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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0 20:46:22

바이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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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3대 대공
바이셀가
Vaišelga
파일:바이셀가.png
출생 미상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망 1267년 4월 18일
리투아니아 대공국 볼린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1264년 ~ 1267년
아버지 민다우가스
어머니 리투아니아의 모르타
종교 정교회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3대 대공.

2. 생애

리투아니아 대공국 초대 대공 민다우가스와 모르타의 아들이다. 리투아니아 역사가 토마스 바라나우스카스(Tomas Baranauskas)에 따르면, 보이셀가라는 이름은 리투아니아어 vaišės(대접)와 alga(보상)에서 유래되었으며, 문자 그대로 "환대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노브고르드 연대기에는 1251-1252년 볼린의 투리스크 외곽에서 볼히니아 국왕 다닐로 로마노비치군을 격파하고 슬로님과 볼코비스크 등지를 탈환한 "민다우가스의 아들"을 언급했다. 이 인물은 바이셀가일 가능성이 높다.

1253년 아버지에 의해 노브로고드 공작에 선임되어 1254년까지 통치하면서, 현지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을 루테니아 국왕 다닐로 로마노비치의 아들이며 루테니아 북서부의 상속자인 스바르나스와 결혼시켰다. 1254년 다닐로와 화해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노브고로드 공국을 로만 다닐로비치에게 넘기고 폴론노예 시에 있는 폴로닌스키 수도원에 들어가 라브리쉬라는 이름으로 수도자 서약을 했다. 이후 헤움에서 그레고리 수도사와 만난 그는 그레고리의 설득을 받아들여 정교회로 개종했다.

폴로닌스키 수도원에서 3년간 보낸 후 1256년 또는 1257년에 아토스 산으로 순례를 떠났지만, 불가리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1257년 10~12명에 사제들과 함께 네만 강에 수도원을 세우고 라브리셰프스키(Lavrishevsky)라는 명칭을 붙였다. 1258년 갈리시아-볼히니아 공작들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자, 수도원을 떠나 사촌 토브티빌과 연합하여 로만 다닐로비치를 물리치고 사로잡았다가 석방한 뒤 재차 노브고로드 공작이 되었다. 이후 리투아니아에 기독교화 정책을 이루기 위해 리투아니아어에 익숙한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성직자들을 초청해 리투아니아에서 사역하도록 했다.

1263년 아버지를 살해하고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 트레니오타가 토브티빌을 살해하자 핀스크로 도주했다가 1264년 핀스크의 군대와 함께 노브고로드로 돌아와서 노브고로드의 보야르들이 일으킨 분대와 연합한 뒤 리투아니아로 진격해 많은 적군을 물리쳤다. 트레니오타는 얼마 후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많은 공작들이 반 기독교 정책을 펼쳤던 트레니오타를 지지했기에, 리투아니아는 내전에 휩싸였다. 그는 무력으로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헤움 공작 슈반 다닐로비치와 동맹을 맺고 날샤니와 디아볼트바를 공략했다.

1267년, 그는 슈반에게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맡기고 볼린 수도원으로 은퇴하기로 했다. 슈반은 함께 통치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해 4월 18일에서 4월 23일 사이에 슈반에게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맡기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에 분노한 슈반의 형제이자 갈리치아 공작 레프 디닐로비치에 의해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