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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데 로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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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예수회 총장
S.J.
이냐시오 데 로욜라
Ignacio de Loyola
파일:이냐시오.jpg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colbgcolor=#c72518,#c72518><colcolor=#e6cd85,#e6cd85> 본명 에네코 로페스 로이올라코아[1]
(Eneko Lopez Loiolakoa)
이니고 로페스 데 오냐스 이 로욜라[2]
(Íñigo López de Oñaz y Loyola)
출생 1491년 10월 23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스페이티아
사망 1556년 7월 31일 (향년 64세)
교황령 로마
학력 알칼라 대학교 ( 논리학, 물리학, 신학 / 중퇴)
살라망카 대학교 ( 논리학, 물리학, 신학 / 중퇴)
파리 대학교[3] ( 철학 / 학사)
파리 대학교[4] ( 철학 / 석사)
직업 성직자( 사제), 신학자, 작가, 군인
종교 가톨릭
소속 예수회
사제 수품 1537년 6월 24일
베네치아 공화국
빈첸초 네구산티 주교 주례
재임 기간 초대 예수회 총장
1541년 4월 19일~ 1556년 7월 31일
서명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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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예수회 총장
초대 2대
이냐시오 데 로욜라 ( 1541년~ 1556년) 디에고 라이네스 ( 1558년~ 15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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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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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2518,#c72518><colcolor=#e6cd85,#e6cd85> 성인명 한국어: 이냐시오
[언어별 명칭]
라틴어: 이냐치우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영어: 이그네이셔스 오브 로욜라
(Ignatius of Loyola)
스페인어: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
(Ignacio de Loyola)
바스크어: 이그나시오 로이올라코아
(Ignazio Loiolakoa)
프랑스어: 이냐스 드 로욜라
(Ignace de Loyola)
이탈리아어: 이냐치오 디 로욜라
(Ignazio di Loyola)
포르투갈어: 이나시우 디 로욜라
(Inácio de Loyola)
독일어: 이그나티우스 폰 로욜라
(Ignatius von Loyola)
네덜란드어: 이그나티우스 판 로욜라
(Ignatius van Loyola)
그리스어: 이그나티오스 로이올라
(Ιγνάτιος Λογιόλα)
폴란드어: 이그나치 로욜라
(Ignacy Loyola)
러시아어: 이그나티 데 로욜라
(Игнатий де Лойола)
일본어: 이그나치오 데 로요라
(イグナチオ・デ・ロヨラ)
중국어: 이나줴 뤄야올라
(依纳爵‧罗耀拉 / 依納爵·羅耀拉)
시복 1609년 7월 27일
교황령 로마
교황 바오로 5세 주례
시성 1622년 3월 12일
교황령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주례
상징물 IHS 문장[5], 비레타, 수단, 십자고상, [6]
축일 7월 31일
수호 군인, 피정, 어려운 시기에 놓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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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소년 시절2.2. 군인 시절2.3. 회심과 순례2.4. 만학도의 길2.5. 예수회 설립2.6. 예수회 총장 시절2.7. 말년과 죽음
3. 신학적 사상4. 사후 공경 및 영향
4.1. 그의 이름을 딴 것들
5. 대중 매체6. 어록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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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D MAIOREM DEI GLORIAM[7]AMDG이라는 약칭으로도 표기한다. 본래 문장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inque hominum salutem)’로 예수회의 표어뿐만 아니라 30년 전쟁 시절 군인들이 전장에서 외치는 구호로도 사용되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지은 예수회의 표어
스페인 사제이자 신학자. 본래 스페인어식으로 칭하면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이지만, 한국에서는 가톨릭교회 예수회 측에서 표기하는 이름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예수회의 주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으로서,[8] 개신교의 공세로부터 가톨릭교회가 다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선교, 교육, 그리고 문화 활동에 주력해 대항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그는 ' 영신수련'으로 대표되는 자기 자신을 꾸준히 성찰하고 감정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은 채 냉철한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영혼을 단련하는 이냐시오 영성을 태동시켰으며,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자연과학 지식 습득을 통한 신앙과 이성의 연계를 피력함으로써 이지적인 믿음을 중시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가톨릭과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7월 31일이다.

2. 생애

2.1. 유소년 시절

파일:Nacimiento_de_San_Ignacio_de_Loyola_y_profecías_que_le_predijeron.jpg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탄생과 이를 예견한 예언자들
(Nacimiento de San Ignacio de Loyola y profecías que le predijeron)
미구엘 카브레라 作, 테포초틀란 부왕령 국립박물관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1491년 10월 23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아스페이티아 지방의 로욜라 성에서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니고 로페스 데 오냐스 이 로욜라(Iñigo López de Oñaz y Loyola)[9]인데, 여기서 이니고는 오냐 지방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장이었던 성 이니고(Íñigo de Oña)[10]에서 따온 것이며 '나의 귀염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 벨트란 이바녜스 데 오냐스 이 로욜라(Beltrán Ibáñez de Oñaz y Loyola)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María Sáenz de Licona y Balda)는 변방 귀족 출신이었다. 로욜라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가주의 후계자였던 첫째 형 후안 페레스(Juan Pérez)마저 이탈리아 전쟁에서 전사해 집안이 혼란스러워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마을 대장장이의 아내 마리아 데 가린(María de Garín)의 손에 잠시 맡겨졌다.

이후 1498년 로욜라가 7살이 되던 해, 둘째 형 마르틴이 혼인과 동시에 새로운 가주가 됨으로써 상황이 안정되자 로욜라는 다시 본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로욜라가 수도자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2.2. 군인 시절

예수회의 설립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Saint Ignace de Loyola, fondateur de l'ordre des Jésuites)
화가 미상, 베르사유 궁전
그러나 아버지와의 바람과는 달리 세속적인 출세의 꿈이 컸던 로욜라는 1506년 그의 친척이자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Juan Velázquez de Cuéllar)의 수행원이 되었다. 똑똑하고 유능한 로욜라가 마음에 들었던 후안 벨라스케스는 그에게 춤, 펜싱, 도박, 연애, 결투 등 사교 생활에 유용한 것들을 가르쳤다.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로욜라는 당시 최고의 직업 중 하나였던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엘 시드, 원탁의 기사, 롤랑의 노래 등 전설 속 기사들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읽고 이들을 롤 모델로 삼아 꿈을 향해 열심히 정진했다.

그렇게 로욜라는 1508년 17살에 마침내 입대를 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높았던 동시에 춤 실력이 뛰어났고 여자 관계가 복잡했으며 거친 성미를 지니기까지 해 툭하면 싸움에 휘말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완벽히 소화해 내어 이듬해 로욜라는 그의 또 다른 친척이자 나바라 왕국의 나헤라 공작인 안토니오 만리케 데 라라(Antonio Manrique de Lara)가 이끄는 부대의 장수로 진급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의 우수한 외교 능력과 리더십은 빛을 발했고, 덕분에 그는 공작으로부터 아낌없는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1521년 5월 20일 팜플로나 전투[11]에서 로욜라는 프랑스 왕국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우던 도중 그의 오른쪽 다리가 포탄[12]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그는 자신의 본가인 로욜라 성으로 급히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는데, 회복하던 중 뼈가 잘못 붙어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해야만 했다. 마취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당시 로욜라에게는 교정 수술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고, 이러한 과정이 수차례나 반복되었으나 뼈가 다시금 잘못 붙은 바람에 부상당한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짧아져 결국 절름발이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그렇게 군인으로서의 경력이 끝난 그는 크게 낙심했지만, 이윽고 향후 그의 인생을 완전히 탈바꿈할 커다란 전환점이 그에게 찾아왔다.

2.3. 회심과 순례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이 마냥 지루하기만 했던 로욜라는 여느 때처럼 기사들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이를 가져올 것을 요청했으나 시종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대신 평소 친하게 지냈던 그의 형수 마그달레나 데 아라오스(Magdalena de Araoz)가 그리스도 성인들의 일생을 다룬 책들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로욜라는 마지못해 14세기의 가톨릭 신학자 작센의 루돌프가 집필한 <그리스도의 생애(Vita Christi)>와 13세기의 제노바교구 대주교 야고보 데 보라지네가 쓴 <성인 전기(Legenda sanctorum)>[13]를 집어 읽었는데, 그는 책장을 넘기면서 자신의 오만하고 방탕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은 수도자 성인들처럼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또한 로욜라는 돈과 명예를 얻은 출세의 미래와 성인들처럼 신앙의 길을 걷는 미래를 상상하며 비교했는데, 그는 이런 생각들에 큰 차이가 있음을 인지했다. 세속적인 일을 공상할 때에는 당장은 즐거웠지만 나중에는 싫증이 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던 반면, 성인들을 본받아 고행을 실천하는 상상을 할 때에는 당시에도 위안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행복한 여운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로욜라는 이러한 깊은 사색을 통해 악한 영에서 오는 생각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각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회심
(La conversión de San Ignacio de Loyola)
미구엘 카브레라 作, 멕시코 국립미술관
로욜라가 결정적으로 신앙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그가 목격한 환시였다. 어느 날 밤, 그가 잠을 청하다가 눈앞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나타나더니 지친 그의 심신을 달래 주고는 이내 사라졌다. 환시가 끝난 후에도 큰 위안을 느낀 그는 몸이 나아지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와 엄격한 고행 극기를 꼭 하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1522년 3월 혼자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완전히 회복된 로욜라는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 몬트세라트 수도원에 방문함으로써 순례를 시작했다. 수도원에 다다른 그는 고해성사를 통해 지난날 자신이 저질렀던 죄들을 고백했고, 성모 마리아 제단 앞에 군인으로서의 상징이었던 자신의 검과 갑옷을 봉헌했다. 그 다음 날, 수도원을 나온 그는 자신이 입고 있었던 옷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준 뒤 거친 천으로 만든 낡은 옷을 입었다.
만레사의 이냐시오
(Ignatius at Manresa)
앨버트 셰발리에 테일러 作, 윔블던 성심 성당
걸어서 만레사라는 도시 근처에 당도한 로욜라는 그곳에서 1년여 동안 머물면서 고행을 했다. 때로는 길거리에 구걸을 하며, 때로는 음식을 얻는 대가로 작은 병원에 잔심부름을 하며 청빈한 일상을 보냈다. 한편 그는 만레사에 체류하는 동안 기묘한 체험을 겪었는데, 햇빛이 내리쬐는 대낮에 ‘ 눈처럼 생겼지만 눈이 아닌 것들을 지닌 아름다운 뱀의 형상’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을 볼 때마다 큰 기쁨과 위로를 느꼈지만 정작 그것이 사라졌을 때는 허탈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똑같은 환상이 연이어 나타나자 그는 그것의 존재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했고, 최종적으로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영을 꾀어내는 악마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윽고 로욜라는 악마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 위해서 마을 언덕의 동굴 속에 자리 잡았다. 그는 수개월 동안 동굴 안에서 기독교 서적들은 물론 당시 성행했던 르네상스 철학 서적들까지 탐독한 후 매일 7시간씩 기도를 함으로써 사사로운 감정과 욕망을 물리치는 극기를 수행했고, 이를 토대로 < 영신수련(Exercitia spiritualia)>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523년 초 로욜라는 순례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해 만레사를 떠났고, 베네치아에서 배를 탄 후 키프로스를 거쳐 같은 해 9월 3일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당시 순례지를 관할하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이를 완강하게 거절함에 따라 도착한 지 20여 일 뒤에 유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4. 만학도의 길

로욜라는 순례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떠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기나긴 여정을 통해 그는 구원에 대한 조바심으로 마냥 자신의 죄를 수없이 고백하고 극단적인 고행만을 지속하는 것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당시 로욜라의 나이는 이미 33살이었기에 학교를 다니기엔 한참 늦었지만, 그는 더 늦기 전에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우선 무료로 운영되는 공립 예비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그는 대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기본적인 라틴어 교육 과정을 거쳐 1526년 마드리드 북부 지역에 있는 알칼라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도밍고 데 소토(Domingo de Soto)의 논리학,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의 물리학, 그리고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길거리로 나아가 자신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종교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그러나 아직 학생 신분으로 설익은 지식을 전하다 보니 이단심문소에서 로욜라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는 이단심문관들에 의해 마땅한 학위도 없이 길거리에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는 죄로 17일 동안 감옥에 수감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석방되는 날 그에게 학위를 취득하기 전까지는 교리는 절대로 입에 올리지 말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듬해 로욜라는 살라망카 대학교로 학적을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칼라의 이단심문관들로부터 그의 범죄 이력을 알게 된 도미니코회 수도자들[14]에 의해 또 다시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수도원에서 약 한 달 간 수감되었고, 마찬가지로 학위를 취득하기 전까지는 설교를 금지한다는 훈계를 받고 석방되었다.
파일:Ignatius_and_companions_profess_vows.jpg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장엄서원을 하다
(Ignatius and Companions Profess their Solemn Vows)
앨버트 셰발리에 테일러 作, 윔블던 성심 성당
이러한 위험천만한 경험을 통해 이단심문소의 위협을 느낀 로욜라는 1528년 프랑스 왕국으로 건너갔다. 두 번의 감옥 생활을 통해 학위의 필요성을 절실히 체감한 그는 같은 해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고, 이 시기부터 라틴어식 이름인 이냐치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향후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거와 예수회의 설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칠 6명의 동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6명의 이름은 이러하다: 니콜라스 데 보바디야(Nicolás de Bobadilla), 디에고 라이네스(Diego Laínez), 시망 호드리게스(Simão Rodrigues), 알폰소 살메론(Alfonso Salmerón),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 그리고 피에르 파브르(Pierre Favre)다. 로욜라는 이들에게 꾸준한 기도와 명상을 기반으로 자신의 삶에 맞게 예수의 가르침을 알아서 정리하고 선택함으로써 믿음을 다지는 영신수련을 소개했고, 그의 수행 방식에 매료된 이들은 그와 신앙 생활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로욜라를 포함한 7명은 1534년 8월 15일 몽마르트르에 있는 생피에르몽마르트르 성당에 모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봉헌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했다. 이를 기점으로 이들은 정기적인 신앙 생활 모임을 가졌고, 스스로를 예수의 동반자(Compañía de Jesús)라고 칭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회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시간이 흘러 1535년 43살이라는 나이에 석사 학위를 취득한 로욜라는 파리를 떠나 교황령 볼로냐 베네치아 공화국을 방문했다. 한편 여전히 파리에 있었던 그의 동료들도 역시 1537년 1월 8일 베네치아로 건너가 다시금 그와 결속을 다졌다. 이들은 다 같이 팔레스티나로 순례를 떠나고 싶었으나,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 제국 간의 전투로 인해 그곳으로 향하는 뱃길이 끊겨 있어 그 염원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같은 해 6월 24일 로욜라는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2.5. 예수회 설립

파일:giovanni-battista-gaulli-il-baciccio-the-vision-of-saint-ignatius.png
성 이냐시오의 환시
(The Vision of Saint Ignatius)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作, 우스터 미술관
1537년 말 로욜라는 디에고 라이네스 피에르 파브르와 함께 예수의 동반자 모임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인가받고자 로마로 향했다. 이들은 여정 도중 로마 북부 라스토르타라는 마을의 경당에 들렀고, 로욜라는 그곳에서 잠시 기도를 하다가 환시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하느님은 옆에서 십자가를 어깨에 걸친 예수에게 “이 자를 너의 종으로 삼기를 원하느니라”라고 말하자 예수가 이에 화답하는 의미로 로욜라에게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베풀겠노라(Ego vobis Romae propitius ero)”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그는 자신의 신앙관에 대해 더욱 큰 확신을 가져 예수의 동반자 모임을 정식 수도회로 확장하기로 다짐했다.
파일:Aprovação_da_Companhia_de_Jesus_pelo_Papa_Paulo_III_(c._1640).png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한 예수회 승인
(Aprovação da Companhia de Jesus pelo Papa Paulo III)
도밍구 다쿠냐 作, 코임브라 신 대성당
1538년 로마에 도착을 한 로욜라와 그의 동료들은 그곳에서 창설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하고자 하는 수도회의 사상적·구조적 토대와 당시 시대적 소명이었던 종교 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확장 저지 및 가톨릭교회의 부흥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개신교의 공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현재 가톨릭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개신교 탄압보다 도리어 가톨릭교회 자체를 쇄신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유럽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연을 종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중세적 관점이 천문학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발표를 말미암아 자연을 과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근대적인 관점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커짐으로써 이슬람교를 비롯한 다양한 외부 문화들이 유입되는 시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에 로욜라는 교회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신학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과 같은 이과적인 학문을 습득하고 다른 종교들의 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기존의 가톨릭교회와는 차별적인 노선을 내세웠다. 이러한 신념은 그가 동료들과 함께 집필한 <예수회 헌장(Formula instituti)>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이는 수도회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2년 뒤 1540년 이들은 <예수회 헌장>을 바오로 3세에게 전달했고, 종교적·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해당 수도회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오래전부터 고수한 가톨릭교회 신앙관과 다른 성향의 수도회 건립을 두고 교황청 내에 갑론을박이 수개월 동안 이어졌으나, 결국 같은 해 9월 27일 교황은 칙서 <전투 교회의 통치(Regimini militantis Ecclesiae)>를 통해 이를 허가함으로써 예수회가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었다.[15]

2.6. 예수회 총장 시절

파일:Peter_Paul_Rubens_Miracle_of_Saint_Ignatius_of_Loyola.jpg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기적
(Wunder des Hl. Ignatius von Loyola)
페테르 파울 루벤스 作, 빈 미술사 박물관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로욜라는 동료들의 만장일치에 따라 예수회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16] 그는 <예수회 헌장>에 명시해 놓은 목표를 실현하려면 선교를 통한 교육 및 문화 사업이 필수적임을 여겨 이를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겼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유럽 각지로 보내며 곳곳마다 신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을 제공하는 교육 시설을 세우도록 했다. 평소 예수회의 이러한 뜻에 공감을 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대사 후안 데 베가(Juan de Vega)는 시칠리아로 가는 여정에 로욜라를 초대했고, 대사를 만난 로욜라는 그에게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지지를 부탁했다. 이에 1541년 해당 지역의 북동부에 위치한 메시나라는 도시에 첫 예수회 학교가 개교하는 성과를 일구었다. 이후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교육 기관을 세울 때 메시나의 학교 체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메시나의 학교는 시간이 흘러 현재는 메시나 대학교로 자리 잡은 상태다. 1551년에는 로마에 신학을 전문으로 한 고등 교육 기관인 로마인 대학을 설립했고, 5년 뒤인 1556년 당시 교황 바오로 4세가 이를 정식으로 승인했다. 그렇게 최초의 예수회 대학이 탄생했으며, 현재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남만병풍 (일부)
(南蛮屏風)
가노 나이젠 作, 고베시립박물관
또한 로욜라는 예수회의 활동을 유럽을 넘어 다른 대륙으로 확장해 국제화를 도모했다. 그는 예수회를 교두보로 삼아 가톨릭의 문화와 유럽의 종합 교육 방식이 현지 사회에 녹아듦으로써 교회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꿈꿨다. 그는 해외로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현지인들과 원활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외국의 언어를 확실히 습득해야 함을 당부했다. 선교사들은 로욜라의 뜻에 부응하고자 바다를 건너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향했고, 시간이 흘러 이들의 영향력은 남쪽으로는 모로코, 에티오피아, 그리고 콩고에, 서쪽으로는 캐나다, 볼리비아, 페루, 그리고 파라과이에, 동쪽으로는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에까지 뻗어 나갔다. 로욜라는 로마 내에서의 세계화도 도모했다. 로마인 대학의 성공 이후 그는 도시 곳곳에 외국인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다수 창건함으로써 로마를 여러 나라 사람들이 유학하는 가톨릭 신학의 국제 중심지로 거듭나기를 추구했다. 이에 예수회는 그의 뜻을 본받아 1552년에는 독일인 대학을, 1579년에는 잉글랜드인 대학과 헝가리인 대학을, 1591년에는 그리스인 대학을, 1615년에는 스코틀랜드인 대학을, 1635년에는 아일랜드인 대학을, 그리고 1858년에는 라틴아메리카인 대학 등을 설립했다.

로욜라는 사회 복지 사업에도 힘썼다. 그는 로마에 범죄를 저질렀거나 중독에 빠진 여성들의 교정 및 재활을 돕는 시설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세간의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시설을 건립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두 곳의 고아원과 더불어 극심한 가난으로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보살펴 주는 시설도 추가로 세웠다.

아울러 로욜라는 헌장을 바탕으로 자신의 비서 후안 알폰소 데 폴랑코(Juan Alfonso de Polanco)의 도움을 받아 <예수회 회헌(Constitutiones Societatis Iesu)>을 집필해 1553년 예수회의 규율과 체계를 공식적으로 명문화했다. 회헌에는 교황의 명령에 따르는 수직적인 행동 양식을 강조한 군대식 규율, 사적인 성찰과 명상으로 개인적인 신학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 영신수련의 정신, 그리고 인문학 자연과학의 필요성 등 로욜라가 주창한 모든 사상들이 집대성되었다. 더불어 그는 회헌을 통해서 훗날 수도회의 표어가 되는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라는 최우선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가톨릭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상, 물건, 혹은 목표일지라도 그것이 악하지 않는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하느님의 영광과 자신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일례로 로욜라는 천문학이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어 예수회가 해당 학문의 발전에 기여해야 함을 역설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예수회 사제들이 천문학은 물론 이와 연계된 학문인 수학 물리학까지 직접 공부해 다양한 연구들을 진행했다. 이들의 대표적인 성과로는 그레고리력 제작, 지구 자전 자전축 증명, 월면학[17] 확립, 그리고 겉보기 쌍성 발견 등이 있다.

2.7. 말년과 죽음

파일:Muerte_de_San_Ignacio_de_Loyola.jpg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죽음
(Muerte de San Ignacio de Loyola)
미구엘 카브레라 作, 테포초틀란 부왕령 국립박물관
로마에 남아 예수회 총장으로서 소임을 다하던 로욜라는 1556년이 되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로마에는 중세 시기부터 풍토병으로 자리 잡은 말라리아가 성행했고 그도 이를 피할 수가 없었다. 병약해진 몸을 지녔음에도 총장으로서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던 그는 같은 해 7월 31일 동틀 무렵의 아침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를 들은 교황 교황청 관계자들, 로마의 시민들, 그리고 1,000명에 달하는 예수회 사제들 등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했다. 그의 시신은 파도바 대학교 해부학 교수였던 레알도 콜롬보(Realdo Colombo)에 의해 부검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시신의 , , 결장, 신장, 그리고 방광에 다량의 결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제단과 묘소
안드레아 포초 作, 제수 성당
부검이 끝난 로욜라의 시신은 목관에 안치되었고, 1556년 8월 1일 산타 마리아 델라 스트라다 성당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해당 성당이 1568년에 소실되어 그 자리에 제수 성당의 건설이 착수되자 그의 시신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80년 로욜라의 시신은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성당 내부의 산티냐치오 경당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소가 있는 제수 성당은 이후 예수회의 본당으로 자리 잡았다.

3. 신학적 사상

로욜라의 신학적 사상은 이냐시오 영성 영신수련이라는 두 용어로 명시될 수 있다. 이냐시오 영성이 근본적인 개념이라면, 영신수련은 이를 바탕으로 구체화하는 실질적인 방법이다. 그의 사상은 인본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는 신비신학의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르네상스의 영향에 기인한다. 로욜라가 살아 있던 당시에는 르네상스가 주된 시류였고, 그 본질적인 기저는 다름 아닌 신보다는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핵심으로 여기는 인본주의였다. 동시대의 여느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연스레 해당 사상을 설파하는 저서들과 인물들을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학문적 접촉은 과거 만레사에서의 고행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과 어우러져 신학과 르네상스의 이념적 산물이 융합된 독특한 사상을 구축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로욜라는 ‘활동 중에 관상’을 실천함으로써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를 제창했다. 즉,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기도와 성찰로 구성된 수행 방식인 영신수련을 통해 이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성에 관한 기존의 신학과는 다른 이냐시오 영성만의 인본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영성 신학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수직적이고 보편적인 하느님으로부터의 계시를 중시했다면, 로욜라의 사상은 하느님을 향하는 가르침을 주도적으로 탐색하는 인간 개개인의 식별 능력과 체험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냐시오 영성의 성향을 띠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로 ‘이냐시오적(Ignatian)’이라고 부른다.

3.1. 이냐시오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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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영신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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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후 공경 및 영향

“영혼의 아버지.”

“이냐시오의 내면의 눈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열중했습니다.”

“그의 기도 방법은 자기 희생과 자제력 또는 나쁜 습관의 통제를 행하게 만듦으로써 영혼을 가장 높은 수준의 묵상과 신성한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성 이냐시오는 상처를 회복하던 중 하느님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힘차게 들렸을 때 이를 따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영감에 예민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을 구별하고, 후자를 키워 나가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속에 여물도록 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습니다.”

로욜라는 1609년 7월 27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그로부터 약 7년 뒤인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그의 기일인 7월 31일로 지정되었다. 성공회에서도 가톨릭과 동일한 축일에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는 현재 가톨릭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사제들을 보유한 수도회로 자리 잡았으며, 이탈리아를 포함한 전 세계 112개국에서 종교, 교육, 문화, 과학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다.

로욜라가 제창한 영성신학 이냐시오 영성은 시간이 흘러 가톨릭뿐만 아니라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회, 침례회 등 다양한 기독교 교단에 도입되었고, 평신도들에게 이냐시오 영성 교육 및 피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관인 이냐시오 영성 센터가 세계 각지에 창설됨으로써 기독교 내에 뿌리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영성신학은 수많은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깊이 연구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카를 융이 있다.

4.1. 그의 이름을 딴 것들

5. 대중 매체

6. 어록

“가서 세상에 불을 질러라.”[18]
“Ite, inflammate omnia.”
“우리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면 우리에게 더욱이 도움되는 것만을 갈망하고 선택해야 한다.”
“Ex omnibus ea demum, quae ad finem ducunt, eligere ac desiderare.”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살피실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승리다.”
“세상을 개혁하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위험하며,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하느님께서 많은 고통을 주신다면, 그것은 당신을 성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는 신호다.”

7. 여담

8. 관련 문서



[1] 바스크어식 본명. [2] 스페인어식 본명. [3] 콜레주 드 몽테귀에서 재학. [4] 콜레주 생트바르브에서 재학. [5] 예수회의 공식 문장에 쓰여 있는 로마자. [6] 특히 예수회의 표어인 Ad maiorem Dei gloriam(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이 쓰인 책. [7] 라틴어. MAIOREM이라는 단어를 MAJOREM으로 쓰기도 하며, [8] 예수회는 7명이 공동으로 설립한 수도회인데, 이냐시오는 그 핵심 멤버였다. [9] 스페인어식 본명. 그의 고향인 아스페이티아가 속해 있는 바스크 지방의 언어인 바스크어식으로는 에네코 로페스 로이올라코아(Eneko Lopez Loiolakoa)이다. [10] 바스크어식으로는 성 에네코(Eneko Oñakoa)라고 일컫는다. [11] 당시 아라곤 왕국에 병합된 나바라 왕국은 아라곤 출신 관리들에 의해 핍박을 받아야만 했고 이에 나바라 국왕 헨리케 2세 프랑스 왕국과 손을 잡아 왕국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단행해 전쟁이 발발했다. [12] 로욜라가 있었던 장소 근처의 성벽에 맞고 그를 향해 튕겨 나갔다고 한다. [13] <황금 전설(Legenda aurea)>이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하며, 로욜라가 병상에 누워 있던 당시에는 <성인들의 개화기(Flos sanctoru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4] 당시 이단심문관들의 대부분은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 구성되었다. [15] 다만 바오로 3세는 인원 수를 60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하에 수도회 설립을 허가했다. 이러한 제약은 10년 후 1550년 교황 율리오 3세에 의해 해제되었다. [16] 처음에 로욜라는 자신이 총장이 되는 걸 꺼렸지만, 동료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17] 표면 상태와 그 성질을 탐구하는 지리학적 천문학이다. [18] 1541년 인도로 떠나려는 자신의 설립자 동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보낸 편지에 쓰인 라틴어 경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