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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10대 국왕 카스티야 왕국 후안 1세의 왕비 베아트리스 Beatri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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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73년 2월 7- 13일 |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 |
사망 | 1420년 (향년 46~47세) |
카스티야 왕국 |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여왕 (논란) |
1383년 ~ 1385년 | |
배우자 | 후안 1세 (1383년 결혼 / 1390년 사망) |
아버지 | 페르난두 1세 |
어머니 | 레오노르 텔레스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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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후안 1세의 왕비.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기도 하지만, 남편에게 의존할 뿐 별다른 통치를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2. 생애
1373년 2월경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와 포르투갈 귀족 마르팀 아폰수 텔레스의 딸인 레오노르 텔레스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382년, 페르난두 1세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면서 양국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외동딸을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1383년 10월 22일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인 레오노르 텔레스는 사전에 맺은 조약에 근거해 딸과 사위의 이름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여기에 레오노르의 연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가 재상으로 선임되었다. 후안 1세는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몬탈반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383년 12월 6일 아비즈의 영주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동생인 주앙이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하면서 반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알바로 파리스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이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포르투갈 제독 란사로테 페사냐도 베자 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포르투갈 국왕을 자칭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격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남편이 리스본으로 진군하여 반란군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베아트리스는 산타렝에 그대로 머물렀다. 1384년 9월 3일 전염병 창궐과 보급품 부족으로 곤경에 처한 남편이 카스티야로 철수할 때, 그녀 역시 남편을 따라갔다.
1385년 4월 6일, 주앙 왕자가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로 등극했다. 후안 1세는 이에 분노해 그 해 6월 32,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쳐들어갔지만, 그해 8월 14일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에게 완패하고 본국으로 쫓겨났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은 포르투갈에 더 이상 간섭할 수 없었고, 베아트리스의 포르투갈 여왕 직위 역시 배제되었다.
1390년 10월 9일, 후안 1세가 부르고스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 궁전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후안 1세가 전 왕비인 레오노르[1]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3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계모로서 섭정 자격이 있었지만, 포르투갈 출신이라서 카스티야 귀족들에게 경원시된 데다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귀족으로 구성된 섭정 평의회가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토로에서 조용히 지냈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지만, 그녀의 영지였던 토로가 1420년경에 카스티야 왕국의 직할지가 되었으므로 이때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