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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22:24:41

게디미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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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10대 대공
게디미나스
Gediminas
파일:Gediminas_(1709).jpg
출생 1275년경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망 1341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1316년 ~ 1341년
아버지 부트비다스?
형제 보인?, 비테니스?, 테오도르
종교 발트 신화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
3.1. 대공이 되기 이전의 생애3.2. 게디미나스 대공
3.2.1. 외교 정책3.2.2. 서방 전선3.2.3. 동방 전선3.2.4. 내치
3.3. 사망
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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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10대 대공.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노련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저지하고 루테니아의 여러 공국들을 무혈점령하여 세력을 크게 넓힌 명군이다.

2. 언어별 표기

리투아니아어 Gediminas
벨라루스어 Гедзімін
우크라이나어 Гедимін
폴란드어 Giedymin
라틴어 Gedeminne, Gedeminnus

3. 생애

3.1. 대공이 되기 이전의 생애

1275년생으로 알려졌지만, 당대에 리투아니아와 관련된 문헌이 매우 희소했기 때문에 기원과 초기 생애 및 대공이 된 과정 등이 명확하지 않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리투아니아 8대 대공 부트비다스의 아들이며, 9대 대공 비테니스의 형제라고 한다. 반면 그가 비테니스의 아들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사촌이라는 설도 있다. 리투아니아인들의 오랜 적이었던 튜튼 기사단측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비테니스의 하인이었고 대공위를 확보하기 위해 비테니스를 살해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비테니스의 하인이었다는 기록은 튜튼 기사단이 자신들의 오랜 적이었던 그를 악의적으로 깎아내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간주하며, 비테니스와 비슷한 나이대에 대공이 되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비테니스의 아들이라는 설 역시 배제한다. 하지만 부트비다스의 아들이자 비테니스의 형제라는 기록 역시 신빙성이 있다고 확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평가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1380년 쿨리코보 전투를 다른 러시아 시 <자돈시치나( Zadonshchina)>에서 당시의 대공 알기르다스의 두 아들이 스칼만타스(Skalmantas)의 증손자로 일컬어지는 것을 근거로, 그의 아버지는 스칼만타스였다고 주장한다. 영국 역사가 스티븐 크리스토퍼 로웰(Stephen Christopher Rowell)은 게디미나스의 가문은 리투아니아 서부에 거주하는 사모기타이인을 이끌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들과 결혼 동맹을 맺고 서방에서 쳐들어오는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막아내는 역할을 수행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이에 따르면 게디미나스 역시 사모기타이에 기사단이 건설한 "게디민-부르크" 성을 포위 공격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역할을 맡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가 대공이 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현대 학자들은 튜튼 기사단 측의 악의적인 주장과는 달리 평화적으로 계승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3.2. 게디미나스 대공

3.2.1. 외교 정책

리투아니아는 튜튼 가사단과 가톨릭 세계, 그리고 정교회를 받든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게 있어 정벌 및 교리 전파의 대상이었다. 튜튼 기사단 측은 자신들의 본부가 있는 프로이센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 있는 리보니아 사이의 영역을 정복하기를 원했고, 교황청은 리투아니아에 가톨릭을 전파하길 원했으며, 모스크바 총대주교 역시 리투아니아에서 루스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을 관리하기를 희망했다. 게디미나스는 이러한 상황을 냉철하게 살펴본 뒤 정교회 측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교황청을 잘 구슬리면서 튜튼 기사단을 견제하기로 했다.

1317년, 게디미나스는 리투아니아 정교회 대주교구 설립을 승인했다. 리투아니아 정교회 대주교구는 대공국의 경계 내에 거주하는 정교회 신자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나중에 게디미나스가 정복한 동방 영토 역시 관리했다. 본거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된 흑루테니아(Чорная Русь)에 있었고, 테오필루스라는 성직자가 1317년에서 1330년 사이에 리투아니아 대주교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게디미나스는 리투아니아 영내에서 활동하는 루스인들을 위한 교회 설립을 허가해주면서, 장기적으로 그들의 호의를 사고자 노력했다.

1322년, 게디미나스는 라틴어 리가 대주교의 중개하에 교황 요한 22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일명 '게디미나스 서신'으로 일컬어지는 이 서신에서, 그는 일찍이 민다우가스가 모든 신하와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았지만,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에서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주민들이 전통 의식을 다시 받아들이려는 유혹에 굴복했다며 기사단을 단속해달라고 청했고,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자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용인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 서신에 적힌 아래의 문구는 교황청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fidem catholicam recipere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겠다.

1323년, 게디미나스는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들에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한자 동맹에 속한 모든 사회 계층에 자신의 영토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겠으며, 현지인과 동일한 급료로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튜튼 기사단이 자국의 영역을 끊임없이 침략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가톨릭을 적대시하고 있다면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기사단의 공격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에 1323년 8월 10일, 리가의 교황 특사와 리보니아 기사단, 인근의 성직자들이 모여 게디미나스의 편지에 대해 논의한 끝에 리투아니아에 사절을 보내 게디미나스가 개종할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하기로 결의했다. 1323년 9월 리투아니아를 방문한 사절들은 게디미나스의 정중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하느님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아신다"라는 말을 들었다. 다만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것을 확증할 문서를 발행하지 않았다.

교황 요한 22세는 게디미나스와 리투아니아인들이 개종할 여지를 주기로 마음먹고,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으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1323년 여름, 게디미나스가 군대를 일으켜 에스토니아 공국을 공략한 뒤 네만 강 유역의 메멜을 파괴한 후 삼비아, 도브쥔 일대를 약탈해 수많은 주민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자,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인들과 평화 협상을 논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323년 10월 2일,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사이의 평화 협약이 게디미나스가 이 해에 축조한 성채인 빌뉴스에서 확정되었다.

협정에 따르면, 향후 4년간 양자는 전쟁을 벌이지 말아야 하며, 협약의 최종 발효를 위해서는 교황의 비준이 필요하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1324년에 그에게 사절을 보내 직접 자신들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게디미나스가 거부하자, 튜튼 기사단장 베르너 폰 오르셀른은 게디미나스가 가톨릭 세계로 보낸 사자들을 투옥하고 때로는 살해했으며, 그들이 가져온 편지를 파괴하거나 왕실 인장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게디미나스가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재개하도록 유도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게디미나스는 튜튼 기사단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1324년 8월 교황이 평화 협약을 비준할 떄까지 꿋꿋이 버텼다. 그 해 10월 리가에 도착한 교황 특사는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모두가 이 협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해 11월, 교황 특사들이 빌뉴스에 도착한 뒤 게디미나스에게 세례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게디미나스는 리투아니아의 여러 지역에서 온 20여 명의 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들이 이교도들에게 극도로 무례하고 호전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의 대표자라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악마가 나에게 세례를 주기를!"

영국의 중세 역사가 에릭 크리스티안센(Eric Christiansen, 1937 ~ 2016)은 게디미나스가 처음부터 기독교를 포용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으며, 오로지 기사단의 침략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한 신중한 외교 전술이었다고 평가했다. 만약 개종이 이뤄졌다면, 그는 발트 신화를 신봉하는 사모기타이인과 아우크슈타이티야인들의 지지를 잃었을 것이고, 러시아 정교회도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게디미나스가 세례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지만, 평화 협약은 기사단이 1328년 또는 1329년에 침략을 재개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3.2.2. 서방 전선

1325년, 게디미나스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 카지미에시 3세를 자신의 딸인 알도나와 결혼시키고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1326년, 브와디스와프 1세는 교황 22세로부터 교황청과 심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물려받는 것을 막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에게 병력을 지원받은 뒤 브란덴부르크로 진군해 그해 2월 10일에 입성한 뒤 미엥지르제츠를 병합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인들이 브란덴부르크의 여러 부유한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했기 때문에, 브와디스와프 1세는 이교도와 야합하여 기독교도들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른 사악한 왕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1세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 니에모들린 공작 볼코로부터 비엘룬을 탈취했다. 1327년, 브와디스와프는 프워츠크를 공략하고 마조프셰를 폴란드 왕국의 영역으로 삼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원정군은 프워츠크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튜튼 기사단이 그를 규탄하며 전쟁을 단행하면서, 폴란드-튜튼 기사단 전쟁이 발발했다.

1328년 또는 1329년, 리가 주민들이 리보니아 기사단에 맞서 봉기했다. 그들은 게디미나스에게 사절을 보내 기사단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리가에서 기사단을 몰아냈다. 이에 격분한 튜튼 기사단장 에버하르트 폰 몬하임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도움을 받고 리투아니아를 향한 성전을 선포했다. 1329년 2월, 보헤미아군은 리투아니아의 메드베갈리스 요새를 정복하고 그곳에 살던 6,000명의 리투아니아인들을 강제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보헤미아군이 돌아간 뒤, 이들은 곧바로 전통 신앙으로 돌아갔다.

1329년 3월, 튜튼 기사단은 리가를 포위 공격해 1330년 3월에 항복하도록 강요했다. 시민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튜튼 수비대가 주둔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에 게디미나스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와 합세해 비스툴라 강을 건너 튜튼 기사단의 핵심 영토인 헤움노를 기습 공격했다. 1330년 9월, 양군은 튜튼 기사단을 코왈레보 포모르스키에 성에 몰아넣고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원정 도중에 브와디스와프와 게디미나스간의 개인적인 다툼으로 인해 동맹이 파탄나버렸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게디미나스가 철군한 후인 1330년 10월 18일 튜튼 기사단과 7개월간의 휴전 협약을 맺고 폴란드로 귀환했다.

이후 1331년부터 1334년까지 리보니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사모기티아인들의 영역에서 기사단과 사모기타이인들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지만, 기록이 부족해서 자세한 경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336년,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서유럽의 자원자들을 포함한 대규모 십자군을 일으켜 리투아니아로 쳐들어가서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리투아니아 병사들은 필레나이(Pilėnai) 요새에서 이들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이 임박해지자 항복하느니 죽기로 작정하고 집단 자살했다. 이후 혹독한 겨울이 닥쳐오면서 전투를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튜튼 기사단은 라우도네(Raudonė)에 요새를 세웠다. 이에 게디미나스는 1337년 라우도네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그와 동맹을 맺고 있던 트리카이 공작이 목숨을 잃었다.

1338년 8월 14일, 네만 시 인근의 갈리알라우크에서 튜튼 기사단장 하인리히 두세메르 폰 아르프베르크와 게디미나스가 맞붙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리투아니아군은 튜튼 기사단군보다 3배 더 많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이 패퇴했지만, 하인리히는 게디미나스가 새로운 공격을 시도할 것을 우려해 적을 추격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모범을 보이기 위해 물러났다. 리투아니아군은 이 전투에서 1,220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지나, 기사단 피해 역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전투가 끝난 직후 삼비아로 철수했다. 1338년 11월, 리보니아 기사단과 리투아니아간의 10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에도 양자간의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지만, 대규모 침략은 게디미나스 사후인 1344년이 되어서야 재개되었다.

3.2.3. 동방 전선

게디미나스는 서방에서 쳐들어오는 기사단을 막아내는 동안 내분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남쪽과 동쪽의 슬라브 공국을 꾸준히 공략했으며, 이와 동시에 동방의 공작 또는 공주와 자신들의 자녀들 사이의 전략적 결혼을 주선했다. 1320년에서 1330년 사이, 게디미나스는 키예프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이르핀 강 전투에서 키예프와 라쟌의 공작인 키예프의 스타니슬라우스와 그의 동맹군을 격파한 후 벨고로드, 민스크, 비테브스크, 나바흐루다크, 페레자슬라프, 오브루치, 지토미르 등지를 점령하고 키이우를 포위한 끝에 한 달 만에 함락시키고 형제 테오도르에게 그곳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후 투로프 공국과 핀스크 공국을 정복했으며,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에서 내전이 터진 틈을 타 이들의 영역에 속한 포들라키아를 합병했다.

게디미나스는 트베리 공국과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트베리 공자 디미트리와 딸 마리아를 결혼시켰으며, 트베리 공국이 정치적, 군사적 패권을 놓고 모스크바 대공국과 갈등을 빛던 트베리를 지원했다. 그러면서도 모스크바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1333년 자신의 딸 아나스타샤와 러시아 공자 시메온과의 결혼이 성사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스몰렌스크, 노브고르드 공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양자간의 무역 거래를 활성화시켰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이 시기에 흑해 연안까지 진출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기록이 부족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한편, 그는 킵차크 칸국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1319년 튜튼 기사단의 지속적인 침략에 맞서기 위해 킵차크 칸국에 살던 타타르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으며, 1324년 우즈베크 칸을 빌뉴스에서 접견해 회담을 갖기도 했다. 우즈베크 칸은 리투아니아인들이 킵차크 칸국의 봉신이었던 슬라브 공국들을 정복하거나 간접 통치하는 것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그 도시들에 대한 공물 지불을 계속 요구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를 묵인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킵차크 칸국은 1333년 리투아니아의 동맹 세력인 스몰렌스크를 공격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으며, 1339년엔 트베리를 공격하는 등 견제했지만 리투아니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3.2.4. 내치

게디미나스는 유럽 전역에서 상인을 끌어들여서 자국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했다. 특히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유대인 공동체가 그의 통치 하에서 리투아니아 각지에 확산되었다. 1323년과 1338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맺은 평화 협정에서, 그는 한자 동맹과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등지의 통행권을 보장해, 기독교 상인들과 리투아니아 상인들간의 교역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했다. 1338년 11월 리투아니아와 스몰렌스크 공국 사이에도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그의 치세 동안 자체 통화를 보유하지 않았으며, 무역 거래는 소위 리투아니아 장주화[1]로 이뤄졌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는 처음에는 게디미나스가 집권 직후 건설한 트라카이로 정해졌다가 1323년에 건설된 빌뉴스로 옮겨졌다. 전설에 따르면, 게디미나스는 사냥 여행 중에 언덕 위에 있는 철로 만든 늑대 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 그 늑대가 이상한 방식으로 울부짖었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제사장인 리즈데이카에게 밝혔고, 제사장은 늑대가 울부짖던 바로 그 자리에 도시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표징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게디미나스는 꿈에서 본 장소, 즉 빌니아강과 네리스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요새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이 빌뉴스였다고 한다.

그는 가톨릭 수도원 공동체가 대공국에 들어가 신자 및 지나가는 외국인과 교류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이교도 리투아니아인을 개종시키거나 고대 지역 신앙을 폄하하려는 모든 시도를 재심 없이 처벌했다. 1339~1340년 보헤미아에서 온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울리히와 마르틴이 리투아니아에서 공개적으로 발트 신화를 비난한 죄로 체포되었다. 게디미나스는 그들에게 설교를 철회하라고 요구했지만,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한 뒤 처형되었다.

3.3. 사망

15세기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게디미나스는 1337년 바이에르부르크 요새를 공격하던 중 요새에 가까운 참나무 기슭에 있을 때 다트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나 그가 전투에 대한 언급 없이 기사단 문서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을 고려하면 그가 전장에서 싸우다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학자들은 그의 이름이 기사단 기록에서 더이상 언급되지 않은 1341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리투아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이교도로서 죽었고, 전통에 따라 장례식 때 호화로운 장작더미가 준비되었고 인신공양이 시행되었다. 이후 대공국의 여러 지역에 대한 행정권이 그의 아들들에게 넘겨졌고, 대공위는 야우누티스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이 대공위를 쟁취하려 들고 기사단이 그의 사망을 틈타 공세를 개시하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내우외환에 휘말렸다.

4. 가족

게디미나스에게 아내가 몇 명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비호베츠 연대기>에 따르면, 쿠를란트 출신의 비다, 스몰렌스크 출신의 올가, 폴로츠크 출신의 야우네가 그의 아내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야우네는 다른 문헌에서도 등장하지만, 비다와 올가는 비호베츠 연대기 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허구의 인물로 간주된다. 야우네는 동방 정교회 신자였으며, 1344년 또는 1345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게디미나스는 야우네와 결혼하기 이전에 이교도 출신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15세기 후반에 집필된 <튜튼 기사단의 위트레흐트 연대기>에서 게디미니스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된 야우누티스를 나리만타스의 이복 동생으로 언급한 데서 비롯된 주장이다. 그러면서 야우누티스가 다른 형들을 제치고 대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게디미나스가 두번째로 맞이한 아내 야우네의 첫번째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추정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아래의 자녀들을 낳았다고 한다.


[1] Lietuviškas ilgasis: 은으로 이뤄진 상품 화폐. 길이는 약 13cm였고, 무게는 100~110g인 반원형 막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