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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헝가리의 잡지 물트코르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마차시 1세 | 무명용사 | 어틸러 요제프 | 라코치 페렌츠 2세 | 센트죄르지 얼베르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
민트센티 요제프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라슬로 1세 | 코슈트 러요시 | 쾨뢰시 초마 샨도르 | |||||
9위 | 10위 | ||||||||
후녀디 야노시 | 퍼프 라슬로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9대 국왕 크로아트 왕국 제13대 국왕 라슬로 1세 I. László |
|
|
|
출생 | 1040년경 |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 |
사망 | 1095년 7월 29일 (향년 55세) |
헝가리 왕국 니트러[1] | |
재위 | 헝가리 왕국의 제9대 국왕 |
1077년 ~ 1095년 | |
크로아트 왕국의 제13대 국왕 | |
1091년 ~ 1095년 | |
배우자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라인펠덴의 아델하이트 |
아버지 | 벨러 1세 |
어머니 | 폴란드의 리헤자 |
형제 | 게저 1세, 람페르트, 소피아, 에우페미아, 옐레나 리예파 |
자식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헝가리의 이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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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제9대 국왕, 크로아트 왕국 제13대 국왕. 이슈트반 1세 사후 40여 년간 이어진 내란을 수습하고 크로아트 왕국을 복속시켰다.상단의 초상화는 상태로 보아 한참 후대에 그려진 듯 하다.
2. 생애
1040년경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왕국에 망명한 헝가리 왕자 벨러와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의 딸 리헤자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게저 1세, 남동생으로 람페르트가 있었고, 여자 형제로 소피아, 에우페미아, 옐레나 리예파가 있었다. 1046년 아버지가 백부 언드라시 1세와 함께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무찌른 뒤 헝가리에 들어왔다. 1060년 아버지가 폴란드의 힘을 빌려 언드라시 1세를 무찌르고 왕위에 올랐을 때 형 게저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1063년 8월, 신성 로마 제국은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의 모후 푸아투의 아녜스의 결정에 따라 망명한 언드라시 1세의 아들 셜러몬을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이 헝가리로 진군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자, 벨러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모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그해 9월 11일, 벨러 1세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케페스 연대기에 따르면, 벨러 1세는 왕좌에 앉은 채 고심하던 중 왕좌가 돌연 부러지는 바람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수하들은 급히 왕을 들것에 실어서 세케슈페헤르바르 왕궁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왕은 키니저 강변에서 숨을 거두었다. 벨러 1세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그는 동생 라슬로, 람페르트와 함께 폴란드로 도피했고, 셜러몬은 제국군의 호위를 받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하여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제국군이 철수한 직후인 1063년 가을, 그는 두 형제와 함께 폴란드군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벨러 1세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영주들이 가세했고, 민중들은 셜러몬이 독일의 꼭두각시 노릇할 거라 여기고 토벌군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셜러몬은 적의 공세를 피해 독일 국경과 가까운 모손 성으로 피신한 후 독일군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는 듯 했으나, 죄르의 데죄 주교가 양측을 오가며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1064년 1월 20일, 분쟁 당사자들은 죄르에서 데죄 주교의 중재 아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벨러 1세의 세 아들은 셜러몬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국을 맡았다. 셜러몬과 게저는 부활절을 함께 축하했고, 1064년 4월 11일 게저가 셜러몬의 머리에 왕관을 직접 씌워주었다. 그러나 당시 설러몬은 아직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아나스타시야와 비드 주교, 에르네 주교 등이 섭정을 맡았다. 이후 그는 게저 1세와 함께 셜러몬의 여러 원정에 함께 했다.
1071년 난도르페헤르바르를 공략한 뒤 전리품 분배를 놓고 게저 1세와 셜러몬이 대립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게저 1세의 편에 섰다. 1072년 동로마 제국이 난도르페헤르바르를 공략하자, 셜러몬과 게저는 보복 차원에서 동로마 제국을 침공해 니시까지 침투하여 성 프로코프의 유물을 가져와 세케슈페르헤르바르의 정교회 수도원에 기증했다. 이때 라슬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니르세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는 셜러몬이 전쟁 도중에 형을 살해할 경우 즉시 보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셜러몬과 게저 1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073년 두 진영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주교들의 중재로 에스테르곰 성에서 협의 끝에 1073년 11월 11일부터 1074년 4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상대방을 꺾기 위해 동맹국을 찾았다. 셜러몬은 신성 로마 제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청했고, 게저는 라슬로를 키예프 루스, 보헤미아 공국, 폴란드 왕국에 잇따라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1074년 2월 26일, 먼저 제국군의 지원을 확보한 셜러몬이 케메즈넬에서 게저를 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게저가 바츠로 도주하자, 그는 즉시 추격했다. 그러나 라슬로와 게저의 처남인 올뮈츠 공작 오토 1세가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074년 3월 14일, 모교로드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적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한 셜러몬은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모손 성으로 달아났고, 게저와 라슬로는 헝가리의 요충지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했다.
그 후 게저가 헝가리 왕위에 올랐지만, 셜러몬은 독일과 인접한 서부 일대를 다스리면서 진정한 헝가리 국왕은 자신이라고 선포했다. 라슬로는 헝가리군 총사령관을 맡아 셜러몬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파견한 제국군의 보호를 받는 셜러몬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한편, 라슬로는 형을 설득해 그들의 승리를 예언한 징표가 나타났다고 알려진 바츠에 교회를 세웠다. 훗날 형이 죽자, 그는 형의 유해를 바츠 수도원에 안장했다.
1077년 게저 1세가 사망했다. 게저 1세는 생전에 칼만과 알모스를 낳았지만, 그가 사망할 무렵엔 두 왕자 모두 너무 어렸기에 라슬로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직후 헝가리의 법률을 종합한 '라슬로 1세 법전(I. László I. törvénykönyve)'을 편찬했다. 그는 이 법전 서문에 "헝가리의 영주들은 도둑을 살려주거나 숨기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고 기술했으며, 법규 중 절반 이상을 재산 보호에 할애했다. 모든 절도범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암탉의 가치보다 많은 것을 훔친 자는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실명형에 처해지며, 범인이 성당에 숨을 경우 처벌을 면하는 대신 10살 이상의 자녀들이 노예로 팔렸다. 또한 손이나 코를 자르고 혀를 찢는 등 신체 절단형도 흔히 시행되었다.
만약 판사가 범인을 도망치게 한다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로 팔렸다. 반면 무고한 사람을 교수형에 처했을 경우 피해자의 피값만 내면 됐다. 또한 그는 왕가의 소금 독점을 정당화했으며, '귀족'(nobilis)이라는 용어를 법전에 처음 드러내면서 이들에게 반역죄 등 중대한 범죄를 제외한 법적 책임에 대해 면책 특권을 부여했다.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라슬로 1세의 법전에 근거하여 특권적인 지위를 향유했다. 한편, 라슬로 1세 법전은 소와 말의 수출과 유통을 제한했으며, 살인자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중 2/3을 피해자의 유족에게, 1/3을 살인자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주게 했다.
라슬로는 왕이 된 후 셜러몬을 향한 공세를 재개했다. 1079년 겨울, 그는 셜러몬의 군대를 격파하고 몬손 성을 공략했다. 셜러몬은 하인리히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던 하인리히 4세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을 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입지가 갈수록 위태로워진 셜러몬은 1081년 봄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주고 재산을 보전해주는 대가로 왕위에서 물러나 라슬로 1세의 신하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1082년경 추종자들을 은밀히 끌어모아서 라슬로 1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비셰그라드 성에 연금되었다.
1083년 8월 20일,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라슬로 1세는 이 날을 기리기 위해 셜러몬을 특별 사면하기로 했다. 하지만 셜러몬은 아직 헝가리 왕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레겐스부르크에 있던 하인리히 4세를 찾아가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와의 갈등 때문에 도와줄 여력이 없었고 아내 유디트 마저 외면해버리자, 그는 다시 페체네그와 연합하기로 했다. 그는 페체네그 지도자 쿠테스크(Kutesk)에게 복위시켜준다면 트란스다뉴비아를 페체네그에게 넘겨주고 쿠테스크의 딸을 아내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1085년 셜러몬은 페체네그와 함께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라슬로 1세가 반격을 개시해 문카치에서 페체네그인을 격파했다. 셜러몬은 이후에도 페체네그인과 함께 했고, 1087년 페체네그 지도자 첼구(Celgu)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 테마를 습격했다가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으로 패한 뒤 어느 산채에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2]
1087년, 하인리히 4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슈파이어에서 제국의회를 열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 콘스탄츠의 베르놀트에 따르면, 라슬로 1세는 그들에게 사절을 보내 2만 마리의 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를 축출한 뒤 대립 교황으로 세운 클레멘스 3세를 인정하지 않고 빅토르 3세를 교황으로 따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셜러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교황과 황제의 권력 투쟁에 개입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여기고 반 황제 동맹과 거리를 두었다.
1091년, 라슬로 1세는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누이인 옐레나 리예파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왕위 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해 사바강 북쪽에 위치한 슬라보니아를 점령하고 크로아트의 왕을 칭했다. 이때 많은 크로아티아인 귀족들이 그를 받들었지만, 일부 귀족들은 페타르 스나치치를 크로아트 왕으로 세워 그와 대립했다. 라슬로 1세는 게저 1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모스 왕자에게 크로아트 영토의 관리를 맡겼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크로아트 왕국에 대한 라슬로의 개입을 비판했지만 그 이상의 조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 후 라슬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침공하여 모르바 강과 드리나 강 사이의 지역을 공략했다. 하지만 얼마 후 쿠만인들이 카폴크(Kapolcs)의 지도하에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도나우 강과 티서강 사이의 일대를 파괴했다. 라슬로 1세는 급히 본국으로 돌아간 뒤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데리고 헝가리를 떠나려던 쿠만인들을 테메슈 강 인근에서 습격해 격파했다. 이후 생포된 쿠만인에게 기독교 개종을 제안했고, 쿠만인 대부분이 이를 받아들였다. 라슬로 1세는 이들을 야시사그에 정착시켰다.
본토에 살고 있던 쿠만인은 원정갔던 동료들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라슬로에게 당장 포로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라슬로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쿠만과 헝가리 사이의 국경 지대로 진군했다. 양측은 세베린 인근에서 격돌했고, 라슬로 1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승리했다. 라슬로는 쿠만 족장 아코스(Ákos)를 처단했다. 그러나 그가 쿠만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사이, 알렉시오스 1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1092년 헝가리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성 블라시엔의 베르놀트에 따르면, 1092년 12월 하인리히 4세와 라슬로 1세가 회담을 가지려 했으나 바이에른 공작 벨프의 훼방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르바노 2세는 헝가리인들이 "구원의 목자들을 떠났다"고 언급했다. 이는 라슬로가 이 무렵에 편을 바꾸어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받들기로 했음을 암시했다. 베네딕토회 소모지바르 수도원의 문서에 따르면, 라슬로는 수도원장에게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교회의 세속 권력에 대한 독립을 추구한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에 반대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1092년, 라슬로 1세는 서볼치에서 주교들을 소집해 공의회를 개최한 뒤 새 법전을 반포했다. 이 법전은 주로 교회 문제를 다뤘다. 기혼 사제는 인정하지만 아내를 사별한 기혼 사제의 재혼은 금지했고, 교회 재산이 보호되었으며, 파괴된 성당의 재건을 국고로 지원했다. 또한 헝가리로 재정착하여 세례성사를 받은 '이스마일인'이 무슬림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유대인이 기독교인 아내나 하인을 두는 것은 금지되었다. 또한 교회의 주일과 의무축일 미사 참례 준수, 대소재(단식재와 금육재) 준수, 사후 교회 묘지 매장, 간음자 처벌 등을 규정했으며, 국외에서 헝가리로 이주한 자들을 성당 근처에 정착해 주교들의 감독을 받게 했다. 여기에 십일조 징수가 규제되었으며, 왕실 사법부는 성범죄와 여성의 부도덕, 주술 행위 등을 헝가리 대주교의 입회하에 처벌했다.
1093년, 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브와디스와프 1세의 사생아인 즈비그뉴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즈비그뉴 편에 서서 폴란드로 진군하여 브와디스와프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를 포로로 잡았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1세는 즈비그뉴를 정식 아들로 인정했다. 일루미나티드 연대기에 따르면, 1095년 부활절에 프랑스와 카스티야, 잉글랜드에서 온 사절들이 그를 찾아와서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으로 진군해달라고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지며, 실제로 예루살렘에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던 벨러 3세의 치세 때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라슬로의 누이 에우페미아는 1073년 이전에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넷째 아들인 올로모우츠 공작 오타 1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 스바토플루크 2세, 오토 2세를 낳았다. 그런데 1087년 오타 1세가 사망하자,당시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공국을 아들 볼레슬라프에게 넘기고 에우페미아와 그녀의 자녀들을 추방했다. 그녀는 이에 맞서 보헤미아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귀족들과 함께 할거했다. 1095년, 라슬로 1세는 누이와 두 조카를 돕기 위해 보헤미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군 도중에 중병에 걸렸고, 1095년 7월 29일 헝가리-보헤이마 국경 근처 마을인 니트러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너지바러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라슬로 1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왕비의 이름과 가족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성명 미상의 딸은 1090년경 볼히니아 공작 스뱌토폴크 2세의 아들인 이아로슬라프 스뱌토폴치히와 결혼했다. 그는 1078년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뒤 왕을 자칭했던 라인펠덴 공작 루돌프의 딸인 아델하이트[3]와 재혼했다. 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 피로슈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요안니스 2세와 결혼했다.
그는 후계자를 두지 못했기에, 게저 1세의 장남 칼만과 차남 알모스 중 한 사람이 헝가리 왕이 되어야 했다. 이 중 알모스가 라슬로 1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만은 폴란드로 도피했다가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받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알모스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 형이 헝가리 국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고, 칼만은 1096년 초에 대관식을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