve가 제작한 사극 드라마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에서는 스페인어인 인판테 페르난도(infante Fernando)라는 호칭으로 등장하며, 에릭 발바스(Eric Balbàs)가 연기한다. 초창기에는 스페인 왕위를 두고 형과 대립하나 형을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고, 이후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가 있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로 보내져 통치에 필요한 교육을 받다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받아 독일 종교 개혁 문제를 전담하게 된다. 전반적으로는 형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밀라노 공국의 상속 문제로 형과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형제간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결국 신성 로마 제국 제위 계승 문제로 완전히 갈라선다. 슈말칼덴 전쟁 막바지에 카를 5세가 자신의 맏아들 막시밀리안과 손잡은 독일 제후들에게 밀려 도망칠 때 자신을 믿지 못하는 카를 5세를 향해 일갈하면서 탈출을 도와주는 것이 드라마에서 형제가 대면하는 마지막이 된다. 이후 카를 5세는 퇴위를 발표하면서 제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겠다 선언하고 플란데런에서 만나기를 요청하나 '한번 깨진 도자기는 다시 붙일 수 없다.'고 말하며 단칼에 거절하지만, 마지막회에서 카를 5세의 서거 소식을 듣고 침통한 표정을 짓는다.
[1]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헝가리의 왕위를 차지했다. 다만 야노시 1세 (재위 : 1526년~1540년)와 그의 아들 야노시 2세 (재위 : 1540년~1570년)와의 왕위 분쟁으로 공식적으로는 헝가리의 왕이 아니었다. 한편 야노시 2세는 1570년 명목상의 헝가리 왕위를 페르디난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2세에게 양도하면서 그 이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헝가리 왕위를 계승했다.
[2]
페르디난트와 그 여동생
마리아는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야기에우워 왕조와 겹사돈이었다.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러요시 2세와 마리아 사이에서 적법한 후사가 없었기에, 페르디난트가 처남의 자격으로 3국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3]
우습게도, 그럼 독일어는 유창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카를이 모어로 사용한 언어는 모순적이게도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싸웠던 프랑스의 언어인
프랑스어였다. 프랑스어 외에는 주로 자신이 매일같이 탄압한
네덜란드의 언어
플람스어를 사용했다. 이는 카를의 고향이 현재의
벨기에 즉,
저지대 국가였기 때문.
[4]
대표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만 해도 집권 초창기에는 외국인이나 다름없었던 그에게 반항하는 귀족 반란이 일어났으나 제압하고 주동자를 처형하여 권위를 과시했다.
[5]
트라스타마라 왕조는 카스티야 왕국의 왕조였지만 동시에 아라곤 왕국의 왕조였다. 페르디난트 1세의 외할머니인
이사벨 1세와 외할아버지 페란도 2세는 부계 기준 6촌 친척이었다.
[6]
러요시 2세와 손녀
마리아도 이 때 약혼하였다.
[7]
물론 이 전에도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 전하(Seine Hoheit Herr Erzherzog Ferdinand von Österreich)로 불렸으나 이 후 오스트리아 대공 전하(Seine Majestät der Erzherzog von Österreich)로 불리게 되어 예우상의 대공이 아닌, 국가원수로서의 대공이 되었다.
[8]
프로이센 공국의 설립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형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의 사촌.
[9]
여기서
개신교의 어원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유래했다.
[10]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대관식 이전 로마왕(독일왕)으로 불렸는데 차기 주자라는 뜻이 있고 독일왕으로
군주라는 직위 뜻도 있다.
[11]
크로아티아 왕위는 1091년
라슬로 1세 시절부터 헝가리 국왕이 겸임해 왔다.
[12]
독일어로는 귄스(Güns).
[13]
오스만 제국은 이후 야노시 2세가 즉위한 이후 헝가리로 출병한 1541년에 헝가리를 삼분하여, 서부는 합스부르크 황가, 동부는 야노시 2세, 중부는 자신이 직접지배하게 된다.
[14]
여담으로 이때 오기에르는 오스만빠가 되어 돌아온다. 오늘날까지도 그가 남긴 기록이 전해지는데, 오스만에 대한 그의 평가를 한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완전 킹왕짱. 왜 우리는 저렇게 못하지?' 정도.
[15]
바이에른 공작이 가톨릭으로 남은 건 신앙심이라기보단 같은 가문이던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선제후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선제후직에 목말라 있었는데 성직 선제후 자리인
쾰른,
트리어 대주교 자리 둘 중에 하나를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끊이지 않게 계속해서 배출할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카를 5세의 회유책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16]
슈말칼덴 전쟁 후
비텐베르크 항복으로 종가인 에른스트계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대신하여 작센 선제후가 되었다.
[17]
대표적으로
팔츠 선제후국은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 형제 시절의
프리드리히 2세,
오토 하인리히 때는 루터파,
프리드리히 3세 때는 칼뱅파였다가
루트비히 6세 때 다시 루터파로 개종했다가
프리드리히 4세 때 또다시 칼뱅파로 회귀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18]
황제의 직속 군사력이 압도적이였다면 가능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강압적으로 나가려 했던 것이 카를 5세의 큰 실수였다. 황제의 직속 군사력은 사실상 스페인 군대에 한정되었는데 당시
스페인군은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독일까지 오기 위해선 기나긴 항해를 해야만 했고 스페인 귀족들이 아무리 카를 5세에게 헌신적인 충성을 바쳤다 한들 굳이 독일까지 원정을 가야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다.
[19]
본인의 고향이어서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의지가 강했다.
[20]
슈바벤과
알자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
[21]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트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일부
[22]
첫번째 결혼은
귀천상혼이었고, 두번째 결혼에서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23]
레오폴트 5세의 아들들인 페르디난트 카를과 지기스문트 프란츠가 모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손자
레오폴트 1세 대에 오스트리아가 재통합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토스카나 대공국같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지 않는 영토는 분할하되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분할 상속하지 않았다.
[24]
두아르트 1세의 장녀이자
페란도 1세의 외손녀이다.
[25]
주앙 1세의 외손자이다.
용담공 샤를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26]
주앙 1세의 손녀이다.
[27]
보헤미아 왕으로는 블라디슬라프.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에시 4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계 출신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의 맏아들이다.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레오폴트계의 후손이다.
[28]
여담으로 이때 러요시 2세의 숙부인 같은
야기에우워 왕조의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의 보헤미아, 헝가리-크로아티아 상속은 배제되었다.
[29]
독일식 본명은 엘리자베트. 어릴 때부터
간질로 고생했으며 어머니 언너의 사촌으로 5촌 외숙부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결혼했으나 시어머니 보나 스포르차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싫어했고 남편 지그문트 2세도 이미
리투아니아 귀족인 바르바라 리지비우를 사랑하고 있어서, 결혼 생활 내내 시어머니와 남편의 냉대를 받으며 살다가 지그문트가 자신의
지참금을 받으러 떠난 사이 간질발작으로 기력을 다해 19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때 엘리자베트를 보나가 죽였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후 지그문트 2세는 바르바라 리지비우와 결혼하지만 바르바라도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사망하자 결국 자기 어머니가 그리도 싫어하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자, 엘리자베트의 여동생으로 처제였던 카타리나와 결혼하지만 카타리나에게도 역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면서 이후 폴란드 왕위와 리투아니아 대공위는 귀족들에 의한 선출제로 넘어갔다.
[30]
백부
카를 5세의 장녀로 친사촌이다.
[31]
스페인의 왕비 안나,
루돌프 2세,
프랑스의 왕비 엘리자베트,
마티아스 등
[32]
여담으로 이 둘의 결혼 당시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계가 단절될 경우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유산을 넘겨주겠다는 결혼 협약을 작성했는데, 이는 안나가 언니 엘리자베트의 죽음으로 페르디난트 1세의 실질적인 장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고 아들들 역시 다산하여 부계가 한동안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특별한 일이 없었지만 약 200년 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을 때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사실상 사문화된 페르디난트 1세의 이 협약을 근거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다. 카를 알브레히트의 경우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언니이자
요제프 1세의 딸으로서 본디 상속권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컸다. 마찬가지로 요제프 1세의 사위였던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역시 아내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33]
안나의 증조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와 알브레히트의 할머니 쿠니쿤데 여대공이 남매이기 때문에 7촌이다
[34]
슈바벤과
알자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
[35]
귀천상혼
[36]
넷째 여동생 만토바 공작부인 엘레오노라의 딸로 외조카다.
[37]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안나(
마티아스의 아내) 등
[38]
마리아의 딸 마리 엘레오노라가
개신교 신자였던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와 결혼하고 그녀의 딸들도 모두 개신교 왕족들과 결혼하면서, 마리아는 1517년
종교 개혁 시작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는 드물게도 수많은 개신교 왕족들의 조상이 되었다. 일단 마리아의 외손녀인 프로이센의 안나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와 결혼해서
게오르크 빌헬름을 낳으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비롯한 프로이센 왕실의 직계 조상이 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
아우구스트 2세,
빅토리아 여왕도 마리아의 후손이다.
[39]
클레베의 앤의 남동생이다.
[40]
독일식 본명은 카타리나.
만토바 공작 프란체스코 3세와 결혼했다가 4개월만에 사별한 후, 큰언니 엘리자베트의 남편으로 형부였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재혼했다. 하지만 지그문트 2세는 카타리나가 뚱뚱하고 둔해서 매력이 없다고 여겼고, 카타리나도 지그문트가 언니 엘리자베트를 박대해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만들었다며 혐오해서 부부 사이는 나빴다. 또한 카타리나는 시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친정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게 하려고 애썼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그문트 2세는 카타리나를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라돔으로 보내버렸다.
[41]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괴르츠 백국,
트리에스트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일부.
[42]
둘째 누나 바이에른 공작부인 안나의 딸로 외조카다.
[43]
폴란드와
스웨덴의 왕비 안나,
페르디난트 2세,
스페인의 왕비 마르가리타,
폴란드의 왕비 콘스탄챠 등
[44]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비 마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