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켕스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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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52301><colcolor=#ffffff> 리투아니아 대공국 14대 대공
켕스투티스
Kęstutis
파일:켕스투티스.jpg
출생 1297년에서 1300년 사이
리투아니아 대공국 빌뉴스
사망 1382년 8월 15일
리투아니아 대공국 크레바
재위 트라카이 공작
1337년 ~ 138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대공
1381년 ~ 1382년
아버지 게디미나스
형제 나리만타스, 야우누티스, 알기르다스
아내 비루테
자녀 7명
종교 발트 신화
1. 개요2. 생애3. 가족4.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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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14대 대공.

2. 생애

리투아니아 대공국 10대 대공 게디미나스의 아들이다. 형제로 나리만타스, 야우누티스, 알기르다스 등이 있었다.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 없다. 1337년 아버지 게디미나스가 바이에르부르크 성에 정착한 튜튼 기사단을 공격했으나 패전했을 때, 트라카이 공작이 전사했다. 당시 게디미나스가 트라카이 공국의 관리를 그에게 할당했는지는 불명확하다. 1341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형제들이 아버지의 영역을 분할했을 때 트라카이 공국과 사모기타이 공국의 관리권을 부여받았다.

1342년, 켕스투티스는 형제 알기르다스와 함께 리보니아 남부(현재 라트비아) 일대를 공격해 파괴를 자행하고 리가까지 진군했다.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 야우누티스가 형제들의 이같은 행위를 방임했는지, 아니면 이를 제지할 군사력이 없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343년 또는 1344년, 튜튼 기사단이 서유럽의 여러 주권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아낸 뒤 벨류오나 시를 침공했으나 공략에 애를 먹다가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의 반격에 직면하자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이후 두 사람은 1344년 하반기에 튜튼 기사단 및 폴란드 왕국과 일시적인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44년 12월,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리투아니아인들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에는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모라비아의 카렐, 부르봉의 피에르 1세, 에노의 기욤 2세도 참여했다. 십자군은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리투아니아인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무렵, 야우누티스의 어머니 야우네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야우누티스의 입지는 약해졌다. 여기에 최근에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명성이 드높아졌고, 대규모 십자군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해야 한다고 여긴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1345년에 야우누티스를 축출하기로 결의했다. 두 사람은 빌뉴스로 진격해 야우누티스를 폐위시켜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알기르다스는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고, 켕스투티스는 2인자격인 트라카이 공작에 선임되었다. 알기르다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동부 문제를 전담하기로 했고, 켕스투티스는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기사단, 폴란드 및 헝가리를 상대해야 하는 서부를 관리했다. 다만 상대방이 요청할 경우 함께 힘을 합쳐 외적을 공격하기로 했다.

1345년, 켕스투티스는 알기르다스와 함께 삼비아와 리보니아 중부 일대를 습격해 황폐화시키고 600명의 기사를 생포했다. 1346년, 두 사람은 지난해의 참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삼비아의 기사단을 재차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한편, 야우누티스는 한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 대공국에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정교회로 개종하고 세례명으로 요한을 받았다. 이후 시메온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또다른 형제인 나리만타스와 힘을 합쳐 켕스투티스를 처단하고 알기르다스를 폐위하려 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의 반격으로 인해 오히려 나리만타스가 축출되어 버렸고, 두 사람은 킵차크 칸국에 망명했다. 그후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에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야우누티스는 1347년 빌뉴스로 돌아온 뒤 대공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알기르다스, 켕스투티스와 화해했다. 알기르다스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야우누티스를 자슬라에 공작에 선임했다.

1348년 1월 튜튼 기사단이 프랑스와 영국에서 합류한 전사들과 연합한 뒤 십자군을 선포하고 리투아니아 서부로 쳐들어오자, 켕스투티스는 즉시 알기르다스와 연합해 이들을 대적할 태세를 갖췄다. 이후 적군 대다수가 악천후로 인해 체르냐호프스크에서 멈추고 단지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만이 리투아니아 깊숙이 들어와서 세엘리스케스, 아우크슈타드바리스, 트라카이 등지를 약탈하자, 이들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의했다.

1348년 2월 2일,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스트레바 강을 건너려던 십자군을 공격해 먼저 건너갔던 소규모 적병을 섬멸했다. 이후 강을 건너려는 적병을 향해 화살을 쏴서 많은 적병에게 보상을 입혔다. 이에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가 중기병을 이끌고 달려들었고, 리투아니아군은 갑작스러운 돌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이후 십자군은 많은 저항을 받지 않고 샤울리아이 지역을 공략하고 파괴를 자행했으며, 뒤이어 벨리우나 성을 파괴했다. 리투아니아 동쪽의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는 리투아니아군이 위세를 잃자 독립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중세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리투아니아를 향한 공세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

이 무렵,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스트라바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패배하면서 위세가 꺾인 틈을 타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귀속된 루테니아의 블라디미르 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카지미에시 3세는 1349년 9월에 군대를 일으켜 블라디미르를 기습 공격해 그 일대를 순식간에 평정했다. 이에 켕스투티스는 1350년 5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마조프셰를 침공해 바르샤바와 체르스크를 파괴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양산하고 윙체차까지 진격했다. 이에 카지미에시 3세는 군대를 일으켰고, 약탈을 마친 뒤 철수 중이던 그들을 추격해 주코프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해 8월, 켕스투티스는 재차 군대를 일으켜 루테니아를 침공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브워지미에시, 벨츠, 브레스트 및 여러 마을을 점령한 뒤 우쿠프, 산도미에시, 라듐으로 쳐들어가 많은 폴란드인을 납치했다. 카지미에시 3세는 이들을 완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리비프 땅을 제외한 블라디미르 전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돌려주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51년, 카지미에시 3세는 교황으로부터 4년 동안 내는 십일조의 절반을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와의 전쟁에 쓰는 것을 승낙받은 뒤 원정을 준비했다. 그해 6월,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헝가리군을 이끌고 폴란드군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침공할 준비를 갖췄다. 양군은 루블린에서 합류했는데, 카지미에시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본국으로 귀환했고 러요시 1세가 그를 대신해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을 이끌었다. 그 해 7월, 러요시의 군대에 직면한 켕스투티스는 러요시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형제들과 함께 부더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는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이 철수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요시 1세는 켕스투티스를 징벌하기 위해 재차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의 원정에 참여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리투아니아군의 습격으로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부더로 철수했다.

1352년, 병이 나은 카지미에시 3세는 다시 리투아니아 원정을 개시해 벨츠를 포위했다. 그해 3월, 러요시 1세가 카지미에시 3세와 합류한 뒤 벨츠를 성공적으로 함락시켰다. 이에 알기르다스가 형제를 도우기 위해 타타르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포돌레로 쳐들어오자, 러요시 1세는 본국이 침탈당할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해 5월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러요시 1세가 향후 4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징수할 권리를 승인했다. 그러면서 헝가리에 인접한 이교도들과 교회 분열주의자들의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러요시 1세는 1354년 4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헝가리군이 킵차크 칸국에 밀려와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하자, 자니베크 칸은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돕지 않고 헝가리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러요시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킵차크 칸국은 헝가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카지미에시 3세는 추가 군사 작전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니에즈노 대성당의 귀중품을 기부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가 사망한 폴란드 왕국에 통합된 도브진을 튜튼 기사단에게 저당잡히고 그 대가로 상당한 돈을 받아냈으며, 프워츠크 땅을 바르샤바 공작 카지미에시 1세에게 저당잡히고 역시 돈을 받아냈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 이르렀다가, 리투아니아 사절단과 협상한 끝에 양자가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고 지금까지 확보한 영토를 그대로 가지는 것이 허용되며, 양측은 휴전 기간 동안 요새를 건설하거나 재건하지 않고, 리투아니아인들은 타타르족이 폴란드 본토를 침공할 경우 폴란드를 도와야 하지만 루테니아를 침공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고, 카지미에시는 헝가리 왕이 리투아니아를 공격하면 리투아니아인을 지원해야 하지만 루테니아를 침공할 때는 돕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또한 리투아니아 공작 중 누군가가 휴전을 위반하면 대공이 그를 심판해야 하며, 양자는 서로에게 도망자들을 인도해야 했다.

카지미에시 3세가 협정에 만족하며 돌아간 뒤, 켕스투티스는 알기르다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협정을 재빨리 깨뜨렸다. 1353년, 켕스투티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인들은 리비우를 침공해 파괴했으며, 7월 7일 할리치나를 공략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후 소폴란드로 진군해 자비코스트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이에 분노한 카지미에시 3세는 그해 10월 보복 원정을 단행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354년 11월 10일, 교황청은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족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요청했고, 폴란드가 십일조를 군자금으로 쓰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1355년, 카지미에시 3세는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블라디미르 일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블라디미르 요새를 공략했다. 1356년 타타르인들이 이 요새를 빼앗자, 카지미에시는 스타니스와프 치올레크에게 병력을 맡겨 블라디미르 탈환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했고, 스타니스와프는 전사했다.

한편, 1352년 튜튼 기사단장에 선임된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는 흑사병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리투아니아인들과 전쟁을 지속하기엔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여기고, 튜튼 기사단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완충 지대, 즉 끊임없는 습격으로 인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을 넓혔다. 이와 동시에 리투아니아와 평화 협상을 이어갔고, 카지미에시 3세의 리투아니아 원정을 돕지 않았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1356년 9월 17일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르는 카지미에시를 돕지 않는 것을 질책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끝내 폴란드를 돕기를 거부했고, 1357년에 알기르다스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당시 튜튼 기사단과 갈등을 벌이고 있던 카지미에시 3세에게 적대적인 폴란드 공작을 지원했다. 힘지어 윈리히는 리투아니아와 함께 반 폴란드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6세가 "기사단이 이교도와 동맹을 맺고 기독교도를 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협상 자체를 차단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356년 여름 말 또는 초가을,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대한 내용은 알려진 바 없지만, 1357년 1월 24일에 발행된 교황 교령에서 이를 언급했다. 인노첸시오 6세는 이 문서에서 카지미에시가 이교도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을 비난했다. 1357년 12월 17일, 카지미에시는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리투아니아를 폴란드 교회 관구에 종속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58년, 알기르다스는 자신의 딸 케나를 스웁스크 공작이며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의 친척인 카지미에시 4세와 결혼시켰다. 여기에 마조프셰 공작과 리투아니아 사이에 국경 협약도 체결되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간의 평화가 일시적으로 성립되었지만, 볼히니아에 대한 양국의 대립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완전한 평화는 여전히 요원했다.

그러던 중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 형제 중 한 사람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 자신이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358년 7월, 두 형제 중 한 사람이 뉘른베르크에 있던 카를 4세에게 리투아니아가 기독교화를 원하므로 대공이 크리스마스에 세례를 받으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황제는 몹시 기뻐하며 브로츠와프에서 세례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정해진 날짜에 오지 않았고, 그 대신 사절을 보내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에게서 빼앗은 땅을 반환할 때까지 세레를 받지 않겠다고 알렸다. 물론 튜튼 기사단이 이를 거부했기에, 리투아니아의 기독교 개종은 이뤄지지 않았다.

1361년, 켕스투티스가 오카토보, 요하네스부르크 성을 공략하고 파괴한 뒤 우블리크 호수 인근에 진을 치다가 튜튼 지휘관 헤닝 신데코프의 소규모 분대의 습격을 받고 사로잡힌 뒤 마그데부르크 성에 구금되었다. 알기르다스는 형제의 석방을 위해 튜튼 기사단과 협상했지만, 그들이 요구한 몸값이 너무 높아서 협상이 지지부진했다. 켕스투티스는 반년 후 하인 알파스의 도움으로 3m 두께의 벽에 구멍을 뚫고 튜튼 기사로 분장한 뒤 말을 타고 탈출했다. 1362년 4월,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심부에 위치안 카우나스 성을 함락시키고 켕스투티수의 아들이자 수비대 사령관인 바이도타스를 사로잡았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1362년에서 1370년 사이에 약 20번의 원정을 감행했다. 튜튼 기사단은 카우나스 북쪽과 스벤토지 강 유역을 습격했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북서쪽 국경지대를 공략했다. 이들은 수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사로잡은 뒤 무슬림에게 노예로 팔아넘겨 막대한 이득을 취했으며, 점령지에 요새를 신설해 지배력을 굳혔다. 급기야 1365년, 켕스투티스의 아들 부타우타스가 아버지와 알기르다스가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에 참여한 형제 나리만타스를 돕기 위해 볼히니아에 가 있는 틈을 타 여러 귀족과 함께 빌뉴스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빌뉴스 총독 디르수나스에게 발각되었고, 부타우타스는 추종자들과 함께 튜튼 기사단국으로 망명한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헨리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1365년 8월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침공을 감독해 리투아니아 수도권에 위치한 케르나베와 마이시아갈라를 심각하게 파괴했다.

1367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리투아니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의 연이은 침공으로 피폐해진 틈을 타 루테니아를 침공해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그 땅의 주군인 루바트로부터 블라디므르와 루스크를 계속 다스리는 대가로 모든 적에 맞서 자신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68년, 리투아니아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조프셰를 침공해 프워츠크, 체르빈스크, 비쇼그로드, 풀투스크를 파괴했지만, 폴란드 본토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1370년, 튜튼 기사단의 거듭된 침략에 견디지 못한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리투아니아인, 사모기타이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타타르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프로이센으로 쳐들어가서 쾨니히스부르크 북쪽의 루다우 일대를 파괴했다. 이에 튜튼 기사단장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와 헤닝 신데코프는 프로이센에 주둔하고 있던 기사단을 신속히 모은 뒤 반격을 개시했다. 루다우 주변을 약탈하는 데 전념하던 켕스투티스는 어느 시점에서 적군의 접근을 인식하고 즉시 달아났고, 알기르다스는 고지로 올라가서 목책을 세워 대항했다. 이어진 루다우 전투에서, 리투아니아군은 1,000명 가까이가 전사했고, 튜튼 기사단은 26명의 기사와 100명 또는 200명의 병사들이 사살되었다. 온종일 이어진 전투 끝에 해질녘에 패전이 확실해지자, 알기르다스는 남은 병력을 수습해 철수했고, 튜튼 기사단은 지칠대로 지쳤기에 쫓아가지 않았다.

1373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호소했지만 무시당했다. 이 무렵, 카지미에시 3세 사후 폴란드 국왕을 겸임하게 된 러요시 1세가 자신의 모친이자 카지미에시 3세의 여동생이었던 엘즈비에타를 폴란드 대리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폴란드 귀족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고, 많은 귀족들은 그니에프코보 공작이자 피아스트 왕조의 일원이었던 브와디스와프를 폴란드 국왕으로 받들고 반기를 들었다.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카지미에시 3세가 빼앗아갔던 루테니아 일대를 탈환했고, 여세를 이어가 폴란드로 쳐들어가서 1376년 11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 인근까지 진격했다. 이에 폴란드인들은 크라쿠프에서 엘즈비에타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160여 명에 달하는 하인들이 살해당하자, 엘즈비에타는 헝가리로 도주했다. 브와디스와프 역시 공세를 이어가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러요시 1세는 헝가리군을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격해 폭도들을 처형하고 질서를 재정비한 뒤 브와디스와프를 몰아붙인 끝에 1377년 3월 브제시치 쿠야프스키(Brześć Kujawski)에서 브와디스와프에게 1만 플로린을 주고 헝가리의 펀논헐머에서 수도원장 직을 맡게 해주는 대가로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게 한 뒤 리투아니아군을 몰아붙였다. 설상가상으로, 튜튼 기사단이 헝가리의 리투아니아 공세에 가담해 1377년 2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포위했다. 알기르다스는 이를 가까스로 격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병에 걸려 1377년 5월 24일 빌뉴스에서 사망했다.

알기르다스 사후, 알기르다스의 아들로서 당시 빌뉴스에 유일하게 있던 요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에 선임되었다. 켕스투티스는 초기에는 조카의 집권을 용인했고, 러요시 1세와 튜튼 기사단과의 항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377년 여름, 러요시 1세는 루테니아로 친정해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헤움과 벨츠를 공략했다. 이후 옛 루테니아 왕국 대부분 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합병시켰다. 결국 라트노 공작 페도르, 포돌레 공작 알렉산더르와 보리스 등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러요시의 패권을 인정했다.

여기에 요가일라가 1380년 튜튼 기사단과 도비디슈케스 조약을 체결해, 기사단이 켕스투티스를 공격할 경우 자신은 돕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두 사람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켕스투티스는 튜튼 기사단이 트라카이 공국과 사모가타이 공국을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느라 큰 손실을 입으면서, 알가르다스와는 달리 자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요가일라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요가일라는 오히려 그가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서,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군대를 대신 이끌게 하라고 요구했다. 얼마 후 도비디슈케스 조약의 내용이 누설되었고, 켕스투티스는 극도로 분노해 조카를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1381년 요가일라에 의해 빌뉴스의 대리통치자로 선임된 스키르가일라가 폴라츠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했다.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빌뉴스에 입성한 뒤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등극했다. 요가일라는 곧 체포되었고, 크레바와 비테브스크에 잇따라 연금되었다가 자유를 대가로 모든 직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켕스투티스가 오랜 적인 튜튼 기사단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부과하자, 리투아니아 주민, 특히 상인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가일라가 대공에 복위하기를 희망했다. 요가일라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스키르가일라, 카리부타스와 동맹을 맺고 반격을 준비했다.

1382년 튜튼 기사단장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인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그바르데이스크에 이르렀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요가일라에게 사절을 보내 사모기티아의 영토를 양보해주면 그가 집권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요가일라는 이에 힘입어 트라카이를 공략한 뒤 리투아니아 심장부를 향해 진격했다. 빌뉴스 주민들은 리가의 상인 하눌의 선동을 받고 요가일라의 군대가 빌뉴스에 은밀하게 진입하는 것을 받아들었다.

나중에 빌뉴스가 요가일라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켕스투티스는 회군했지만, 대규모 내전을 피하고 싶었기에 아들 비타우타스와 함께 요가일라와 만나서 협상했다. 그러나 협상 도중에 요가일라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에 의해 생포되었고, 그 후 크레바 성내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요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했고, 켕스투티스는 1382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그가 자연사했다는 기록과 자살했다는 기록, 요가일라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제기되었지만 이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후 그의 유해는 그의 말과 무기와 함께 불태워졌고, 그의 지지자들은 투옥되거나 처형되었다. 한편 비타우타스는 여성복으로 변장해 크레바에서 탈출한 뒤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리투아니아 내전을 단행했다.

3. 가족

4. 대중 매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