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kai 트라카이 |
|||||
국가 | 리투아니아 | ||||
주 | 빌뉴스 주 | ||||
면적 | 497.1km² | ||||
인구 | 4,141명[1] | ||||
시간대 | UTC+02:00( 서머타임 적용) | ||||
[clearfix]
1. 개요
트라카이는 오늘날에는 5천여 명 남짓 거주하는 조그만 소도시이지만 서기 14세기 문헌에부터 꾸준히 언급될 만큼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도시였다. 호수들 사이에 건설된 요새로서 방어에 특화된 위치였기 때문이다. 특히 크림 반도의 카라임 유대인들의 사업 기지가 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카라임 유대인들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거주하지는 않으며 도시 인구 대부분은 리투아니아인(시 인구의 66.5%)과 폴란드인(19%)이다.2. 언어별 표기
리투아니아어 | Trakai |
폴란드어 | Troki(트로키) |
독일어 | Tracken/Traken(트라켄) |
벨라루스어 | Трака́й/Trakáj(트라카이) |
3. 역사
- 트라카이 요새
리투아니아 구전 전승에 따르면 13세기 게디미나스 대공이 이 지역에 요새를 건설했다고 하며 튜튼 기사단의 연대기에는 14세기부터 트라켄이라는 지명이 직접 언급되기 시작한다. 게디미나스 대공이 빌뉴스에 자리잡으면서 트라카이 요새는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켕스투티스에게 물려주는데 켕스투티스는 이 요새를 거점 삼아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사모기티아 지방을 방어해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동군 연합과 이후 사모기티아와 트라카이 요새를 위협하던 튜튼 기사단이 몰락하면서 트라카이에도 성당이 들어서고 1409년부로 도시는 마그데부르크 법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1413년에는 도시 내 주교구가 따로 설치될 정도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1410년 비타우타스 대공은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궤멸시킨 것을 기념하여 트라카이 성 내에서 7일 동안 축제를 벌였다 한다.
1397년 비타우타스 대공은 크림 반도에서 노예 무역을 하던 카라임 유대인 일부를 리투아니아로 초청하였는데 카라임 유대인들은 여기에 호응하여 빌뉴스와 트라카이에 상당수가 정착하였다. 다른 유대인들보다 덜 차별받고 훨씬 더 부유한 편이었던 카라임 유대인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리투아니아와 크림 반도 사이를 왕래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토크타미쉬 칸이 귀순할 때 함께 온 타타르인 일부가 비타우타스의 호위병으로 발탁되어 트라카이 성에 정착하였다. 오늘날 트라카이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언덕 길에는 단색으로 칠한 통나무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집들은 타타르 방식으로 지어진 집이라 한다. 립카 타타르인들이 먹던 키비나스( 엠파나다 닮은 요리, 삼사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라는 요리도 지역 특산품이다.
1569년 루블린 조약 이후 트라카이는 과거와 같은 정치적인 중요성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트라카이 요새는 유지되었지만 트라카이 시는 빌뉴스, 크라쿠프 같은 다른 도시에 밀려 조금씩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1477년 카지미에시 4세가 베네치아 사절을 트라카이에서 맞이하는 이벤트도 벌어졌지만, 이후 트라카이는 정치적으로 몰락한 왕족이나 귀족들을 밀어넣는 사실상의 유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17세기 중반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사이의 전쟁에서 트라카이 시내가 철저하게 약탈당하면서 명맥만 유지하던 도시로서의 기능도 마비되고 말았다. 18세기 초에는 대북방전쟁의 여파로 트라카이 일대가 가뭄과 역병에 시달리면서 도시는 결정타를 맞았다.
1795년 폴란드 분할 이후 트라카이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차 대전 와중에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독립하는 와중에 폴란드가 트라카이를 장악하고 폴란드야말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계승한다는 프로파간다를 위해 10여년에 걸쳐 공을 들여 트라카이 요새를 재건하였다.
4. 현대
2차 대전 초반부 폴란드 동부를 공격한 소련군들이 이 지역을 잠시 장악하였으나, 이후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트라카이를 점령한다.[2] 나치 독일 패망 이후 소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국경을 리투아니아 쪽으로 유리하게 재조정하면서 트라카이 시는 리투아니아 SSR의 영토가 되고 폴란드인 주민 상당수는 다시 폴란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트라카이를 접수한 리투아니아 측에서도 1961년부터 90년대 초까지 정치적, 역사적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중세 트라카이 요새를 복원 및 개축 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중세 시대 튜튼 기사단을 막아내고 20세기 내내 복원되던 트라카이 요새는 오늘날 트라카이 시의 랜드마크로 기능하고 있다.트라카이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와 차로 30~40분 정도 되는 거리이다보니, 빌뉴스를 방문하는 배낭여행객들이 자주 방문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빌뉴스에서 열기구를 타고 트라카이 성을 둘러보는 코스도 있고, 트라카이 구시가지의 오두막집들을 둘러보며 전통 음식을 먹는 투어 코스도 있다.
상술한대로 지역 특산물로 키비나스 혹은 키비나이(Kibinai)라고 불리는 음식이 있다. 키비나이 자체는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먹는 음식이긴 한데, 트라카이가 키비나이의 원조로 알려지면서 관광 상품화된 것. 비타우타스 대공과 토크타미쉬 칸을 따라 트라카이에 정착한 타타르족 호위병들이 먹던 중앙아시아식 페스트리 고기 파이[3]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추정되며 안에 양고기와 양파가 들어간다. 물론 트라카이는 카라임 유대인 상인들의 무역소가 있었던 만큼, 카라임 유대인들이 들여온 조리법이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종종 지역 주민들이 비타우타스 대공과 토크타미쉬 칸을 기리는 행사를 하면서 미녀들한테 립카 타타르 전통 의상 코스프레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 등 지역 전통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오늘날 트라카이 주민들도 조상 중에 립카 타타르인이 있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이런 행사도 가능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