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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17:47

공성전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이 문서는 성을 공격하는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의미에 관해서는 아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2. 명칭3. 어려움4. 필요성5. 역사6. 공성전술7. 공성 병기8. 수성 병기9. 각종 공성전들
9.1. 국내9.2. 해외
10. 대중매체
10.1. 공성전을 잘 표현한 게임10.2. 미디어에 나온 공성전들
11. 비유적인 의미의 공성전들

1. 개요

공성전(, siege assault)은 하는 를 의미하는 용어로, 근대에 들어와서 요새가 등장하자 요새를 공격하는 전투도 역시 공성전이라고 부른다. 공격 측에서 성이나 요새를 공격하는 행위를 공성이라고 하며, 수비 측에서 성이나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하는 행위를 수성 내지 농성[1]이라고 한다.

현대전의 경우 보통 참호 요새에서 싸우는 경우도 많지만, 게릴라전이나 비정규군과 상대하거나 그냥 시간이 없거나 하는 경우에는 건물 속에서도 싸우기 때문에 건물을 함락시키는 것 역시 공성전으로 불렸으나, 도시의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면서 이 개념이 확대되어 시가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2. 명칭

한국어로는 어느 상황이든 공성전이라고 불리나 영어는 경우에 따라 용어가 나뉜다. 상대가 농성이 가능한 지역을 공격하는 경우 전투의 명칭에 siege가 붙는다. 그리고 포위하고 상대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직접 공격을 시도하면 siege assault가 된다.

고대로부터 도시 자체가 일종의 방어진지로서도 사용가능해진지가 오래되었으므로 siege란 말은 비단 요새들만이 아니라 도시를 공격할 때도 쓸 수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베를린 전투 등의 시가전도 엄연히 농성하는 상대를 몰아내기 위한 전투였으므로 Siege of Stalingrad, Siege of Berlin이라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고전적인 전투/전쟁 명명법이 유명무실해진지라 그냥 battle이란 명칭도 자주 쓰인다. 더군다나 스탈린그라드 베를린의 경우 단순히 농성하는 적과 싸우는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야전의 요소도 상당수 들어가기 때문에 그냥 battle로 칭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보통은 아예 빼도 박도 못하는 요새 점령전에만 siege란 명칭이 붙으며 그 외에는 battle이란 명칭도 곧잘 쓰인다.

3. 어려움

성은 원래 공략당하지 않고 적의 공격을 보다 원활하게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건물들의 총집합체이니, 기본적으로 공성전을 제대로 해보려면 공격하는 측이 수비하는 측의 3배의 병력이 필요했으며, 그렇게 3배의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병력의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 할 만큼 공성전은 힘든 싸움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3개월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많은 부담을 안는 전투가 바로 공성전이다.

이것도 그나마 비교적 기어오르기 쉽고 더불어 성벽을 높게 쌓기 힘든 토성(土城)을 기준으로 삼은 요구였다.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석성(石城)이나 벽돌로 쌓은 전축성일 경우는 토성을 공략하는 싸움보다 더 어렵다. 후술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7천명에 불과한 수비대는 수비대의 인원이 적정한 수비인원 요구치에 한참이나 모자라는데다가 농성전 준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최소 10만명의 오스만군에 대항해서 2달에 가깝게 오랫동안 성을 지켜내었다. 게다가 이것도 평지에 쌓은 평지성의 경우며, 산에 축성한 산성(山城)의 경우에는 난이도가 추가로 크게 올라간다. 산은 자연 요새인 동시에 식수 등 보급 문제도 크게 해결되는 천연의 요새이기 때문이다. 영국 내전 당시 코르페 성의 경우 왕당파 전투병력 5명이 의회파 300명의 공격을 몇 주간 버텨내기도 했을 정도다.

방어측은 아무리 지형에 숙달되지 않았어도 튼튼한 방어시설을 이용해서 전투를 수행하기 때문에 손해를 덜 입지만, 공격측은 방어측이 준비해뒀을 여러 장애물과 견고한 성벽, , 해자 등의 방어 시설을 극복하면서 공격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써야 했다. 야전과는 달리 전장 자체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동력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없었고, 성이나 요새가 이미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투방식이나 공격로도 방어측이 충분히 예상한 몇 곳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야전에서 뛰어난 용병을 자랑하던 장군도 공성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희생이 들어가는 무식한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일반적인 전장에서 쓸 수 있는 대부분의 전술을 쓸 수 없도록 지어놓은 것이 요새나 성이기 때문에, 공성전을 치르려면 전술적인 재능이 아니라 꾸준한 보급으로 아군의 피해를 관리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적군의 현황을 파악하고 적의 지원군과 보급을 차단하는 등의 행정적인 능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몸을 보호할 튼튼한 건물 및 구조물을 갖추고 물자를 확보하는 등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면 수비측이 유리한 편이지만, 수성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경우 병자호란 남한산성처럼 오히려 수비측이 불리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물론 성벽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불리해졌다는 말을 할 수나 있는 거지 평지에서 조선군이 수만의 청군과 붙었다고 상상해보면 불리고 뭐고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순식간에 박살나면서 전쟁이 청군 승리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수성전의 장점은 확실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남한산성이 원래의 방어력에 비해서 수성전 준비가 너무 부족해서 빨리 무너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애초에 공격측의 전력이 우세해야 공격측이 포위하고 수비측이 농성하는 상황이 성립할테니 수비측 입장에서도 성벽만 믿고 방심할 수는 없으며, 공격측 역시 견고한 성이나 요새 앞에서 며칠 혹은 몇 달씩 머무르면 식량부족이나 전염병 또는 사기저하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결국에 따지고 보면 양측 모두에게 피곤한 전투다.

농성측이 많은 식량을 보존하고 있다 하더라도 농성 시 병사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거의 모든 백성( 민간인)이 성으로 몰려서 식량이 엄청나게 빨리 소모되고 전염병이나 질서 통제 등의 위협도 매우 크다. 그리고 공격 측은 공격을 할 지 안 할지, 물러갈 지를 먼저 결정할 수 있으니 수성측의 증원이 오거나 수비측이 성의 이점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어 추격하지 않는 이상 전장을 선택하는 건 공격측이다.

덧붙여서 큰 전장 판면에서 보면 통상적으로 공격자는 자신의 전력을 선택해서 원하는 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지만, 수비자는 공격자가 언제/어디서 공격해올지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수많은 성으로 자신의 병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준비가 잘 되어있다면 수비자가 적은 병력으로도 더 많은 공격측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기에 이런 수비측의 약점을 상쇄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공격측의 최종 목표 자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반드시 함락시켜야 하는 수도인 동시에 불패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던 철옹성급 요새일 경우라면? 꼼짝없이 공격측은 결국 공성전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4. 필요성

도시를 성벽이 감싸고 있다면,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서 공성전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는 산맥, 강, 바다 등 지형지물 때문에 진격로가 좁은 길목으로 한정되는 경우, 진격로에 관문이나 성채를 지어놓으면 공성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도로만 봐서는 아무도 안 사는 허허벌판인데 거기에 일부러 요새를 짓거나 굳이 군사도시를 만드는 등의 일이 벌어졌고, 공격측에서도 우회하지 않고 굳이 공성전을 벌이며 병력과 보급을 대규모로 소비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병참 보급수단의 한계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비행기라는 게 없었고, 보급품을 현대처럼 차량에 실을 수 없고, 수레가 다닐 길도 잘 닦이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다 수레를 써봤자 어차피 사람이나 말이 끌기 때문에 보급품에 한계가 있었다. 거기다가 물이라는, 무겁기는 더럽게 무거운데 소모량도 엄청 많고 행군 상황에서는 하루이틀만 못 마셔도 사람이 사경을 헤메는 자원이 있다보니 필연적으로 행군로는 대군이 움직이더라도 물을 구하기 쉬운 경로여야 했다. 여기에 조금 더하면 행군경로 상에 인구가 꽤 살아서 약탈이나 구매, 징발 등으로 모자란 식량을 보충 가능한 편이 여러모로 유리했으며, 또는 대량의 물자가 운송하기 쉽게 수로를 끼고 행군하는 것도 좋다. 그렇지 않은 경로를 따라 군대가 움직이면 속도가 빠르고 느리고를 떠나 병력이 굶어죽고 말라죽어 전투도 하기 전에 와해될 수 있기 때문에, 평야를 가로질러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움직일 수 있는 행군로는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이 행군로가 아닌 곳을 택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박을 의미했고, 아주 소수의 별동대가 아닌 한 별다른 의미도 없었다.

전쟁의 역사에서 정상적인 행군로가 아닌 곳으로 주력을 통과시켜서 승리한 사례가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상황이 예외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실패하기 마련이며 성공하더라도 희생이 막대했다. 당장 로마 공화국에서 한니발 바르카가 알프스를 넘는다는 선택을 배제한 이유도 그것이 상식을 벗어난 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니발도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며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다. 등애 촉한멸망전에서 길도 없는 험준한 산맥을 넘는 동안 전투력을 거의 상실해버렸고 만일 마막이 강유관을 어이없이 상실하지 않았거나 촉군이 부성에서 제대로 된 방어전을 수행했다면 그냥 무모한 실패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국방을 하는 측에서도 이걸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진격로의 요충지마다 요새나 성을 지어 방비한 것이다. 실제로도 고구려-수 전쟁에서 수나라가 30만 별동대를 어처구니 없게 날려버린 이유도 보급로가 단절되기 때문에 보급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급 문제를 어찌어찌 해결해 다른 성을 모두 우회하고 도시에 다다랐다고 쳐도 결국 도시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여야 하는데, 이때 정리하지 않고 넘어온 성에서 지원군을 보내온다면 꼼짝없이 앞뒤로 포위당하게 된다. 위연 자오곡 계책 제갈량이 거부한 이유도 발상은 참신하지만 실제 실행시 온갖 문제점이 터져나올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제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의 전략이 어그러진것도, 양규가 살아남아 거란의 뒤통수를 계속 찔렀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례는 병자호란인데 청나라 입장에서는 지연전이 될수록 본인들이 크게 불리해질것은 알기에 청나라 기병은 정묘호란 때와 달리 산성을 건들지 않고 왕을 잡기 위해 한성으로 쾌속 진격을 했으며, 결국 청나라는 인조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얼마나 빠른 진군 속도냐면 의주성에서 안주성까지 단 2일만에 180km 거리를 돌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4일도 안되는 시간동안 안주에서 개성까지, 즉 235km를 왔다. 이것은 하루 평균 78km를 진군한 것이다 청나라군은 지연전을 펴러던 조선측의 전략을 훤히 알고 이를 분쇄하기 위해 장기인 기동력을 철저히 활용했다. 여기에 정묘호란 때의 경험으로 조선조정이 대피하게 될 강화도 공략이 승리의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점을 제대로 알고 움직인 청나라는 기동력으로 조선의 지연전을 무력화시켰고, 이어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결국 조선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엄밀하게 말해서는 조선의 청야 전술이 실패한 것이 더 크다. 인조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때 남한산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미처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해,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4,000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2,000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결국 포위된 지 고작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여기까지 가면 아군을 상대로 초토화 전술을 한 수준이다.

원칙대로라면 긴급상황에 대비해서 식량 창고가 반드시 성 안에 있어야 한다. 식량같은 무겁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품목을 유사시에 험준한 지형을 통과해서 성 안으로 제대로 들여놓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남한산성도 처음 축성될 때 성 안에 식량 창고가 있었다. 이렇게 남한산성 내부에 잘 있던 식량 창고를 광주 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면서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인조는 이런 걸 다시 재수정하지도 않았다.

본래 청군은 20일 정도 밖에 버틸 식량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30일 정도의 1달 수준으로 약간만 버틴다고 해도 청군은 조선 한복판에서 원거리 포위당한 채 식량고갈을 당해서 스스로 붕괴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강화도가 더 빠르게 함락되더라도 인조와 조선의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버티는 상황이라면 최악의 경우라도 삼전도의 굴욕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고 청군의 무탈한 철수를 위해 적절한 수준의 외교 교섭이 벌어질 것이며 조선에게 상당히 유리한 수준의 양호한 결과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 한강변에 떡하니 있는 식량 창고를 청군이 쉽게 노획한 후 제대로 활용해서 45일간 포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줬으며, 오히려 남한산성 내부가 식량 부족을 겪었다. 결국 조선의 상식을 초월한 멍청한 대응 덕분에 청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전근대 시절에는 대규모 병력을 진군시킬 때, 행군로가 사실상 정해져 있었고, 그런 행군로에 적절한 기지를 지음으로써 방어측에서 공성전을 강요할 수 있었다. 요새나 성을 피해 우회기동하는 것은 소수 별동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불가능한 선택지였다는 뜻이다.

5. 역사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고 농경이 시작되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 되면서 도시국가가 등장했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그 자신들을 유목민들로부터 효과적으로 지킬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목책 혹은 성벽이 등장한 이래로 본격적인 인류의 문명의 시작부터 공성전이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고대 작품인 아시리아의 라키슈(lachish) 포위공격을 묘사한 석판을 봐도 공성전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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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석구를 쓰는 병사들과 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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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병 앞에서 방패 엄호하는 창병들과 나무로 만든 비탈길 위를 올라가는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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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필사적으로 지키는 유대 병사들과 아시리아 공성추
왼쪽에 보이는 건 비가 아니라 성벽 위 병사들이 던지는 횃불들이다.
이 횃불은 나무로 만든 공성기구들과 나무 비탈을 태우기 위해서이다.

수성측은 화살 등을 쏘고 성벽 위와 보루 위에서 끓인 이나 불에 달군 모래 등을 붓거나 혹은 이나 나무를 떨어뜨려 성을 방어했고 성을 공격하는 자들은 각종 공성장비로 성벽과 성문을 파괴하거나 갈고리를 단 밧줄이나 사다리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공성을 하기 위해 이동식 요새를 만들어 접근하기도 하고 아예 성 앞에 토성을 쌓아서 공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해 공성전에 화포가 등장함으로서 패러다임은 완전히 바뀌었다. 화약무기는 기존 공성병기들에 비해 강하고 정확도가 높았기 때문에 당시의 성벽을 과거에 비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어서 요새와 성벽의 양식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천 년 동안 함락되지 않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 공성포에 의해 함락된 것을 패러다임의 전환기로 본다. 자세한 것은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서를 참조하자.

물론 신무기의 등장에 방어측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다. 이후 베네치아 로도스 기사단 이슬람의 위협에 놓여있던 곳에서는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신식 성벽을 쌓아올렸다. 기존의 직각에 가깝고 두께는 별로 두껍지 않고 높게만 쌓아올린 스타일의 성벽에서 포탄을 튕겨내고, 맞더라도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낮고 두껍게 짓는 방식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성벽의 높이가 낮다라는 말은 과거보다 낮다는 거지 병력이 뛰어넘기에는 여전히 높은 수치라서 공격자 입장에선 도긴개긴이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포를 채용하고, 방어의 중핵을 요새포가 설치된 포대가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공성의 난이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이런 대응방식은 17세기 말 ~ 18세기 프랑스 보방 후작이 건설한 요새가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먼저 등장한 요새 양식인데 보방 후작은 단지 그것을 조금 다듬었을 뿐이다. 흔히 보방식 요새라고도 하는데 본고장 유럽에서 그렇게 부르는 나라는 보방의 고향 프랑스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성형 요새를 참조하자.

이러한 낮고 두꺼운 방식의 신공법은 조선에도 전해졌는데, 그것이 수원화성이다. 성형 요새와 같은 방법으로 만든 것이 아니지만 그 대신에 치성을 굉장히 많이 쌓았기 때문에 치성들이 뾰족한 보루 부분의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과거의 조선의 성들보다는 방어력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100년에서 200년이 더 흐르자 점점 화포가 발전하게 되면서 이윽고 기존의 목표에 명중하여 물리적인 충격력만 주던 대포에서 목표에 명중하면 폭발하는 타입의 포탄이 개발되고, 암스트롱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화약과 포탄의 개발로 점점 성벽의 방어력이 대포의 공격력을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성벽도 이에 대응하여 강화를 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문제는 수많은 요새를 이렇게 만들었다가는 비용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다는 것.

지상전에서는 야전 축성술이 우수한 가격 대 성능비를 보이며 요새를 조금씩 대체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면 극초반 벨기에 전선의 몇몇 요새 전투를 제외하면 공성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빅 베르타 같은 구경 42cm가 넘는 거포들이 불을 뿜어대니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도 무너진다.

공성전이 사장된 다른 이유로, 벽돌로 위로 쌓아낸 튼튼한 성보다 오히려 보병들이 삽으로 아래로 파서 만든 참호가 포격에 더 잘 견뎌내더라는 것이다. 성벽은 무너뜨릴 수 있어도, 땅 그 자체를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 지진폭탄이나 전함의 주포 포격이나 대구경 공성포의 포격 같은 거라면 참호 자체를 분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진폭탄은 큰 폭격기에서나 투하할 수 있는 거대한 폭탄이라 포격처럼 지속적이고 빠른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고, 전함 역시 바다에서만 떠다닐 수 있고 포각이 안나오면 공격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으며 공성포도 참호를 박살내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진 대구경의 경우에는 운반해서 설치하기가 어렵고 연사속도도 매우 느려서 셋 다 모두 육군 포병의 일반적인 야포 포격에 비해서 사용이 까다롭다.

더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넘어가자 폭격기가 등장하기 시작함으로써, 대세가 된 기동전과 화력전은 에반-에마엘 요새, 마지노선, 대서양 방벽, 지크프리트 선, 메탁사스선 등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지은 요새들을 기껏해야 약간의 시간벌기 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기존의 요새는 완전히 역사 속의 유물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특이하고 예외적인 사례로, 1945년 2월 경 서부전선에서는 중세시대에 세워진 고성인 블라이엔비크 성에서 단 15명의 독일군 팔슈름예거 영국군 1개 연대를 이틀이나 저지했던 적이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성 그 자체는 단순한 육상공격에 있어서는 여전히 악마적인 방어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일째에 날씨가 풀리고 성을 건설한 중세인들은 상상도 못 해봤을 RAF가 폭격을 개시하자 이들은 바로 항복했다.

2차대전 종전 직전에는 역사상 최후의 공성전인 이터 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요새나 방어선의 주류가 이른바 지하요새로 지칭되는 거미줄 같은 땅굴 네트워크로 변화하고, 중요 시설물은 깊은 땅 속에 방어구조물까지 넣어서 건설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들 방어시설에 대해서는 기존의 화기들의 위력이 격감하기 때문에 지진폭탄으로 시작된 거대하고 관통력이 높은 벙커버스터 같은 폭탄을 쑤셔박거나, 아예 핵무기의 사용을 검토하게 될 수준이 되었다. 벙커버스터는 지하요새, 공성용도 '따위의' 땅굴과는 차원이 다른, 지하요새급 땅굴 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든 현대전 최고의 병기 중 하나이다. 단순 지하 파괴, 관통력은 지표에 명중하는 핵무기 이상의 능력을 가진다. 애초에 만들어진 이유 중 하나가 공고히 구축된 지하 핵시설 타격 용도였으니까. 또는 지하시설 공격 시에 소이탄이나 화염방사기 등으로 입구와 내부에 불을 질러 내부 산소를 싹 태워 질식사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규모 지하방어시설에 대해서는 정밀무기로 타격하는 것 외에도 보병을 침투시켜서 총격전을 벌이는 소탕작전이나, 불도저 등 중장비를 이용해서 입구를 파괴하는 파괴작전을 진행할 때가 많다. 시가전이나 대테러전을 할 때도 저격을 하는 경우나 건물채로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지만 인질이 있는 등의 이유로 건물을 점거해야 할 때는 보병이나 경찰특공대, 특수부대를 침투시키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따라서 기존의 공성전이라고 불리는 전투는 거의 사라졌지만, 방어시설에 웅거한 적을 공격하는 임무 자체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벙커버스터, PDW, 전자동 산탄총, 섬광탄, 특수전 권총 등 이에 대응한 무기도 계속 사용되고 발전 중이다.

6. 공성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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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공성 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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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수성 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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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각종 공성전들

분류:공성전도 참조할 것.

9.1. 국내

9.2. 해외

10. 대중매체

10.1. 공성전을 잘 표현한 게임

분쟁을 막기위해 가나다 - ABC - 123 순으로 배치한다. MMORPG의 공성전도 참조해보자.

10.2. 미디어에 나온 공성전들

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공성전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에 영화나 게임, 드라마에서 나온 유명한 공성전은 죄다 CG다.

11. 비유적인 의미의 공성전들



[1] 이쪽은 '목적 달성을 위해 한 곳에 틀어박혀 시위하는 것'이라는 뜻도 있다. [2] 행주산성은 성곽보다 야전 구조물에 더 가깝지만 왜군이 병력을 축차투입시킨 데다 온갖 공성병기가 동원되었기 때문에 공성전의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3] 참고로 이 부족 했다는 폭약의 무게는 무려 다이너마이트 25 t이다. 일반적인 건물을 철거 하는데 드는 폭약의 양을 생각하면 경이로운 수치인데 이걸 버텼다는 것. 저게 어느 정도냐면 영국의 특제 건물 철거 병기인 그랜드슬램 3~5발어치의 폭약이다. [4] 공성 캠프를 세워야 공격이 가능해 지는데 이 때 준비 시간동안 수성측은 발리스타를 미리 세워 적 공성병기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후술할 성벽을 부수는 전술도 이에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데 공성측보다 먼저 3개 이상의 발리스타를 세운다면 수성측 대응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진다. [5] 수비쪽이 방어를 잘 갖추고 있으면 공격 쪽이 수비의 10배 정도 되는 병력을 가지고 와도 힘들다. 그야말로 우주방어 게임. [6] 해당 작품의 여타 공성전들과 달리 전투가 직접 묘사되는게 아니라 노래 뒤의 속사정으로만 공개되는 레인 가문 + 타벡 가문 VS 라니스터 가문의 공성전이지만 요새 공략 중 수공의 무서움을 매우 잘 살린 공성전이다. 카스타미르의 비 레인 가문, 레인-타벡 반란 문서 참고. [7] 13권 겨울 전쟁 일기에서 윗동네 아이들이 윗동네에서 썰매를 타려는 아랫동네 아이들을 막기 위해 눈으로 길을 가로막는 방벽을 만들어 아랫동네 아이들과 공성전을 벌인다. [8] 테란의 모든 지상 유닛들이 시즈 탱크에게 상성상 열세이기 때문에, 테테전은 기본적으로 맵을 반으로 가르고 탱크 전선을 유지하며 이득을 취하는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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