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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시대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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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1]
洪景來ㅡ 亂
파일:홍경래의 난.png
시기 1811년 음력 12월 18일 ~ 1812년 4월 19일[2]
장소 조선 평안도 청천강 이북
원인 지속적인 평안도에 대한 지역차별에 평안도민들의 불만 누적
결과 관군의 승리, 반란 진압
교전 세력
조선 정부 홍경래 반란군
지휘관
순조
이요헌
박기풍[3]
유효원
정시†
이영식[4]
유정양
김익순➝
허항[5]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홍총각
김창시†
이제초†
김사용†

1. 개요2. 배경
2.1. 천대받는 서북 지방2.2. 수령들의 과도한 수탈2.3. 농민들의 몰락
3. 경과
3.1. 전기
3.1.1. 반란을 모의하다3.1.2. 서북을 휩쓸다3.1.3. 홍경래 암살미수사건3.1.4. 관군의 태세 정비3.1.5. 송림 전투3.1.6. 북진군의 패배
3.2. 후기(정주성 전투)
3.2.1. 정주성에서 농성하다3.2.2. 거세지는 전투3.2.3. 고립당한 정주성3.2.4. 정주성이 무너지다3.2.5. 반란군의 최후
4. 의의 및 한계
4.1. 난의 성격4.2. 전술적 한계
5. 영향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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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캡션


캡션


조선 순조 11년(1811)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 지역에서 일으킨 반란.

2. 배경

역사학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2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적 모순이고, 또 하나는 한때 지역감정으로 남아 있던 서북 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징이다.

2.1. 천대받는 서북 지방

서북 지방은 고려 시대 때부터 여요전쟁 등의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서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해 왔다. 게다가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 등 반란도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중앙정부가 보낸 군대에게 진압당했다. 결정적으로 후기에는 몽골의 침략에 아예 직통으로 갈리고 동녕총관부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원나라 말기엔 홍건적도 침략해왔다. 이렇듯이 전쟁이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기에 서북 지방은 조선 시대에 와서도 고전적 양반이라는 계층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당시는 청야 전술이 주된 전술이었기 때문에, 농사도 좀 짓고 해서 경제력이 상승하려 하면 전쟁 터져서 다시 갈리고의 무한 반복이었다. 특히나 서북지방은 하천 유량이 부족해 대대적인 치수관개사업이 수반되어야 제대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게 안되니 무려 19세기까지도 수도건파법[6]이라는 변칙적인 재배방법을 쓸 지경이었다. 자연히 삼한 시기부터 토지 개간과 치수관개에 힘써온 하삼도 지방과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심지어 북방 출신인 태조 태종 대에도 이 지역은 무시당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는 '서북 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도, 함경도 두 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라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 자신이 서북보다 더 차별받은 동북 지방 출신이므로 그런 명령을 정말로 내렸을 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이에 대해서 후에 태조의 이름을 팔아서 서북 차별을 정당화한 것이라는 주장[7]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특히 서북은 중종 시기부터 유배지로 변질되었기에 유배지로서 시작했던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대 왕들의 이름을 팔았다면 꽤 그럴듯 해진다.

세종조의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시행된 사민 정책이 시간이 지나 중종 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죄인의 가족을 서북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형태로 변질되면서 서북 지방은 완전히 유배지로 낙인찍혔다. 특히 함경도는 열악한 기후에다 원래 여진족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이라는 점과 더불어서 당시 조선 사람이 서북 지방을 보는 시각은 과거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보는 시각, 혹은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를 본 시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고…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한성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이중환 택리지 중에서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 시대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성리학의 전파가 늦어져서 " 서북 지방에서는 양반들도 소학을 읽지 않는다"는 장계가 올라올 정도에 이른 것이다. 소학은 아동용 혹은 입문자용 유학 교과서로, 말하자면 초등학생용 교과서로 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기초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초등교육이나 마찬가지로 즉 오늘날로 치면 국정감사에서 "서북 지방에서는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부터가 학습 이해능력이 타지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며 그 자식, 손자[8]들은 구구단도 이해를 못한다고 합니다."라고 대놓고 지적이 나온 셈이다. 결국 서북 지방은 양반 세계에서 완벽하게 왕따당한다.

일반적인 인식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서북 지방 출신은 승진의 길이나 마찬가지인 청요직에 임명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당상관 후보자의 명부인 도당록(都堂錄)에 서북 지방 출신민으로 이름을 올린 이가 단 1명도 없었다.

무관의 경우는 상황이 좀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북 지역 차별은 여기에도 존재하여, 서북 지역인들은 문과의 숭문원에 해당하는 선전관의 직책에 임명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문과 합격자는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고 임명될 수 있고, 무과 합격자는 선전관, 부장, 수문장 가운데 하나에 추천을 받았는데, 승진 한계와 승진 속도가 정확하게 이 순서에 비례했다. 따라서 서북 지역인들은 하급 무관만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정확하게 속대전 기준으로 서얼들이 받던 대접이다.

평안도 지역 사람들의 과거 합격률 자체가 낮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안도민들의 과거 합격률 자체는 8도에서 높은 편에 속했다. 홍경래의 난의 원인을 언급할 때 평안도에 대한 차별을 떠올리기 때문에 과거 합격률도 낮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2015년 기상직 7급 공무원 시험에서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노린 문제가 출제됐다. 그런데 역으로 말하자면, 과거 합격률이 차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좋은 증거이다. 이는 상민의 과거 합격률 문제와도 비슷한데, 저 사람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을 얻지 못하고 생원 진사 등에 머물거나 미관 말직을 전전하다가 끝났다.

문제는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고위직이 아니더라도 관직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생원시를 봐서 생원 직위를 따거나 진사시를 봐서 진사 직위를 따도 '양반'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기는 했다. 경주 최씨의 가훈이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인 이유도 양반 커트라인이 소과인 생원시, 진사시를 통과해서 4대까지였기 때문이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대대로 소과만 봐도 양반 지위가 유지는 된다.

그러나 표면적인 양반 타이틀은 소과 합격을 통하여 어떻게 얻을 수는 있더라도 실질적인 명예 및 품위 유지를 위해서는 관직을 얻어야 했는데,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든든한 빽을 만드는 것으로, 정계 유망주에게 경제적으로 막대한 후원을 해주는 이른바 엽관 활동을 벌여야 했다. 이러다가 몰락한 인물이 홍경래군에서 가장 전형적 양반에 가까운 김창시이다. 김창시는 부호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까지 했지만, 엽관 활동에 실패해서 집안을 말아먹었다. 그 정도의 재력이 없다면 과거(대과)에 합격하여 본인의 순수한 능력으로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미 과거합격자 임용이 만성적으로 심각하게 적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빽없는 서북인이 등용될 수 있는 확률은 더욱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 코스를 밟지 못한 이들은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몰락해서 잘해야 훈장이나 묏자리 잡는 지관, 의사가 되었고, 자칫하면 농민이나 상공업자로 전락해서 군역 걱정을 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이 홍경래의 난과 그 이후에 정감록과 정진인설이 뻔질나게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애초에 홍경래부터가 과거에 실패하고 풍수장이로 묘자리 보면서 전국을 떠돈 케이스이고, 주력 참모인 우군칙 역시 풍수 경력이 있다. 난 당시에 부원수를 칭한 김사용은 향반 출신이지만 가난해서 결혼도 못한 경우이다. 이게 현대로 치면 공무원 시험에는 합격했는데 전라도 출신이라며 실질적인 직업을 주지 않고 기약 없는 보직대기를 하는 상태가 된 건데, 현대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 대를 잇는 개념이 강했던 조선시대 양반의 기준이면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2.2. 수령들의 과도한 수탈

이런 이유로 인해 서북 지방에서 사족이 완전히 사라진 결과, 다른 지역과는 달리 향임이 향권(鄕權)을 장악하였다. 잉류 지역으로서 부세를 중앙에 운반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서북 지방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부세 행정에서 향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후 이 지역에도 수령과 결탁한 신향과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고, 서북 지방 수령들은 다른 지방 수령에 견주어 더욱 긴밀하게 세도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수탈이 매우 심해졌다.

이 시기 대표적인 수탈 방법으로 매향(賣鄕)과 민고(民庫)가 있다. 매향은 수령이 돈 많은 상인들에게 향임을 강제로 떠넘기는 것이다. 가장 천시받던 이들을 향임으로 올려주는 것이니 일종의 승격이지만, 이 과정이 강제적이고 워낙에 돈을 많이 뜯으면서 동시에 광범위해서 문제가 되었다.[9] 이중 가장 압권은 이미 매향이 문제가 되었던 상황이던 정조 14년 정주 목사 오대익이 총 46,849냥을 받고 무려 400여 명을 향임에 올린 것이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 엽기적 사건의 배경이자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 중 하나가 민고였다. 청나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연행의 경비와 각 읍의 경비를 서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충당하게 한 창고가 바로 민고였다. 조선 초에는 잦은 연행 자체로 인한 부담 자체가 엄청났고, 조선 후기 연행이 감소할 무렵에는 민고가 수령의 사금고화 되어서 뇌물 창고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뇌물 문제로 텅 빈 민고의 부족분을 향인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매향으로 한 번 걷고, 그 매향으로 생긴 향임들에게 부족분을 메울 책임을 전가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탈 방법은 서북민에 대한 차별이라는 피해의식과 결합하기 딱 좋았다. 이대로라면 서북민인 향임과 중앙 출신인 수령이라는 대립 구조가 형성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대 서북 지방에선 이 정도 지위에 오를 양반 자체가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중앙 정부에 대한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기에, 이런 상황 때문에 서북 지방의 봉기는 곤궁으로 자연 발생한 남부의 농민 봉기와는 다르게 향임들 주도로 일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함경도 북청부 단천의 농민 봉기(1808년)의 주도층도 향임이었고, 홍경래의 난 얼마 전에 황해도 곡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 역시 향임들이 주도한 수령에 대한 반관 투쟁이었다. 그래서 홍경래의 난 당시 향임들은 적극적으로 홍경래 군에 내응했고, 홍경래군은 세력을 확장할 땐 거의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파죽지세를 이어갔다. 다만 그런만큼 이탈도 빨라서 홍경래 군의 몰락은 이 향임들의 배반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홍경래 군의 몰락 과정에서 향임층은 내응을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관군에 협력하여 의병까지 조직하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였다.

홍경래의 난에 상인들을 연결짓는 시각도 있다. 당시 서북 지방은 농업 생산력이 타지에 비해 비교적 높고 자원이 풍부하여 수공업과 광업이 활성화되었으며, 특히 청나라와의 교역 과정에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공무역 외에도 사무역이 대규모로 진행되면서 평양, 개성, 의주, 안주, 정주 등이 중심지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잠채를 통한 광산업 역시 극도로 발달하였는데, 이 역시 상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송상과 만상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은 독자적인 연결망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북민 차별 철폐를 기치에 둔 홍경래의 반란의 이면에 있어서 송상과 만상이라는 서북 지방 상인들과 한양의 경강 상인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특권 상인들간의 대결 구도로 파악하는 견해도 늘고 있다. 이런 상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평안도의 거부였던 이희저로 초기 농민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선금으로 1~3냥을 지불하였는데 그 돈 역시 이 거상들에게서 나왔다.

다만 이들은 난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홍경래 군에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아무런 직책도 없었고, 가장 주요한 인물인 이희저마저도 후방에서 군량이나 대는 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 이희저는 본래 역참의 역졸 또는 딸린 노비 출신이었다가 청나라와 사무역으로 치부를 해 벼락부자가 된 인물이다. 상인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체구가 크고 용력이 셌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비를 털어 용병을 사와서 난 초기에도 이희저가 육성한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활약했다. 관련 매체에는 이희저가 돈을 많이 벌었음에도 무시를 당하는 신분제도에 불만을 품고 홍경래의 '벼슬자리 준다'는 꾐에 넘어가 재산을 홀랑 써버리고 죽었다는 서술이 많다. 뒤에서 무슨 협약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희저가 홍경래와 우군칙에게 이용당했다'라는 소문이 도는 지경에 이른다. 정사에서도 이희저가 정감록 때문에 홍경래에게 낚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상인층 역시 향임층만큼이나 머리가 좋아서인지 이탈이 빨랐고 반란 진압 후에도 상당수가 원상 복권되었다. 이는 뇌물을 주고 뒷수습을 잘한 영향일 수도 있다. 그 당시 조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2.3. 농민들의 몰락

16세기에는 직전법이 폐지되어 전주 전객제가 소멸하고 지주 전호제가 확산되었고, 17세기에는 신분질서의 동요와 유통경제의 성장으로 인하여 지주 전호제가 경제적 지주 전호제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토지 소유에 있어서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농민층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조선왕조는 부세 징수에만 급급하여 농민들의 체제 이탈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이라 불리는 이들은 숙종 31년 경상 감사의 장계에서 5만여, 충청 감사의 장계에서 10만여가 언급된다. 기민(飢民)[10]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땅 없이 떠돌면서 사회 불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유난히도 빈발했던 각종 자연재해들은 사회 불만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1809년 발생한 기록적인 흉년[11]으로 대대적인 기민이 발생했다. 흉년 때마다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들을 돕기 위해 곡식을 무상제공하는 진급제도가 마련될 정도.

1810년 순조실록에는 기민이 840만 1,209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가 언급된다. 진휼을 마친 이후인 <순조실록> 순조 10년 5월 27(경진), 47 집 658 면의 기록에 따르면 ‘ 수원이 14만 1천 1백45구口, 내하전 별순 2만 7백 87구, 광주가 4만 5천 3백 12구, 경기도 여주 등 28읍에서 38만 7천 8백 89구, 호서의 평특 등 50 읍진과 역에서 1백 31만 1천 9백 59구, 호남 전주 등 90 읍진이 4백 76만 4천 4백 57구, 영남의 경주 등 71읍진과 기민이 1백 72만 9천 6백 60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모두 840만 1천 2백 9명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황당하게도 그 해 말에 기록된 8부 5도의 총 인구 758만 3,036명 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순조 실록> 순조 10년 12월 30(경술)에 기록된 한성부에서 올린 인구 조사 기록을 보면
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바쳤다. 5부(五部) 및 8도(八道)의 총 원호(元戶)는 176만 1,887호였는데, 남자는 375만 4,890구(口)이였고, 여자는 382만 8,156구(口)였다. 남녀를 더한 총 인구수가 758만 3,036명이다.

기민과의 차이는 무려 81만 8,163명이나 된다. 이런 이들은 삼남 지방(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떠나서 서북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서북 지방의 광산붐에 편승해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몰락한 농민들의 상업적 잠채로 연결되는 모습이 영국 인클로저 운동 이후 몰락 농민이 일거리를 찾아 임노동자로 변하는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은 잠채가 산업발전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민고의 폐단에 고리대로 농민층의 몰락이 극심했던 기민들까지 몰려드니, 서북 지방은 그야말로 거지 소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장 많이 몰린 것이 잠채, 그중에서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금광이었다. 그래서 홍경래 군이 금광이 난다는 소문을 터뜨리고 농민들을 모집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돈에 고용된 광산 노동자[12] 또는 향임에 의해서 동원된 부대로서, 그리고 될 대로 되라거나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홍경래 군에 가담하여 홍경래 군의 세를 늘려줬다.

3. 경과

홍경래의 난은 전기(1811년 12월 18일 ~ 29일)와 후기(12월 29일~ 1812년 4월 19일)로 크게 구분된다. 난의 주동 세력이 크게 변화되는 데다가, 성격도 크게 바뀌기 때문이다.

3.1. 전기

MBC 드라마 상도 중에서

3.1.1. 반란을 모의하다

반란을 주도한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사람으로,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뛰어난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유교 뿐만 아니라 병서나 술서, 특히 정감록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1798년 사마시(司馬試)에서[13] 낙방한 뒤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수가가 되어 각지를 전전했는데 이 경험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1800년, 홍경래는 훗날 봉기의 파트너이자 참모가 되는 우군칙을 만났다. 우군칙은 평안도 태천의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사람으로, 홍경래처럼 풍수가로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친분을 맺었고 반란을 모의하였다. 이후 우군칙은 봉기의 물주가 되어줄 가산의 부호 이희저를 끌어들였고, 의희저는 가산 다복동(현 박천군 청룡면 인덕리 다복동)에서 광산을 경영하여 사람을 불러모았고 밤이 되면 그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반란을 준비해나갔다.

1810년 11월 무렵 우군칙은 다시 홍경래를 만나 봉기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희저와 함께 봉기군의 새로운 기지를 골랐다. 이듬해 1월 곽산 출신의 진사로 문장가이자 재예가인 김창시(金昌始)가 합류했는데 그는 우군칙과 함께 서북의 유력자들과 부호들을 포섭하는 활동을 했다. 또한 홍경래의 무리는 다복동에 30칸의 기와집을 짓는 등 봉기군의 본부를 차리기도 했다.

1811년 7월 이후 홍경래는 포섭해둔 장사들과 함께 다복동에 있는 우군칙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 무렵 태천 출신의 무관 김사용(金士用)이 합류했는데 그는 우군칙의 집에 머물면서 반란군의 군세를 다듬는 작업을 담당했다. 그 외 곽산 출신의 상인이자 장사인 홍총각[14]과 힘 쓰는 역사인 양시위, 김운용, 이제초(李濟初)도 봉기에 가담했다. 이중에서 양반 출신은 몰락 양반으로 추정되는 이제초 1명으로, 나머지는 모두 농민 출신이다.[15]

이 밖에,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000명 정도의 봉기군 중 대다수인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 없는 농민이나 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1811년 12월이 되자 홍경래 일당은 광산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집하다는 명목으로 돈을 뿌려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일반 군졸은 물론 깃발 그릴 때 필요한 병풍 수리공, 무기 만들 때 필요한 대장장이, 걸인, 상인, 마부, 향인, 빈민 등등 수많은 사람이 가산 다복동으로 몰려들었다. 12월 20일을 D-day로 잡은 홍경래는 김창시를 통해 임신년(1812년)에 봉기가 일어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심을 뒤흔들고, 12월 15일 평양 대동관을 폭파시켜 봉기에 앞서 평양에 소동을 일으키려 했다. 이 계획은 폭탄이 물에 젖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그와 별개로 멀리 황해도에서도 사람이 올 정도로 봉기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갔다. 하지만 반란의 낌새를 눈치챈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이 이희저와 김창시 등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박성신이 붙잡히자 홍경래는 날짜를 앞당겨 12월 18일 반란을 일으킨다.

홍경래는 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가산, 박천, 영변, 안주 등을 공격하는 남진군으로 삼고, 나머지 하나는 정주, 곽산, 선천, 철산, 의주를 공략하는 북진군으로 삼았다. 반란군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3.1.2. 서북을 휩쓸다

1811년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 밤, 홍경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반란의 정당함을 설파한 뒤 가산으로 진군했다. 반란군은 200명 이하에 불과했지만 이미 가산 관아의 아전들이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산 점령은 식은 죽 먹기였고 가산군수 정시(鄭蓍)는 저항하다가 살해당했다. 반란군은 관아의 병기를 거두고, 곡식을 풀어 기민들을 구제하며, 가산을 통치할 주관장(主管將)으로 윤원섭(尹元燮)을 임명했다.

가산을 점령하자 홍경래는 서북의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였다. 아래는 홍경래의 난 당시의 격문으로, 이들의 봉기 의도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한계도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평안도 지역 차별만 내세워 스스로를 지역 고립시켜 지역에 국한된 반란에 불과했다는 것 등등. 이것은 홍경래가 이 격문을 평안도 전역에만 보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18]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19]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20]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21]의 재주가 또한 이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糞土)[22]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400년 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모, 박모(박종경)의 무리[23]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24]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5살 때에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황명(皇明)의 세신 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25]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각 주, 군, 현의 고을원들에게 보내니 절대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26]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서 거행함이 좋으리라. 위 격문을 안주병사, 우후목사와 숙천부사, 순안현령, 평안감사, 중군, 서윤과 강서현령, 용강현령, 삼화부사, 함종부사, 증산현령, 영유현령에게 내리노라. 대원수.

가산을 시작으로 서북의 고을들은 한순간에 반란군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19일 300명으로 불어난 반란군은 박천으로 나아갔고 다음날 새벽 박천에 진입했다. 박천군수 임성고(任聖皐)는 반란군이 몰려오자 도망쳤지만 노모가 붙잡히자 돌아와 항복했다. 반란군은 박천을 통치할 주관장으로 한일항(韓一恒)을 임명하고 영변으로 가려고 했지만 후술할 홍경래 암살미수사건으로 다복동으로 철수한다.

박천을 점령하고 멈춘 남진군과 달리 김사용이 통솔하는 북진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그들은 선천부사 김익순이 체포한 박성신(朴聖信) 등을 구출하고 곽산으로 나아갔다. 북진군은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19일 새벽 곽산에 무혈입성했다. 곽산군수 이영식은 벽장 속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곽산의 장교인 장재흥(張再興)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정주성으로 도주하였다. 김사용은 박성신을 곽산의 주관장에 임명하고 병력을 3~400명으로 불렸다.

북진군의 다음 목표는 정주였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정주성은 곧 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돌아 흉흉한 상태였는데 정주목사 이근주(李近冑)는 내응자를 체포하는 등 대응에 나섰지만 최이륜(崔爾崙) 등이 감옥에 갇힌 자들을 구해냈고,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안주 병영으로 도망쳤다. 21일 김사용은 정주성에 입성했고 이제초가 북진군에 합류하여 선봉장이 되었다. 김사용은 최이륜을 주관장으로 삼고 나머지 관직들은 정주의 유력자들에게 적절히 나누어주었다. 또한 기존의 행정체계를 이용하여 군량을 확보하고 병력을 징발하여 군세를 불렸다.

23일 김사용은 최이륜을 북진군의 참모로 임명하고 김이대(金履大)를 주관장에 임명했으며 24일 선천에 입성했다. 선천도 이미 내통자들에 의해 함락당했고 김사용은 우영장 최봉관을 선천부사로 임명하였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검산산성으로 도망쳤지만 다음날 반란군에게 항복했다.

28일 북진군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1,200여명에 달하는 본대는 철산으로 진격했다. 철산부사 이장겸(李章謙)은 12월 23일 운암산성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관아의 내통자들에 의해 붙잡했고 그들의 위협에 항복했다. 그 때문에 철산은 북진군이 오기도 전에 내통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북진군은 철산에 무혈입성했다. 김사용은 정복일을 유진장에 임명하고, 1812년 1월 3일 용천부사 권수(權琇)가 지키고 있는 용골산성을 공격했는데 권수가 의주로 도망치는 바람에 손쉽게 승리하였다. 김사용은 북진군 사령부를 양책참(良策站)에 두고, 용천부사로 정성한(鄭聖翰)을 임명했으며 의주부 공략을 준비했다.

구성으로 간 북진군 별동대는 대략 240여명이었는데, 구성부에서 30리 떨어진 남창에 머무르면서 기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내통자를 통해 600명에서 1천 명에 달하는 지역민들을 반란군에게 합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구성부사 조은석(趙恩錫)은 다른 수령과 달리 도망치거나 항복하지 않고 항전을 이어나갔다.

워낙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기습이었던 데다, 부정부패로 만연하던 지방정부엔 난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홍경래 측에게 금전으로 포섭되거나 역성혁명에 찬동하여 곳곳에 내통한 아전들이 있었다. 내통한 아전들에 의해 반란군이 오자마자 관아 문이 활짝 열리고 반란군이 들이닥쳤기에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붙잡혔고, 살기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반란군에 참여한 군수도 있었다. 유일하게 저항한 가산군수 정시는 병부를 내놓으라고 하는 반란군의 요구를 거부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했지만, 정시를 수청들던 관기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이 반군 몰래 빼돌려 장례를 치렀고 나중에는 반란 진압 후 그 충직함을 높게 사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렬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반란군은 수령을 대신하여 점령한 고을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에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그래서 홍경래 군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서 한때는 진짜로 격문에 나온 5,000여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반란이 진행된 이유는, 향임들과 상인 등 여러 세력들이 조정의 북방지방에 대한 무관심과 차별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길을 알려주거나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게 된 것이다.

3.1.3. 홍경래 암살미수사건

홍경래의 남진군은 본래 박천에서 영변을 공략하고 안주로 내려가는 계획이 있었다. 안주 병영의 집사였던 김대린(金大麟)과 이인배(李仁培)는 (자기가 잘 아는 곳이라 그런지) 일단 안주부터 재빨리 쳐들어가자고 주장했지만, 홍경래는 모사인 우군칙의 조언에 따라 김대린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선 영변을 공격한 후 그 다음에 안주를 칠 것을 결정했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대린과 이인배는 홍경래를 죽여 공을 세울 생각으로 홍경래 암살을 모의하였다. 김대린은 칼을 휘둘러 홍경래를 내리쳤지만, 하필이면 전립에 맞아서 홍경래는 죽지 않았다. 홍경래가 칼끝을 잡으며 사람을 부르자 우군칙이 뛰어들어 김대린을 붙잡았고, 김대린은 자살하였으며 이인배는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반란군은 이 둘의 머리를 효수하였으며 이무경(李茂京) 같은 안주 병영의 내통자들도 살해하였다.[27] 홍경래는 칼을 맞이 이마 쪽에 부상을 입었고 반란군은 21일 가산 다복동으로 회군했다.

당연히 이는 관군에게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 일부가 내응을 위해 영변에 잠입했지만 영변부사 오연상(吳淵常)은 내응자를 색출하여 처형하고 가산과 박천에서 몰려온 피난민을 성 밖으로 쫓아내어 내응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로 인해 반란군은 다른 군현과 달리 영변은 손쉽게 점령하지 못했다.

분란을 수습한 남진군은 23일 태천을 공격했는데 이미 태천현감 유정양(柳鼎養)은 21일 영변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손쉽게 내응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태천을 접수했다. 반란군은 태천의 유진장으로 변대익을 임명했으며, 태천을 점령하기 전날 안주에서 30리 떨어진 박천에 진을 쳤다. 반란의 충격으로 안주는 매우 소란스러웠지만 안주목사 조종영(趙鍾永)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병사를 소집했다. 소문을 듣고 두려워한 백성들이 도망치면서 병사를 모으는 건 쉽지 않았지만 조종영의 조치로 안주는 다른 고을과 달리 반란군에게 넘어가지 않고 관군의 교두보가 되었다.

3.1.4. 관군의 태세 정비

홍경래의 군세가 청천강 이북을 휩쓸었지만 의주 안주 같은 주요 지역은 점령하지 못했다. 안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방상 요충지로 원래부터 이런 곳은 일반 고을처럼 허술하게 관리되는 지역이 아닐 뿐더러, 수령들의 발빠른 대처로 사전에 내통자들을 처단하였기에 내응을 바라기도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반란군이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내다보거나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임상옥을 비롯한 거상들이 막대한 후원금을 기부하여 조정 편인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조정에서도 진압군을 파견하기 시작한다.

12월 22일부터 조정은 반란군에 의해 죽거나 항복, 도주한 수령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령들을 임명하였고 그들에게 전투와 모병에 관한 권한을 부여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새로 임명된 수령은 다음과 같다.

조정은 평안감사와 병사 이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반란군을 소탕할 것을 독려하며 적의 수괴를 잡아온다면 큰 상금과 수령에 임명하겠다는 보상을 건다. 그러나 24일 평안도의 군대만으로는 반란군을 진압할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양서순무영을 금위영에 설치하고 양서순무사로 이요헌(李堯憲), 순무중군에는 박기풍(朴基豊), 종사관에는 김계온(金啓溫)과 서능보(徐能輔)를 임명했다.

정부는 12월 27일 보군 7초(哨)로[38] 구성된 진압군을 관서로 출동시키기로 했다. 또한 27일 안주목사, 서흥부사를 새로 임명하고 그들과 함께 갈 병사 240명을 뽑았지만 자원자는 그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반란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반란군의 허실이 드러나고, 안주 병영도 안정을 되찾자 영부사 이시수(李時秀), 좌의정 김재찬(金載瓚), 판부사 한용귀(韓用龜),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공동으로 상소를 올려 정예 병사 몇 초를 먼저 안주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그 다음에 순무사가 관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여 12월 26일 훈련도감에서 보병 1초, 금위영의 경중초(京中哨) 1초와 기병 1초, 개성의 기병 1초를 차출하고 좌별장 김처한에게 이들을 통솔하여 27일 새벽에 관서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김처한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출동을 거부하자 그를 체포한 뒤 출정하는 날 효시하고,[39] 순무중군 박기풍을 좌별장으로 삼아 출동하도록 하였다.

평안도의 관군도 봉기 초반의 충격에서 벗어나 전열을 정비했다. 관서의 수령들은 반란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길을 막고 병사를 동원해 약산산성 등 주요 거점을 지키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평양에서는 유생과 무사들이 정부를 지지하는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에 대적하였다. 당시 평안도 관군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 평안 감영: 중군 이정회(李鼎會) 휘하 5개 초
* 안주 병영: 우후 이해승(李海昇) 휘하 9개 초
* 약산산성: 영변부사 오연상(吳淵常), 운산군수 한상묵(韓象默), 개천군수 임백관(任百觀), 태천현감 유정양(柳鼎養)
* 자모산성: 은산현감 김기은(金箕殷)
* 영변과 안주의 사잇길: 영변부사 오연상(吳淵常)
* 숙천~삼화로 이어지는 사잇길: 삼화부사 김영(金煐), 용강현령 신재업(申在業)
* 그 외 요해처인 상원, 삼등, 성천, 양덕 또한 각 고을의 수령이 엄중히 경비했다.

3.1.5. 송림 전투

홍경래의 반란군은 봉기 초기 파죽지세의 기세로 청천강 이북의 여덟 고을을 장악했고, 이제는 청천강을 넘어 평안도의 요충지인 안주성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12월 24일 선봉장 홍총각이 지휘하는 반란군 300명이 선발대로 박천의 송림리에 진을 쳤고, 26일에는 홍경래, 김창시, 우군칙 등이 이끄는 반란군 본대 500여명이 합류하였다. 이때 반란군이 동원한 병력은 대략 1천여 명이었고 그 구성의 대다수는 기민이었다. 관군도 여기에 질세라 숙천, 중화, 순천, 함종, 영유 등 아직 반란군이 장악하지 못한 고을에서 병사를 징집하여 대략 2천 명에 달하는 군세를 이루었는데, 이 중 전투력이 있는 부대는 9개 초 였다.

12월 29일, 좌영장을 맡은 함종부사 윤욱렬과 우영장을 맡은 순천군수 오치수가 각각 4개 초를 지휘하여 진군했고, 그 뒤를 우후 이해승이 2개 초를 지휘했다. 관군은 송림동의 어귀에 있는 풍진(楓津)의 고개에 주둔했는데 홍경래는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둘은 관군의 전진(前陣)을 앞뒤에서 치고 나머지 하나는 이해우의 후진(後陣)을 노렸다.

전투가 시작되자 홍총각이 말을 타고 뛰쳐나와 관군의 후진을 공격했고 전진에 비해 숫자가 적은 후진은 위기에 몰린다. 하지만 안주성 백상루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평안병사 이해우가 전 곽산군수 이영식을 후원장(後援將)으로 임명한 뒤 1천 명의 관군을 주어 반군의 후미를 치도록 했다. 그러자 반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홍총각은 전의를 꺾지 않고 사투를 벌였고, 그의 기세에 압도당한 관군의 전열이 무너지려 했다. 하지만 윤욱렬이 호통을 치고 탈주병들을 베어버리려고 하자 관군 병사들은 정신차리고 전투에 임했다.

이후 관군이 총을 쏘며 적진으로 돌격하자 반란군의 기병 서너명이 총에 맞아 낙마했고 반란군은 패주하였다. 전진은 패주하는 반란군을 쫓아 송림동을 샅샅이 뒤졌다. 반란군은 최소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고 장수도 4~5명이 죽었으며 30명은 포로가 되었다.

패배한 홍경래는 12월 29일 정주성으로 퇴각했고 관군은 반란군에게 넘어간 고을을 수복하고 다복동에 있는 반란군 본부를 불태웠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관군은 민간인들을 약탈, 학살하는 등 잔혹한 초토화전술을 펼쳐 지탄을 받게 되었다. 반면 홍경래군은 패주하는 와중에도 일반 농민들을 끌어들여 학살에서 구해내고 향후 반란의 지지 기반으로 삼으려 하였다.

3.1.6. 북진군의 패배

남진군이 송림에서 패배할 무렵, 북진군은 여섯 고을을 점령하고 의주부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주부윤 조흥진(趙興鎭)은 계엄령을 내려 성 내부를 수습하고, 김견신(金見臣)과 허항(許沆)이 의병을 일으켜 백마산성을 지켰다. 그러던 중 관군이 반격하자 북진군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흔들린 부대는 남창에 모여 구성을 공략하던 부대였다. 1812년 새해가 밝자마자 이들은 패전 소식을 듣고 정주성으로 도망쳐버렸다. 관군은 이들이 버린 깃발, 갑옷, 그리고 선천부사의 도장을 입수했다. 1월 6일에는 영변부사 오연상이 관군 300명을 이끌고 태천을 탈환했으며 유진장 변대익을 붙잡았다. 이틀 뒤에는 후원장 이영식과 우영장 오치수가 이끄는 관군이 곽산을 탈환했고 곽산 유진장 박성신은 형 박성간(朴聖幹)과 함께 도망쳐 선천에 있는 이제초의 진영으로 가 급보를 전했다.

1월 9일, 정주성에서 김창시가 와서 이제초에게 관군과 싸우자고 하자 이제초는 휘하 병력 1천 명을 이끌고 곽산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다음 날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미처 진을 지키도 전에 윤욱렬이 이끄는 관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다. 관군은 반란군 50여명의 목을 베었고 선봉장 이제초를 비롯해 반란군의 간부인 김국주(金國柱), 김국신(金國信), 이명전(李明詮), 김이국(金理國), 박정용(朴正用)을 붙잡았다.[40] 이제초는 관군에게 붙잡혀 곤장과 주리틀기를 당했지만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여 관군을 놀라게 했고, 관군은 압송하다가 뭔 일이 있을까봐 이제초를 김국주, 김국신과 함께 처형했다.

북진군 진영에 남아 있던 김창시는 사송평 전투에서 패한 이후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김사용의 부하였던 조문형(趙文亨)에게 배신당해 죽었다. 그의 목은 전 선천부사 김익순이 죄를 면할 요량으로 천금을 주고 사서 자신이 죽인 것처럼 관군에 바쳤다. 북진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선천 또한 1월 15일 곽산에서 온 관군을 보고 놀란 반란군이 흩어져 도망치면서 손쉽게 함락되었다.

반란군의 부원수 김사용은 용천을 점령한 후 양책참에 진을 쳐 의주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견신(金見信), 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가 1월 10일 용천을 일시적으로 탈환하고 반란군 26명을 목을 베었으며, 퇴로가 끊길 것을 염려하여 잠시 물러났다가 1월 11일 김사용이 버리고 간 양책참을 점령했다. 동림성으로 후퇴한 김사용은 1월 13일 남은 1천여 명의 군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자신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이로써 한때 2~3천여 명에 달했던 북진군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1월 14일, 서림성을 지키던 김익명(金益明)이 관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고, 16일 철산이 관군에게 넘어갔다. 운암산성과 동림성에 남아있던 반란군도 관군의 공세에 무너졌으며 북진군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반란군이 승리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붕괴된 이유는, 여러 목적을 가진 다양한 집단이 명확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결집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잘 되면 승승장구하지만, 뭔가 일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서로 발을 빼려 하기 때문에 한 방에 붕괴되기 딱 좋다. 실제로 전세가 관군한테 기울기 시작하자 향임층과 상인층이 먼저 발을 뺐고, 나중에는 의병까지 조직하여 되려 관군에 가담해 홍경래 군을 공격했다.

3.2. 후기(정주성 전투)

단편영화 정주성

3.2.1. 정주성에서 농성하다

홍경래는 농성 장소로 견고하며 식량이 많이 비축된 정주성을 선택했다. 정주성은 1715년에 지어진 석성으로 둘레는 4,680보에 높이는 15척이고 성문은 동서남북 네 곳과 서쪽과 남쪽 사이에 소서문까지 총 다섯 개 있었다.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쌓여져 있으며 북쪽과 서쪽에는 적을 관측하며 지휘할 수 있는 장대가 있었다. 다섯 문 중에 오로지 남문만이 개활지에 노출되어 있지만 옹성이 있어 그 약점을 커버했다. 또한 내부에 우물이 많아서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말해 정주성이야말로 반란군에 농성하기 딱 좋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홍경래가 정주성으로 피신하는 사이 관군은 잡으라는 홍경래는 안 잡고 가산, 박천을 비롯한 주변 고을들을 탈환하면서 학살, 약탈, 방화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 때문에 홍경래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관군의 학살에 내몰린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주성에 들어가 반란군에 가담하는 역효과를 냈다.

그리고 이 농성 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초기 주도 세력이던 향임층과 상인층이 이탈한 반면, 농민층이 주도 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지지 세력층이 단일화하면서, 난을 주동한 지휘부도 반란을 이어나가기 위해 내부에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식량을 고루 배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농민전쟁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반란 자체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농성 준비에 필요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의외로 정주성의 농성은 길게 이어졌다. 이는 진압군의 초토화 전술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격분한 많은 백성들이 농성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관군은 홍경래의 난 전기 때처럼 내부에서 내통자가 발생하기를 바랐으나, 이미 민심을 잃은 관군을 적으로 생각하며 일치단결된 상황에서 그런 내통자가 나오면 미처 내응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거나 혼자서만 간신히 도망치기 일쑤니, 관군 입장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반란군은 농성에 대비하여 성 내의 각종 창고에 보관된 곡식을 모두 꺼내고 백성들의 식량까지 징발하여 군량으로 삼았다. 또한 성 내의 백성들을 징병하고 도망치려는 백성들에게 가족까지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또한 성 주위에 마름쇠를 뿌리고 민가는 모조리 불태워 관군의 접근을 방지했고 계속 사람을 보내 관군의 움직임을 정탐했다.

1월 3일, 이해성, 이유수, 윤욱렬, 오치수, 이영식이 지휘하는 관군이 정주성 남문 앞에 진을 졌지만 성과 너무 가까워 역습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진을 5리 물렸다. 그리고 이틀 뒤 청북소모장 제경욱(諸景彧)이 병사를 이끌고 정주성 동문을 도끼로 부수려 했지만 반란군의 반격으로 전사자 셋에 부상자 17명을 낸 채 후퇴했다. 1월 10일 박기풍이 지휘하는 순무영 병력이 마침내 정주성에 도착했고 관군의 군세는 한양에서 온 1천명을 더해 무려 8천에 달하게 되었다.

1월 12일, 관군은 본격적인 공성에 앞서 회유를 시도했다. 정주 주관장 김이대의 아들 김치적과 반란에 가담했다가 붙잡힌 승신묵에게 효유서를 들려 성 안으로 보냈고, 위력 정찰로 반군을 정탐했다. 다음날에는 대완구로 성내에 포탄을 날렸지만 반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관군은 총을 쏘고 북을 두들기며 함성을 지르는 등 반군을 압박했고 반군도 깃발을 흔들고 북을 두들기고 횃불을 붙이는 등 대응했다.

1월 15일, 관군은첫 번째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겨울이라 폭설이 내리고 반란군이 관군이 접근하기를 기다리다가 때를 맞춰 총을 쏘자 관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북문을 공격하던 순무영 군관 김태백과 병사 둘이 죽고, 남문에서도 공성을 지휘하던 제경욱이 전사했다.[41] 이 전투로 21명의 전사자와 50여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폭설까지 겹치자 관군은 퇴각했다. 다음 날 조정은 평안감사 이만수와 평안병사 이해우에게 반란군의 정주성 점거를 막지 못했고 공성에도 실패한 점을 물어 파직했고[42] 후임으로 정만식과 박기풍을 임명하였다.

1월 18일 관군은 반군의 가족들을 성 앞으로 끌고 와 반란군에게 투항을 권유하도록 했지만 반란군은 전혀 듣지 않았다.

1월 19일 새벽, 관군은 다시 한 번 총공세를 펼쳤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 관군들은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고 악기를 연주하며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올랐다. 하지만 성벽에 접근하자 반란군이 다시 총과 활을 쏴댔고 관군은 또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동문에서는 의병 황종대(黃宗大), 김신홍(金信弘), 차동이(車同伊) 세 사람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랐는데 뒤에 있는 군사들이 아군이 성벽을 오르고 있는 걸 모르고 그 중 한 명을 총으로 쏴 떨어뜨렸다. 나머지 둘은 성벽 위에서 올라오라고 소리쳤지만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산군수 정주성이 칼을 빼들고 병사들에게 전진하라고 독촉했지만 그 사이 반란군이 몰려와 관군에게 총을 쐈고 위에 올라간 두 사람도 다친 채로 성벽을 내려와야 했다. 관군은 8명이 전사했고 36명이 부상당했다.

3.2.2. 거세지는 전투

2차 총공세가 실패하자 관군은 잠시 공성을 멈추고 태세를 정비했다. 공성 실패로 많은 군사를 잃었지만 각지에서 의병이 모였기 때문에 관군의 전력은 오히려 증강되었다. 관군은 부대의 진영을 옮겨 포위망을 짰는데 동문에는 삭주부사 윤민동을 배치했고 서문에는 의병장 허항과 행영장 정래흥, 함종부사 윤욱렬의 부대가 주둔했으며 소서문에는 순천군수 오치수, 북문에는 의병장 김견신, 남문은 평안 감영군과 박천에서 온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순무영 본영에게 공성에 필요한 대장군전, 대완구와 공성 병기를 제작할 장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관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반란군도 가만있지 않고 병사들을 내보내 성 주변의 가옥을 모조리 철거하여 엄폐물을 제거하고 약탈을 통해 물자를 보충했다. 관군도 야밤에 큰 소리로 병사를 행군시키는 등 탐색전을 벌여 반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허실을 알아내려 하였다.

2월 1일, 관군의 김진원(金鎭源)은 윤차(輪車)라는 이름의[43] 공성탑을 제작했다. 윤차는 크게 상, 중, 하층으로 나누어 하층에는 윤차를 움직이기 위한 바퀴가 있었고 중층에는 사다리가, 상층에는 포수 5~6명이 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상층에는 전우좌 세 방향으로 철판을 덧댄 송판을 둘러 포수를 보호했고, 그 사이에 구멍을 뚫어 총을 쏠 수 있도록 했다. 중층와 하층의 가림막에는 갑목(甲木)을 둘렀으며 특히 하층에는 윤차를 굴리는 병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가죽으로 가림막을 만들고 안쪽에 철판을 덧대었다. 하지만 서정일기의 저자 방우정(方禹鼎)은 바퀴를 잣나무 판대기로 만들어서 윤차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우려했고, 순무 군관 손태영(孫泰永)은 대놓고 이건 실패할 것이며 시골집에서 천장에 회 바르는 데 쓰면 되겠다고 악평을 내놨다.

2월 2일 새벽, 관군은 북문 방면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김견신과 윤민동이 북문 공격을 지휘하고, 나머지 부대는 양동 작전으로 서문과 남문을 공략했다. 관군은 건조더미와 장작을 엄폐물 삼아 접근했지만 이미 반란군은 관군의 작전을 다 간파하고 있었고 관군은 부상자 5명을 내고 성과없이 기껏 모은 건초더미를 불태우고 철수했다.

하지만 관군은 2월 3일 그동안 만든 공성 병기들을 대거 투입하여 사방에서 총공격을 펼쳤다. 이번에는 남문과 소서문 방면이 주공을 맡았다. 그런데 비와 눈이 내리면서 진창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공들여 만든 윤차 중 세 대가 진창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관군은 진창에 빠진 윤차들을 끌어낸 뒤 유일하게 빠지지 않은 윤차를 앞세워 남문을 공격했다. 하지만 반군이 깔아놓은 마름쇠 때문에 관군은 성에 접근하지 못했고 총을 쏘고 싶어도 눈비 때문에 제대로 쏘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남은 윤차마저 성벽에 접근하다가 축이 부러지고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멈추고 말았다. 또 패배한 관군은 고생해서 만든 윤차들을 모두 불태운 뒤 철수했다. 이때 관군은 14명이 죽고 72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날, 순무영에서 관군에게 인력과 물자를 지원하였다. 순무영이 지원한 화기는 호준포, 완구, 백자총통(百字銃筒),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불랑기포, 대장군전, 석류화전(石硫火箭)이었고 인력으로는 어영청 집사 김인환(金仁煥)과 남한산성 집사 이정량(李廷良)을 비롯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별파군(別破軍)[44] 10명이었다.

2월 7일, 삭주부사 윤민동이 성문을 불태우겠다며 화약 3말을 가져다가 동문 아래서 불을 붙였지만 성문은 불타지 않았고 반란군들의 비웃음만 산 채 물러나야 했다. 2월 13일에는 북장대에 큰 불이 나자 의병장 김경신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전투가 길어지자 조정은 정주성 공략 실패의 책임을 물어 2월 18일 박기풍을 파직하고 신임 평안병사로 신홍주(申鴻周)를, 신임 순무중군으로 유효원(柳孝源)을[45] 발탁했다.[46]

한편 반란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출성하여 관군을 선제공격하는 등 초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관군과 달리 성에 갇힌 상황이라 보급을 받을 수 없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기에 최대한 빨리 관군의 포위진을 깨트려야 했기 때문이다. 2월 9일 반군이 매복한 박천진 부대를 공격했다. 2월 19일 새벽에 반란군이 매복을 위해 출성햇다가 의병들에게 걸려 6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직후 5~600명에 달하는 반란군에 출성하여 싸움을 걸었지만 전사자 7명을 내고 퇴각했다.

그 와중에 죽은 이제초의 동생 이제신(李濟信)이 홍경래의 목을 바쳐 죄를 용서받을 생각으로 반란을 모의했다. 그는 홍경래를 벨 때 사방에서 몰려들 반란군으로부터 몸을 지킬 생각으로 사람 50여명을 모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박경모(朴景謨)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계획이 홍경래의 귀까지 들어갔다. 홍경래는 장대에 풍악을 울리면서 이제신을 불렀고 이제신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잔치가 끝나자 이제신은 체포되었고 홍경래는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우군칙이 만류하여 살려주었다.

2월 25일, 박기풍은 그가 지휘하는 마지막 공세가 될 4차 총공세를 지휘했다. 이번에는 순무영에서 파견한 장인 김재명(金再明)이 개량한 윤차를 투입하였다. 3차 총공세에서 윤차의 바퀴는 너무 허약했으며, 상층의 장갑판은 반란군의 총탄을 막아내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김재명은 장갑판을 보강하고[47] 회석(灰石)을 쌓아 엄폐물 겸 성내 진입용으로 사용했다. 또한 이번 공세에는 땅굴을 파 성벽을 무너뜨리는 굴토군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4차 총공세도 관군의 대실패로 끝났다. 관군의 윤차가 접근하자 반란군은 조총과 불화살을 쐈다. 그런데 불화살이 회석에 닿자 연기가 피어올라 관군의 시야를 가렸다. 어찌어찌 성벽에 윤차를 접근시켰더니 이번에는 반란군이 제작한 기둥에 돌을 매단 수성 병기에 윤차의 상층이 박살나고 말았다. 여기에 반란군이 윤차에 불을 붙이자 윤차를 굴리던 병사들은 모두 도주하였고 윤차는 모두 불타버렸다. 굴토군 또한 성벽에서 날려대는 총탄과 화살 때문에 작업을 할 수 없어 모두 피신하였다.

남문 공략에 투입되었던 윤차는 남문의 옹성으로부터 수십 보 떨어진 지점에서 바퀴가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반란군이 출성하자 관군은 윤차를 버리고 도망쳤는데, 동남쪽을 공략하고 있던 방우정이 포수를 이끌고 반군 몇을 죽여 관군을 구했다. 해가 지자 관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노획을 막기 위해 멀쩡한 윤차들까지 전부 불태웠으며, 전사자 12명과 부상자 144명을 내고 퇴각했다. 연전연승한 반란군은 풍악을 울리며 승리를 자축했고, 관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2월 27일, 관군의 군관이 몰래 성을 나온 반군 1명을 쫓아갔다가 오룡포에서 적의 복병에 걸렸다. 그 군관은 논으로 도망쳤지만 진창이 된 논에 말이 빠지자 말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 말은 반란군이 데려가서 잡아먹었고, 말뼈를 성 아래로 던지면서 관군을 조롱하였다.

2월 28일, 신임 순무중군 유효원이 정주성에 도착하여 박기풍이 통솔하던 관군과 의병 8,329명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3.2.3. 고립당한 정주성

네 번의 총공세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관군은 방침을 바꾸어 목책으로 정주성 전체를 에워싸 완전히 고립시키려 했다. 정주성 전투 초기만 해도 관군의 진영은 정주성과 좀 떨어져 있었기에 반란군은 관군의 방해 없이 백성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을 뿐더러 외부와 연락 및 지원 세력 모집도 원활했다. 하지만 관군은 주변의 지원군을 모두 소탕하여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주민들을 외지로 소개했으며 진영을 성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렇기에 반군은 연전연승했으나 더더욱 고립되고 있었다. 반란군은 철저히 성내 주민들을 통제했지만 탈주자는 계속 나왔고 외부의 지원과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투를 벌일 때마다 나오는 사상자는 큰 부담이었다.

더 큰 문제는 식량과 무기였다. 넉넉했던 식량과 무기는 농성전이 장기화되며 소모되었고 이를 보충할 수도 없었다. 반군은 식량 배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쌀 대신 누룩을 보급하는가 하며 소와 돼지는 물론 군마도 지휘관들이 쓸 몇 마리만 빼고 전부 도살했다. 총탄도 부족하여 연환(납탄) 대신 무쇠 솥을 부숴 만든 철환(철탄)을 지급했다.

갈수록 초조해진 반군은 더더욱 공세적으로 나왔다. 3월 9일 우군칙, 홍총각이 지휘하는 반란군 6~700여명이 새벽에 몰래 성을 빠져나와 은밀히 윤욱렬의 부대를 공격했다. 이들은 가장 먼저 경계병을 죽이고, 불붙인 화약주머니를 마구 던져 관군 진영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우군칙이 진영 뒤쪽을, 홍총각이 앞쪽을 치면서 불길에 놀라 뛰쳐나오는 관군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 목책 감관 이정량(李廷良)이 창에 맞아 죽었고 함종부사 윤욱렬과 목책 감관 김인환(金仁煥)은 각각 평양 진영과 허항의 부대로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함종진을 시작으로 관군 부대를 차례차례 무너뜨리려 했으나 중군의 명령을 받은 숙천부사 이유수(李儒秀)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성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관군은 70명이 죽었고 137명이 다쳤으며, 반군은 10여명이 죽었고 박천 백성 고종혁(高宗鉉)을 비롯한 네 명이 붙잡혔다. 이 네 명은 관군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모두 참수되었다.

기습을 당한 관군은 경계태세를 한층 끌어올렸는데, 경계병들이 야습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조그마한 움직임이 있어도 경보를 울렸다. 이게 사흘 연속으로 벌어지자 관군들은 잠을 못 자서 피로에 찌들었다. 그 때문에 관군의 경계심이 더 소홀해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고 반란군은 이 틈을 찔러 기습을 시도한다.

3월 15일 정오 무렵 1천 명에 달하는 반군이 북문을 열고 나와 높은 언덕에 일자진을 짰다가 곧 방진으로 바꿨다. 그러자 관군 기병들이 반군을 향해 돌진하고, 수백 명의 포수들이 목책에 의지하여 총을 쐈다. 반군도 가만있지 않고 평지로 내려와 총을 쐈다. 전투가 치열해질 무렵 부원수 김사용이 총탄에 맞아 떨어지자 반군은 성내로 철수했다.[48]

시간이 갈수록 정주성의 상황은 나빠졌고 주민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처지에 몰렸다. 홍경래는 군량 200석이 있지만 호병(胡兵)을 영접할 때 써야 한다고 사람들을 속였다. 반면 관군은 반란군이 나오면 명령을 기다릴 것 없이 즉시 제압하라고 했으며 동문 밖에 포수를 매복시켰다. 또한 관군 각 진영마다 소 한마리씩 잡아 잔치를 열어 굶주린 주민들의 항복을 유도하였다.

3월 18일, 한호운(韓灝運)이라는 사람이 와서 홍경래의 죄상을 꾸짖으면 그들도 필시 감동하여 항복할 것이라며 정주성에 들어갔다. 한호운은 홍경래에게 나라의 은혜 운운하며 꾸짖었지만 홍경래는 듣지 않았고 가산의 구실아치였던 자가[49] 창으로 한호운의 옆구리와 발등을 찔렀다. 홍경래는 차마 못 죽이겠다고 우군칙에게 보냈는데 우군칙은 한호운의 목을 베었고 반란군은 그 시체를 남문 밖으로 던졌다. 시신은 아들 한맹린(韓孟麟)이 수습했다.[50]

3월 20일, 더 초조해진 홍경래는 다시 한 번 공세에 나섰다. 북문과 서문으로 나온 반란군은 북문에 주둔한 허항과 윤욱렬의 부대가 박아둔 목책을 뽑고 진영을 급습했다. 허항이 급히 돌아와 전투를 지휘했지만 선봉장 홍총각에 피살당했고, 홍총각도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반란군은 관군 본진에서 지원군이 오자 성내로 퇴각했으며 관군 측은 전사자 23명과 부상자 6명, 반란군은 전사자 48명과 수많은 무기를 빼앗겼다.

3월 22일, 반란군은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반란군의 정예병 1천 명을 이끌고 새벽에 몰래 출성하여 관군의 진영을 기습했다. 반란군이 관군 경계병을 죽이고 진영을 불태우자 관군도 여러 부대를 투입하여 목책을 지키고 기병 돌격으로 대응하였다. 낡이 밝을 무렵 가산과 정주의 병사들이 반란군을 엄습하자 반란군은 무너져 패퇴했고 홍경래도 관군의 기병 김우현(金禹鉉)에게 맞아 낙마하여 뛰어서 도망쳐야 했다. 관군은 반란군 87명을 붙잡고 69명을 참수했으며 무기와 말도 빼앗았다. 관군의 피해는 전사 17명에 부상자 23명에 불과했고, 포로들을 심문하여 반란군의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모처럼 통쾌한 승리를 거둔 관군은 공을 세운 병사들을 표창했고 포로들을 목 베었으며, 반란군은 두 번 다시 출성 공격을 하지 못했다.

패배한 홍경래는 반란군을 불러모아 지금의 형세가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4월 18일에 호병이 와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니 그 날까지 기다리고, 만약 호병이 오지 않는다면 내 목을 관군에 바쳐 항복하라고 말했다. 이런 극한 발언은 패전과 굶주림으로 흔들리는 반란군의 군기를 다잡기 위함으로 보인다.

한편 이 무렵 관군 진영에서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졸들이 죽자, 각 고을에게 명해 병사 841명을 징발하여 관군에 편입시켰다.

3.2.4. 정주성이 무너지다

반란군 지휘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로 원군을 이끌어오고 정보를 알아오며 관군의 후방을 교란할 사람들을 끊임없이 보냈다. 이미 농성이 시작된 1월부터 홍경래의 세작들이 정주성 밖으로 나가 각종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김사용의 사주를 받은 유한순(兪漢淳)이 관군의 정세를 정탐하고 한양에서 벽보를 붙여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또한 박기조(韓基朝)라는 사람은 한양에서 거사에 가담하였다. 심지어 벼슬살이를 한 박종일(朴鍾一)과 이진채(李振采)도 반란에 가담하여 도성에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목이 잘렸다. 외부의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정주성의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동안 반란군은 허장성세로[51] 어려운 사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게 되자 정보 누설을 감수하고 입을 줄일 목적으로 25일과 26일에 걸쳐 노약자와 부녀자 총 227명을 성밖으로 내보냈다. 유효원은 이들을 죽였다가는 반군 측에서 더 이상 투항자가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들을 모두 무사히 귀가시켰고, 반란군의 사정이 매우 어렵다고 판단했다.

4월 3일 새벽, 관군은 반란군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각지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다섯 번째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굶주린 반란군이 무너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반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병력을 물렸다. 이 전투의 패배로 관군은 성벽을 폭파하기로 결정했다. 일부 지휘관들은 흙을 쌓으면서 성벽으로 전진하자고 주장했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지만 폭파작전의 책임자 손태영이 화약을 땅에 묻어 폭파시키는 시범을 보여주자 모두 납득하였다.[52]

4월 3일 관군은 운산의 광부를 동원하여 땅굴을 파고, 연막작전으로 흙벽을 쌓고 성에 포격과 총격을 가했다. 중간에 암석지대를 만나 우회하고, 비가 와서 물을 빼내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4월 17일 땅굴이 완성되었다. 반란군은 점점 다가오는 흙벽 뒤로 총탄과 활을 쏴댔고, 흙벽 덕분에 직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곡사는 막을 수 없어서 몇 명이 부상당했다.
첫닭이 울었을 때 약환감관藥丸監官 김치언金致彦 등이 몰래 굴속에 들어가서 먼저 볏짚 자리를 5겹으로 깔고 또 갈대자리를 깔고 자리 위에 화약 2천 근을 놓았다. 또 싸리나무 껍질로 엮은 굵은 밧줄 끝은 화약 속에 묻고 시작 부분은 굴 옆으로 꺼냈다. 그 끝에 불을 지르면 안으로 타들어가게 했다. 화력이 밖으로 샐까 염려하여 진흙을 바르고 큰 돌을 세워서 동굴 입구를 단단히 막았다. 먼저 긴 새끼 하나로 안의 새끼가 불에 타는 것을 비교하여 굴속에서 화약이 터지는 시기를 시험하였다.(중략)
그즈음 한 덩어리 연기가 곧바로 하늘로 솟구쳤는데, 금빛 뱀같은 불빛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갑자기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벼락치는 소리가 일어나 각 진영의 사람들의 귀는 갑자기 먹먹했고 말들의 눈은 모두 휘둥그레졌다. 성 본체 4, 5발把이 디딤돌[坮石] 같이 조각조각 모두 부서져 날리었다. 중간에 길 하나가 열렸는데 천 명의 군사가 다닐 수 있었다. 성벽[堞]을 지키던 적의 병졸들은 모두 깔려 죽었다.(중략)
남문의 군대가 적 병졸을 붙잡아서 심문했더니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남문 안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고 의논한 자가 홍경래입니다.” 했다. 이에 곧바로 남문으로 향해 총을 쏘았다. 홍경래는 잠시 남문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총알에 맞았다. 비록 총알에 맞았으나 오히려 숨을 쉬고 있었는데 여러 군사들이 크게 모여 앞다투어 죽였다. 평양 장사 군관(壯士軍官) 옥재혁(玉載赫)이 먼저 그 머리를 가지고는 고무되어 본부 진영에 와 바쳤다.
현인복(玄仁福)의 진중일기 1812년 4월 19일. 출처
4월 18일, 관군은 화약 1천 700근을 땅굴에 묻었고 다음 날 새벽 터트렸다. 그러자 북문의 성벽이 무너지고 반란군 수백 명이 깔려죽었다. 관군은 북문으로 진입하여 성문을 열고, 반란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밀린 반란군은 중앙의 향교에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패퇴했고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몇몇 반군은 남문으로 도주했지만 매복한 관군에게 붙잡혔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반군들은 관군에게 붙잡혔다. 관군은 정주성을 제압한 이후 정주목사 임재수(林裁洙)에게 행정사무를 맡겼다. 이렇게 홍경래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된다.

3.2.5. 반란군의 최후

홍경래는 정주성이 함락될 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참수된 뒤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처리되었다. 이 때문에 연좌 처벌 강도도 더욱 높아짐에 따라, 홍경래의 아내 최씨는 성이 함락된 이후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진 뒤 거리에 목이 내걸렸다.

부원수 김사용 또한 홍경래처럼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희저는 정주성이 무너지자 도망쳤지만 의병 중 한 명인 함의형(咸義衡)에게 살해당했다. 양시위는 저항하다가 붙잡혀 바로 참수되었다. 우군칙과 홍총각은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뒤 참수되었으며, 김창시는 도주했다가 조문명에게 살해되었고, 박성간 & 박성신 형제는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박성신의 아들인 인초 & 인복과 함께 한양에서 참수됐다.

반군에 가담한 농민들에 대한 처벌도 상당히 잔혹했다. 정주성에서 체포된 이들은 총 2,983명이었는데, 관군은 10세 이하의 남아 224명과 여자 842명은 무죄 방면했지만 나머지 1,917명은 반란군에 부역한 혐의를 물어 4월 23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처형했다.

정주성 함락 당시 관군이 한 학살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처사가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는, 이후 난의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을 논공행상할 때 "반란군 중에는 마지못해 난에 참여한 사람도 있을 텐데 성을 함락시키자마자 무턱대고 2천 명을 모두 처형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며 정주성 전투를 이끈 유효원의 삭직을 비변사가 요청하여 순조의 윤허를 받은 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순조실록 1812년 6월 9일 자 기사 유교 이념에 충실했던 조선은 반란이나 민란이 발생하면 주동자와 핵심 가담자는 일벌백계로 죽이지만 단순 가담자인 지역민에게는 선처를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본업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는 고종 시기의 제1차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때까지 지켜진 민란 대응 메뉴얼이었다. 그런데 이 원칙이 정작 홍경래의 난 때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평안도의 지방 속오군 다수가 반군에 가담했는지라 남은 관군의 사졸들은 훈련도가 너무 낮아서 훈련도감이 주축이 된 순무영이 전적으로 도맡았는데, 이들의 숙련도와 감투정신은 조선 최고였지만 민사작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한양에서 긴급 파병된 중앙군이 평안도 칼바람 아래 탈영이 상습인 지방병들의 목을 매달아가며 토벌을 진행하니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반군은 완전히 악에 받혀버렸다. 특히 정주성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관군의 민간인들에 대한 잔혹행위가 심했다. 관군 병사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것을 관군 지휘부에서 통제하지 않다보니 병사들의 약탈과 학살이 심각했다. 이로 인해 관군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지게 된 주민들이 반군과 함께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되면서 공성전이 예상 외로 3달이나 진행됨에 따라 관군의 피해가 커지게 되었고 이에 관군들 역시 악에 받혀버렸다. 게다가 야지에서 격파 후 와해된 것이 아니라 성 안에 들어가 포위당하고 있어서 피할 길도 없었고, 결국 조선조 유례없는 잔혹한 결말을 맞았다.

4. 의의 및 한계

4.1. 난의 성격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2가지가 존재한다. 1524~1525년의 독일 농민전쟁과 같이 각 지의 농민들이 주도한 반봉건적 민란, 즉 또 다른 '농민전쟁'이라는 시각과 '농민전쟁'이 아닌 하나의 민란이었다는 시각이다.

전자는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와 반봉건적 성격, 계급투쟁론적 시각을 담고 있다. 후자는 난의 주도세력과 농민층의 연대가 부족하였다는 점, 농민층은 난이 시작된 이후에야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계급투쟁론을 조선 후기 사회에 도입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이라는 점 등을 들어 전자를 비판한다. 물론, 농민층의 주도적인 참여를 인정하면서도 홍경래의 난을 농민 전쟁으로 보지 않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그러므로 칼같이 분류하기는 불가능하다.

홍경래의 난은 체제 갈등이 아니라 체제 변혁의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즉 단순한 계급적 저항이 아니라 계급 의식을 기초하여 일어난 최초의 봉기이다.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저항 행위의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일종의 감결 사상으로서 홍경래 불사설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특히 그동안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농민들이 정주성 농성 단계에서 능동성을 표출하면서 백성이 형성되는 초보적인 단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분제에 대한 의식의 성장을 통해 농민 항쟁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 체제가 아니라 기층 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 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때문에 정주성 항쟁 시기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를 ' 평안도 농민 항쟁', '평안도 농민 전쟁', 심지어는 '홍경래의 혁명'이라고까지 칭하기도 한다. 봉기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사례가 정주성이 함락된 뒤의 모습인데, 정주성을 함락한 관군은 성 내의 향교, 사당, 관아 등이 거의 멀쩡하게 보존된 것을 발견했다.[53]

한편 홍경래의 난은 봉건적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봉건 권력의 교체에만 집중했다는 한계가 있다. 반란에 가담하고 내응한 자들은 주로 향임이나 상인들이었다. 물론 기민 같은 하층민도 가담하긴 했지만 반란 초창기만 해도 주도층은 향임이었고 반란군에게 임명된 유진장들도 향임들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수령질서에 반감을 가졌지만 반봉건 개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고을들도 수령만 바뀌었을 뿐, 지배질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홍경래는 봉건적 사회 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차별만으로 여겨 삼남 지방의 농민 항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였다. 물론 난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후기에는 향임과 상인층이 이탈하고 관군에게 쫓긴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농민 항쟁과 비슷하게 성격이 바뀌면서 지휘부의 생각도 달라졌지만, 이땐 이미 반군의 세력이 붕괴된터라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항쟁 말기에는 만주 청나라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위험성도 노출시켰다. 다만 정말로 청에 병사 파견을 요청하는 등의 실질적 행동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란 지도층은 "호병이 올 것"이라는 말을 난 초기부터 했지만, 이 호병은 사실 현실적인 청나라 군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으니까 청나라도 정통성이 있는 자신들을 지원할 것이라는 명분상 표현이었다. 정주성 농성기에는 호병 표현이 더 자주 쓰이는데, 이는 고립무원인 처지에서 농성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러나 만약 청에 특사를 보내는데 성공했다 해도, 조선왕조가 청의 질서에 이미 순응한 상황에서 반란군을 지원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미 당시의 조선은 청나라와 나름 쌓아온 관계가 있었으며, 청나라 입장에서도 말을 잘 듣는 기존의 조선 조정을 버리고 말을 잘 들을지 안 들을지도 모르면서 세력도 훨씬 미약한 반란군 세력을 도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최항기의 소설 <홍경래의 난>에서는 이 호병이 청나라 병사들이 아니라 만주의 마적단을 의미하는 걸로 나오는데, 홍경래가 특사를 보내 이들을 고용하려 했으나 선금으로 들고간 5천냥을 날로 먹은 뒤 10만냥을 선금으로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기에 결국 고용은 무산된다.

4.2. 전술적 한계

전술적으로도 홍경래의 난은 문제점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난을 일으킬 때 병력이 1,000명이었고 정주성에서 농성할때 5,000명일 정도로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너무 적었다는 것인데, 이 적은 병력을 잘게 쪼개기까지 해서 기습으로 인한 초반의 우세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홍경래의 난은 1812년 1월 31일(양력)시작 당시 약 1천여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이후 여러 고을을 함락하면서 떠돌아다니던 유민과 노비, 천민들이 합세하고, 병부를 통해 양민들을 징발하면서 병력의 규모가 5천여명까지 늘었으나, 처음의 병력 1천여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군사 훈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머릿수 채우기에 불과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내응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손쉽게 고을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점령하는 고을이 늘어나고, 그 고을마다 최소한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기에, 반군의 수는 전과가 오를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반군이 점령한 대읍(大邑)[54]만 해도 11개인데, 이런 대읍마다 최소 50명만 남겨둔다면 이미 절반 이상인 550명이다. 홍경래군은 고을을 점령하면서 숫자는 불어났지만 홍경래가 직접 조련했던 정예병은 갈수록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반군 입장에서 이러한 고을들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는 것이 이들은 단순히 약탈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를 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반드시 점령한 고을은 통치해야만 했다. 실제로 반군은 다른 민란과 달리 각 고을마다 수령, 천총 등을 임명하여 도망치거나 항복한 수령과 아전을 대신하여 행정 및 군사업무를 보도록 했다.

또한 홍경래가 안주와 영변 중 어느 것을 먼저 공략할지를 두고 갈등이 벌어진 것도 반란의 실패에 일조했다. 김대린은 "한양과 평양의 지원군이 안주에 도달하기 전에 당장 안주성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우군칙은 "안주성은 방비가 매우 튼튼하니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외곽의 영변, 태천과 같은 지역부터 함락시킨 다음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경래는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안주를 공격하지 않고 태천 등 주변 지역을 공략했는데 이것이 오판이었다. 반란 초기만 해도 안주성은 반란의 충격으로 뒤숭숭했고 방비도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갈등이 김대린의 홍경래 암살미수사건으로 번지면서 반란군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관군에게 태세를 정비할 시간을 줘버렸다.

이후 홍경래는 태천을 점령한 다음 안주 공략에 나섰지만 며칠 전과 달리 안주를 비롯한 평안도 관군은 혼란을 수습하고 반란군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된 상태였다. 결국 홍경래는 안주는 커녕 청천강도 못 넘고 박천 송림리에서 관군에게 패배하였다. 홍경래군의 패망은 송림 전투로부터 4개월 뒤의 일이었지만, 이때 반란의 예봉이 꺾이면서 사실상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술적 한계의 2번째는 첫번째와 이어지는 것이다. 홍경래군은 반란 초기만 해도 기습을 통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나, 이때 너무 쉽게 연이어 승리를 거둔 탓에 조선 정규군의 수준을 너무 얕본 것이다. 순조 때의 조선이 세도정치로 인해 망조가 들어가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래도 국가 체계는 유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명군으로 평가받는 정조가 바로 전대의 국왕이었다. 또한 아무리 나라가 막장이 되어도 기득권층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최후의 방패인 군사력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며[55],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룩하는 데에 성공하여 지방에 정치 체제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국가들은 중앙군이 지방군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경우가 많다.

즉 홍경래군이 상대한 지방군 역시 중앙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인 것은 맞지만, 그 수준 차이가 넘사벽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조선군이 임진왜란 초기,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전쟁 도중 졸전을 펼친 사례가 많기 때문에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조선보다 국력이 더 강한 나라에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가지고 쳐들어온 사례들이고, 반란군을 상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당장 홍경래의 난보다 수십 년 전에 먼저 벌어진 이인좌의 난 당시에도, 반란군이 중앙군의 화력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밀려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시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수도인 한양에만 해도 훈련도감이 약 6천여명, 금위영 2천여명, 어영청 2천여명, 호위청 1천여명 등 1만 여명의 병력이 존재했고, 경기도 방어를 담당하는 총융청, 한양 인근의 주요 도시인 광주·수원·강화·개성에는 각각 수어청, 총리영, 진무영, 관리영이라는 방어 부대가 따로 있었다. 물론 이때쯤 되면 방군수포라 하여 군적에는 이름만 올려놓고 군포만 납부하는, 군사훈련 한 번도 안 받아본 민간인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깎아 들어도 한양과 수도권 인근에만 최소 1만 여명의 직업군인들이 상주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다 수도권 병력보다 질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숫자는 오히려 더 많은 삼남 지방의 병력들. 난리가 나면 지방의 향림과 사림 등 양반층이 주도해서 모집하는 의병들까지 고려하면 홍경래의 반군과 그들이 상대해야 할 관군과의 격차는 거의 1대 100 이상으로 벌어진다. 더군다나 유교적 질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당시에 홍경래의 반군은 앞선 인조반정이나 중종반정처럼 군주를 바꾸자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라 자체를 갈아치워 버리자'는 역성혁명이었기에, 여기에 동조해줄 기득권 세력은 전무했다. 처음 궐기한 서북 지방에서도 동조해줄 기득권은 이전부터 중앙정부의 차별과 무관심으로 인해 불만이 있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홍경래군이 조선 지방군을 지방군 '따위'라고 무시할 정도로 정예인 것도 아니었다. 봉기 초반에는 관청와 군의 내통자를 적극 활용하고 겁먹은 수령들이 항복하거나 도망치면서 승승장구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안주와 의주는 공격하지도 못하고 지방군에게 패퇴했다. 반란을 진압한 것을 한양에서 보낸 순무영이었지만, 반란군의 진격을 막고 정주성으로 밀어넣으며 빼앗긴 고을을 탈환한 것은 평안도 지방군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실패들을 한 밑바탕으로는 홍경래와 그 수뇌부들의 태생적 한계가 많이 거론된다. 홍경래를 포함하여 우군칙, 김사용, 홍총각, 이희저, 김창시 등 수뇌부들 중에선 군사를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록 홍경래의 카리스마가 대단하고, 홍총각과 김사용의 무예가 대단하다고 해도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것이지 군사를 잘 지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수많은 병서를 읽어 온갖 병법에 통달하였다고 하지만, 실전경험 없이 병서만 많이 읽은 이들이 막상 실제 전투에 돌입하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홍경래군 지휘부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실전경험은 단순히 실제로 싸움을 해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실전경험이라면 홍경래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조선 중앙군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군사 교리와 이론을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훈련에서 실제로 그 교리대로 행동해 보고, 그 과정에서 책에 나오지 않는 여러 시행착오들을 겪어 보면서 나중에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를 바탕으로 변수에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56] 홍경래군 지휘부는 이론만큼은 숙달되었을지 몰라도, 대단위 병력을 가지고 진법에 따라 대형을 펼치고 기동해보는 등의 훈련 경험은 거의 쌓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반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홍경래가 광산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군사 훈련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조선처럼 중앙정부가 지방을 완벽히 통제하는 국가에서 총칼로 무장한 장정들을 데리고 대규모 훈련을 자행하면 반란하겠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이 훈련이라는 것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실제로 처음 거병했을 때 병력 수가 1천여 명인데, 이 정도면 연대 하나 정도밖에 안 된다. 조선군 최정예부대인 훈련도감만 5~6,000여 명에 달하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다복동에서 거병 이후 각 고을을 점령하면서 고을에 있던 무관들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 부각됐다. 상단에 서술된 김대린이 이러한 무관 출신인데, 무관들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지금 공격을 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음에도 우군칙이나 김사용 같이 글로만 병서를 배운 이들이 반발하니 갈등이 심해졌고, 결국 내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5. 영향

홍경래의 난은 비록 규모면에서는 40여개의 성이 모두 호응해 3년동안 지속된 조위총의 난이나 내전으로까지 보이는 김헌창의 난보다 작았지만, 사회적인 영향력은 꽤나 대단했다.

진압된 이후에도 홍경래는 백성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 봉기를 선동하였다. 그리고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언서 정감록을 전면에 내걸고 나선 최초의 농민 봉기였다. 그래서 난 이후 홍경래와 함께 수도 없이 돈 것이 정진인설로 대표되는 정감록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서북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1813년에 제주도 목사로 김수기가 부임했는데 이 인물은 제주 특산품인 전복을 뇌물로 한양의 대신들에게 바치기 위해 해녀들한테 전복을 잡아오라고 닦달하며 해녀들을 발로 차서 물속에 빠뜨리는 등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김수기는 풍랑이 심해서 전복을 잡지 못하고 있는 해녀들에게 "당장 전복을 잡아오라"고 강요했고, 해녀들이 무리라고 거부하자 해녀를 발로 차서 물속에 빠뜨린 것이다.

이에 분노한 제주 백성들이 홍경래의 난 소식을 듣고는 존경받는 토착 호족인 양제해[57]를 목사로 앉히기 위해 양제해의 주도 하에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 감영의 병력이 소수였기에 수백명이나 되는 제주 백성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김수기는 백성들한테 끌려나왔다.

양제해는 끌려나와서 겁에 질려있는 김수기에게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자 백성들을 해산시키고 물러났다. 하지만 김수기는 약속을 어기고 즉시 양제해를 체포하였고, 조정에 양제해를 처벌해달라는 보고를 올렸다. 목사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이재수를 찰리사 겸 위유사로 삼고 제주에 파견,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주모자 중 양제해는 탈옥했다가 다시 붙잡혀 목사의 문초를 받다 옥사하고 고덕호와 양제해의 아들 일회는 참형에 처해졌고, 강필방·김익강·양인복·김창서 등은 절도에 안치되었다. 또한, 양일신·양일빈 등 6인은 도배에 처했으며, 나머지 35인은 보석 또는 방면되었다.

위유사 이재수는 이 사건과 관련, 제주도의 실정을 일일이 조사해 이폐조목과 함께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도 실정 사실을 인정하고 도민선무에 힘쓰게 하는 한편, 탐욕과 불법으로 민원을 샀던 전 목사 이현택을 체포, 도배에 처하였다. 제주도민에겐 그나마 다행히도, 김수기의 후임 목사인 허명은 해녀들이 내는 일종의 조합비인 수세를 폐지하고 채무를 탕감해주는 등의 선정을 베풀어서 민심을 다잡았다고.

1817년에는 김맹억의 집에 안유겸, 채수영, 김계호, 박충준, 신성문이 모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고 보부상으로 위장하여 각지에 '홍경래 대원수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충청도 전라도부터 공격하기로 거사를 정했는데 박충준이 갑자기 변절해서 고변하는 바람에 난은 실패로 끝나고 공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조정에서는 충청도를 '공충도'로, 충주목을 충주현으로 당분간 깎아부르도록 했다.

심지어 가짜 홍경래 사건도 있었다. 평안북도 선천에 학승이라는 땡중이 살고 있었는데, 이 인물은 검학산을 중심으로 "홍경래가 살아있다"는 헛소문을 조금씩 퍼뜨렸다. 또한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나는 죽었다고 알려졌던 홍경래이며, 사실은 죽지 않았고 산에 숨어 도술을 닦았다"는 소문도 함께 퍼뜨렸다.

그렇게 여론이 술렁이자 일단 몸을 숨겨 완급을 조절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회산의 부자인 김진서를 속임수로 현혹시켜 수하로 삼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붙잡힌 학승은 돈을 모으기 위해 홍경래를 사칭했음이 드러나 참수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고, 김진서는 선처를 받아 귀양가는 정도로 그쳤다. 가짜이긴 했지만 조정에서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부임하는 수령들에게 회산 지방을 잘 다스리라는 명을 내렸다.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8. 같이 보기



[1] 양서대란이라고도 한다. 양서지역 : 평안도(관서)와 황해도(해서)라는 뜻. [2] 태양력으로는 1812년 1월 31일 ~ 5월 29일. [3] 정주성 공략이 장기화되자 유효원으로 경질되었다. [4] 곽산군수. [5] 1758~1812. 의주 의병장 [6] 천수답 지역에서 봄에는 물을 대지 않아 밭처럼 경작하고, 여름에 비가 오면 물을 채워 재배하는 방식. [7] 서북이라는 표현은 평안도뿐만 아니라 함경도, 황해도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때의 서북은 방위상 서북쪽이 아니라 서+북부. [8] 양반의 명백한 정의는 문반 및 무반 그리고 그들의 3대 자손까지로, 오늘날로 치면 공무원과 군인이다. 물론 광의의 의미로는 지배계층이므로 오늘날에는 정치인, 재계 등도 포함되겠지만. [9] 웅진출판사의 "만화로 보는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희저가 이 매향에 말려들어서 중앙 정부에 반감을 품은 것으로 묘사했다. 돈만 주면 양반으로 만들어 준다길래 거액을 투자했는데 '천민이 양반이 되려 한다'며 반대가 심했고, 그 와중에 향임 등록비는 돌려줄 수 없다며 푼돈만 돌아온 것이다. 이에 이희저가 홍경래-우군칙에게 하소연하자 홍경래가 '수령 한두 놈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왕조가 바뀌면 모를까'라며 포섭한다. [10] 굶주린 백성 [11] 탐보라 화산 항목을 참조. 1809년에 전세계적인 이상 기후 현상(한랭화 효과)이 발생했는데, 화산 폭발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12] 거상들에 의해서 1~3냥 정도의 선금을 받은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13] 사마시는 과거 시험 중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생원진사시나 소과라고도 한다. [14] 또는 홍봉의(洪鳳儀), 홍이팔(洪二八)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홍총각은 말 그대로 총각의 음차이고, 홍봉의는 나중에 가져다 붙인 이름이 아닐까 추정된다. [15] 조선시대에 완전히 하급 무관 양성소 취급을 했던 서북 출신답게 홍경래, 김사용 등 지도부는 상당히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모사로 취급받는 우군칙마저 칼을 빼드는 모습이 기록에 남아있다. 이제초와 홍총각은 아예 선봉장으로서 적진을 휘젓고 다녔다. 지도부에서 완전한 문관은 진사 출신인 김창시 정도. 여기에 더해서 역사 출신들은 농민층과의 연결고리로서도 그리고 일선 지휘관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야말로 서북 지방민들은 전투민족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16] 반란군 총사령관 겸 남진군 사령관. [17] 가산 점령 이후 합류. [18] 이 격문은 내신, 수능을 불문하고 홍경래의 난을 문제로 낼 때 단골로 발췌 및 요약되어 나오는 사료 중 하나이다. [19] 용골산성에서 분전했던 의병장이다. [20]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당대에는 상당히 명성이 높았다. 인조 대에는 성균관 사업(정 4품)에 제수되었고 상당히 후대인 고종 대에 이조 판서로 추증(1883년)되기도 했다. [21]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22] 논어에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지. 썩은 흙으로는 담장을 쌓을 수 없어(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한 마디로 재활용도 안 되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구제불능의 잉여인간이라는 뜻의 욕설이다. [23] 당시 외척으로 안동 김씨 급은 아니지만 권세가 셌던 반남 박씨들을 말한다. [24] 혜성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807년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관측 기록이 자주 보인다. [25] 정감록 사상을 이용한 것으로, 홍경래는 정시수 또는 정제민이라는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의 명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정진인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따위는 그냥 밟아버릴 수 있지만, 자비로우신 분이라 대신 대리로 자신(홍경래)이 나섰다. 그리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이용하기 위해 명나라 유민이 함께 한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26] 당연히 실제 반군의 수와 질을 뻥튀기한 과장이다. 그냥 5,000명도 몰래 양성하기엔 대단한 규모인데, 철기(鐵騎)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27] 이무경의 형 이무실(李茂實)은 반란군에게 붙잡혔다가 야음을 틈타 평안 병영으로 도망쳤지만, 이미 반군에 가담한 자가 되돌아와 동정을 살피려는 모습을 괘씸하게 여긴 평안병사 이해우가 목을 벤 뒤 효수했다. [28] 정주성 전투 도중인 1812년 2월 19일 교체되었다. [29] 전임자 한상묵(韓象黙)은 금광 채굴을 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왜냐하면 조정에서 금광의 인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30] 전임자 이영식은 고을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정경행도 반란군에 가담하여 용천부사, 청북 도지휘사 등 몇몇 직함을 받고 군량을 대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했다. 정경행은 양책참에 있는 북진군의 본진에 있다가 1812년 1월 중순 의주부의 관군과 의병이 북진군의 잔당을 소탕할 때 관군 장교 최치륜(崔致倫)에게 붙잡혔고,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1812년 2월 6일 다른 가담자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31] 전임자 신재명(申在明)은 휴가 보내러 한양으로 내려왔다가 난이 터지자 병을 핑계대며 임지로 복귀하려 들지 않았기에 교체되었다. [32] 김처한이 순무사의 장관이 되어 출동하게 되자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33] 본래 정주목사로 임명되었지만 내천(內遷)한 전임자 오연상을 대신하여 영변부사를 맡았다. [34] 정주성 전투 도중인 2월 19일 교체되었다. [35] 반란을 진압할 능력이 있는 무신을 임명하라는 비변사의 권유로 교체되었다. 신대영은 평안병사, 삼도수군통제사, 포도대장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36] 난이 일어났을 때 뛰어난 대응으로 백성들의 호평을 얻었기에 백성들이 유임을 청하자 교체된 지 몇 주 만에 복직했다. [37] 신대영과 마찬가지로 반란을 진압할 능력이 있는 무신을 임명하라는 비변사의 권유로 교체되었다. [38] 초는 조선군의 편제단위중 하나로 지금의 중대와 비슷하다. [39] 김처한은 이후 의금부로 옮겨졌다가 1812년 6월 9일 청도군으로 유배되었다. [40] 이 중 김국주, 김국신, 이명전은 용천 출신의 군관이고, 김이국은 선천 사람이며, 박정용은 점쟁이다. [41] 사후 제경욱은 공을 인정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 추증되었고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2] 이 두 사람은 파직을 넘어 각각 경주시 순창으로 유배당했지만 난이 진압되고 몇 주 뒤인 5월 5일 풀려났다. [43] 윤제(輪梯)라고도 한다. [44] 화기를 다루는 조선군의 특수 병종. [45] 유효원은 영정조 시기 무관 고위직을 역임한 류진항의 아들로 조선 후기 무반 가문을 대표하는 진주 류씨의 일원이다. 난 이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및 삼도수군통제사, 좌/우포도대장을 맡았고, 사후 병조판서 추증 및 시호 무숙(武肅)을 받았다. [46] 상술했듯이 원래 진압군 총사령관인 양서순무사는 이요헌이었지만 후방인 한양에 남아 순무중군 박기풍과 류효원에게 전투를 일임한 상태였다. [47] 2월 10일 작업을 감독하던 손태영이 지붕 장식의 철판이 너무 얇다고 하자 사람들은 철판 두께가 2촌이 넘는데 어떻게 총탄을 뚫을 수 있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손태영이 포수를 불러 총을 쏘게 하자 총탄이 철판을 쉽게 뚫어서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48] 서정일기는 이때 총에 맞은 김사용이 며칠 뒤에 죽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정주성이 함락된 날 총에 맞아 죽었다. [49] 서정일기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이 김완근(金完根)이라고 하고, 진중일기에서는 최완근(崔宛根)이라고 한다. [50] 이후 한맹린은 복수를 위해 관군에 가담하였고 4월 20일 아버지를 찌른 자의 목을 베어 복수를 이루었다. 한호운은 참판에 추증되었다. [51] 기생을 끼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성을 순찰하면서 총을 쏘거나, 서장대에 모여 매일 음악을 연주하거나, 기생을 말에 태워 음악과 함께 성을 돌게 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열악한 사정을 숨겼다. [52] 성벽을 터트리는 공성법은 오스만을 포함한 유럽에선 화학기술이 발전해 화약이 흔했고 실전사례도 있어서 자주 이용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최초의 시도였기에 폭약을 터뜨리기 전에는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사실 조선의 화약 생산량은 18세기 초에야 폭증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이런 전술을 시도도 못했으므로 당연히 효과를 의문시할 수밖에 없었다. [53] 관아를 불태우지 않은 것이 기존 유교질서에 묶여있던 한계를 보여준다는 주장이 있지만 너무 현대적인 관점이다. [54] 규모있는 도시 [55] 대표적인 예시로 북한과 아프리카 일대의 군벌들이 있다. [56] 대한민국 국군의 장교들 역시 베트남 전쟁 이후로 큰 규모의 실전경험은 딱히 없지만, 훈련을 통해 실제 상황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 수 있으며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대략적인 감을 익혀 나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57] 당시 제주 지방에는 고, 양, 부 라는 세 성씨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셋은 본인들조차 모를 정도로 오래 이어진 토착 호족이었다. [58] 조문형 또한 반란에 참가한 죄를 물어 3월 19일 목이 베였다. [59] 이 때 죽인 사람의 수가 41명에 달한다고 한다. [60] 사형이 아닌 것이 의외이긴 하나 조선시대에는 강상죄나 역모가 아닌 이상 사형을 내리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강한 유배형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태천에서 장흥까지 직선거리로 약 600km 정도 되는걸 감안하면 처벌 자체는 상당히 강하게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61] 좀 더 정확히는 홍경래의 난과 김병연의 방랑 모두가 조선왕조의 약세와 안동 김씨 세도 정치, 그로 인한 사회체제의 붕괴라는 동일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62] 다만 이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출판사가 명의만 갖다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