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643년 5월 19일 프랑스 왕국 북부의 로크루아 지방에서 일어난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의 전투. 30년 전쟁의 일부인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주요 전투이다.유럽 최강의 육군이었던 스페인 테르시오의 150여 년 역사 동안 가장 피해가 컸던 패배였으나 이 전투 이후에도 스페인 육군은 중요한 전투들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여러 번 보여 준다. 같은 해 11월에 튀틀링겐 전투에서 프랑스를 대파했고 1656년 네덜란드에서도 프랑스에게 승리하였다.
2. 배경
30년 전쟁 중반기에 들어 반합스부르크 진영으로 직접 전쟁에 참전하게 된 프랑스[1]는 합스부르크 세력을 플랑드르에서 축출하기를 원했고, 반대로 스페인은 플랑드르와 카탈루냐 양면에서 전선을 형성해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었다.3. 전개
3.1. 전투 이전 상황
1643년 리슐리외 추기경의 죽음과 루이 13세의 와병으로 프랑스가 잠시 주춤한 가운데 새로이 플랑드르의 섭정으로 임명된 프란시스코 데 멜로는 프랑스 국경 요새인 로크루아를 포위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앙갱 공작이 로크루아 방면으로 기동하는 동안 루이 13세가 사망했지만 앙갱 공작은 군의 사기를 위해 장교진에게만 그 사실을 통지하였다.로크루아로 가는 길목은 좁은 숲 골짜기여서 대 콩데는 멜로가 그 길목에서 프랑스군을 차단한다면 짐과 대포를 후방에 놔 두고 숲을 관통해 로크루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멜로는 프랑스군보다 병력[2]이나 훈련도에서 앞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포위 섬멸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프랑스의 기동을 방기하였다.
로크루아 앞 평원에 전열을 정비한 프랑스군은 좌익에 늪지대를 낀 형태로 양익에 기병대를, 중앙에 보병대를 배치 하였고 에스파냐군 역시 비슷한 포진을 하는 한편 프랑스군 우익과 에스파냐군 좌익 사이에 있는 좁은 숲에 총병을 배치해 프랑스군 우익의 기동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3.2. 전투
5월 19일 아침에 프랑스의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의 좌익을 맡은 알부르케르케는 자신의 측면이 총병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 콩데에 의해 미리 제거되었기 때문에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붕괴하고 말았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좌익은 섣부른 공격을 감행했다가 멜로의 반격에 의해 패퇴되고 있었고 중앙 보병 역시 에스파냐의 보병대에 밀리고 있었다.중앙을 구원하기 위해 대 콩데는 에스파냐군 중앙을 향해 무모한 돌격을 시도했지만 에스파냐군 중앙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 대 콩데는 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기병 기동을 성공시켜 프랑스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에스파냐군의 우익 배후에 등장하였고 양쪽에서 공격을 받은 에스파냐측 기병대는 모두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기병대의 지원을 잃어버린채 전장에 남게된 에스파냐 중앙의 보병대는 프랑스의 보병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역전의 에스파냐 테르시오 방진은 프랑스군이 노획한 에스파냐군의 대포가 두들기는 가운데 이후 네 번이나 이어진 프랑스군의 기보 합동 공격에도 유럽 최강 스페인 육군의 위용을 보여줬다. 포탄의 화력과 수적인 열세속에서 겁을내지 않았고 보병대만으로도 프랑스군에 만만찮은 피해를 줬다. 물론 대포에 노출된 상태여서 스페인 육군의 피해가 더 심했다.
하지만 보병대 지휘관 퐁텐[3]이 유탄에 맞아 전사하자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에스파냐 보병대는 대 콩데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대 콩데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로크루아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