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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中華民國 | Republic of China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colbgcolor=#de2119> 국기 국장
五族共和
오족공화
파일:china_map_1912.svg.png
1913년 ~ 1915년, 1916년 ~ 1928년[1]
성립 이전 동북역치 이후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국민정부
이칭 북양정부(北洋政府)
국가 오족공화가 ,(1913년),
경운가 ,(1913년~1915년),
단호하게 선 조물주, 중국이여! ,(1915년~1921년),
경운가 ,(1921년 ~ 1928년),
위치 중국 대륙
명목상 영토 투바, 외몽골, 티베트
수도 공식 베이징 ,(1913년 ~ 1928년),
임시 선양 ,(1928년),
면적 11,418,174km²
정치 체제 공화제
의원내각제[2](1913년, 1916년~1923년, 1924년)
초급총통제[3](1914년~1915년)
대통령중심제[4](1923년~1924년)
내각제[5](1925년~1927년)
군정[6](1927~1928년)
국가원수 중화민국 대총통 ,(1913년~1924년),
임시집정 ,(1924년~1927년),
육해군대원수 ,(1927년~1928년),
정부수반 국무총리
입법 기구 양원제 국회
언어 중국어
문자 한자, 주음부호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기독교
민족 한족, 위구르족, 몽골족, 티베트족, 만주족, 소수민족
통화 위안
본위제도 은본위제도

1. 개요2. 국기3. 국가
3.1. 오족공화가3.2. 경운가3.3. 단호하게 선 조물주, 중국이여!
4. 역사5. 정치
5.1. 대략적 정치체제5.2. 초기 시대5.3. 중기 시대5.4. 후기 시대와 그 이후
6. 주요 사건7. 관련 인물
7.1. 역대 국가원수7.2. 역대 부총통7.3. 역대 정부수반7.4. 정치가7.5. 국민당7.6.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북양정부(北洋政府, Beiyang government)는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중화민국 과도정부다. 북양정부라는 이름의 유래는 초대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영도한 군벌인 북양군벌이다.

2. 국기

오색기(五色旗)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다섯 개의 색깔이어서 오색기라고 한다. 공모를 통해 선정되었는데, 그 중 쑹자오런이 고안한 이 깃발을 1912년 1월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의회가 정식 국기로 제정하였다. 공모했었던 여러 깃발 중에서 쑨원이 고안한 청천백일만지홍기는 훗날 국민정부 수립과 함께 국기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붉은색은 한족, 노란색은 만주족, 파란색은 몽골족, 흰색은 위구르족, 검은색은 티베트족을 상징한다.[7] 중국을 한족의 국가가 아닌 소위 한만몽회장(漢滿蒙回藏), 즉 다섯 개의 민족이 연합된 국가로 규정하는 오족공화의 사상에 짙은 영향을 받았다.

사실 이 오색기는 긴 역사를 가진 상징이다.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 때부터 5가지 색의 군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오행, 즉 나무(청색) 불(홍색), 흙(황색), 쇠(백색), 물(흑색)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오색기는 당나라 때도 사용되었는데, 5개의 서로 다른 깃발이 아닌 한 깃발 안에 5가지 색이 들어있는 형태로 진화하였다. 오색기가 오행만이 아닌, 다민족국가를 의미하게 된 건 정복왕조인 원나라 때부터였다. 이후 , 대까지 오색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활용되어 점차 군기와 국기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3. 국가

3.1. 오족공화가

오족공화가

쑨원이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을 당시부터 북양정부 초기까지 쓰였던 국가.

3.2. 경운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운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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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랫동안 쓰인 국가이며 '북양정부 국가'라고 하면 대개 경운가를 칭한다.

3.3. 단호하게 선 조물주, 중국이여!

단호하게 선 조물주, 중국이여!

위안스카이의 홍헌제제 이후 쓰였던 국가.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가, 1921년 다시 경운가로 복귀하였다.

4. 역사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직을 받고 북양정부 수립을 완료한 위안스카이는 수도를 베이징에 두었으며, 독재 체제를 굳히려는 양상을 보였다. 그는 안으로는 혁명가들을 탄압하였으며, 밖으로는 열강들에게 너무 많은 이권을 주어 점차 국민들의 반발을 산다. 대총통에 집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문들과 장남 위안커딩의 권유로 이전부터 꿈꿔왔던 황제의 꿈을 실현시켰다.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수많은 중국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심지어 측근들도 대부분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가족들조차 위안커딩을 제외하면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더 나아가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열강들 반발에도 직면하였다. 결국 1915년 12월 25일에는 운남군벌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합세하여 토원 봉기가 일어나는 등 봉기가 전국으로 퍼져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3월 23일 제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측근들의 배신과 하야 압력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6월 6일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대리총통 리위안훙은 임시약법과 구국회의 회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헌법 제정 문제로 국회 내부의 정쟁이 이어졌고 부원지쟁 장훈복벽을 거쳐 중화민국 국회가 다시 전복되면서 호법전쟁 등 남북 내전이 이어졌다. 북방에서는 북양정부의 권력을 쥐기 위해 북양군벌에서 갈라진 계파인 직예군벌, 안휘군벌, 봉천군벌 등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며 중앙에서 대립했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는 지역 군벌들이 난립하여 내전을 이어갔고,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1928년까지 이어졌다. 1919년 외몽골 출병을 통해 외몽골을 다시 복속시키는 등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마저도 1921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세력에게 장악되어 다시 상실하고 만다.

1926년 장제스 북벌이 시작되면서 북양정부를 치기 위해 북상했고, 이에 북양군벌들의 계파는 급하게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대응했다. 국민당은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잠시 분열되었으나 곧 영한합작을 통해 난징 국민정부로 통합하였고 1928년 펑위샹, 옌시산 등과 힘을 합쳐 2차 북벌에 나섰다. 결국 장쭤린은 수도를 봉천으로 옮긴다고 선포한 후 내각을 거느리고 본거지인 만주로 퇴각하다가 관동군 고모토 다이사쿠, 도이하라 겐지 등이 일으킨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어 장쉐량이 봉천군벌의 지도자가 되지만, 국민당과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다 결국 장제스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5. 정치

[[중화민국 북양정부|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정부의 주요 파벌]]
안복계 교통계 연구계

5.1. 대략적 정치체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중화민국 임시약법
, 대총통선거법
, 수정대총통선거법
,
,
,


북양정부의 정치체제는 시대에 따라 달랐는데, 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문서에선 크게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취임부터 홍헌제제의 선포와 호국전쟁까지(1913-1915)를 초기로, 홍헌제제의 취소와 임시약법의 복구부터 장훈복벽까지(1916-1917)를 중기로, 호법전쟁부터 뤄원간 사건까지(1918-1922)[8]를 후기로, 이후 북벌까지(1923-1927)를 말기로 잡는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

헌법상 미국 국회를 모티브로 삼아 구상된 북양정부 국회는 인구 80만 명당 1석씩 배정되는 3년 임기의 중의원(하원), 성별 및 지역별로 10명씩 분배해 총 265명으로 구성되는 6년 임기의 참의원(상원)[9]으로 이뤄진 양원제였으며, 중의원 선거는 인구가 워낙 많아 유권자수를 집계하기 힘든 당시 중국의 특성상 현 단위 선거구를 기준으로 정원수의 50배만큼 예비의원을 선출하는 초선을 실시한 뒤 결선투표로 최종 의원을 선출하는 특이한 방식을 채택했다.

중의원 및 대총통 선거권은 현 단위 선거구에 2년 이상 거주했고 1년 납세액이 2위안 이상이거나 소유 부동산이 500위안 이상인 21세 이상의 주민을 대상으로 주어져 보통선거가 보장되지 않았으며, 피선거권은 연령을 제외하면 선거권과 동일한 조건으로 중의원 출마는 25세 이상, 참의원 출마는 30세 이상부터 가능했다.

이후 부원지쟁이 끝난 11월 10일 개정된 국회조직법 및 중참의원선거법에선 선거권을 1년 납세액이 4위안 이상이거나 소유 부동산 1000위안 이상인 25세 이상의 주민에게만 부여해 선거인수를 매우 크게 줄였으며, 피선거권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식자층 및 직접세를 100위안 이상 납부했거나 부동산을 5만 위안 이상 소유한 부유층에게로 한정해 중의원 정원을 약 600명에서 약 400명으로, 참의원 정원을 약 275명에서 약 170명으로 줄이는 개악을 실시했다. 이는 의원수를 줄여 매수 및 부정선거를 통한 국회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안휘군벌의 의도가 담겨 있었으며, 이러한 개악이 대중 사이에서 매우 심각한 반발을 샀기 때문에 안직전쟁 직후 장쭤린이 신국회를 해산하고 구국회를 복원하면서 다시 예전과 같은 선거법이 적용되었다.

정부 구조의 경우 약법 제정 당시 대총통제를 강력히 주장한 위안스카이와 책임내각제를 강력히 주장한 쑹자오런, 장빙린 등의 극렬한 대립 끝에 일종의 타협으로서 현대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제에 가까운 책임총리제가 자리잡았는데, 대총통과 국무총리, 국회가 삼각구도를 이루었고 원래라면 삼권분립의 마지막 한 축을 이루어야 하는 사법부는 내각에 일개 각료 자격으로 입각하는 사법총장의 지휘를 받았기에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다. 대총통은 거부권과 군정권을 제외하면 행정명령을 통한 법률의 반포와 각료의 임명, 훈장 수여 등의 비교적 사소한 권한만을 보유했고 국무총리는 군령권과 함께 장관급 각료인 9대 총장을 지명하고 그 명단을 국회에 제출(사실상 강제)하는 막강한 권한을 보유했는데, 이는 다당제 하의 상호견제의 원리를 통해 특정 정파가 정치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하에서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대총통과 국무총리가 대립해 극도로 불안정한 정국이 이어지거나 아예 대총통과 국무총리를 동시에 장악하는 역효과를 낳을 때가 더 많았다.

임시약법 체제의 또다른 특징으론 국회의 권력이 매우 막강했다는 점이 있는데, 약법에서 규정한 국회의 직권은 모든 법률, 세법, 화폐 및 도량형의 준칙 등의 의결에 대한 입법권, 대총통의 국무원 및 외교관의 임면과 선전, 강화, 조약체결 등의 동의에 대한 승락권, 정부의 예산과 결산, 공채의 모집 및 국고에서 부담하는 계약의 의결에 대한 재정결정권, 법률 및 기타 사건에 대한 의견의 건의권, 국무원에 대한 질문서 송부와 청문회에 대한 질문권, 대총통 탄핵권과 부정부패 수사권 등이 있었고 국무총리 또한 대총통이 아닌 국회에 책임을 졌기 때문에 대총통과 국무총리 간의 상호견제는 주로 국회의 성향이 어느쪽인지에 따라 균형이 결정되었다. 부원지쟁 이후 차례로 중앙정부를 장악한 돤치루이, 장쭤린, 차오쿤 또한 구약법에 기초한 국회를 아예 무너뜨리기보단 국회해산 및 조기선거를 통해 의원들의 인적 구성을 자신의 편으로 교체하거나 의원 개개인을 매수해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국회를 통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쪽으로 행동했으며, 겉으로나마 국회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군벌정권의 태생적으로 불안한 정통성을 보강하려 시도했다.

한편, 내각에 입각하는 9대 총장은 외교총장, 내무총장, 재정총장, 육군총장, 해군총장, 교육총장, 사법총장, 농상총장, 교통총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외교총장[10]과 해군총장[11]은 비정치적 한직으로, 사법총장[12]과 교육총장[13]은 비정치적 요직으로, 나머지 5대 총장은 정치적 요직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교통은행과 철도, 전신, 우편, 선편 수입 및 차관 도입 권한을 보유해 대총통이나 국무총리조차 어쩌지 못하는 막강한 자금 동원력을 보유한 교통총장은 아예 북양정부의 3대 비군벌 정파 중 하나인 교통계를 이끄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5.2. 초기 시대

초기 시대에는 중화민국 임시정부 때 선포된 임시 약법에 따라 임시참의원에서 임시 대총통을 선출하고 임시대총통이 국무총리를 임명하면 임시참의원이 인준하였다. 이후 북양정부의 참의원과 중의원이 구성되면서 임시참의원의 역할은 양원제 국회가 대신하였다. 하원뿐 아니라 상원까지 국가수반 선출에 관여한 이유는 북양정부는 의원내각제였으나 의회제도는 미국에서 영향을 받았기에 선출방식에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상하원이 동등했기 때문이다.

임시약법은 본래 위안스카이 혁명파가 '대강' 논의한 조직대강을 근간으로 제정되었지만 인민의 권리와 의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계급, 종족, 종교의 차별을 없애는 등 보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법안으로, 무엇보다 위안스카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각책임제를 관철했다는 점에서[14] 큰 의의를 가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식 헌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맺은 임시 규약이었기 때문에 정부구성 전에 필요한 권리장전은 제대로 되어있었으나 정부 구성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북양시대의 국무총리들은 1년의 임기를 가지고 국회의 동의를 거쳐 연임하는 방식으로 선출되었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고 연임한 총리는 진윈펑 한 사람 뿐이다. 임시로 사용되었어야 할 임시약법은 회선 사건 이후 대총통으로 취임한 차오쿤 1923년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실질적인 헌법으로 기능했으며, 이는 약법의 적용 범위는 물론 심지어 약법의 복원 여부만으로도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임시약법의 취약점을 간파한 위안스카이는 계축전쟁으로 국민당의 기세가 크게 꺾인 틈을 타 1913년 10월 25일 각성의 도독 및 민정장관들에게 국민당이 다수당 지위를 이용해 행정부의 독립권을 소멸시키고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가짜 뉴스를 퍼뜨렸으며, 이윽고 11월 4일 국민당을 해산하고 438명에 달하는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해 국회를 개회하기 위한 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하게 만든 뒤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실시해 제왕적 대총통제로의 개편을 단행, 5월 1일에는 종신제 대총통제를 골자로 한 신약법을 반포했다.

신약법 시기는 홍헌제제의 예비 단계로 초급총통제라는 이름으로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했다. 대총통으로써 외국과의 조약과 강화, 긴급명령, 계엄령의 발효와 해엄 등의 권한을 의회의 동의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오히려 의회의 설립을 규정하지도 않았다. 국무총리는 제정 시대 명칭인 국무경으로 개칭되었고 자신의 뜻대로 임면할 수 있었다. 그는 종신 대통령으로 형식상의 선거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선출에 대한 규정조차 없었기에 신약법은 그야말로 위안스카이 1인만을 위한 법이었고 그 어떤 후속조치가 없었다.

국회를 무력화하고 종신제 총통직을 손에 넣은 위안스카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 의회를 대신할 거수기 기관인 입법원을 설치, 소속 의원들의 추대를 받아 중화제국을 선포했지만, 정작 북양군벌의 핵심 심복들 중 대부분에게도 반대를 산데다가[15] 분노한 혁명파 세력이 호국전쟁을 일으키며 단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제제를 취소하게 된다.

5.3. 중기 시대

이후 홍헌제제가 호국전쟁의 발발로 졸속하게 마무리되자 돤치루이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물로 여겨진 것 때문에[16] 혁명파와 위안스카이 양쪽에게 추천을 받아 약법 및 민국 체제의 복원을 담당할 책임총리가 되었다.[17] 하지만 혁명파의 핵심 인사인 리위안훙과 북양군벌의 야심가인 돤치루이가 성향상 잘 맞을 리가 없었고 북양정부의 정치는 그대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북양정부의 중기 시대는 완전한 정치적 혼란으로 점철되었는데, 우선 신생국인 중화민국에 동양에선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던 민주주의가 잘 정착할 리가 없었기에 인구 80만 명당 1명씩 총 600명 구성으로 이루어진 중의원 의석은 지역 주민들을 온갖 방법으로 매수해 당선된 유지 및 신사층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가뜩이나 많은 의원들이 매수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결집하기 시작하면서 국회가 사실상 마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많게는 수십 개나 되던 원내 정파가 아귀다툼을 하는 동안 이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은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은 구약법 체제 하에서 대총통-국무원 간의 권한 구분이 명확치 않다는 이유 때문에 극렬히 대립했고,[18] 이것이 부원지쟁으로 이어지면서 북양정부의 짧았던 정당정치는 파국을 맞이했다.

안휘군벌이라는 막강한 군사적 배경을 갖춘 책임내각의 총리인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을 결재용 기관쯤으로만 취급하면서 각종 행정업무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했으며, 이에 리위안훙은 대총통의 권한인 거부권으로 맞섰다. 그러는 동안 국회는 국민당이 다수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쑨원의 지도 하에 같은 혁명파 출신인 리위안훙과 합작해 돤치루이를 압박하려 시도했으며, 약법에 따르면 국무총리는 국회에 책임을 지고 국회는 국무원에 대한 탄핵권을 가졌기 때문에 이는 돤치루이가 극단적인 한 수를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원래부터 국무총리 자리를 대총통에 오르기 위한 발판쯤으로 생각한데다가 언젠가 자신이 앉을 대총통직의 실권을 더욱 늘리기 위해 구약법의 복원이 아닌 신약법의 유지를 원했던 돤치루이는 부원지쟁 끝에 벌어진 장훈복벽을 계기로 리위안훙과 혁명파를 축출하고 정통성의 확보를 위해 '일단은' 구약법에 기반한 신국회를 선출해 중앙 정계를 어용 정치인들로 가득 채웠으며, 이를 안복국회라고 한다. 구약법에 의거해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데다가 그 권한을 독재자인 돤치루이 한 사람을 위해 휘두르는 안복국회의 수립으로 북양정부의 정당정치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이 뒤로 국민정부가 북양정부를 몰아낼 때까지 호인정부론에 기반한 무당파적인 인물 중심 정치와 군벌들의 할거가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원지쟁으로 대표되는 극심한 대립으로 제대로 된 통치가 이뤄지지 않았던 북양정부 중기는 경제적 측면에서 북양정부가 나라 구실을 하던 유일한 시기였다. 북양정부 수립 년도인 1913년 당시 4억 1267만 위안에 달했던 세입액은 군벌들이 마구 할거하고 정부가 남북으로 찢어진 1915년에 이르면 1억 3067만 위안까지 주저앉아 사실상 행정이 마비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관세의 집계를 외국인 및 매판 자본에게 위임해 일부 금액을 수수료로 지불하는 대가로 안정적인 조세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1916년엔 세입액 3억 1578만 위안으로 중원대전 이전의 마지막 흑자재정을 확보해 중앙 및 지방행정을 나름 안정적으로 굴릴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군대 규모가 50만 명밖에(?) 되지 않았던 점 또한 안정적인 행정 운영에 보탬이 되었다. 흔히 군벌정권으로 여겨지는 북양정부가 본격적인 군 팽창에 들어간 것은 쉬수정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명분으로 훗날 서북변방군이 될 대규모 참전군을 모병하는 1917년~ 1918년간의 일로, 1918년엔 호법전쟁의 여파가 겹치면서 전국의 병력 규모가 85만까지 팽창한 데 이어 1919년엔 1916년의 3배 가까이 되는 138만 명까지 과확장되면서 정부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후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해진다.

5.4. 후기 시대와 그 이후

부원지쟁 이후 수립된 안복국회에서 기존의 구 국민당, 진보당, 공화당 등의 정당조직들은 탕화룽이 이끄는 헌법토론회 및 량치차오가 이끄는 헌법연구회, 리위안훙이 세운 신 공화당의 명맥을 일부 잇는 천춘쉬안의 정학회 및 헌정사, 1차대전 참전 반대론자들이 모인 왕정팅의 정여구락부, 전직 중의원 의장인 우징롄이 이끄는 익우사 등의 비정당단체로 사분오열되었다. 정부 또한 북부의 북양정부와 남부의 호법정부로 나뉜 상황에서 아직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믿는 정치인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북양정부 치하엔 자연스레 정당정치에 큰 미련은 없는 정치인들이 남았으며, 이들은 따로 정당조직을 재건하지 않고 친돤치루이 성향의 안복계와 반돤치루이 성향의 연구계 양대 계파를 구성했다.

그렇게 돤치루이의 무당파 정권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가 몰락하면서 안복국회 하의 체제는 3년만에 끝을 맞이했다. 베이징에 입성한 장쭤린은 곧바로 안복계 의원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구국회를 복원했으며, 제1차 직봉전쟁 우페이푸의 완승으로 끝나는 동안 호법전쟁이 흐지부지되고 쑨원의 북벌 재개 시도 또한 1922년 국민당의 과도한 북벌 요구에 지친 천중밍이 일으킨 영풍함 사건으로 좌절되는 것을 목격한 잔존 구국회 인사들은 우페이푸를 중원의 천하인으로 여기며 북양정부의 군벌들을 타도하는 대신 그들을 용인하며 전문 정치인, 학자, 관료들로 구성된 내각 각료들을 제공한다는 '호인정부론'을 주장했다.

실제로 차오쿤 우페이푸가 이끄는 직예군벌은 이러한 호인정부론의 구호에 화답해 구국회와 구약법을 온전히 회복하는 법통중광을 이루고 리위안훙을 다시금 총통으로 추대한 뒤 민간 정치인들과 관료들을 대거 기용한 내각을 꾸렸다. 하지만, 이는 직예군벌의 야망에 순진한 정치인들이 놀아나는 꼴에 불과했다. 실제로 리위안훙이 대총통에 다시 오른 뒤 쫓겨나고 차오쿤이 차기 대총통직에 오르기까지의 1년 반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내각은 총 7번이나 바뀌었고, 그중엔 무려 0일동안 지속된 당일치기 내각도 있을 정도로 극심한 혼란상을 겪으며, 그나마도 진정한 의미의 호인정부론 내각은 1922년 9월 19일 왕충후이를 중심으로 세워져 11월 29일까지 지속된 단 한번의 내각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국회와 정당정치의 복원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회선 사건이 결정타를 찍었으며, 1923년 차오쿤의 주도 하에 제정된 신헌법은 외형적인 의회민주정만을 규정했을 뿐 실제로는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중심으로 한 직예군벌 인사들과 소수의 지역 군벌들을 중심으로 정치 및 행정이 이루어지고 내각은 군벌의 '명령'에 의해 교체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국민당의 1차 북벌로 직예군벌이 붕괴하는 1927년까지 이어지며, 북벌의 여파로 베이징이 무주공산이 된 틈을 타 장쭤린이 스스로를 중화민국 대원수로 선포하고 북양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선언했지만 어떠한 정치적 연속성도 없었고 이듬해인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장쭤린 본인마저 베이징에서 축출당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직예군벌이 붕괴한 1927년을 북양정부의 멸망 시기로 보는 편이다.

한편 북벌을 실시한 국민당의 경우 쑨원이 호법정부가 구약법을 유지했음을 근거로 북양정부의 법통을 주장한 것과는 별개로 유일한 정당인 국민당이 훈정 통치를 실시하는 당국 체제를 추종했기에 1948년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 약법에서 규정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시행하지 않았고, 회선 사건 당시 장쭤린이 차오쿤에게 훼방을 놓기 위해 매수한 삼성의원구락부 소속 의원들은 직봉전쟁 이후 장쭤린과 함께 봉천으로 대부분 도망쳤지만 이들이 현지에서 약법 체제를 복원하진 않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북양정부의 정치적 후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6. 주요 사건

7. 관련 인물

7.1. 역대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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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역대 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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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역대 정부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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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정치가

7.5. 국민당

7.6. 참고문헌



[1] 1915~1916년 사이는 중화제국 참고 [2] 임시약법 시기 [3] 신약법 시기 [4] 차오쿤 헌법 시기 [5] 구국회의 임기가 종료되었으나 국회가 구성되지 못하여 임시집정의 지명으로 국무총리가 내각을 구성했다. [6] 장쭤린 육해군대원수 시기 [7]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국기 또한 이를 본떠 만주의 다섯 민족인 만주족, 일본인, 조선인, 한족, 몽골인을 상징하는 신오색기를 사용하였다. [8] 또는 안복국회가 해산되는 1920년까지로 잡기도 한다. [9] 실제로는 미국 상원처럼 3개 단위로 나누어 2년마다 3분의 1을 새로 뽑았다. [10] 구웨이쥔, 옌후이칭과 같이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는 저명한 외교관이 임명되었으며, 정치적 요소가 거의 고려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기능했기에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투쟁에 거의 연루되지 않아 평균 재임기간이 긴 편이었다. [11] 최선임 해군장교 중 한 명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당시 중화민국 해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각 군벌 소속 함대는 해군총장의 명령을 받지 않았기에 문자 그대로 할 일이 없는 직책이었다. [12] 유명 변호사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전국의 공무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3] 차이위안페이 황옌페이 같이 유명 교육자 및 작가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전국의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4] 이를 위해 쑨원은 자신의 임시대총통 사임을 조건으로 내거는 빅딜을 성사시켰다. [15] 대부분의 경우 황제 즉위 과정에서 '공신'의 위치가 되어야 할 자신들에게 논공행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 때문에 불만을 품어 반대했으며, 아예 작위 수여를 거부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협력을 거부한 경우도 많았다. [16] 위안스카이와는 이미 홍헌제제 선포를 놓고 갈라선 상태였지만, 당시 북양군벌 내에서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 없었고 라이벌인 펑궈장은 지나치게 부패한데다 신해혁명 당시 관군을 이끌고 우창 봉기군을 때려잡는데 앞장섰기에 대중에게 인기가 없었다. [17] 이 과정에서 권력욕에 눈이 먼 위안스카이가 돤치루이를 국무경으로 삼고 자신은 대총통 자리에 그대로 남으려 시도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깔끔하게 씹혔고 대신 혁명파에서 요구한 대로 리위안훙이 대총통직을 승계했다. [18] 대표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결의 당시 선전포고 및 평화조약 체결 등은 대총통의 권한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는데, 리위안훙은 독일과의 국교 단절이 온전히 자신의 권한이라 주장하면서 참전을 막으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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