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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나 Messi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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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이탈리아 | ||
지역 | 시칠리아 | ||
면적 | 213.23km2 | ||
인구 | 218,786명[1] | ||
시장 | 페데리코 바실레 | ||
시간대 | UTC+1 ( 서머타임: UTC+2) | ||
1. 개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북동부의 항구도시이다. 메시나 해협을 경계로 이탈리아 본토와 떨어져 있다. 시칠리아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이자 이탈리아에서 13번째로 큰도시로 도심에는 21만명 정도 광역권까지 합치면 60만명이상이 거주한다.2. 경제
주요 산업은 항만 산업, 군사 조선소, 크루즈 관광, 레몬, 오렌지, 만다린 오렌지, 올리브 생산 및 재배이다.3. 역사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인이 이주하면서 세운 도시로 5세기 초 레기움의 아낙실라스가 고대 그리스의 도시 메세네[2]를 기린다면서 이름을 메세네로 바꾸었다. 메시나와 시라쿠사는 누가 시칠리아의 패자인가를 두고 다투기 시작하였고, 이는 시칠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시칠리아 전쟁은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였고, 이는 지중해 재해권을 확보하려던 로마가 이 곳 세력 다툼에 끼어들었다. 시라쿠사는 카르타고가 지원하고 메시나는 로마가 지원하였다. 메시나의 주요 세력이던 마메르틴인들은 한 때 시라쿠사인들이 고용하던 용병 집단이었다. 그 용병 집단이 메시나와 레조칼라브리아를 습격해 두 도시를 차지하였다.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메시나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로마가 메시나를 지원하면 카르타고와 전쟁이라는 걸 알았지만, 카르타고의 세력이 커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결국 메시나를 지원하였다. 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졌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가 승리하였고 결국 메시나를 포함한 시칠리아 전체가 로마 제국의 차지가 되었다.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메시나는 고트족, 동로마 제국, 아랍인이 차지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노르만족 형제 로베르 기스카르와 루제루 1세가 차지하였다. 결국 루제루 1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중간에 잉글랜드 왕국 국왕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메시나에 잠시 들렀다. 그 때 여동생 지참금 문제로 시칠리아 왕국과 싸워, 잠시 도시가 잉글랜드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1347년 메시나는 서유럽에 흑사병을 퍼트리는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카파에서 출발한 제노바 공화국 갤리선이 메시나에 도착해 물자를 보급 받을 때 전파가 된 것이다. 이미 배가 메시나에 도착했을 때 부터 선원 대부분은 전염병에 감염되었으며, 거기에는 흑사병이 감염된 쥐도 있어서, 쥐를 통해 메시나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흑사병이 도시를 황페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메시나는 다시 번창하였다. 17세기 유럽의 10대 도시 아래에 들 정도로 번창한 것이다. 하지만 그 번영도 오래가지 못했다. 1743년 도시에 두 번째 전염병이 발발해 48,000여명을 죽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783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무너졌다.
그 이후 메시나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거점으로 리소르지멘토 폭동이 발발한 최초의 도시였다. 1848년 양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하던 보르보네 왕조의 탄압을 받았지만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메시나를 점령함으로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류하였고,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08년 12월 28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시가지 전체가 파괴되어 1911년에야 재건이 완료되었다.
1943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전후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메시나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시칠리아로 파견된 추축국 군대와 보급품의 통과 지점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약 6,500톤의 폭탄을 투하한 영국군과 미국 공군의 주요 표적이었다. 이 공습으로 도시의 3분의 1이 파괴되었고 메시나 시민 854명이 사망했다.
4. 랜드마크
- 메시나 대성당 (Duomo di Messina) : 12세기 지어진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여러 차례 대지진으로 붕괴 되었지만 20세기 후반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이 성당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천문시계인 메시나 천문시계가 있다.
- 메시나 성 : 13세기에 지어진 성으로 메시나 해협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했으나 1908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는 마칼다의 탑과 성과 16세기에 만들어진 성문만 남아있다.
- 오리온 분수 (Fontana di Orione) : 메시나 대성당 앞 광장에 위치한 분수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제자 조반니 안젤로 몬토르소리가 1547년 제작하였다.
-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데이 카탈라니 교회 (Chiesa della Santissima Annunziata dei Catalani) : 12세기에 지어진 노르만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아랍, 그리스, 로마 양식이 한 데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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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테 델 산티스시아모 살바토레 (Forte del Santissimo Salvatore) :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항하기 위해 16세기에지어진 요새. 현재 이탈리아 해안 경비대 기지로 쓰이고 있다.
5. 여담
-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세운 최초의 예수회대학 메시나 대학교가 메시나에 설립되었다.
- 축구팀으로는 ACR 메시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