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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량(오호십육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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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년~376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서진 전진
별칭 <colbgcolor=#fff,#191919>전량(前涼), 장량(張涼)
위치 중국 간쑤
수도 고장(姑臧)
정치 체제 군주제
국성 장(張)
국가원수
주요 황제 초대 태조 무왕 장궤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도교, 불교
종족 한족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
2.1. 건국기2.2. 전성기2.3. 쇠퇴기2.4. 멸망기 및 부활 실패
3. 특징
3.1. 장점3.2. 단점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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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涼
301년 ~ 376년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난립했던 나라 중 하나로 한족 출신의 장궤(張軌)가 301년 건국하였다. 통칭 장량(張涼). 수도인 고장(姑臧)은 현재의 란저우시 영역에 속해있으나 정확히 말해서는 황하와 인접한 란저우시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북서쪽 지역에 위치한다.

376년 전진 부견(苻堅)이 보낸 요장(姚萇)에 의해 멸망하였다.

2. 역사

오호십육국시대에 난립한 국가이며 위치도 이민족이 날뛰는 서량일대인 양주에서 건국한 국가치고는 한족이 왕위를 유지했으며 한족의 비중도 상당히 높은 국가였으며 무려 75년이나 국가를 유지했기 때문에 난립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건국기, 전성기, 쇠퇴기, 멸망기가 다 존재한다.

2.1. 건국기

장궤 서진의 상황이 어려운지라 하서를 점거해 보존하려는 생각을 가져 호강교위, 양주자사가 되기를 요구해 301년에 양주자사로 취임하면서 전량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서량이라고도 불렸던 양주(涼州)의 경계안에 도적이 발호하고, 선비족이 노략질을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양주자사로 취임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의 병력과 함께 현지로 부임했다. 양주자사로 취임하자마자 선비족을 격파해 1만여명을 참수했다.

또한 송배와 범원 등을 모주로 삼고 9개 군의 자제 500명을 불러들이면서 학교를 세워 숭문좨주와 별가 등을 두고 춘•추에 향사의 예를 실시했다. 여기에 더해서 양주로 피난오는 피난민을 적절한 장소에 정착하게 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고 주민을 늘리는 일도 동시에 병행하였다.

장궤는 이런 식으로 서량지역을 평정하고 양주의 지배를 확립하였으나 사망할 때까지 서진의 신하로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2.2. 전성기

장궤가 전량을 건국한 후에 장식, 장무, 장준, 장중화에 이르는 4명의 왕이 전량을 계속 발전시켰다.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답게 왕위계승이 복잡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를 이어나간 것이 특징이다. 장궤에게서 부자상속을 받은 장식이 유홍이라는 사이비 교주의 책략으로 인해 암살당하면서 장무가 형제상속을 하고, 장무가 자식이 없어서 다시 장식의 아들인 장준에게 숙질상속을 하고, 장준은 서자인 장조 대신 적자인 장중화에게 부자상속을 하는 등 상당히 복잡한 계승을 했음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서서히 독립국가의 길로 나가는 단계를 체계적으로 거쳐나가기 시작한다. 장식까지는 서진 및 동진의 신하를 유지했으나 장무부터는 외왕내제의 마이너 버전으로 내부에서는 왕을 칭하였으나 외교적으로는 동진의 신하을 유지했다. 그러나 연호는 서진의 민제 시대에 쓰던 건흥(建興)을 계속 사용하면서 어느 정도 동진과는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는 신호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장준의 시대부터는 황제의 의장을 사용하고 천자의 권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력과 군사력도 점점 발전하여 장무의 시대에 전조 유요가 29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와도 국가가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며 장중화가 통치하는 시기에는 후조가 12만 대군을 일으켜서 침공하는 것을 막고 오히려 반격할 수준으로 국력이 향상되었다.

2.3. 쇠퇴기

장중화의 시대 후반부터 전량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오호십육국시대가 어느 정도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관중지역을 차지한 후 서량을 본격적으로 목표로 삼고 완전정복하려는 국가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미 후조의 12만 대군이 침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애라는 명장을 등용한 것에 힘입어서 운수좋게 승리하자 장중화가 정치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량의 명장인 사애(謝艾)를 주천(酒泉)의 태수로 좌천해서 내보낸 일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사애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참언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전진을 초기에 제압하지 못하고 대패한데다가 재위 7년만에 중병에 걸려서 급사하는 바람에 장요령이 급하게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장요령은 정말로 운수가 안좋았다. 353년 10월에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그제서야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11월에 장중화의 병이 위중해졌는데 장중화가 그 전에 서형인 장조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 이미 장조가 장중화의 총신들과 몰래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주변을 모조리 장악했기 때문에 장요령은 즉위시부터 누구에게도 의지를 할 수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된 것이다. 장중화도 다 죽어갈 때에서나 이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좌천했던 사애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서 위장군으로 삼고 장요령을 보좌하면서 조정의 중책을 담당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미 장조가 장중화의 조서를 멋대로 탈취해서 안보낼 정도니 답이 없었다.

결국 장요령은 재위 1개월도 안된 상태에서 폐위당하고 장조가 즉위한다. 장조는 개인적인 능력은 있고 정무도 잘 처리하는 편이었으나 그런 능력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여 간통, 강간등 황음무도한 짓을 자주하는 데다가 제대로 된 사전조치를 하나도 안하고 종묘와 백관을 설치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화평(和平)이라고 독자적으로 정하여 외국에 공식적으로 알려질 정도까지 널리 선포함으로서 그 동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던 전량 내부의 민심과 외부 외교관계를 모조리 파탄낸다.

당장 353년에 장조가 비합법적이고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즉위했으면 눈치를 보고 안과 밖을 안정화시킨 후에 공적까지 세워야 가능할 듯 말듯한 황제 즉위와 독자 연호 선포를 불과 1년 후인 354년에 시행했으니 민심이 분열되었으며 외교적으로도 타국과 마찰이 발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354년 5월에 전량에 서리가 크게 내려 농작물들이 모두 죽고 백성들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355년부터 대규모의 반란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그 시작도 평소 싫어하던 친척인 하주자사 장관(張瓘)을 차도살인하려다가 계획이 들통나서 역습을 당하면서 발생하였다. 너무나도 다급한 나머지 반란군이 옹립하려던 전임 국왕 장요령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서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결국 옥좌에서 끌려내려와서 병사들에게 난도질 당하면서 장조는 처참하게 죽는다.

그 이후에는 장중화의 차남인 장현정이 즉위한 후 칭제를 취소하고 연호도 이전에 쓰던 건흥(建興)으로 되돌렸으나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옹립되었다는 한계가 있어서 공신들끼리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장조의 동생인 장천석이 순차적으로 2번 쿠데타에 가까운 정변을 벌여서 장현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런 과정으로 전량이 내분에 빠지면서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국력을 낭비하는 동안 외부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2.4. 멸망기 및 부활 실패

전량의 내분이 일단 종결되었지만 최종승자가 장조의 동생인 장천석인데다가 장천석도 장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방탕하고 색을 밝혀 정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분이 일어난 의미조차 퇴색된 것이다.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전진이 바로 옆에 있고 전량 주변에 전량을 도와줄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장천석은 궁궐 정원에서 연회를 즐겨 열었으며, 자신의 찬탈을 도운 유숙과 양경에게 장씨 성을 하사하고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기면서 그들의 전횡을 눈감아주었다. 양주의 민심이 흉흉하여 장천석의 사촌동생인 중랑 장헌이 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교적 실책까지 작렬했다. 전진의 명군인 부견이 364년에 사자를 파견해서 장천석을 대장군, 양주목, 서평공으로 임명했는데도 불구하고 366년에 동진에서 정식으로 사자를 보내 장천석을 대장군, 대도독, 독농우관중제군사, 호강교위, 양주자사, 서평공에 임명하자 외교적 판단을 잘해야 할 상황에 몰린 것인다. 그런데 본래 동진을 섬기고자 했던 장천석은 임명을 받자마자 전진의 부견과 단교하는 실책을 일으킨다.
파일:전량-전진-전연-동진.jpg
4세기 후반의 중국[1]

덕분에 안과 밖의 상황이 맞물리면서 전량의 입장에서는 안좋은 시너지가 발생하였다. 367년에 전량에 반란을 일으켰던 이엄이 아들 이순을 전진에 보내 항복하면서 농서의 땅이 전부 전진에 넘어갔다.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는데 전량의 전방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원래 전량은 농서 지역을 일부라도 점유함으로서 관중 지역에서의 침공을 막을 1차 방어선을 수립하고 황하로 2차 방어선을 짜놓은 다음 황하까지 돌파당하면 수도인 고장(姑臧)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는 방식으로 방어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하면 적의 입장에서는 농서의 험준한 지형을 돌파하고 황하를 건너고 사막을 돌파하는 길고 고된 진격을 해야 하며 전량의 수도인 고장까지 도달하게 되면 더 이상 침공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 틈을 노려서 전량이 외교술을 동원해서 형식적인 항복 및 복속의 의사를 나타내면 그걸 수락하면서 침공군은 명목상 승리를 자랑하면서 후퇴하는 과정으로 침공이 마무리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전량이 75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서가 전부 전진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리면서 황하가 국경선 겸 1차 방어선이 되었고 황하만 돌파하면 그 후에는 황하와 전량의 수도인 고장 사이에 놓인 좁은 사막만 돌파하면 전량의 수도인 고장까지 도달이 가능한데 과거와는 달리 방어선도 약해지고 수도까지 돌파해야 할 거리도 짧아져서 침공군의 입장에서는 충분하게 공성전을 할 여력이 충분하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전량은 앞서 말한 외교적 수습이 불가능해지고 수도에서 농성전을 해도 답이 없게 되므로 돈황같이 사막 저 멀리에 있는 전량의 변경지역까지 도망치거나 그냥 항복해야 한다.

이리하여 장천석은 농서지역을 되찾기 위해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한(枹罕)에서 전진의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던 한족 출신의 왕맹과 격돌했지만 패배하여 약 1만여명이 전사하고 7천여명이 전진군에 사로잡혔다. 농서가 전진에 넘어간 뒤로 전진은 지속적으로 전량을 침공해오니 국경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사태가 악화하자 장천석인 제단을 쌓아 가축을 바치면서 하늘에 기도를 하는 한편 사자를 파견해서 동진에게 맹세를 하면서 동진의 연호를 도입하고 동진과 연합해서 전진을 치려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결국 376년 8월에 전진의 부견이 1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전량을 침공하자 파죽지세로 전량은 붕괴되었으며 장천석은 그나마 있던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등의 무의미한 저항 끝에 항복한다. 항복 이후에는 장천석은 전진으로 끌려갔지만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패배한 틈을 타서 동진으로 도망쳤으며 그 곳에서 천대나 받고 충격에 빠져서 정신병에 걸린데다가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406년에 61세로 사망할 정도로 당시 기준으로는 그럭저럭 오래 살았으나 그 덕분에 아들인 장대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 등 인생 끝이 별로 안좋았다.

장천석의 왕세자인 장대예가 전진이 비수대전의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다시 전량을 재건국하려고 했으나 후량에게 당하고 처형당한다.

3. 특징

전량이 오호십육국시대에 난립한 국가답지 않게 서량이라는 험지에서 75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존재한다.

특히 양주지역은 전량이 멸망하고 전진이 붕괴한 후 후량, 남량, 북량, 북하, 서량 등의 국가가 난립하면서 서로 공격하고 반격당하고 멸망하는 식으로 대혼란이 이어지다가 결국 화북을 재통일한 북위에게 모두 정리당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전량이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해당 지역을 통합해서 유지하면서 오래 버틴 것이 더 신기해보인다.

3.1. 장점

전량의 장점은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으로 나뉜다.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과 양주(涼州)의 특성이 기묘한 화합을 이루면서 해당 지역을 할거하고 장기간 독립할 수준의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양주지역은 이민족이 날뛰는데다가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지역으로 하서회랑을 비롯한 각종 통로가 많기 때문에 방어할 지역이 많아서 오래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서량 지역에 이민족 침공과 내부 침투 및 거주가 많았다는 것만 봐도 양주의 황폐함이 충분히 연상된다.

그러나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하면서 상당수의 이민족들이 관중, 관동지역등 중원지역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서량지역보다 중원지역이 살기가 좋으므로 중원에 혼란이 발생하면 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이민족들의 심리였고 거기서 중원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싸우면서 서량지역은 이민족에게 일시적으로 잊혀진다. 대표적인 사례로 선비족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기존에 몽골고원을 차지하던 이민족들은 중원지역인 남쪽으로 내려가고 그 뒤를 이어주는 유연 제국 서진 시대 말기에 소빙하기가 의심되는 이상기후로 인해 몽골고원 일대가 유목민들에게도 살기 어려운 곳으로 전락하면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티베트고원 일대는 아직 토번 제국같은 강력한 국가가 나타나지도 않았고 중국 근처의 접경지역에 살던 이민족들은 앞서 말했듯이 관중, 관동지역으로 진출해서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종합하자면 일시적이지만 양주(涼州)를 괴롭히는 이민족들이 거의 사라지면서 양주가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으며 누군가가 양주를 평정하면 오래 유지할만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장궤를 비롯한 전량의 지도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통해 전량을 유지 및 발전시킨 것에 있다. 장궤가 빠른 속도로 양주를 평정한 후 장식부터 장중화까지 4명의 왕이 순탄하게 즉위하면서 정통성을 확립하고 내부를 안정시켰기 때문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내부적으로는 외왕내제에 가까울 정도로 황제에 가까운 왕 노릇을 하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서진이나 동진의 신하라는 타이틀을 걸어놓고 주변국이 강성해지면 칭신을 청해서 책봉을 받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외교적으로도 완전 자립한 황제의 국가가 된 시기는 장조가 재위중인 354년이라는 1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크로드 교역으로 얻은 진귀한 물품을 조공하는 등 강대한 국가에 대한 우호적인 외교관계 확립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장씨 집안이 독립된 국가의 국왕으로 자립하려는 생각도 있어서 시간이 흐르고 국왕이 여러 명 즉위하면서 서서히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었다. 장식까지는 서진과 동진의 신하라는 의식이 강했다면 장무부터는 내부적으로 왕을 칭하며 독립적인 국가로 나가기 시작하고 장준부터는 영지내에서는 황제의 의장을 사용하고 천자의 권한을 쓰는 등의 단계를 하나씩 밟아나가고 있었다.

3.2. 단점

전량의 단점도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으로 나뉜다.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양주의 좋은 상황이 결국 일시적인 일이라는 것과 관중지역에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면 침공에 대비해야 하며 화북지역을 통일할 수준의 국가가 나타나면 결국 풍전등화의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양주의 땅이 그 당시 기준으로 비옥하긴 하나 평지의 면적이 좁고 수자원이 부족하며 주변에 사막이 존재하는 등 자립해서 오래 버티기는 곤란한 지역인데다가 앞서 말했듯이 교통의 요지라서 방어할 지역이 병력에 비해 많다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서 오호십육국시대 개막으로 이민족이 빠져나간 것도 일시적인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결국 중원에서의 싸움 끝에 강력한 국가가 탄생할 것이며 이민족이 빠져나간 자리도 시간이 지나면 어디선가 다른 이민족이 와서 자리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전에 자립해서 관중을 침공하여 점령하는 등 대규모 세력이 될 능력은 전량이 보유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장중화의 시대에 이미 후조에서 12만 대군으로 침공을 시작하는 등 위기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장천석의 시대에 전진이 13만 대군으로 침공해왔을 때 전량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한족이 의의로 많고 한족 출신 호족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며 후조, 전진과 같은 강력한 이민족 국가가 존재하므로 서진이나 동진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단절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량의 국왕들이 단계적으로 외왕내제식 방식으로 서서히 권위를 높인 이유는 한족인 백성들과 호족들에게 장씨가문의 통치 정당성을 입증하고 늘리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오호십육국시대를 포함하는 위진남북조시대에 한족이 가진 주류적인 생각은 정통정권은 육조시대 중 서진 멸망 후의 동진을 비롯한 남조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한족이 많은 국가는 어느 정도 이런 점을 감안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전량은 내부적으로도 한족을 다수 포함하고 있고 지도자층도 한족이라서 서진이나 동진의 신하로서의 장씨가문이 고립된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린다는 정통성을 쉽게 변경하기가 곤란했다.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왕을 칭하는 것도 기존의 정통성을 한 번에 몽땅 내다버리는 식이라 상당히 위험해서 대를 이어가면서 조금씩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가능했던 일이었다.[2][3]

하지만 장조의 대실책으로 인해 이러한 아슬아슬한 균형이 모조리 붕괴되어 버리고 전량은 내분의 시대에 돌입했다. 당장 지도자층 사이에서도 동진의 신하라는 신하파, 신하이긴 하되 독자성은 있으니 기존대로 서진의 연호를 사용하는 중도파, 황제를 칭하자는 급진파로 나누어진 상황에서 성급한 칭제와 독자연호 사용은 화약고에 불길을 당긴 수준이었고 폭발 및 혼란이 오래 지속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런 혼란 상황에서 날로 발전하면서 몸집을 불리는 전진에 대한 제대로 된 견제가 없었기 때문에 내전을 일단 수습한 장천석의 시기에 와서는 전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홀로 서 있는 전량이라는 신세가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못차리다가 치세 후반기에 전진의 침공을 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외교적인 노력을 비롯한 각종 시도를 해봤지만 때가 늦었다.

4. 역대 군주

묘호 시호, 연호는 전량의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외왕내제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외교문서같이 타국에 보여줄 수 있는 기록에는 서진이나 동진의 연호나 해당 국가의 연호를 사용했고 타국에서 추시한 시호를 사용해서 기록하였다. 역사 기록에서 전량의 시호가 보통 2종류로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1대 태조(太祖) 무왕(武王)
무공(武公)[4]
장궤(張軌) - 301년 ~ 314년 건릉(建陵)
2대 고조(高祖) 명왕(明王)[5]
원공(元公)[6]
장식(張寔) 영안(永安) 314년 ~ 320년 314년 ~ 320년 영릉(寧陵)
3대 태종(太宗) 성왕(成王)
성렬왕(成烈王)[7]
장무(張茂) 영원(永元) 320년 ~ 324년 320년 ~ 324년 평릉(平陵)
4대 세조(世祖) 문왕(文王)
충성공(忠成公)[8]
장준(張駿) 태원(太元) 324년 ~ 346년 324년 ~ 346년 대릉(大陵)
5대 세종(世宗) 환왕(桓王)
경렬공(敬烈公)[9]
장중화(張重華) 영락(永樂) 346년~ 353년 346년 ~ 353년 현릉(顯陵)
6대 - 애공(哀公) 장요령(張耀靈) - 353년 -
7대 - 위왕(威王) 장조(張祚) 화평(和平) 354년 ~ 355년 353 ~ 355년 민릉(愍陵)
8대 - 충왕(沖王)
경도공(敬悼公)[10]
장현정(張玄靚) 태시(太始) 355년 ~ 363년 355년 ~ 363년 평릉(平陵)
9대 - 도공(悼公)[11] 장천석(張天錫) 태청(太淸) 363년 ~ 376년 363년 ~ 376년 -
비정통 - - 장대예(張大豫) 봉황(鳳凰) 386년 ~ 387년 386년 ~ 387년 -


[1] 최북단에 대(代), 북서쪽에 전량(前涼), 북부 중앙에 전진(前秦), 북동쪽에 전연(前燕), 남쪽에 동진(東晉) [2] 동로마 제국 라벤나 총독부 아프리카 총독부, 당나라 절도사 등이 실제 역사와는 달리 본토와 연락도 잘 안될 수준으로 멀리 고립된 상태에서 총독이나 절도사가 현지를 오랜기간 세습하면서 지배하는 상태라고 가정해본 후 이런 상황에서 현지의 총독이나 절도사가 완전한 분리독립을 시도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3] 튀르키예 알라셰히르가 동로마 제국시절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의 도시로 오스만 제국에게 50년간 포위당한 상태였지만 동로마 제국 최후의 아시아 지역 영토로 유지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이 구원을 포기한 후에도 12년이나 저항하다가 바예지트 1세에게 함락당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은 몇십년 정도의 단기간으로는 상당히 어렵다. [4] 서진 진민제 사마업이 추시. [5] 혹은 소왕(昭王). [6] 동진 진원제 사마예가 추시. [7] 전조 유요가 추시. [8] 동진에서 추시. [9] 동진에서 추시. [10] 동진의 효무제 사마요가 추시. [11] 장천석은 비수 전투에 참전했다가, 동진으로 망명하여(사실 처음부터 진의 신하를 칭했으니 복귀했다고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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