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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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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인 울루스
اولوس جوي
Ulūs-i Jūchī [1]
Улус Джучи [2]
파일:킵차크 칸국 국기.svg
국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0px-GoldenHorde1300.png
위치
1237년~1502년
성립 이전 분열 이후
쿠만 모스크바 대공국
크림 칸국
몽골 제국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이흐 칸국
카자흐 칸국
<colbgcolor=#fff>위치 북아시아, 동유럽 일대
수도 사라이 바투, 사라이 베르케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지도자
주요 칸 바투 칸
베르케 칸
우즈베그 칸
토크타미쉬 칸
언어 중세 몽골어, 킵차크어[3], 러시아어
종교 텡그리, 이슬람, 그리스도교
종족 몽골인, 킵차크인, 쿠만인, 루스인
통화 풀(Pūl), 솜(Som)

1. 개요2. 구성 칸국3. 역사
3.1. 건국3.2. 통치3.3. 쇠퇴와 멸망
4. 역대 칸 목록5. 멸망 이후


[clearfix]

1. 개요

킵차크 칸국은 몽골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설립된 4대 칸국 가운데 하나이다. 표제어인 킵차크 칸국은 몽골이 튀르크와 함께 이곳에 오기 이전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중세 튀르크계 민족인 킵차크인에서 따온 것이다. 킵차크인들이 살게 된 이후 이 지역을 '킵차크 초원'이라고 불렀으므로 몽골인들이 세운 왕국 역시 킵차크 칸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해외 학계에서는 금장 칸국[4]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이는데, 이는 킵차크 칸국이 멸망하고 난 후인 16세기에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의 황금 천막에 붙인 별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킵차크 칸국이나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이라는 명칭은 당시 몽골인들이 사용한 명칭이 아닌 외부 세계의 호칭인 것이다. 킵차크 칸국과 다른 칸국들의 몽골인 지배층들은 킵차크 칸국이 주치가 분봉을 받은 영지에서 시작된 국가였기 때문에 주치인 울루스(= 주치 씨족의 영지)라고 불렀다. 한국의 2015 개정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울루스에 대한 표현을 강화하면서 '주치 울루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2. 구성 칸국

파일:킵차크 칸국.jpg
티무르 제국과 서방 학자들의 견해에 따른 위치 설정이다. 실제론 서부가 백장 칸국, 동부가 청장 칸국이었다.

킵차크 칸국은 크게 서부의 백장 칸국과 동부의 청장 칸국으로 이루어졌는데, 청장 칸국은 주치의 장남인 오르다 칸이 주치가 최초로 분봉받았던 지역에서 건국한 칸국이었다. 한편 백장 칸국은 주치의 차남이자 오르다 칸의 동생이었던 바투 칸이 러시아 제공국 등 서방 원정을 통해 점령한 지역을 바탕으로 건국한 칸국이었다. 즉, 주치 가(家)의 본가는 청장 칸국이었고, 분가가 백장 칸국이었다. 그런데 킵차크 칸국, 즉 주치인 울루스의 대칸은 백장 칸국의 칸이 대체로 겸직했다.[5] 이렇게 된 이유는 주치 사후 주치의 여러 아들들 중 가장 능력이 있고 세력이 컸던 바투가 주치인 울루스의 통치권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었다.[6] 이때 주치의 장남이었던 오르다 역시 자신의 몸이 약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바투가 이어 받는 것을 지지했다. 러시아 , 폴란드, 헝가리에 대한 서방 원정도 오르다가 몸이 약해서 바투가 이끌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칭기즈 칸의 장남이던 주치가 몽골 초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킵차크 지역에 자리를 잡았는고 하니 몽골의 전통상 장자는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땅을 물려받는 관습[7]이 있기도 했지만 주치 본인의 혈통 문제[8] 또한 반영된 지라 러시아 초원 일대에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원래는 장자인 오르다가 자기 땅을 가지기 위해서 서방 원정을 떠나야 했지만 몸이 약했던 관계로 오르다는 아버지 주치의 원래 분봉지에 남고, 차남인 바투가 서방 원정을 단행해 본인의 땅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주의할 점은 금장 칸국처럼 청장 칸국, 백장 칸국의 이름도 몽골의 러시아 지배기 때는 사용되지 않고 정작 킵차크 칸국이 멸망한 16세기 이후에나 사용된 용어란 점이다. 킵차크 칸국이나 다른 칸국 등 몽골인들은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과 오르다 칸의 지배 영역을 주치인 울루스라고 호칭했다. 즉, 청장 칸국이든 백장 칸국이든 모두 주치인 울루스이고, 울루스 내부에서 주치 가문의 서열에 따라 영지가 분봉된 것 뿐이었다.

《러시아 연대기》등 러시아의 자료와 페르시아(이란)의 자료에서는 킵차크 칸국의 서부 지역(오른손, 우익)을 백장 칸국으로, 동부(왼손, 좌익)를 청장 칸국으로 칭했다.

그에 반해 티무르 제국에서는 반대로 서부 지역을 청장 칸국, 동부를 백장 칸국으로 지칭했다.[9]

그리고 서방 학자들은 티무르 제국의 명명법을 따라 서부를 청장 칸국, 동부를 백장 칸국으로 정했다.

하지만 16세기에 킵차크 칸국에 대한 역사서인《Tarikh-i Dost Sultan》[10]을 집필한 역사가 외테미시 하지는 러시아와 페르시아의 자료처럼 킵차크 칸국의 서부 지역을 백장 칸국으로, 동부를 청장 칸국으로 칭했다.

이는 유럽과 러시아, 동양의 방위 개념의 차이에서 나온 것으로, 몽골인의 관점에서는 왼손, 즉 왼쪽 = 좌익은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으로 동쪽을, 그리고 오른손, 즉 오른쪽 = 우익은 서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왼손(= 좌익)으로 표현된 청장 칸국은 동부에 위치하고, 오른손(= 우익)으로 표현된 백장 칸국은 서부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러시아 연대기》나 페르시아 자료는 모두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저술된 자료라서, 몽골인의 지리 개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

몽골인들이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으로 동•서를 구분하는 것은 몽골인들의 시선이 언제나 풍요로운 정주 문명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몽골 북쪽은 항상 황량하고 지독하리 만치 추운 시베리아다. 당연히 몽골인들의 시선은 언제나 남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들의 지리 개념도 이에 따른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 정주 문명권에서도 중국의 오방색의 개념으로 왼쪽을 동쪽, 오른쪽을 서쪽으로 보았다. 오방색에 따르면 동쪽은 푸른색, 서쪽은 흰색인데, 이는 청장과 백장의 구분이 오방색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이유는 다르지만 몽골 등 유목민족이나 중국 등 정주문명 모두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다. 튀르크인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방위개념이 동일하다.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조선은 수도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었다. 조선 수군 전라좌수영이 경상도 옆에 붙어 있고, 전라우수영은 서해 지역 수역을 관할했던 것이 이 때문이었다.

3. 역사

3.1. 건국

파일:batu.jpg
바투 칸의 유럽 원정로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가 칭기즈 칸에게 분봉받은 영지가 모태가 되며, 주치의 아들 바투가 제2대 대칸인 우구데이 칸의 치세때, 유라시아 서부 초원 지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사실상 킵차크 칸국의 기틀을 닦았다. 전성기 시절 서쪽으로는 현재의 몰도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북쪽으로는 현재의 러시아, 남쪽으로는 흑해 연안, 캅카스까지 이르렀다.

바투 칸 이후 제위에 오른 동생 베르케 칸은 본격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기틀을 다졌다. 무슬림으로 개종해 킵차크 칸국의 이슬람화가 시작되었고, 제4대 대칸인 뭉케 칸의 명령을 받들어 인구조사를 실시해 원활한 징수를 가능하게 했다.

킵차크 칸국이 러시아 남부 스텝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루스인[11]들이 그동안 몇 세기에 걸쳐 터전을 닦아 놓은 가장 좋은 토지의 대부분을 뺏겼다는 뜻이었다. 이후 루스의 인구와 경제 활동, 그리고 정치적 중심은 모스크바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러시아 북동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가 끝난 후 각 대공들 사이의 소모전으로 인해 쇠락한 경제가 미처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몽골인들이 무거운 징수를 일삼자 루스인들은 큰 부담을 안고 말았다.

3.2. 통치

몽골족이 왕족으로서 최고 계급에 있었고, 튀르크계들이 관료나 상인 등의 중간 계급으로서 나머지 슬라브인들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14세기 초 우즈베크 칸이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 이후 몽골인들도 이슬람화했다.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 국가들의 전신이 된 나라가 킵차크 칸국이었다.

현재 볼가 타타르인의 직계 기원은 킵차크 칸국의 몽골·튀르크계 지배층 남성이 슬라브계 피지배층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얻으면서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점차 슬라브화된 경우 및 아예 슬라브계 백인 피지배층 남성이 출세를 노리거나 지즈야를 내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경우, 그리고 킵차크 칸국의 후계 국가들이 러시아에게 정복당한 후 킵차크 칸국 몽골계·튀르크계 지배층의 후손들이 러시아 치하에서 종교만 빼고 슬라브화된 경우다.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이룬 주치와 바투의 군대는 몽골인이 적고, 튀르크인 지배자들이 많았다. 특히 타타르인들의 조상인 튀르크계 킵차크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킵차크 칸국과 그 후계 국가를 타타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획득한 영지도 원래 킵차크인의 거주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초기부터 튀르크족의 영향을 짙게 받아 몽골과 튀르크의 문화가 섞였다. 국가 초기부터 지배자였던 튀르크들이 믿고 있던 이슬람을 몽골인들이 받아들이고, 우즈베크 칸이 즉위한 이후로는 사실상 튀르크족의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칸의 후예답게 기존 가톨릭 동방정교회에 매우 관대하였다. 심지어 우즈베크 칸은 교황으로부터 관대한 기독교 정책에 대한 감사편지를 받았고 우즈베크 칸 또한 교황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의 아들 자니베크 칸이 정교회의 모스크바 대주교를 불러 자기 아내의 병을 치료했다는 기록도 나온다.[12]

킵차크 칸국은 루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국들을 칸국의 속국으로 편입하였다. 루스인들은 일정 부분 자치를 인정 받은 대가로 종주국인 킵차크 칸국에게 의무적으로 공물을 납부해야 했으며, 칸이 요구하면 군대까지 지원해야 했다. 이렇게 1240년부터 1480년까지 칸국의 지배를 받은 기간을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몽골-타타르의 멍에(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라고 부른다. 원나라를 비롯한 다른 칸국들과 달리 킵차크 칸국은 루스인들과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지도 않고 동화되지도 않았기에 정복 이후에도 루스인과 몽골인은 문화적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13]

킵차크 칸국이 제대로 정착한 이후 베르케 칸의 시기부터 남쪽의 일 칸국과 티격태격해댔다. 일 칸국이 들어선 영역이 몽골의 전통으로는 칭기스 칸의 장자 주치의 땅, 곧 '주치인 울루스'로 여겨졌으며, 또한 훌라구가 페르시아 일대를 손에 넣은 후 킵차크 칸국에서 파견된 지휘관들을 숙청하고 병력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칸들이 오고타이 칸국을 지원하면서 원나라와는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카이두 사후 그럭저럭 원의 권위를 인정하고 친선관계를 이어갔다.

한편 크림 반도 제노바인과 제휴하여 크림 반도에서 볼가강 하류,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교역 루트를 장악하여 많은 부를 쌓았는데, 당시 융성한 모습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 베르케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묘사에 잘 드러나 있다.

몽케 칸을 찾아간 뤼브룩의 기욤이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특사 카르피니도 이 루트를 통해 카라코룸으로 향했다.

킵차크의 칸들은 루스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루스 도시 지배자들을 이용하였다. 이 중 가장 충실한 심복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이반 1세부터 본격적인 대공의 지위를 받아 세금 징수원 역할을 했다.[14] 때때로 모스크바 대공들은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도시들이 칸을 섬기지 않는다며 밀고했고 그때마다 킵차크 칸들은 징벌식 원정을 통해 도시들을 파괴시킴으로써 칸국의 종주권과 위신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모스크바 대공이나 트베리 공국의 공작이 칸에게 호출당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기도 했다.

3.3. 쇠퇴와 멸망

파일:Golden_Horde_Uzbek.png
우즈베크 칸 당시 강역
파일:640px-Golden_Horde_1389_el.png
토크타미쉬 칸 당시 강역.
그러나 킵차크 칸국은 14세기 중반에 들어 흑사병의 유행과 함께 우즈베크 칸의 후계자였던 자니베크 칸이 1357년에 살해되면서 삐끗하기 시작했으며, 1360년 이후 20년에 걸쳐 '대혼란'이라고 부르는 계승분쟁 시기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권신 마마이가 등장해 본인의 입맛에 맞게 칸들을 갈아치우면서도 나름대로 킵차크 칸국의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국이 점차 세를 키워가면서 킵차크 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시도했고 1380년에는 모스크바 공작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러시아 제후 연합군과 벌인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가 대패하면서 제대로 망신을 당하고 만다.[15]

한편, 킵차크 칸국의 동부 지역인 청장 칸국에선 티무르의 지원을 받은 토크타미쉬가 우루스 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청장 칸국의 지배자가 된 토크타미쉬는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1381년 쿨리코보 전투의 패배로 인해 힘이 약해져 있던 마마이를 몰아내고 킵차크 칸국 전역을 통일, '대혼란' 시기를 어느 정도 수습했다.[16] 또한 1382년에는 노골적으로 독립할 낌새를 보이던 모스크바를 다른 루스 공국들과 연합해 털면서[17] 러시아에 대한 종주권은 다시 인정받았으나 과거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동맹 관계에 있던 티무르 제국이 손에 넣은 페르시아를 탐내 타브리즈를 약탈한 것을 계기로 동맹은 결렬됐고, 여기저기에서 티무르에게 갈리다가 1395년에는 결국 수도 사라이 베르케까지 함락당했다. 이때 사라이, 아스트라한 등 킵차크 칸국의 주요 도시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티무르 제국으로 끌려간 것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킵차크 칸국이 전통적으로 일 칸국의 영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인간흉기 티무르에게 도전한 대가는 실로 가혹했다. 킵차크 칸국의 권위는 와해되고 영내 여러 부족과 토후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칸위에서 쫒겨난 토크타미쉬는 예전부터 킵차크 칸국과 우크라이나 일대를 놓고 경쟁해오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망명해서,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과 함께 킵차크 칸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의 팽창은 1399년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티무르가 임명한 테무르 쿠틀룩 칸과 에미르 에디구가 리투아니아군을 궤멸하면서 멈췄다. 하지만 이미 킵차크 칸국은 리투아니아에게 우크라이나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리투아니아의 흑해 진출을 허용했다.[18]

킵차크 칸국의 말년에는 여러 칸들이 번갈아 즉위하며 혼란이 이어지던 와중에 군벌이자 킹메이커, 망기트 부[19]의 수장 에디구가 부상했다. 에디구는 전술했듯이 리투아니아의 침공을 물리치고 1408년에는 조공을 거부하던 모스크바 등 러시아 내 공국들까지 약탈함으로써 킵차크 칸국의 위신을 세우려 했다. 에디구는 과거의 마마이와 유사하게 혼란기 킵차크 칸국에서 나름대로 중심을 지킨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에디구 사후 1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노가이 칸국, 우즈베크 칸국[20], 카자흐 칸국[21] 등으로 분열되면서 킵차크 칸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 칸국들이 떨어져가고 남은 킵차크 칸국을 이흐 칸국이라고도 한다.

마침내 아흐메트 칸 재위시절인 1476년 러시아 제후국들을 하나씩 통합하고 있던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크림 칸국과 제휴하여 킵차크 칸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480년 아흐메트 칸은 군사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응징하러 출전했지만, 양군은 우그라 강에서 대치만 하다 철군하였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이를 240년에 달하는 몽골-타타르의 지배가 종료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본다. 이후 이흐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기로 한 크림 칸국에 의해 수도가 약탈당하며 멸망한다.

4. 역대 칸 목록

5. 멸망 이후

킵차크 칸국의 계승 국가
백장 칸국 이흐 칸국 · 아스트라한 칸국 · 카잔 칸국 · 크림 칸국 · 카심 칸국
청장 칸국 노가이 칸국 · 시비르 칸국 · 부하라 칸국 · 카자흐 칸국



[1] 라시드 앗딘의 집사(集史) 표기 [2] 러시아어 표기. 참고로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정식명칭은 Золотая Орда(금장 칸국)이지만 이칭으로 이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3] 타타르어, 카자흐어, 노가이어 등의 조상어뻘이 된다. [4] The Golden Horde, 金帳汗國, Золотая Орда [5] 단, 예외적으로 청장 칸국의 칸이 킵차크 칸국의 대칸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바로 티무르의 라이벌로 유명했던 토크타미쉬 칸이 이에 해당된다. [6] 장자 우선이 없는 유목민족의 특성 중 하나이다. 이후 만주족 후금을 세웠을 때도 같은 이유로 홍타이지 만주이 되었다. [7] 유목민들의 말자 상속제에 관한 자료들을 참고하면 좋다. [8] 일명 메르키트 콤플렉스 칭기즈 칸 배우자 보르테 우진이 메르키트에 납치되었다가 다시 구출된 지 9개월 만에 출산한 아이가 주치이다 보니, 메르키트의 남성에게 강간당하여 임신한 뒤 나온 것이 아니냐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고, 이 때문에 차기 대칸의 후보에 들지 못했다. [9] 티무르 제국에서는 자신들을 기준으로 서부 지역을 청장 칸국, 동부 지역을 백장 칸국으로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10] 14세기 초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우즈베크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을 포함한 킵차크 칸국에 대한 역사서. [11] 동슬라브족으로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였다. [12] 다만 이건 살펴보면 복잡한게 그 당시 러시아 교회의 수장은 엄연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세계총대주교였고, 비잔티움이 킵차크 칸국에 관용적이었던 것이 더 컸다. 오죽하면 친타타르 성향을 띄는 비잔티움에 대한 러시아 교회의 반발이 제3의 로마로 대표되는 반비잔틴적 민족주의적 이념을 만들어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13] 러시아의 타타르계 혼혈 귀족들이 지적되는데, 아예 기원이 완전히 입증되거나 이후 정복당해서 편입된 귀족층 정도를 제외하면 그 당시 소위 타타르계 러시아 귀족은 "무지몽매한 이교도였지만 기적을 목도하고 세례를 받아 러시아인이 되었다"는 식의 검증 불가능한 시조 전설의 내용이기에 신빙성이 없다. 보리스 고두노프만 하더라도 이교도 타타르인이었는데 성모의 환상을 보고 병이 치유되어서 수도원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때문에 설령 타타르 혈통이 맞다 하더라도 결국 문화적으로는 철저하게 구분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14] 사실상 모스크바가 하나의 도시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5] 평소대로라면 모스크바가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짓밟아 이 지역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킵차크 칸국의 기본적인 전략이었지만, 1360년대의 내분이 이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고 이후에는 모스크바가 지나치게 강성해져버린다. [16] 이후 마마이는 본거지인 크림반도로 도망쳤으나, 그 곳에 있던 제노바인 유력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17] 이 때 모스크바의 방어 태세가 워낙 견고해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토크타미쉬는 책략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하였는데,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수비가 너무 견고해서 점령하는 걸 포기했으니 친위대와 함께 성을 둘러봐도 되겠냐고 물었고 이게 기만책인지 몰랐던 모스크바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순진하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에 칸의 군대가 곧바로 성 안으로 진입해 모스크바를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18] 이 때 토크타미쉬는 패배를 직감했는지 러시아의 튜멘 지방으로 도주해 후일을 도모하려 했으나 에디구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 훗날 노가이 칸국으로 발전한다. [20] 티무르 왕조를 중앙아시아에서 쫓아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모태. [21] 우즈베크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다. 현재 카자흐스탄의 모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