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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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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지역과 성별 3. 어형4. 등급5. 위험도6. 역사7. 복장
7.1. 물옷7.2. 고무옷
8. 위기9. 기타10. 대중매체에서의 해녀11. 이 직업을 가진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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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녀()는 제주도, 부산 및 남해 연안 또는 동해 연안, 드물게는 일본, 동남아시아, 러시아 등에서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들을 뜻하는 말이다.

한국표준직업분류에 의한 직업코드가 부여 되어 있다. 코드 번호는 "63023".

2. 지역과 성별

보통 해녀하면 제주도를 많이 떠올리지만, 남해연안의 이나 수심이 깊은 동해연안의 어촌에도 제주도 못지 않게 해녀가 많다.[1] 다만 겨울에도 어느정도 따듯한 수온을 가지는 제주도와는 달리, 동해는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 수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조업의 어려움이 훨씬 더하다. 다만 제주 이외 한국 다른 지역의 해녀도 대부분 제주 출신이 예전에 이주한 케이스가 많다. 부산의 동삼중리 해녀촌 같은 곳에 가보면 사투리가 제주도 사투리인 것을 들을 수 있다.

해녀하면 여성이지만, 현대에도 남자 잠수부가 없지는 않다. 잠수복을 입고 수면 위에서 기체를 공급받으며 바다를 누비는 남자 잠수부는 머구리라고 부르는데[2] 해녀와 같이 물질하는 남자 잠수부가 없어서[3] 아예 잠수부 전체를 퉁쳐서 부르는 것이다. 'MBC스페셜 북에서 온 머구리'이나 'SBS 스페셜 심해, 마지막 머구리' 같은 프로그램에서 자세히 다룬다. 어촌에 산다면 흔하게 볼 수 있다.


동해안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의 어부들. 2015년 방영분이다. 22분경에 문어를 잡는 해녀가, 28분경에 상술한 재래식 잠수복을 입고 비단 멍게를 잡는 머구리가 나온다.

3. 어형

제주도에선 '잠녀'나 제주도 방언인 '좀녀(ᄌᆞᆷ녀) 또는 좀녜(ᄌᆞᆷ녜) '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둘 다 쓴다. 잠(潛)자의 제주식 발음이 아래아가 들어가 "ᄌᆞᆷ"이다. '해녀'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해 1980년대 이후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 제주 어촌에서는 잘 쓰지 않고 있으며 채취작업 하러 나가는 것은 물질하러 간다고 표현한다.

4. 등급

오랫동안 활동한 해녀는 인정 받으며, 이로 인해 해녀들 사이에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한다.
"똑같아 보이는 해녀들 사이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요. 상군, 중군, 하군이죠. 한번 잠수해 2분가량 바닷속에 머무르는 상군은 수심 15m 이상의 바다에서 작업하는 베테랑 해녀이고, 중군은 수심 8~10m, 하군은 5~7m에서 작업해요. 물론 수심이 깊을수록 비싼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어요. 해산물이 많을 때 상군은 한달에 100만원, 중군은 60만원, 하군은 30만원 정도 벌어요. 이 계급은 노력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이 돼요."[4][5]

참고로 지역마다 등급이 조금씩 달라서 최하급인 '똥군', 최상급인 '대상군'도 있다고 한다. '똥군'은 보통 이제 막 물질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고 한다.

5. 위험도

낭만적인 인상이 있지만 사실 해녀의 직업 특성상 잠수하는 시간이 최대 7시간 정도로 꽤 길기 때문에 감압병, 이명, 저체온증상당히 위험한 극한직업이다. 전직 해녀의 증언에 의하면 물질을 하다 보면 바닥에서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정신이 아득할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6] 이때 정신줄 놓으면 바로 죽는다. 과장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욕심을 부리거나 아차하는 순간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해녀들이 내쉬는 숨비소리를 '생과 사의 경계'라고 표현하거나 '생애 최후의 날숨'이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해녀들이 부르는 민요에서 조차 '저승길 왔다 갔다'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워낙 힘든 직업이다 보니 이 태어나면 해녀짓을 시킬 수 없으니 차라리 죽도록 엎어버린다는 민요마저 있을 정도. 또한 해녀는 불턱에서 쉰다.

지구 온난화로 상어에게 공격받아 목숨을 잃는 경우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1981년 충남 보령군[7]에서 해녀가 상어에게 물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일도 일어났다.[8]

6. 역사

남자가 아닌 여자들이 물질을 맡게 된 데에는 신체적인 유리함 이외에도 고통의 역사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해녀와 비슷하게 프리 다이빙으로 작업하는 남자 잠수부는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漢), 복작간(鰒作干) 등으로 불렀다. 포작(鮑作)이라는 업에 종사하며 진상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는 ' 보자기'(혹은 보재기)라고 부르는 것을 한자음을 빌려 포작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부면서 동시에 잠수사 역할을 하였으므로 신량역천(身良役賤)이다. 포작인은 깊은 수심에서 전복, 소라, 고둥 등을 전문적으로 채집하고, 해녀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해조류를 중심으로 채집하여 역할이 비교적 구분되어 있었다.

어부 잠수부 수군 격군[9]의 역할을 겸하는 포작인[10]은 일이 힘들고, 공물로 바쳐야할 전복 등의 할당량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다 보니[11]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도주해 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12] 조선 정부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안하고 조천(朝天)과 별도(別刀)의 두 포구만 개방하고 나머지는 폐쇄해 버리는 꼼수를 썼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제주도민은 더욱 적극적으로 도주를 꾀하는 역효과만 나버렸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꼼수를 강화해 아예 출륙금지령을 내리고 어선 건조마저 금지시키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제주도에 묶어두려 애를 썼다. 진상해야 할 공물은 많은데 남은 인원으로는 할당량(덤으로 관리들이 부정부패할 분량도 좀 많이 추가하고)이 도저히 감당이 안되자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또 꼼수를 부렸다. 포작의 역을 아예 숫자가 많은 해녀에게 전부 떠넘겨 버렸다. 해녀 입장에선 날벼락 맞은 셈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포작간이라는 직업은 아예 없어져 잠수부는 해녀만 남게 되었다.

잠수병, 이명 등의 직업병을 달고 살아야 되는 어렵고 위험한 직업이라, 정조가 해녀들 이야기를 듣고 그 좋아하던 전복을 끊었다는 일화도 있다.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내내 제주 목사로 부임해서 순찰 나갔다가 한 겨울에 온 동네 여자들이 알몸으로 바다에 우르르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고 전복을 끊었다는 경우도 여럿 있다. 허나 정조 이후로 공물부담은 오히려 늘어 민란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결정판이 바로 신축민란이었다.

19세기에 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을 통해 유럽에도 그 존재가 전해졌다.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과장이 섞여 있었기에 '나체로 자유롭게 바다를 가르며 사는 여인들'이라는 편견 가득한 시각으로 소개되었는데, 이 때문에 해녀에 대해 이슬람 제국 하렘에 대해 그랬듯이 에로틱한 환상을 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동서양 인어 전설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주장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해녀들은 크게 시달렸는데 일본에서 잠수기 어업자들이 와서 해산물을 쓸어가버렸기 때문. 해녀들과 달리 이들은 물에 오랫동안 잠수하여 해산물들을 닥치는 대로 채취해댔다.

7. 복장

지금이야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신고 물질을 하지만 옛날에는 알몸인 상태로 바닷속으로 들어갔으며, 1105년( 고려 숙종 10) 탐라군(耽羅郡)의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고, 일본에서는 개화 이후인 비교적 최근까지 대부분 달랑 팬티 하나만 걸치거나 전라(全裸)의 상태로 물질을 했었다.

실제로도 방수가 되는 잠수복이 아닌 이상에야 옷을 걸치고 바다에서 활동하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육지에서의 옷의 기능인 체온유지를 전혀 할 수 없는데다, 너풀거리고 몸에 달라붙어 물속에서의 움직임도 제한된다. 거기에 대부분의 섬유들은 물보다 비중이 높아, 물에 젖으면 무거워 떠오르기도 힘들다. 그리고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육지에서 활동하면 옷이 무거워 쉽게 피로해지고 물이 증발하면서 체온도 빼앗겨 감기에 걸리거나 저체온증에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바닷물이 마르면 소금이 맺히기 때문에 빨래를 한번 더 해야 하는 단점까지 있으니 바다에서 활동하기에는 맨몸이 훨씬 효율적이다.

7.1. 물옷

파일:물옷.jpg
위의 복장은 '소중기
(또는 물소중이)'와 '물적삼'으로, 조선 후기의 해녀복이다.
고무옷이 나오기 전까지 착용했던 전통 해녀복으로, 상기했듯 원래 해녀는 거의 알몸으로 물질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이를 금지한다는 지시도 여러 차례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물옷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에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이 보이며, 이로 보아 최소 18세기 초부터 물옷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옷은 크게 물소중이와 물적삼으로 나뉜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해녀복을 고안하게 한 사람이 당시의 제주목사 이형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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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중이는 상반신까지 가릴 수 있도록 원피스 형태로 되어있는 반바지로서, 제주도 여성들의 전통적인 속옷으로도 널리 쓰였다. 본래 상반신을 가리지 않는 형태였다가 차차 길어져 상체까지 가리게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 개 혹은 두 개의 어깨끈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켜 준다. 매듭단추로 여미는 옆트임이 되어 있으며, 입고 벗기 편하게 디자인 되어있다. 하얀색, 검정색 두 종류가 있는데, 원래는 속옷처럼 흰색을 주로 입었으나, 얼룩이나 변색 등의 문제로 검은 물을 들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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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적삼은 물소중이와 함께 착용하는 상의로서, 보온이나 햇볕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앞섶을 매듭단추로 여미는 형태이며, 소맷부리와 도련에는 끈이나 고무줄을 달아 조일 수 있게 되어 있다. 1930년대 서양 블라우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비교적 최근의 의복으로서, 항목 상단 탐나는도다의 주인공 장버진이 입은 물옷은 하의-흰색, 상의-검정색이나, 본래 물적삼은 흰색을 주로 만들며 소중이는 흰색, 검정색 두 종류가 있다. 퓨전 사극의 극적 허용으로 볼 수 있을 듯.

이외에도 머리에 두르는 물수건( 두건)이나 머리와 목덜미 전체를 덮는 모자인 까부리 등이 있다.

7.2. 고무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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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매우 유사한 디자인과 형태를 지니고 있고, 그 용도도 대동소이하다. 재질은 안감은 흔히 잠수복에 쓰이는 네오프린 소재며, 겉부분에는 고무를 댄다.

흔히 그냥 가게에서 사이즈에 맞게 사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전문 장인이 직접 각 해녀의 신체치수나 취향에 맞게 맞춤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가격대도 2013년 기준 30~35만원으로 꽤 높은 편이다.

본래 1970년대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이 그대로 한국으로 건너와 퍼진 것으로, 최초 보급 당시 가격은 30,000원 정도로 역시 만만찮은 가격이었기에 각 마을마다 고무옷을 사용하는 해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보온성이나, 내수압 능력등 여러모로 물옷을 입고 물질하는 것에 비해 작업능률이 매우 높아져서[13] 순식간에 보급되었다. 이는 해녀들의 안정적인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보급 초기에는 해녀복의 비싼 가격과, 요상한 생김새에 대한 반감. 해녀복을 입은 해녀와 그렇지 않은 해녀들의 작업능률의 격차로 인한 반발이 있었고, 보급이 널리 이루어진 뒤에도 피부질환이나, 장시간 잠수로 인한 두통, 이명, 요통 등 해녀들의 직업병이 부각되는 단점을 가지고 왔고, 이는 현대에 들어서도 변함없이 발생하고 지적되는 문제점이다. 실제로 해녀들은 진통제 등을 달고 사는 경우가 많다. 물옷에 비해 입고 벗기도 불편해서 착용하거나 벗을 때 서로 도와줘야 한다.

물갈퀴와 특유의 수경이 한 세트로 취급된다.

8. 위기

스쿠버 다이버들과 해녀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물론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고 싸우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일부 무개념 스쿠버 다이버들이 마을 공동어장으로 돼있는 바다에 자꾸 쳐들어가서 해산물을 멋대로 채취해가는게 문제이다. 수산업법 상 어업인이 아닌 스쿠버 다이버들이 스쿠버 장비를 사용해 어업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은 수산자원관리법과 그 시행령에 저촉되는 불법행위이다.[14]

해녀들이 조업하는 곳은 어업허가권을 내준 지역이고 어업허가권이 없는 다이버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건 절취행위이며 해녀들이 신고할 경우 수사 착수도 가능하지만 * 문제는 해녀들이 이를 신고하는 게 영 쉽지 않아서 난관이다. 야밤에 와서 쓸어가면 그냥 당하는 것이다. 밤이 되면 그냥 철수해야 하는 해녀와 달리 스쿠버 다이버들은 산소통과 라이트 등, 장비 면에서 우월하기 때문.

해삼, 전복등은 해녀들이 직접 종묘를 하며 어장을 키웠기 때문에 권리가 있는 것이 맞다. 당연한게 아무리 숫자가 적다고 해도 해녀들이 먹고살 정도의 소득을 올릴 양의 해산물을 종묘를 뿌려 키우지도 않고 마냥 채취만 하면 해산물의 씨가 마른다.

무분별한 해루질을 하는 관광객들과의 마찰도 문제가 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루질 참조.

9. 기타

10. 대중매체에서의 해녀

11. 이 직업을 가진 캐릭터



[1]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어머니가 강원도 해녀였다. [2] 각종 커뮤니티 등에서는 머구리의 어원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개구리를 뜻하는 방언/옛말인 '머구리'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자맥질, 무허가 업자를 뜻하는 일본어 '潜り(もぐり(모구리)'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정확한 어원이라기보다는 개인 작성자의 일반적인 견해이고 명확한 근거는 없다. 국립국어원 '머구리'라는 단어가 개구리의 방언으로 국내의 상당수 지역에서 사용된다고 한다. 섣불리 일본어 잔재론을 제기하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3] 해녀와 같이 물질하는 남자 잠수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극소수 존재한다. 이들은 '해남'이라고 부른다 부부가 같이 물질하는 해남 해녀 부부도 있다. [4] 재능을 타고나야만 한다는 뜻이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체적인 한계로 인해 상군이었던 해녀가 중군이 되고 중군이었던 해녀가 하군이 되는 경우도 있다. [5] 숨을 오래 참고 수압에 따른 귀의 압력 평형을 잘 할 수 있어야 깊은 수심까지 조업할 수 있다. [6] 프리 다이빙을 할 때 건강여부에 관계없이 잠수 후 해면으로 올라올 때 있을 수 있는 현상이고, 그래서 프리다이빙을 할 때 제일 위험한 순간이라고 한다. 이것 때문에 요즘 프리다이빙을 배우면 혼자서는 절대 하지 말고, 두 명 이상이서 하되, 자맥질을 번갈아서 하라고 배운다. 즉, 한명이 자맥질을 하고 있을때 다른 한명은 해면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다. 이러면 물 밑에서 올라와서 정신을 잃더라도 구해줄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7] 보령시 [8] 다만 수중 레포츠를 즐기거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상어에 의한 위험은 전체(독을 가진 수중생물, 강한 조류 등)에 비하면 무시할 만한 수준이다. 애초에 한반도 해역에서 사람이 경계할 만한 크기의 상어를 가까이서 만나기도 극히 어렵거니와 그중에서 공격성을 가진 개체도 극소수다. [9] 노를 젓는 병사를 말한다. 배의 노를 젓는 건 무척이나 고되어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되기도 한다. 자세히는 문서의 첫번째 문단을 참조. [10] 조선 시대 제주도는 일 년에 백 명이 넘게 죽어나갈 정도로 남성 사망율이 워낙 높아 다른 지역과 달리 일부다처가 매우 흔했다고 하지만 포작인은 혼인도 못하고 혼자 살다 늙어죽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냐면 조선시대 내내 73~75라는 충격적인 성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도 포작인은 기피대상이라 결혼을 영 못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조선 세종 대의 제주 전체 인구가 약 63,000명이었는데 2배로 증가하는데 500년, 즉 조선시대가 끝나도록 120,000명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11] 다른 지역은 대동법(大同法)을 통해 공물부담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제주도는 오히려 반대로 공물부담이 갈수록 체계적으로 변한다. 일 년에 얼마에서 한 달에 전복 종류별로 몇 개씩 하는 식이었다. [12] 유민이 증가하자 조선 정부에선 추쇄령을 자주 내렸지만 해당지역 지방관은 태업으로 대응했다. 인구증가도 인구증가지만 포작간은 어업 전문가라 많은 양의 해산물 수입이 보장되고 격군으로 삼을 경우 베테랑 병사를 손쉽게 확보하는 것이니 지방관 입장에선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인 포작인을 빼앗기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유민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려 했지 돌려보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결국 타협안으로 이미 정착한 유민은 제외하고 이후 발생하는 유민만 돌려보내기로 했지만 결과는 예상하는 대로 였다. [13] 겨울에도 찬 바닷물 속에서 물질해도 오래 버틸 수 있었고, 본래 하루 30분에서 한시간 정도만 물질이 가능하던 것이 5시간으로 뻥튀기됐고, 작업 반경도 10m에서 13m 가량으로 깊어졌다. [14] 엄연한 어업인인 해녀들도 스쿠버 장비를 메는 것은 불법이다. 이는 해녀들이 종사하는 수산업법 상 마을어업 면허에 보통 어촌계의 어장관리규약에 따라 채취 방법에서의 제한사항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15] 해당 방영분에서 나온 해녀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법적으로 금지된 것도 있지만 수산자원 보호 차원에서도 스쿠버 조업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잠수하는 중간 위에 올라가면서 숨을 쉬는 등 잠수할 줄 아는 분들이라 [16] 강원도 쪽은 남자 잠수부를 '머구리'라고 부른다. 해녀의 남성 버전이 없는 것이 아니다. [17] 공교롭게도 이곳도 섬이다. 전국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오직 섬으로만 구성된 곳이다. 물론 제주도와 달리 영도는 부산 본토와 영도대교, 부산대교, 부산항대교, 남항대교로 이어져 있다. [18] 서울특별시 제주특별자치도를 제외한 제주은행의 유일한 지점이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있다. [19] 나탈리(나탈리 콜)/머라이어( 머라이어 캐리)/재니스( 재니스 조플린)/올리비아( 올리비아 뉴튼 존)/케이트( 케이트 부시)/사라( 사라 본)/데비( 데비 깁슨)/린다( 린다 론스태드) [20] 2015년 8월에 현직 해녀를 포함한 주민들이 '여성의 성적 어필만 담고 해녀의 신앙심을 짓밟는 캐릭터'라며 시에 철회를 요청하였다. 이에 시에서는 단순한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철회를 거부했다. 그러나 해녀들이 지속적으로 강하게 반대를 하자, 시에서 전면 재검토를 하였고, 작가도 부담을 느꼈는지 해녀의 의견을 수용, 결국 동년 11월 5일 시마 시는 모에 캐릭터 아오시마 메구를 공식 철회하였고, 이후 비공인으로 전환하였다. [21] 바다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망간단괴가 가라앉아 있다. 이 때문에 해녀를 이미지화 시킨 듯. [22] 노리카의 어머니는 해녀이고 노리카 또한 엄마를 도와 해녀 수행중이라고 한다. [23] 제주도해녀박물관 콜라보 만화는 아니라고 한다. [24] 어렸을 적에 해녀로 일한 적이 있다. [25] 조삼달 엄마 [26] 조용필 엄마 [27] 왕경태 엄마 [28] 차은우 엄마 [29] 부상도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