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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7 23:01:01

임레(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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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19대 국왕
임레
Imre
파일:Emeric_of_Hungary_TH.jpg
출생 1174년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204년 11월 30일 (향년 30세)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재위 헝가리 왕국 크로아트 왕국의 왕
1196년 ~ 1204년 11월 30일
배우자 아라곤의 콘스탄사
(1198년 결혼)
아버지 벨러 3세
어머니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
형제 언드라시 2세, 헝가리의 머르기트, 콘슈탄치어
자녀 라슬로 3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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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제19대 국왕. 형제 언드라시 2세와 내전을 벌인 끝에 그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 이후 세르비아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했지만 십자군의 협력을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 자다르를 탈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 생애

1174년경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와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 왕비 사이에서 출생했다. 형제로 언드라시 2세, 헝가리의 머르기트, 보헤미아 공국의 오타카르 1세와 결혼하는 콘슈탄치어가 있었다. 페루자에서 학업을 갈고 닦은 수도자 베르나트로부터 교육받았고, 1182년경에 아버지에 의해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 1194년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의 공작으로 선임되었고, 1196년 4월 24일 아버지가 예루살렘 탈환을 이루기 위한 십자군 원정에 착수하려다가 병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남동생 언드라시가 이에 불복했다. 언드라시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돈과 상당한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아버지를 대신해 십자군을 이끄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군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버지가 생전에 맡긴 군대를 돌려 형에게 도전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내전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197년 언드라시가 슬라보니아의 마치키에서 임레를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임레는 동생을 달마티아-크로아티아 공작으로 삼는 것으로 문제를 매듭지었다.

1198년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서약을 준수하고 형제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교황의 충고를 무시하고 형을 아예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끌어모았다. 임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선제 공격했고, 1199년 소모니의 라드 전투에서 언드라시를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영지에서 쫓겨난 뒤 오스트리아 공국의 레오폴트 6세에게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황이 개입해서 두 형제에게 화해하라고 촉구하자, 1200년 양자는 타협했다. 그들은 성지로 함께 진군하기로 했고, 그들이 없을 때 오스트리아 공작이 헝가리를 다스리며, 언드라시는 공국을 되돌려받기로 했다. 또한 두 사람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상대방의 영토를 물려받기로 했다.

1201년, 임레는 세르비아에서 스테판 네마니치와 부칸 사이의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세르비아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칸과 연합하여 공세를 개시해 1202년 네마니치를 불가리아로 몰아내고 부칸을 세르비아 대공으로 세웠다. 부칸은 헝가리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그는 모라바 동쪽 지역을 헝가리 영토로 삼고, 칭호에 "세르비아의 왕"을 추가했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엔리코 단돌로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십자군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바람에 배 항해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에 골머리를 앓다가, 이참에 이들을 이용해서 일전에 헝가리에게 빼앗긴 뒤 번번이 탈환에 실패했던 자다르 탈환에 써먹기로 했다. 십자군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1202년 여름 베네치아 함대와 함께 자다르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임레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저들을 파문시켜달라고 요청하자, 인노첸시오 3세는 이에 따라 베네치아와 십자군을 파문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다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1203년, 불가리아 군주 칼로얀의 사주를 받은 쿠만족이 세르비아를 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칼로얀은 이틈을 타 그해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1204년 네마니치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라쉬카에서 부칸을 축출하고 세르비아 공작으로 복위하였고, 부칸은 제타로 밀려났다. 인노첸시오 3세는 부칸을 세르비아 공작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칼로얀에게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칼로얀은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추대할 수 있는 추기경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헝가리가 불가리아의 주교국 5곳을 점거했다며, 분쟁을 중재해주고 양국의 경계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203년 이전, 언드라시는 이스트라와 크라이나 변경백인 베르톨트 4세와 작센의 베틴 가문 출신인 아그네스의 딸인 메리니아의 게르트루드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든든한 외가를 등에 업은 언드라시는 많은 독일인 용병대를 모집한 뒤 형에게 다시 도전했다. 1203년 10월 임레와 언드라시는 바라주딘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임레가 승리했고, 언드라시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임레는 동생을 해치는 대신 감옥에 가두었고, 게르트루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1204년 초, 교황은 레오 브란칼로니 추기경을 불가리아로 파견해 칼로얀을 불가리아 차르로 추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브란칼로니는 헝가리-불가리아 국경의 케베에서 헝가리군에게 붙들렸다. 헝가리 왕 임레는 칼로얀을 헝가리로 소환하여 분쟁을 중재할 것을 촉구했지만, 교황이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자 9월 말이나 10월 초에 풀어줬다. 11월 초 불가리아에 도착한 브란칼로니는 바실리오스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선임했고, 다음날 칼로얀을 불가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임레는 1198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 알폰소 2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1200년 외아들 라슬로 3세를 낳았다. 1204년 8월 26일에 4살된 아들을 공동 왕으로 세우고, 형제 언드라시를 석방시킨 뒤 그에게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해 그의 맹세를 받아냈다. 1204년 11월 30일에 사망했고, 라슬로 3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205년 언드라시가 조카 라슬로 3세를 폐위하고 언드라시 2세로서 왕위를 찬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