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스부르고 왕조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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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군주국 Monarchia Hispaniae Monarquía de Españ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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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국기 | 국장 | ||||
PLVS VLTRA 보다 더 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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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 1월 23일 ~ 1700년 11월 1일 | |||||
<rowcolor=#fff> 성립 이전 | 왕위 계승 전쟁 이후 | ||||
카스티야 연합 왕국 | 보르본 왕조 | ||||
아라곤 왕국 | |||||
<colbgcolor=#d7141a><colcolor=#fff> 위치 |
이베리아 반도 아메리카 대륙 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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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톨레도 (
1516년 ~
1561년) 마드리드 ( 1561년 ~ 1601년) 바야돌리드 ( 1601년 ~ 1606년) 마드리드 ( 160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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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주요 국왕 |
카를로스 1세 펠리페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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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스페인어, 포르투갈어[1] 등 | ||||
민족 |
스페인인(카스티야인, 아라곤인 등) 포르투갈인, 카탈루냐인, 바스크인 및 식민지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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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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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 |||
<colbgcolor=#fff,#1c1d1f> 스페인어 | <colbgcolor=#fff,#1c1d1f> Monarquía Hispánica | ||
라틴어 | Monarchia Hispania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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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16년부터 시작해 1700년에 끝난 스페인 왕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이다. 압스부르고 왕조의 압스부르고(Habsburgo)는 합스부르크의 스페인어식 발음이다. 스페인이 식민제국으로서 강대국으로 이름 날리던 시기로 스페인 역사상 최전성기였다.합스부르크 왕조의 본가(종가)로 펠리페 1세의 장남 카를 5세의 가계이다.
한때 이베리아 연합을 통해 포르투갈 왕국을 지배한 왕조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어로도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의 표기는 Habsburgo이지만 발음은 '압스부르구'로 스페인어와는 다르다.
압스부르고 왕조가 스페인을 다스린 시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이지 않았고[4] 가문을 대표하는 작위가 주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현지에서는 아우스트리아(오스트리아) 왕조(Casa de Austria)라는 표기를 더 선호한다. 당장 수도인 마드리드만 하더라도, 압스부르고 왕조의 위세가 정점에 달했던 16세기 후반~ 17세기에 조성된 대광장(Plaza Mayor) 일대의 구시가지를 부르는 명칭이 오스트리아의 마드리드(Madrid de los Austrias)이다.
이후 1700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결과 현 보르본 왕조로 이어지고 있다.
2. 시작
오늘날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시작은 1492년의 아라곤 연합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이사벨 1세의 결혼이었다. 비록 법적으로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없었지만 두 가톨릭 왕국 국왕의 결혼으로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는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통합되었다.[5] 이들은 헌신적으로 나라를 다스려 강력한 스페인 성장의 밑거름을 뿌렸다. 특히 1492년 10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함으로써 스페인은 앞선 항해기술을 활용해 중남 아메리카를 모조리 선점했고, 이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 덕분에 유럽 최대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한편 통일 스페인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였던 '공동왕'의 후계자 후안이 어릴 때 병으로 사망하고, 당시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왕비였던 장녀 이사벨이 출산 중 사망했기에 이사벨 1세 사후 차녀인 후아나에게 계승권이 돌아가면서 스페인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면서 아라곤 트라스타마라 왕조도 단절되었고, 페르난도 2세의 유언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1516년 어머니 후아나 여왕과의 공동통치 형태로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를 시점으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는 카를로스 1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물려받았고,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두 가문을 공식 분리한 뒤 펠리페 2세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3. 전성기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후 전 합스부르크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위를 겸하여 전 유럽의 세력 구도를 뒤바꿔 놓으며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영토만 보면 이때가 압스부르고 왕조, 아니 스페인 전 역사를 통틀어 최고 전성기였다.[6]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 마르틴 루터로 인해 촉발된 종교 개혁과 퍼져만 가는 독일에서의 개신교 사상,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전혀 바라지 않는 독일 영방국가 제후들과의 계속된 분쟁 등으로 식민지에서의 막대한 수입을 깡그리 지출한 탓에 국고로 돌아갈 돈이 없어 파산한 경우도 있었으나, 코무네로스 봉기(Guerra de las Comunidades de Castilla) 이후 강력한 자치 도시민과 귀족들을 약화시키는 겸 카스티야 내 수많은 농토와 마을들을(lugares/aldeas) 독립 시(villa)로 자치권을 파는 내부 행정 개편 장사로 만회했다[7]. 식민지에서 뽑아온 금은이 스페인 제국에 본격적으로 재정상 보탬이 된건 그 아들 펠리페 시대쯤 돼서 수은추출법이 개발된 다음이다.
한편 상술한 행정구역 개편과 자치권 판매는 단기적으론 귀족과 부유한 도시민들을 분노케 했지만 장기적으론 왕실의 세수를 늘리고, 무엇보다 농민들에게 압스부르고 왕가가 억압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유와 지방 자치의 수호자인 인식되게 하여 동시대 카스티야가 유럽에서 가장 세율이 높은 편임에도 불과하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낼수 있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압스부르고 왕가는 특히 펠리페 2세 시대 종교 기관의 복지 기능을 대폭 확장하며, 문화적으로 서민들과 상류층의 종교적 일치감을 이루어내어 내부적 안정을 공고하게 다질수 있었다. 기존 지역민들이 애용하던 지역 성당들을 대대적으로 수리, 확장하는 한편 새로운 수도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농부 성 이시도로 기념 축제 같은 행사에도 국왕이 남들과 똑같이 줄서서 기다리며, 기적이 발생했다는 우물에서 물을 떠먹는 등 펠리페 2세 시대에 종교행사를 매개로 한 대중친화적인 서민 퍼포먼스가 많았고, 왕실 아래 다른 대귀족들에게도 비슷한 행동을 종용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권의 전체적 쇄신 노력과 더불어 펠리페 2세의 개인적으로 경건하고도 검소한 성향이 합쳐저 이루어낸 성과였다. 당대 스페인은 종교 관련 대규모 내부 동란, 내전을 거의 겪지 않았다. 스페인은 또한 압스부르고 왕실이 들어올 때와 17세기 중반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극심하게 달했을때 포르투갈, 카탈루냐, 남부 이탈리아의 반란을 제외하곤 큰 내전 한번 겪지 않았고, 17세기의 동시다발적 지역 분리 반란도 포르투갈을 제외하고 모두 진압했다. 당대 스페인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종교적, 국가적 안정성(?)을 자랑했던 곳은 포르투갈뿐이었다.[8]
반면 스페인 본토와 16세기 초반 압스부르고 왕조가 들어오면서 정복한 이탈리아에선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이런 내부 행정, 통치 체계, 사회적 개혁의 핵심적인 촉매이자 중심이었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종교개혁으로 도전 받은 네덜란드에선 대규모 반란과 독립 전쟁이 터졌다. 이는 당시 전투적 가톨릭 이념과 스페인 제국의 불가분적 관계를 반증한다.
당시 스페인은 오늘날 베네룩스 3국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유한 알토란을 유지하면서 레판토 해전( 1571년)에서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켜 상징적인 제동을 거는 데 성공[9]하고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해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하는 등(1580) 절정의 전성기를 달렸으나, 억압적인 통치와 전비를 감당하기 위한 가혹한 과세 정책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1581~1648)이 터졌고, 전 네덜란드가 전화에 휩싸이자 스페인의 경제력은 급속히 추락해 결국 1575년 두 번째 파산이 발생했다.
게릴라전에 능한 네덜란드인들은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의 협력까지 얻어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88년 스페인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 무적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영국-네덜란드 해군과 해적에 패배하면서 세 번째 파산과 함께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스페인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후 잉글랜드, 네덜란드를 비롯해 신생 모직공업의 강자들의 등장으로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스페인 본토 경제의 붕괴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 쇠퇴
<colbgcolor=#d7141a><colcolor=#fff> 카를로스 2세 |
"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하느님께 전구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풍토(風土)를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을 들어주셨다. 다음에는 가장 좋은 과일과 밀을 부탁했고, 가장 뛰어난 말과 칼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들도 모두 들어주셨다.
그들은 다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을 부탁했고, 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가장 용감한 남성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도 들어주셨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좋은 정부(政府)를 부탁했다. 그러자 당황한 성모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씀하셨다. '그것은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암흑기 당시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우화
그들은 다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을 부탁했고, 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가장 용감한 남성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도 들어주셨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좋은 정부(政府)를 부탁했다. 그러자 당황한 성모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씀하셨다. '그것은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암흑기 당시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우화
펠리페 2세의 치세와 죽음(1598년) 이후로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1618~1648) 등과 같은 유럽에서의 분쟁에 계속해서 간섭하면서 식민지의 영토와 대서양을 횡단하는 상선들이 계속해서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에게 약탈당한 탓에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펠리페 2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 총신)들에게만 정치를 맡겨 국정은 파탄에 이른다.[10]
그 중에서도 몇 없던 능력있고 출중한 관료들의 개혁 시도는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펠리페 3, 4세의 무리한 중앙집권화 시도는 결국 포르투갈이 브라간사 가문을 왕가로 추대, 독립을 선언하여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다( 포르투갈 독립 전쟁).
여기에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나폴리의 독립시도가 겹쳤고, 또한 당시는 30년 전쟁의 한복판에 있어서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지원하고 나섰다. 1643년의 로크로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을 격파함으로써 스페인의 영광도 완전히 저물기 시작했고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후 이베리아 연합은 실질적으로 붕괴하였다. 포르투갈과의 전쟁은 6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이미 스페인의 황금기는 막을 내린 뒤였다. 결국 포르투갈이 독립하면서 이베리아 연합은 해체됐고, 스페인은 포르투갈로부터 세우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했다.
17세기 중후반에는 국왕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가 36년 동안 통치하였다. 카를로스 2세는 능력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에서 보기 드물게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전 군주들은 총신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귀족 과두제에 가까워진 스페인 왕국을 임금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고위 귀족들은 카를로스 2세를 적대시하였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카를로스 2세의 치세는 실패로 끝났다. 거기에다 그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자손조차 남기기 못고 사망했다. 이로써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이후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로 넘어가지만 유럽의 두 거대 파워 스페인과 프랑스의 연합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 각 국가는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이 일어났다.
5. 특징
5.1. 가톨릭 이데올로기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가톨릭 신앙의 강조이다. 이에 따라 개신교도와 유대인 및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사실상 스페인 왕국 성립 내내 계속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펠리페 2세 시대에 두드러졌다. 따라서 세간에서 중근세의 종교적 광신을 언급하는 데 스페인은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스페인 종교재판 같은 유머도 여기에서 기인한다.스페인 내에서도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미국-스페인 전쟁 등을 계기로 추락하는 자국의 위상과 유럽 세계의 근대화를 목도한 지식인으로부터 몰락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간주되는 '가톨릭에 대한 광신에 찬' 압스부르고 왕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었다. 일례로 1948년에 프랑코 정권을 피해 망명해 있던 역사학자 아메리코 카스트로는 España en su historia[11]를 출판하면서 이슬람을 몰아낸 가톨릭 공동왕과 그 이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교적 폐쇄성과 광신으로 인해 실패한 체제라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가톨릭 신앙 강조는 펠리페 2세의 개인 성격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정체성이 가톨릭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언어, 문화, 정치 체계가 모두 달랐던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등의 이베리아 반도의 소국들이 통합되어 만들어 진 나라이다. 15세기 후반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한 나라로 통일 될 때도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의 통합만 이루어졌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정책이 달랐고, 당장 카스티야인과 아라곤인들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2]. 당장 이베리아 본토 내에서만 해도 이렇듯 정치적 통합에 장벽이 많았는데, 아라곤령의 남이탈 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지였던 저지대 지역, 부왕 치세에 더욱 확장된 식민지, 펠리페 2세의 재위 중 편입한 포르투갈까지 포함한다면 스페인이란 나라의 실질적인 정치적, 사회적 구심점은 레콩키스타와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십자군적 투쟁이라는 공통적인 역사적 경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치체로서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으며, 펠리페 2세의 유별난 광신성은 이러한 근본적인 역사적 문맥에 개인적인 성향이 가미된 것 정도라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스페인의 종교적 열기는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도 그대로 이어져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보다 50년 가량 앞선 가톨릭 군주와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 시절에 이미 성직자의 교구 부재 문제, 사제들의 무지함, 교회 내의 위계질서 확립 등 기존 교회가 시달리고 있던 많은 문제를 혁파하고 자체적인 재번역판 성경 출간[13], 알칼라데에나레스 대학교 설립, 인문주의 학문적 토양에 기반한 신학 교육 체제 정비 등 훗날 가톨릭 교회 전체가 직면할 개혁 자체를 대다수 이룬 상태였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가톨릭 세력이[14] 스페인의 리더십을 따른 건 신앙에서도 스페인이 선례를 보여주어 여러 면에서 따를 만한 입장에 되어 있었던 점 또한 크다.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 중 압스부르고 왕조 스페인은 다른 국가들이 시달렸던 식량 폭동도 적었고, 전통적 자치권을 둘러싼 아라곤과 남이탈리아의 단편적 반란들을 제외하고는 내부적으로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다. 많은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스페인의 안정은 종교적 안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기록과 발언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의 원칙은 스페인 외의 가톨릭 국가에도, 그리고 개신교 국가에서도 똑같았다.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교 개혁은 단순히 개인들의 신앙을 쇄신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를 쇄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개혁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상이였고, 타 종파는 묵인될 수 있을지언정 관용되지는 않았다[15]. 이 점은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같았다. 종교개혁이 휩쓸고 간 16세기 ~ 17세기 유럽은 종파적 배타성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현대적 가치관에서 위의 국가들은 관용과 다양성의 긍정적 선례로 평가받지만, 전성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예수회의 학문적 지원을 등에 업고 폴란드를 스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같은 공격적이고 본격적인 가톨릭 단일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귀족들, 에르데이 공국과 합스부르크령 헝가리의 헝가리인 개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종교 개혁을 폴란드 내에서도 확산시키려는 개신교 귀족들, 그리고 양쪽 라틴계 기독교들 사이에 쩌리가 되지 않고 정치적, 종교적 자치를 확보하려는 현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 계열 코자키 귀족들이 정신없이 삼파전을 벌이면서 국력의 막대한 부분을 손실했다 [16].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관용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불평등한 공존이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 아니다. 베네치아, 함부르크, 리가 등 종교적 관용의 보루로 평가되는 도시 국가들도 역시 경제적 이유로 이교도의 존재가 허락된 것이지,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고 공권력도 은근슬쩍 동조한 반개신교, 반가톨릭, 반유대인 폭동은 빵값 오를 때마다 주기적으로 터졌다.
게다가 종교 개혁 시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반격의 핵심이 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주교의 자기 교구 주재, 대사 문제, 사제 교육 등 많은 법규 자체가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파격적인 정치적 지원에 힘 입은 스페인 출신의 주교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의 교회 구조를 유지하고 싶었던 친 교황청파와 프랑스 주교들을 상대로 치열한 키배를 벌여 규정된 반쯤은 스페인이 주도한 개혁이었던 만큼, 이 당시 스페인 입장에서 가톨릭 신앙과 국가적 행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페인의 이단심문 희생자 숫자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지곤 했는데, 이를테면 지금도 돌아다니는 "스페인 이단심문에 40만이 희생되어..." 라는 레파토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끔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이 당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더 광신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Helen Rawlings의 통계[17]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스페인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1540년부터 1700년까지 연간 5.1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스페인이 더 광신적이였다고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18]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 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마녀재판에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 ~ 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 ~ 1647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피터 마샬(Peter Marshall)[19]
「종교개혁」, 피터 마샬(Peter Marshall)[19]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끔찍하기는 했으나 타 국가보다 스페인이 더 광신적이라 하긴 힘들었고, 마녀재판에는 회의적이였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가장 끔찍하게 마녀를 사냥하던 지역 중 하나이다.
<colbgcolor=#d7141a><colcolor=#fff>스페인 종교재판[20] |
이 이미지에서 보듯, AD 1540년 ~ 1700년의 스페인 종교재판에서는 826명의 사망자가[21] 유대교, 이슬람교, 루터교, 비공인 영적계시[22], 이단은 아니지만 교회의 정식 가르침에 반하는 종교적 의견(propositon), 중혼(bigamy), 교사죄(Solicitation), 미신(Superstition) 등을 합쳐서 발생했을 뿐이다. 해당 항목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proposición은 엄밀하게 따지면 개신교나 이슬람, 유대교 같은 다른 종교, 이단과의 연결점은 찾기 힘들지만 그래도 어쨌든 교회 가르침과 어긋나는 신앙관을 마음대로 설파했던 행위를 말한다. 이 시대 종교재판소 판례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편인 가장 전형적인 예로선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가볍게 혼외정사하는 건 대죄가 아니다.", "뱃사람이 외국에 나가 있는데 현지처 좀 만들고 할 수 있다." 같은 주로 성, 가정 윤리를 다룬 내용이다.
그리고 종교재판소는 현대의 형사법 체계처럼 자체적으로 죄인을 찾아 기소하는게 아니라, 순회 재판소로서 타인의 밀고나 인근 일대 마을 사람들 모아둔 공공장소에서 가벼운 처벌, 용서를 약속한 댓가로 이루어지는 자백이 있어야만 성립했다. 원래 종교재판소의 기원이 된 유대교, 무슬림 출신 가짜 개종자 탄압은[23] 해당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 몇몇 시기에만 국한되고, 나머지 희생자 대부분은 이렇게 자체 분류가 안 된 비공식 이단 (informal heresy)에 속했다는 걸 보면 종교재판소의 역할이나 실제 돌아가는 모습은 현대 국가의 정치경찰 같은 무시무시한 세뇌와 공포정치의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들끼리 서로 지역 사회의 이권이나 다툼이 생겼을때 꼬투리 잡아 밀고하는 민사재판소에 더 가까웠다는걸 보여준다. 물론 원래 종교재판소 설치와 확대를 추구한 가톨릭 공동왕, 황제 카를로스,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소를 통해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중구난방의 주술적, 미신적 종교행위를 없에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공식 신앙관과 예법을 강제할 기관으로 사용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목적, 교권을 통한 왕권 강화적 의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종교재판관들이 왕실과 세속 정부에 그리 일방적으로 휘둘리지도 않았고,[24] 무엇보다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일반적인 스페인 마을 사람들은 평생 한, 두번 볼까말까한 기관으로 전락하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리고 종교재판소가 상징하던 당시 스페인의 국가 가톨릭주의 이념을 현대의 관점에서 낙후된 중세의 유물쯤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종교재판소란 기관 자체가 상당히 근대적이었다. 유럽에서 거의 최초로 고문의 강도와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횟수[25], 취조 방식과 상황에 따른 증언의 진실성, 소속 감옥의 위생과 청결 같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죄수 인권을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제도화한 법정 체계가 당시 스페인 종교재판소이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 법대를 나온 전문 관료 집단(letrado)이 대거 참여했던 조직적 성격을 반영하여 매우 체계적이고 자세한 문서화된 기록 체계를 남겨 지금까지도 당시 스페인과 중남미의 사회상, 종교 문화, 정치와 교회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 컬렉션을 남기기도 했다. 근본적인 목적이 그릇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다 때려 죽이자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정통 신앙관을 주입하여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끔 하는 사목적 기관이었던 만큼, 여전히 교화보다 그냥 처벌을 중요시하며 극형을 종종 내리던 당대의 세속 재판소와 달리 어느 정도 교화와 죄수의 인권에 신경썼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면도 있었다.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이라는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정신나간 종교 내전을 겪고 종교 문제 자체에 질린 만큼 질린 후에야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의 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귀족들의 자치적 전통이 워낙 강해서 이렇게 종교와 관련된(종교 뿐만 아니라 사실 국정 모든 일에 관련해) 중앙의 확고한 개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 졌을 수 있었던 것이지, 이러한 특별한 케이스 몇몇을 유럽 전반에 대입하면 곤란하다. 되려 이 종교적 관용의 가장 큰 사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17세기 초반 이후 중앙에서 포괄적인 차원은 아니지만 (중앙 권력 자체가 없으니) 사회적인 차원에서 비가톨릭 교도들에게 대한 차별이 만연해 졌고, 시기스문드 3세의 치세 때는 이러한 중앙 권력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가톨릭 세력의 강화를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 때문에 철회해야 됐다. 유럽 전체의 정치적인 구조 자체가 중세적 느슨함에서 근대의 중앙 집권 국가로 전환하던 전근대 시기에서, 이렇게 역사적인 큰 여건을 거스르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교분리란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에 스페인만 유별나게 광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스페인은 종교에 비관용적이었지만, 유럽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비관용적이였다는 편견은 부당하다.
5.2. 왕가의 근친혼
<colbgcolor=#c70243><colcolor=#fff>조상들의 근친혼을 정리한 표[26][27] |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이 특징이었는데, 특히 근친혼이 성행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가는 상대적으로 근친혼이 덜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비해 주걱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도 근친혼이 심했지만 압스부르고 왕가의 멸망 이전까지 야기에우워 가문[28], 비텔스바흐 가문[29] 등 외부 혈통과 성공적으로 통혼하면서 비교적 중화된 반면, 압스부르고 왕가는 카스티야 연합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이전 왕조인 트라스타마라 왕조부터 누적된 근친혼에다가 카스티야, 아라곤과 통혼이 잦았던 포르투갈과의 정략 결혼, 그리고 외부 혈통이었던 프랑스 출신의 왕비들이 모두 후계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후계자를 낳았음에도 후계자가 요절하는 불운까지 더해져 근친혼으로 파멸했다.
아울러 수십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인지 뒤로 갈수록 무능한 왕[30]이 출현했으며 결국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 만에 단절되었다.[31]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돌프 1세부터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영지를 확장시키고 가문을 번영시켰다. 이런 혼인관계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핏줄이 가톨릭 가문의 오만 곳으로 퍼졌는데, 이게 오히려 근친상간으로 인한 왕실의 멸망을 부추기는 결과가 되었다. 통념과 다르게 합스부르크 왕조의 근친혼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는 같은 가문임에도 다스리는 영토가 다르니 통치에 대한 의견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데, 결혼을 통한 동맹은 왕조 내에서 그 의견 차이를 최대한 수습하고자 한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참금과 혼수를 가문 내에서 유통하게 하려는 의도, 살리카법을 따르지 않는 스페인의 특성상 추후 여왕이 즉위하였을 때 스페인 왕좌가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의도 역시 존재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매우 근시안적인 생각이지만, 당시는 근친혼이 초래하는 위험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시점이었고, 실제로 불임이었던 카를로스 2세의 장애조차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또한 압스부르고 왕조가 재위하던 시기 유럽은 한창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 무렵으로, 압스부르고 왕조와 동등한 결혼을 할 만한 가문의 다수가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종교가 다른 가문 간의 통혼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32] 까다로운 것이었고 특히 가톨릭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던 압스부르고 왕조로서는 가톨릭 가문과의 통혼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가문들이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에서 압스부르고 왕조의 결혼 상대는 종교 개혁 이전에 비해 매우 좁혀질 수밖에 없었고, 불운으로 펠리페 2세의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나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부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등 비교적 유전적으로 관계가 먼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왕녀들마저 장성한 남성 후계자를 얻지 못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녀들과의 재혼으로 눈을 돌린 결과가 바로 중첩된 근친혼이었다.[33] 압스부르고 왕조는 그 이외에도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와도 통혼하였지만, 중간에 아비스 왕조가 대가 끊기면서 이베리아 연합이 형성된 데다가, 아비스 왕조 역시 이미 기존의 카스티야, 아라곤 왕조인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강한 혈연 관계를 지니고 있었기에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콩가루 관계가 계속 잇따르면서 유전적 결함이 중첩되어 유전병을 가진 후손들이 대거 태어났고,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가중되었다. 거기다 왕족들이 외국 왕족들이나 당대 평민들보다 더 요절하는 빈도가 늘어나니까 손자뻘 늦둥이 아들을 겨우 낳아서 대를 잇는 일이 빈번해졌다. 카를 5세와 카를로스 2세는 고조부와 현손 관계인데, 펠리페 2세와 펠리페 4세가 각각 50살, 56살에 손자뻘 늦둥이 아들을 겨우 낳아서 이 둘은 자그마치 161년 차이로, 다른 나라 왕가 같았으면 7~8대손차이가 날 수 있는 나이차였다. 161년 차이가 4세대 차이라고 하면 후계자를 낳은 시기가 평균적으로 40.25세로 2023년 현재 기준으로도 늦은 편에 속하며, 영아 사망률 보정 상태로도 평균 혼인 연령이 19살 전후에 평균 수명이 50대 초반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거의 40년 차이는 거의 손자뻘이다. 평균 득자녀 시기 자체는 더 이르지만,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나 펠리페 4세의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처럼 후계를 잇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카탈리나 미카엘라처럼 여성[34]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다.[35] 이렇다보니 세대를 거듭할수록 국왕의 재위 나이도 점점 어려졌다. 만 나이로 펠리페 3세가 20살, 펠리페 4세가 15살, 카를로스 2세는 무려 3살에 즉위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걸작인《시녀들》의 모델로 유명한 스페인의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36]의 연작 초상화를 봐도 성장할수록 도드라지는 주걱턱 때문에 항상 고개를 살짝 돌려서 최대한 주걱턱이 드러나지 않게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안 그래도 주걱턱을 가졌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근친상간을 반복하면서 후손들에게 더욱 심한 주걱턱과 유전병을 물려주게 된 것이다.
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주걱턱이 거의 질병 수준이라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다. 게다가 카를로스 2세는 생김새도 흉측했을 뿐만 아니라[37]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대는 카를로스 2세에서 끊기게 된다. 근친혼의 극치가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낳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5.3. 지방 통치
지방 통치에 있어서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은 후대 왕조인 보르본 왕조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일례로 당시 스페인 왕국[38]은 카탈루냐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허용해줬다. 스페인 압스부르고 가문이 단절되고 프랑스계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자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완전히 박탈되었다.현재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고 말하는 1714년이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보르본 왕조의 통치가 시작된 해다. 이 말은 역으로 압스부르고 왕조 시절에는 카탈루냐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누렸음을 뜻한다. 비단 카탈루냐 뿐만 아니라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획득한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사르데냐 왕국 같은 이탈리아반도의 영토와 프랑슈콩테 같은 구 부르고뉴 공국 시절 상속한 땅들도 거의 대부분 광범위한 지역 자체가 기본적인 통치의 기조였다.
당장 왕실에게 집중적으로 착취당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의 기반이 되었던 카스티야 연합 왕국도 1520년 왕실 자체의 정통성을 위협했던 코무네로스 반란(코무네로스 운동)[39] 때, 카스티야 삼부회(cortes generales)에서 투표권을 가진 국왕 직할 자치 도시 18개 중 14개[40]가 참여했던 규모에도 불구하고[41] 주동자 몇몇만 극형에 처하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삼부회 정규 제도화 및 조세 감찰권 강화, 지역민 자치 같은 반란군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만큼 유연했다.
6. 역대 국왕
<rowcolor=#fff> 대수 | 왕호 | 재위 | 비고 |
1대 | 카를로스 1세 | 1516년 ~ 1556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직 |
2대 | 펠리페 2세 | 1556년 ~ 1598년 | 포르투갈 압스부르구필리프 왕조의 시조, 포르투갈 국왕 필리프 1세 |
3대 | 펠리페 3세 | 1598년 ~ 1621년 | 포르투갈 국왕 필리프 2세 |
4대 | 펠리페 4세 | 1621년 ~ 1665년 | 포르투갈 국왕 필리프 3세[42] |
5대 | 카를로스 2세 | 1665년 ~ 1700년 |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마지막 왕 |
[1]
이베리아 연합(1580 ~ 1640) 시기.
[2]
현재의 멕시코와 미국 서부
[3]
펠리페 2세가 1월 16일에 즉위하면서 완전히 통합된 스페인 왕국이 건국되었다.
[4]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명칭은
합스부르크 백작위가 대표적인 작위였던 초창기에나 쓰였고, 이후로는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 유행한 18세기~ 19세기에나 나타난 가문명이다. 특히
프리드리히 실러의 유명한 1803년작 역사 담시 합스부르크 백작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전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명칭을 쓰는 가문은 있었지만, 잉글랜드 워릭셔 출신인 덴비의 백작들이 족보를 위조하면서 쓴 명칭에 불과했다.
[5]
이후, 펠리페 2세 시기에 포르투갈 역시
스페인의 영향권에 들어서게 된다.
[6]
단, 신성 로마 제국에서 카를로스 1세가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은
저지대 뿐이었다.
중세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 행사는 자신의 영지로 제한되었고, 합스부르크 왕실의 핵심 영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이미 1521년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겨주었다. 사실 카를로스 1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완전히 이행되던 과도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황제라는 칭호에 의미를 두었을 뿐, 당시 독일을 휩쓸던
종교 개혁 문제와 독일 내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떼어준 이유가 스페인에서 나고 자랐던 페르디난트 1세 견제와 같은 정치적인 이유와 더불어 방대한 영토 통치의 한계 등 행정적인 이유 외에도 카를로스 1세 본인은 독일에서 벌어지는 종교 문제에 관심도 없었고 처리하기도 귀찮아서 동생에게 짬때린 결과다.
[7]
비슷한 시기
국교회나
개신교로 돌아선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이나 독일계 공국들은 이런 땅과 자치권 장사를 주로 몰락한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 땅을 삥뜯으면서 했다.
[8]
Helen Nader, Liberty in Absolutist Spain (1993), William A. Christianson, Local Religion in Sixteenth-Century Spain (1981) 출처
[9]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너무나 빠르게 재건되었고
1574년, 튀니지를 잃어버리면서 이 승리의 위상은 빛이 바랬다.
[10]
펠리페 3세는 레르마 공작에게, 펠리페 4세는
가스파르 데 구스만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하였다. 구스만은 비록 세도가이긴 했어도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개혁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레르마는
매관매직과 코드 인사로 국정을 말아먹고 스페인 몰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1]
영어권에는 The Structure of Spanish History,《스페인사의 구조》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12]
특히 아라곤령에서 지방 관리들이 종교 재판관들의 마을 출입 등을 불허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때마다 내새운 명분이 외국인 관리들의 불법 침입이라는 점만 해도 그렇다.
[13]
이게 그 유명한 콤플루텐스 성경으로, 기독교 초창기 성 예로니모가 발간한 불가타 성경 이전 유럽에서 최초로 신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재번역한 판본이다.
[14]
그나마 프랑스 내에서도 devots, 즉 신실파라 불리는 친 스페인 급진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 전쟁 이후 리슐리외의 집권 까지 프랑스 정계 내의 큰 한 축이었다.
[15]
마르틴 루터에 의해 창안된
루터교회를 제외하면,
종교 개혁 운동은 사회 운동으로의 성격도 같이 띄고 있었다.
[16]
대홍수를 불러 일으킨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자키 대봉기도 그렇고, 반왕실 반란들이나
스웨덴,
루스 차르국이 연루된 왕위 계승 전쟁들 같은 동시대 이중 공화국의 국내외 분쟁들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가 있었고, 충분히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정치적 차원에서 교섭하거나 적당히 타협해서 넘어 갈 수 있었던 문제들도 종교적 단초가 들어가 더 격렬한 분쟁으로 심화 되는 등, '관용을 통해 종교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유럽 사학계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현대에는 거의 논파된 테제이다.
[17]
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
[18]
1700년도까지를 기준으로 할 때, 스페인에서 이단심문 + 마녀사냥으로 죽은 사람을 모조리 합쳐서 최대한도로 올려잡아도, 그리고 통계가 빠진 1531 ~ 1540년의 사형 희생자를 연간 40명으로 계산해도, 인구가 훨씬 적은 스코틀랜드에서 1590년부터 1680년까지 마녀사냥으로 처형한 숫자(4,400명)보다 적다. 씨앗 줍기나 영주의 사냥터에서 밀렵, 지역사회 내 파벌 싸움 때문에 극형을 훨씬 더 자주 남발한 세속 법정보다 훨씬 더 온건했던 편이다.
[19]
영국 워릭 대학 역사학과 교수
[20]
출처: Helen Rawlings, <The Spanish Inquisition>
[21]
1,604명을 사형시켰는데, 그중 778명은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고 826명이 사람이다.
[22]
Alumbrados, 영어로는 Illumnist라고 하는 15 ~ 16세기 특히 귀족 여성층 사이로 유행했던, 영적으로 특출난 사람은 교회의 개입 없이 직접 하느님과 교접할수 있다 주장하던 신비주의 집단이다. 당연히 교회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반하는 주장인데다가 개신교스러운 색이 풀풀난다는 이유로 탄압당했다. 그러나 현대 와서는 바르톨레메 베네사르, 조세프 페레즈 같은 종교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알룸브라도가 사실 구체적인 하나의 의식적인 집단이 아니라, 그냥 당시 영적 계시 같은 신비주의적 풍토가 강하던 카스티야 가톨릭 교회에서 어찌 교회와 대놓고 충돌하진 않으면서 신비주의적 신앙을 강조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같은 사람들은 제도권에서 받아줄 뿐만 아니라 시성까지 된 반면, 도저히 교회의 정식 가르침 내에서 받아줄수 없을만큼 막나갔던 영적 신비주의자들은 찍어 누르고 탄압하기 위해 법적, 행정적으로 만들어낸 집단이란 설도 유력하다.
[23]
알함브라 칙령 이후 아예 개종도 안 하겠다고 버티는 유대인, 무슬림들은 종교재판소의 관할이 아니라, 그냥 추방 대상이었다. 종교재판소가 담당했던 건 어디까지나 말로만 개종해놓고 뒤로는 유대교,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거짓 개종자 색출이었다.
[24]
원칙적으로 최고심문관(Suprema, Inquisidor general) 임명을 포함한 전반적인 통제권은 로마가 아니라 스페인 왕실에 있었지만, 어쨋든 신앙을 담당하는 부서인 만큼 교황도 어느 정도 보고를 받고 간섭을 할 권한이 있었다.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았고, 이런 애매모호한 종교재판소의 성격은 분명 주권 자체는 세속 왕실 정부에 있지만 그 정당화 기제, 행정 인력, 통치 인프라 같은 정치의 핵심적인 면에서 교회와의 긴밀한 협조에 의존한, 반쯤
신정국가적이었던 당시 스페인 국체의 미묘한 정체성의 상징 그 자체였다.
[25]
흔히 피칠갑 고어 고문쇼 일색으로 묘사하는 훗날 네덜란드와 영미 같은 적대적인 개신교권에서 나온
프로파간다와 달리, 당시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 고문은 첫 재판 이전 딱 한 번만 할 수 있었고, 고문만을 통해 얻은 자백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도 안 되고, 고문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얻어낸 자백이나 다른 결정적 증거, 증언이 동반돼야 정식으로 기소할수 있었다. 서양권에선 나름 유서 깊은 스페인 가톨릭 폄하 사관(La leyenda negra, Black Legend) 말마따나 종교재판소가 그냥 스페인 왕실과 폭압적인 가톨릭 교회가 같이 손잡고 종교를 통해 백성들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관이었다면 이렇게 정교하면서도 오히려 재판소 측에 불리한 규정과 조항을 만들지도 않았다.
[26]
합스부르크 가문의 철자가 Habsburg가 아닌 Hapsburg로 되어 있다.
[27]
그림의 1st Cousins는 사촌, 2nd Cousins는 육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인명이 영어식으로 번역된 이름으로 표기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영어식으로 찰스 2세(Charles II), 펠리페 2세는 필립 2세(Philip II)라 적는 식. 동명이인의 구분을 위해 재위한 국가의 국명을 붙여 구분한다.
[28]
페르디난트 1세와 7촌 관계였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의 결혼이 이에 해당한다. 비교적 먼 친척 관계였기에 4남 11녀라는 많은 자녀가 태어났고,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성했다.
[29]
페르디난트 2세의 아버지 카를 2세 대공과 3촌 관계였던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의 결혼,
페르디난트 2세와 5촌 관계였던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와의 결혼이 이에 해당한다.
[30]
최근들어
펠리페 2세와
펠리페 4세는 재평가를 받은 반면 펠리페 3세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31]
한편, 이 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었던
레오폴트 1세는 비교적 먼 6촌 친척인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와 결혼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를 이었다.
[32]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
요제프 1세의
부인과
카를 6세의 부인 역시 개신교 신자였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결혼한 바가 있고,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부인도 개신교 신자였다. 개신교는 아니지만 요제프 안톤 대공의
첫 번째 부인이 정교회 신자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결혼은 소수였으며, 절대다수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했다.
[33]
단, 프랑스 역시 통혼 상대를 따져야 했던 건 마찬가지라 비교적 멀다는 것이지 친척이기는 했다. 예를 들어 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엘리자베트는 6촌이었다.
[34]
남성이 여성에 비해 치사 유전의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35]
득손 당시 부친의 연령 역시 의외로 유전병에서 중요 요인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생식 퇴화가 늦게 온다지만 40대 중반을 넘어가면 마찬가지로 정자의 활동성 저하, 염색체 비분리, 유전자 발현이나 돌연변이 등으로 인해 자손의 유전병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유전자도 빅토리아 여왕 이전에는 가족력이 없었으나 그녀의 부친이 만 50대가 넘어서 그녀를 출산했기에 빅토리아 여왕에게 돌연변이가 생겼다.
[36]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펠리페 4세의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 역시 3촌이자 4촌이자 6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시집갔다. 결국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불과 22살의 나이에 출산 도중 요절했으며, 그녀의 자식들도 대부분 1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마르가리타의 살아남은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했지만, 남편과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고 심지어 가정폭력까지 당했다고 한다.
[37]
동복형제들과 비교해도 유독 외모가 좋지 못했고 장애도 훨씬 심했다. 막내인 만큼 펠리페 4세가 고령일 때 태어난 탓에 유전자 결함이 더 심해진 것을 알 수 있다.
[38]
압스부르고 왕조 시기 스페인 왕국은 카스티야, 아라곤 왕국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고, 보르본 왕조에 들어서 그 두 왕국을 폐지하고 완전히 스페인이라는 이름만 남겼다.
[39]
코무네로스 운동은
이사벨 여왕 사후 오랫동안 외국인
섭정 정치의 혼란에 시달린 이후 드디어 새로운 왕으로 카스티야에 온 미래의
카를 5세,
스페인어로는 카를로스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 자금을 위해 카스티야 삼부회를 통하지 않고 무작정 새로운 세금을 공포하자 꼭지가 돌아버린 카스티야 지방 자치 도시들이 단체로 일으킨 반란이다. 아빌라에서 혁명 정부를 꾸린 이들은 당시 외국인 출신 왕이자 여전히 10대였던 카를로스 1세의 권력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수준으로 제약하려고했고, 이중에서 급진파는 아예 카를로스의 정통성 있는 통치권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경제적 영향력도 카스티야 전체 세수의 80%를 이들 자치 도시들이 담당했고,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경제적 문제에 따른 농민 반란 정도가 아니라 이전 카톨릭 공동왕 시절 교육, 행정 개혁을 통해 양성된 전문 법조인, 행정 관료들이 속해있던 엄연한 도시 자치 정부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던 만큼 실제로 마음 먹으면 진짜 국정을 대신 집어먹을 역량도 있었다. 1520년 여름에 봉기한 후 그해 가을쯤에는 이제까지만 하더라도 이름만 공동 군주였던 모후
후아나 1세를 유폐 상태에서 모셔오는거를 빙자한 납치와 권력을 돌려드리는
퍼포먼스를 통해 아예 카를로스 1세의 정통성에 전면 도전을 하는 등 잘나갈 때는 진짜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왕위를 얻자마자 다시 상실할뻔 만큼 세력이 컸지만, 왕실에 도전할 군사력 확보 과정에서 농민 해방 밑 징집 같은 지나치게 사회적으로 과격한 주장을 하여 처음만 하더라도 본인들도 나름 외국인 왕실에 불만 많아 코뮤네로와 왕실 사이 저울질하던 대귀족(grandeze)들이 대거 후자에 투신하면서 결국 패배했다.
[40]
톨레도, 세고비아, 살라망카, 자모라, 부르고스, 바야돌리드, 레온, 쿠엔카, 과달라하라-시구엔자, 무르시아, 아빌라, 마드리드, 소리아, 팔렌시아 등.
[41]
톨레도, 세고비아, 살라망카 등 거의 자치 도시들이 주동 세력이었던 부르고스나 아빌라처럼 미적지근하게 따라가다 전세가 뒤집히니 이탈하던 간에 거의 모두 일시적으론 반왕실, 혁명 정부에 투신했다. 반면 코뮤네로 운동을 거부한 도시들은 세비야, 하엔, 그라나다, 코르도바 등 전부 자치 도시민 세력이 약하고
레콘키스타 기사단령을 비롯한 대귀족 영향이 강하며, 왕실과 싸우기엔 당장 피정복
무어인 반란이 훨씬 더 큰 걱정거리였던
안달루시아 지방들이었다. 갈리시아, 나바라-바스크 일대는 애시당초 독자적인 지역 자치 정부가 있어서 카스티야 삼부회에 따로 참여하지 않았다.
[42]
포르투갈 국왕은 1640년 12월 1일까지 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