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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7:06:21

천자총통

파일:조선군 좌독기_White.svg
조선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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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천자총통과 대장군전.png
대장군전이 장전된 천자총통의 복제품.[1]
국립진주박물관 옥외전시장 #
1. 개요2. 성능3. 구조 및 운용법
3.1. 발사체
4. 실제 운용법
4.1. 함선에서의 운용4.2. 장거리 화력4.3. 근접전 화력4.4. 평가: 종합적 무기 체계
5. 임진왜란 이후6. 컬버린과의 비교
6.1. 카로네이드 포6.2. 화약의 양6.3. 컬버린의 크기6.4. 해상전6.5. 홍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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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 조선에서 가장 규격이 큰 재래식 화포( 총통). 총 길이 1.3m, 통신 길이 1.16m, 구경 128mm로 조선의 대형 화포에 해당하는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가운데 가장 큰 화포였다. 화포의 이름인 천, 지, 현, 황(天, 地, 玄, 黃) 자체가 천자문식 넘버링이다. 즉 한자 자체의 뜻을 고려했다기보다 타입 A, B, C, D 식으로 이름을 지은 것.

총통들은 그 양식에 따라 발사 방식이나 장전 방식이 달랐지만, '-자' 자 돌림의 총통류는 크기만 다를 뿐 발사, 장전 양식은 모두 같았다. 또한, 본 항목에서는 천자총통뿐만 아니라, 대형 화기로 분류되는 현자총통 이상급의 총통을 모두 다룬다.

2. 성능

청동 합금을 사용해서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2] 최대 사거리는 약 960m 정도로 추정되고, 당시 무기들과 비교했을 시 총통류의 유효한 살상 사거리는 대략 200-500m 정도로 추정된다. 해군사관학교의 시험에서는 현대의 화약을 사용해 옛날의 기준량의 1/3을 사용해서[3] 대장군전을 발사했는데, 400m를 날아가 화강암 석축 사이의 작은 틈바구니를 비집고 80 cm 가까이 박혀버렸다.

또한, 여러 드라마 탓에 "조선의 주력 화포"[4]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지만, 천자총통급은 주력이 아니었다. 천자총통은 화차처럼 그 위력에 비해 화약 낭비가 심하다는 소리가 많았다.[5] 따라서 현자총통과 다른 화약 병기를 주력으로 보급했다.[6] 백사집과 정만록에서도 천자총통은 화약을 많이 소모한다고 지적했고, 이순신이 대포를 만들 청동을 요구하는 장계에서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수량만 적었다. 심지어 개전 1년 후부터 천자총통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학계에서는 지자, 현자를 조선군의 주력 무기라 추정한다. 이것은 비단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인식이었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거대한 화포가 낭비라고 생각했다. 유럽 문화권 또한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대구경의 화포들을 주로 생산하였으나, 점차 대구경 화포들은 공성전을 위한 특별한 무기로 소수만 생산하고, 소구경포의 생산에 주력하게 된다.[7]

3. 구조 및 운용법


총통들은 크게 화약을 담는 "격실" 약실 부분과 탄체 부분 사이의 가스 누출을 방지하는 격목을 끼우는 "격목통" 포열인 "부리"로 이루어져 있다. 화약을 다져 넣는 약실 부분은 포열보다 더 두껍게 만들어졌고 윗부분에는 도화선을 끼우는 구멍이있다.

총통의 발사 순서는 1603년 한효순이 쓴 신기비결에 나와있는데, 이 순서는 천자총통에 중형 납탄환 100발을 동시에 넣고 사격하는 순서다.
  1. 세총(洗銃) - 총통 안을 쓸고 씻는다.
  2. 입약선(入藥線) - 약선혈(도화선을 넣는 구멍)에 도화선을 밀어넣는다.
  3. 하화약(下火藥) - 총구로 화약을 넣는다.
  4. 하복지(下覆紙) - 총구에 종이를 넣어 화약을 덮는다.
  5. 하송자경(下送子經) - 나무 자루로 화약과 종이를 살짝 두드려 다진다.
  6. 하목마(下木馬) - 총구에 격목을 넣는다. 목마는 격목의 중국식 이름인데, 신기비결이 중국 병서의 영향을 받은 책이라 그렇다.
  7. 하송자 용력타 지약전(下送子,用力打,至藥田) - 나무 자루로 힘껏쳐 격목을 화약 바로 앞까지 밀어넣는다.
  8. 하연자일층 하토하송자(下鉛子一層,下土子送子) - 총구에 납탄환 30여발을 넣고 흙을 넣는다.
  9. 하연자일층 하토하송자 (반복)
  10. 하연자일층 하토하송자 (반복)
  11. 하합구대연자 일장 하송자 용력타입구평총(下合口大鉛子,一杖下送子,用力打入口平銃) - 마지막으로 총구에 맞는 큰 탄환(대연자)을 넣는다. 힘으로 쳐서 총구에 평평하게 넣는다.
  12. 방포하라!

3.1. 발사체

천자총통은 일반적으로 포환 한발만을 장전하지만, 여러가지 탄을 함께 섞어서 발사할 때도 있었다. 천자총통에 쓰이는 포탄은 매우 다양한데, 대장군전 같은 대형 화살, 포환, 조란환 등 여러가지 탄종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서 위력이나 정확성을 비롯한 전반적인 쓰임새를 늘릴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해 포탄. 조선 시대에는 쇠로 만든 철환, 돌을 다듬어 만든 석환[8], 납으로 만든 연환, 철환 표면에 납을 씌운 수철연의환을 주로 사용했다. 천자총통에서 사용하는 것은 납을 씌운 수철연의환이었다. 일반적인 철환은 튼튼하고 위력적이면서도 저렴했지만, 너무 무거워서 화약 낭비가 생기고 포강을 마모시킨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수철연의환은 철환 표면에 납을 씌웠기 때문에, 포강을 심하게 마모시키지 않으면서도 포강과 밀착해서 철환보다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순수 연환은 부드러워 포강에 밀착되어 멀리 날아가기 좋지만 위력 면에선 좀 떨어지고 단가도 비싸다. 단석은 돌을 갈아 만든 것으로 단가는 매우 싸지만 역시 포강 마모가 심하고 발사 중에 깨질 수 있다.[9]
일반적으로 대형 철환이나 단석을 운용하는 방식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밀덕들을 중심으로 대장군전의 인기나 인지도가 높아진 상태이다. 아무래도 현대 미사일을 연상시키는 폭풍간지를 자랑하는 외형 때문일 듯. 실제로도 천자총통을 비롯한 지자, 현자, 황자 총통은 대형 화살을 발사하여 적 함선이나 적 시설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현재 일본에 구키 요시타카가 가져간 대장군전 실물이 남아있다. 안골포 해전 당시 어립선에 맞은 것을 기념으로 보존한 듯하다. 이 해전에서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등은 42척의 함대로 분전했으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42척의 함선을 전부 잃고 육지를 통해 도망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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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란환은 새알 크기의 철제 탄환. 수마석은 풍화 작용으로 반질반길하게 자연 연마된 작은 돌멩이들을 말한다. 둘 다 접근한 적병들에게 끼얹는 산탄 용도로 쓰였다. 비슷한 시기 서양에서도 포도탄(Grapeshot)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한 바 있고, 현대에도 전차포와 자주포 등에서 동일한 원리와 용도의 산탄포를 운용하고 있다.
천자총통에는 약 400개의 산탄을 넣고 발포했다. 해전에서도 상대 갑판에 쏴제끼며 승무원 살상을 노렸고, 그 위력은 정말 확실했다고.[10] 불멸의 이순신 마지막 회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호위하고 있던 병사들을 싹 쓸어버렸다. 영화 명량에서는 근접전에서 조란탄을 쓰는데 위력이 가히 크레모아급이다. 조선의 총통류가 근접용으로도 훌륭한 디자인인데다가, 한번에 쏘는 탄환이 400개나 되었으니... 화약의 질을 생각해도 현대의 크레모아보다는 파괴력이나 사정거리가 뛰어나다. 조총의 위력도 그렇지만, 중세의 화약 무기는 운동량만 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강하다.[11]

4. 실제 운용법

4.1. 함선에서의 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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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총통이 가장 잘 알려진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보여준 인상적인 전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존하는 조선 수군의 교본 중 수조규식 등을 참고하면 당시 포술 운영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을 볼 수 있다.
흔히 사극에서 등장하는 교전 거리보다는 꽤 짧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함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목표물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화포의 최대 사정거리를 100%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수조규식[12]에 따르면 적선이 200보 내에 들어오면 대형 총통으로 포격을 시작하고, 100보 내에 들어오면 조총, 90보 내에 들어오면 을 사격했다고 한다. 조총과 활은 일본 수군도 가지고 있는 무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 수군이 일방적으로 때릴 수 있는 구간은 200보에서 100보 내라는 말이다.

그런데 바퀴가 달린 동차에 화포를 실어 나르고, 포격을 개시하면 그 반동에 따라 동차가 밀려나면서 충격을 완화하는 사극 속 묘사와는 달리 임진왜란 당시에는 동차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차는 19세기에 쓰여진 융원필비에 처음 등장하는 장비이며, 그보다 임진왜란과 훨씬 가까운 시기에 쓰여진 신기비결[13]에서는 동차가 등장하지 않는다.[14] 신기비결은 육군에서 화포를 사용하는 방법만을 다루고 있어 조선 수군을 고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동차 같은 유용한 장비를 수군에서만 쓰고 육군에서는 쓰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즉 임란 당시 조선 수군은 화포의 반동을 완화해줄 장치가 없거나 부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동 제어 및 완화가 부실하면 어느 화기나 명중률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조선 수군의 교본상 포격 개시 거리가 대형 총통의 최대 사거리에 한참 못 미치는 200보인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허나 조선 수군이 칼같이 200보에서 100보 내라는 거리를 지키면서 싸울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 내내 벌어진 해전의 상당수는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보다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일본 수군의 주력 함선인 세키부네 판옥선보다 빨랐다.[15] 여기에 흔들리는 함상 위에서 화포를 쏜다는 상황 + 조선군의 만성적인 화약 부족 등을 감안하면, 조선 수군이 함포 사격을 한 차례 가하고 나서도 100보 이내로 들어오는 왜선이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이순신의 전술이 "절대 근접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난중일기나 이순신이 올린 장계 속 내용을 보면 화포로 왜선을 격침시킨 것 못지않게 '불살랐다' 불태웠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수군은 화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화공은 의외로 불화살 등을 쏘는 것 못지않게 직접 올라타서 불을 놓는 방식도 꽤 사용되었을 수 있다. 2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신유의 일기 북정일기에서 러시아 함선과 교전했을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청연합군은 1차적으로 함포 사격을 가한 뒤 근접해서는 갑판 위의 러시아군을 조총 사격으로 제압했으며, 이후 러시아 배에 직접 올라타 불을 놓으려고 시도한다.[16] 이때 조총을 쏘고 적선에 올라타 불을 놓으려고 했던 군사들은 모두 조선군이었다.

조선 수군이 근접전을 자주 수행했음을 암시하는 또다른 기록으로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가 있다. 일본사에는 임진왜란 관련 기록도 나오는데, 프로이스는 조선 땅을 한 번도 밟은 적이 없기에 일본군을 따라 종군했던 다른 선교사들이나 일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만으로 내용을 썼다. 즉 철저히 일본군 입장에서 느낀 대로 적혀져 있다는 말인데, 일본사에 기록된 옥포 해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 우선 조선 수군 쪽에서 화기에 의한 공격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인을 몹시 애먹이고 괴롭혔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이 성가신 접근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바다 쪽으로 멀리 나아가는 전술로 응전했다. … 이 싸움에서 조선인들은 70척의 일본 배를 빼앗고 병사 대부분을 살해하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겨우 목숨만 건지고서 도망쳤다.

'조선 수군의 화기에 의한 공격'을 '조선인들의 성가신 접근전' 이라고 표현하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 임진왜란 당시의 행정문서인 최희량 임란관련 고문서의 내용을 참고해보면, 조선 수군의 근접전이 어떤 양상이었는가가 대략 추측이 가능하다. 최희량은 판옥선을 새로 건조하면서 추가적으로 필요한 무장의 수량을 기록했는데, 이때 대철환은 겨우 12발에 중철환 역시 40발밖에 되지 않는 반면, 소철환은 3천 발에 소소철환은 5백 발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소철환이나 소소철환은 산탄 사격용이라 당연히 대형 포탄보다 필요한 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걸 감안해도 대철환과 중철환을 다 합해서 52발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은, 조선 수군의 주력 포탄은 함선 자체에 타격을 입히기에 유효한 대형, 중형 포탄이 아니라 승조원 살상에 유효한 산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프로이스의 기록 중에는 '조선 수군이 미늘창을 잘 쓴다' 고 언급한 내용도 있는데, 이는 조선군이 의외로 백병전을 수행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는 말이다.

즉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조선 수군은 200보 안에 왜선이 들어오면 함선 자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대형 포탄을 활용하여 포격을 가하고, 100보 이내로 왜선이 접근하면 승자총통, 조총, 국궁, 쇠뇌 등을 활용하여 승조원을 직접 살상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그러고도 살아남아 접근하는 왜선에게는 산탄 사격으로 남은 승조원들을 한바탕 쓸어버린 뒤 직접 미늘창을 들고 백병전으로 돌입하며[17] 이후 불을 놓아 화공을 가하는 식으로 교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첨언하자면 명량을 비롯한 사극 속 전투씬 연출 때문에 조선 수군이 '크고 튼튼한 판옥선으로 내구도가 부실한 왜선을 충각전술로 들이받아 부쉈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는 영화적 과장에 불과하다. 충각전술은 부딪히는 적선 못지않게 들이받는 아군 군함도 엄청난 충격을 받기 때문에 아예 충각전술에 특화된 함선이 아닌 이상 사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실제로 해전 역사상 실제로 충각전술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고 실증된 사례는 고대 지중해에서 벌어진 해전 말고는 전무하다.[18]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등장하는 '당파'라는 표현을 두고 충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는 사료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곡해한 것이다. 당파라는 표현이 나오는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데,
“좌부장 낙안 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당파(撞破)하고,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합해서 왜선 26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혀 당파하고, 불태우니(銃筒放中撞破焚滅) 넓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 속으로 숨어 엎드려 기운이 꺾이지 않은 놈이 없었습니다.

'총통으로 쏘아 맞혀 당파하고' 라는 표현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즉, 당파는 포격으로 왜선을 격침시킨 것을 말하지 판옥선으로 들이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4.2. 장거리 화력

총통류는 대장군전을 비롯한 화살형 발사체들을 도입하여, 전장식 중세 화포임에도 사거리를 상승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임진왜란 외에도 여진족이나 병자호란에서 싸운 기록을 보면, 조선의 포수들은 우수한 비거리를 활용하여 적들의 포대를 저격하여 무너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에임핵의 민족 아래 본문에는 홍이포와 호준포의 이름이 혼용되고 있으나, 중근거리 소형 산탄포인 호준포와 달리 모과만한 포탄을 수십 리 날렸다는 점을 보면 홍이포임을 알 수 있다. 천자포는 천자총통의 다른 이름이다.
(전략) 며칠 전에 적이 망월대(望月臺) 밖에 대포를 설치하니 신경진이 사졸들에게 천자포(天字砲)를 쏘도록 하여 오랑캐의 장수와 졸개 몇 명을 맞추니, 적이 흩어져 갔다.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또 7대,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蹲)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후략)

최근의 연구로 의외의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고 있지만, 익히 알려져 있는대로 조선의 화포들은 장거리 운용에 있어서도 유용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4.3. 근접전 화력

천자총통의 사거리가 예상보다 짧다고 해서, 실제 전장에서 이들의 역할이 미약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선입견으로 당시를 판단한 오류이다.

최근의 연구로 보면 조선군의 포수들은 근접 사격을 주력 전술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1인 운용 무기인 승자총통조차도 20발 이하의 조란환을 쏠 수 있어서 쓸만한 방어용 화기로 인식되었는데, 당시의 대형 총통들은 무려 50발 ~ 400발의 중형 쇠구슬을 조총보다 멀리서 발사할 수 있었다. 당장 후대 유럽의 대포에서 자주 발사하는 포도탄[19]도 근거리 발사용이다.[20] 즉, 중세에는 화포라는 물건이 근접 사격도 상정한 물건임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 기록을 보아도 조선 초기의 총통류 화기들은 엄폐물이 있는 상황(방어전, 해상전)에서 집단으로 기어올라오는 적들에게 산탄을 끼얹어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총통들이 가진 특유의 작고 운반하기 쉬운 모양[21]도 이러한 운용법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4.4. 평가: 종합적 무기 체계

조선 총통이 당시로서 뛰어났던 이유는 다양한 거리에서 종합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근접전 화력은 훈련도가 떨어지는 조선 병사들조차도 왜군을 거점에서 쫓아내기에 충분했으며, 장거리 화력은 명나라와 청나라 군대도 놀랄 정도로 뛰어났다. 즉, 조선의 총통들은 화약 에너지를 가지고 모든 거리를 커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전에서 화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집단적이고 유기적인 운용 시스템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만약에, 화포를 갖춘 조선군에게 적들이 접근하면 양산형 소형 화포인 지자 / 황자를 비롯한 무수한 철환이 쏟아진다. 산탄이 무서워 성곽 / 함선에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맴돌면? 대장군전이나 신기전이 날아온다! 이런 점에서 볼때, 조선 총통은 당대로서는 분명히 효율적인 무기 체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렇게 미리 준비 된 거점에서 적에게 니가와를 강요하며 근본적인 조작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화포로 처리하는 건 기본 발상 자체가 수비적이고, 전황이 순간 순간 급변하는 상황에서 항시 사용하기엔 너무 경직된 전술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군이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기습 당했거나, 지휘 계통이 또라이 한명의 X맨 짓으로 꼬여서 사격 통제가 전혀 안됐던 용인 전투, 쌍령 전투 같은 경우 분명 숫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음에도 왜 그리 일방적으로 참패했나 생각해 볼 수 있다.

5.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이후 불랑기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홍이포가 들어오면서 기존 총통류는 비중이 줄어들게 된다. 다만 불랑기포는 구조상 대구경으로 제작될 수 없는 등 구조적 문제로 인해 천자총통을 비롯한 전통 총통들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사용된다.

융원필비에 따르면 이들 천자총통은 개량 없이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대형화된 것으로 보이고, 외관적으로도 약통과 포신이 명확히 구분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말기에는 흥선대원군 주도로 신형 소포 중포가 제작되어 쓰였다.

6. 컬버린과의 비교

구경과 사용시기는 비슷해 줄곧 비교 되곤 하나, 컬버린이나 천자총통은 급이 다른 무기였다. 화약 사용량만 보면 천자총통은 30냥 = 2.4 파운드인데, 보통의 컬버린은 화약을 12파운드를 쓴다. 포신 길이는 천자총통이 전장 1.3m 급이지만, 컬버린은 전장 3미터 ~ 5미터에 달한다. 또한 무게는 300kg대 1,200kg ~ 2,500kg 정도로 훨씬 커다란 화포다. 단순히 화약량으로만 본다면, 천자총통의 30냥은 미니온포의 3파운드보다도 약간 더 적은 양이다.

또한 17세기까지도 포거를 운용하지 못한 조선과 달리, 컬버린은 기본적으로 포가나 포차에 올려서 운용했고, 이는 포의 정밀도와 야전에서의 운용성에 매우 큰 격차를 주게 된다.

이런 격차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포격전 패배, 강화도 방어전에서의 해전 패배등 조선 후기의 화력 열세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6.1. 카로네이드 포

천자총통의 짧은 사거리를 옹호하기 위해 카로네이드 포를 예로 들기도 하나, 이는 적절하지 않다. 카로네이드 포의 개발사를 보면 당시 서양의 군함에 탑재하던 롱건의 최대 유효 사거리가 1km 정도[22]였지만, 실제 해전은 대부분 500m 이내에서 이루어졌으며 넬슨이 주도한 이후로 영국 해군의 주 전술은 30m 이내의 근접전이었다. 당시에 군함의 전투력은 대구경의 함포를 얼마나 많이 탑재하느냐에 달려 있었기에 대구경의 함포를 더 많이 탑재하기 위해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대포가 카로네이드 포다. 포신의 길이를 줄이고 두께를 얇게해서 무게를 감랑해서 화약 소모량이 줄어들어 32파운드 카로네이드 포는 9 파운드 롱건과 무게와 운용 인원이 같았다.

카로네이드 포는 동일 구경의 장포신 포에 비해서 가볍기 때문에 선박 상부에 여러 문을 배치할 수 있다는게 장점이지 동일 구경의 더 많은 화약을 사용하는 화포보다 근거리에서 더 많은 살상효과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상부갑판에서 산탄을 사용하므로 근거리에서는 인마살상 효과를 유사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원형탄을 사용할 경우 포탄의 살상효과는 관통하는 선박의 외판이나 목재의 두께, 포탄의 구경과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포탄의 구경이 크고, 관통되는 위치의 목재가 두꺼울 수록 발생하는 목재 파편의 수가 증가하며 파편의 속도는 포탄의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카로네이드 포는 초속이 느리지만 구경이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파편의 수가 관통만 한다면 비슷할 수 있지만 속도가 느리므로 파편의 살상력은 떨어진다. 실제 영국에서 해당 실험이 진행되었고 오히려 초속이 빠른 포탄일 수록 외판을 관통하고 반대쪽 외판을 관통하면서 재차 파편을 발생시키므로 살상력이 증가한다.

초기에 영국 해군에서는 카로네이드 포가 모든 롱건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롱건은 체이스 건[23]으로만 사용하고 카로네이드 포를 주 무장으로 하는 군함들을 건조[24]했다. 하지만 롱건이 없이 카로네이드 포만 탑재한 군함이 사정거리가 긴 소구경 롱건을 탑재한 소형 군함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사례가 나오면서 롱건을 대체하리라는 기대는 사라졌고,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에 가면 카로네이드 포를 주 무장으로 하는 군함들의 건조도 중지했다. 이와 같이 카로네이드가 발명된 이후에도 영국 해군의 주력 함포는 여전히 사정거리가 긴 대구경(3급 이상의 전열함은 32 파운드 롱건, 64문 3급 전열함, 4급함과 소수의 5급 프리깃은 24 파운드 롱건, 5급 프리깃은 18 파운드 롱건[25])의 롱건이었고, 카로네이드 포는 1급함 ~ 5급함의 부 무장, 6급함과 등급외 함들같은 소형함들의 주 무장으로 머물렀을 뿐이었다.

동시대 동일 구경의 롱 캐논과 비슷하거나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위에서 주장했지만 이는 근거리에서만 해당하는 말이고, 짧은 사거리가 너무 치명적이어서 개발하고 처음으로 도입한 영국 해군에서 롱건을 보조하는 부무장으로만 사용했다. 적정한 사격 비율만 찾아내면 전반적인 성능에서 취약점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지만, 짧은 사거리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단점이다. 이처럼 카로네이드 포의 장점만을 언급하고 천자총통이 가지는 단점과 같은 카로네이드 포의 단점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6.2. 화약의 양

카로네이드 포와 산업 혁명 이후의 12 파운드 롱건의 화약 사용량과 비교한 것 역시 정당한 비교가 아니다. 먼저 청동이나 주철 대포가 쓰기만 하면 폭발을 일으킨건 아니었고, 항상 최대 화약으로만 사격을 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면 영국 해군에서는 용도에 따라서 사용하는 화약의 양을 조절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32 파운드 롱건의 경우 최대 사거리로 발사할때는 10 파운드 11 온스를 사용했지만, 근접전에서 포신의 과열을 막으면서 연사를 할때에는 6 파운드를 사용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1분 30초마다 사격이 가능하도록 선원들을 훈련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한 세기간의 기술 발전을 감안해야겠지만) 폭발의 위험성이 크다면 이렇게 훈련을 시킬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산업 혁명 이후 대포에서 사용하는 화약의 양을 언급해서 컬버린이 비효율적이라고 했는데, 두 시기는 200년 이상의 차이가 존재하며 이 기간동안 과학 기술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은 비교다. 초기에는 적절한 화약의 양을 계산할 수 없었기에 대포의 구경(포탄의 무게)와 같은 화약을 사용[26]했으며 대포의 구경이 작거나 같은 구경이더라도 포신의 길이가 짧은 경우에는 더 적은 양을 사용했다.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화약과 대포의 성능을 시험하는 체계가 나와서 화약의 양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1750년에 영국에서는 화약의 양을 3배 늘여도 포탄의 속도는 50%만 증가할 뿐이고, 속도가 증가하면 저항도 늘어나서 위력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대포에 사용하는 화약의 양을 대폭 줄였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 시대 대포들의 화약 사용량이 줄어든 결정적인 이유다.

동시에 화약 제조 기술도 발달했는데 흑색 화약은 초석, 숯, 황을 일정한 비율로 혼합해서 만들었다. 초석의 양이 많을수록 위력이 증가하며 이 비율에 따라 위력이 달라졌기 때문에 각국은 이를 비밀로 해서 나라마다 화약의 성능이 달랐다. 초기에는 1:1:1의 비율을 사용하다가 이후 4:1:1을 거쳐 17세기에는 6:1:1, 1780년에 75:15:10의 비율이 나오면서 이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흑색 화약은 굉장히 위험하고 불안전한 물질이라서 보관하는 동안 수분을 흡수해서 품질 저하가 발생하거나 부주의로 폭발하는 등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과정을 거쳐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화약 사용량이 나온 것인데, 이런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결과만을 놓고 비교하는 것은 2차 대전 시기의 무기와 현대의 무기를 비교하면서 전자가 비효율적인 무기 체계라고 말하는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카로네이드와 천자총통은 컬버린과 같은 롱건과 비교할 때 사정거리가 짧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무기 체계로 비교 대상이 아니다. 카로네이드의 화약 사용량이 극단적으로 적은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사실과 롱건에 비해 유극[27]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롱건은 사격을 하면 포신에 탄매가 심하게 끼기 때문에 사격할 때 포신의 내부 소제를 해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해 포탄이 포신 내부에 끼어 불발탄이 나오는 문제들이 일어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롱건의 유극을 일부러 크게 만들었고, 유극이 크면 폭발시에 압력이 세어나가기 때문에 화약의 양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카로네이드는 이 유극이 거의 없기에 화약 사용량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천자총통의 화약 사용량이 적은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18 파운드 카로네이드 포의 화약 사용량은 1.5 파운드, 12 파운드 카로네이드 포는 1 파운드임을 볼 때 천자총통의 화약 사용량이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자총통의 화약 사용량이 컬버린에 비해 적은 이유는 단순히 단포신에 소구경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유럽은 철에 비해 가벼운 돌로 만들어진 석탄을 사용할 경우에는 정량의 1/3만을 사용했다. 천자총통의 경우 2.4파운드가 정량이라고 하지만, 이는 어떤 포탄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사거리에서 발사할 때의 양인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게다가 아래의 홍이포 항목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조선도 컬버린을 도입했던 것을 보면 폭발 위험성, 화약 낭비량만 증가하는 자살적인 전법이 아니라 컬버린과 같은 대구경의 화포가 가지는 장점이 컸다고 봐야 한다.

6.3. 컬버린의 크기

컬버린의 포신이 길고 두꺼운 이유는 그게 더 안전하기 때문이고 당시 기술자들은 이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대포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이는 당시의 대포 제조 과정을 보면 과학적으로도 맞는 사실이다. 포구 부분을 아래로 하고 세워서 제조를 했는데 대포의 포신이 길고 두꺼울수록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의해 포구 부분의 조직이 치밀해져서 내구성이 더 좋아진다. 그래서 사격시에 화약을 많이 사용할 수 있었고, 이는 대구경의 포탄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으며, 포탄의 속도가 빨라져서 사거리, 명중률, 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는 천자총통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장점이다.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포신의 길이는 짧아지고 무게는 가벼워지는데 이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대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더 적은 가격으로 많은 대포를 만들기 위해 폭발의 위험성이 커지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변화를 줄 수 밖에 없었다.[28] 16세기경 대포의 사진을 보면 성능과 상관이 없는 화려한 문양들을 볼 수 있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이런 문양들도 없애면서 나폴레옹 시대의 밋밋한 대포가 나온 것이다.

6.4. 해상전

전세계에서 19세기 전까지 중소형 화포를 선호했다고 했지만, 이는 육상전과 해상전에서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으로 일부만 맞다. 육상전은 기동력과 보급 문제 때문에 무거운 대구경의 대포를 운용하기 힘들어서 유럽은 17세기 경부터 가볍고 기동성이 좋은 소구경의 대포가 주력이 되었다. 그러나 요새포와 공성포로는 24파운드 이상의 대구경 대포를 여전히 사용하였고, 공성용으로 개발한 10인치 박격포의 경우 무려 90 파운드 포탄을 사용했다. 여기에 군함은 대포를 탑재하고 다니기에 육군에 비해 무거운 대구경의 함포를 운용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서[29] 본격적인 전열함 시대가 막을 올림과 함께 유럽 각국들은 이를 많이 탑재할 수 있는 대형함들을 많이 보유하고자 노력했다.

영국은 1540년부터 6문 ~ 14문의 캐논과 데미 캐논, 20문 ~ 30문의 컬버린과 데미 컬버린을 탑재하는 34문 ~ 56문 갤리온들을 건조했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 동안에 전열 전술이 자리를 잡으면서 1640년부터는 전열함이 군함의 표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 후인 1637년에 진수한 영국의 HMS Sovereign of the Seas는 무려 102문의 함포를 탑재했는데, 현측에 42파운드 캐논을 20문이나 탑재해서 당대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무적의 함으로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그 위용을 발휘했었다.[30] 이 시기의 영국 해군은 1급함부터 4급함까지 전열함으로 취급을 했는데, 4급함은 컬버린(구경은 대략 18파운드이며 10파운드 ~ 12 파운드인 데미 컬버린을 같이 탑재)을 주 무장으로 하는 30문함 ~ 40문함, 3급함은 데미 캐논(대략 32 파운드이며, 컬버린과 데미 컬버린을 부 무장으로 탑재)을 주 무장으로 하는 50문함, 2급함은 데미 캐논을 주 무장으로 하는 60문함, 1급함은 캐논(대략 42파운드이며 20문을 탑재)을 주 무장으로 하는 80문함이었다. 이처럼 17세기 중반부터 유럽은 대구경의 함포를 탑재하는 대형 군함들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6.5. 홍이포

결국 그러한 서양의 화포 체계에 대한 열세는 아시아 국가들도 잘 아는 것이었다. 이는 비교대상인 컬버린을 명, 청, 조선에서 홍이포란 이름으로 도입했다는 것을 보면 해당 국가들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명나라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겪은 컬버린의 성능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청과의 전쟁에서 사용을 했고, 명과의 전쟁에서 홍이포에 호되게 당한 청나라는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운용을 했다.[31] 조선도 병자호란을 통해 청나라가 공성용으로 사용한 홍이포를 접하게 되고 홍이포를 도입하기위해 노력을 했다. 위에서 천자총통은 화약의 낭비가 심해서 주력이 아니었고, 임진 왜란 개전 1년 후부터는 기록조차도 없다고 나와있다. 그럼에도 천자총통보다 화약의 낭비도 심하고 훨씬 비싼[32] 컬버린을 홍이포란 이름으로 도입을 시도했던 것을 보면 조선에서 사용하던 기존의 화포들에 없는 장점들을 컬버린이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홍이포는 천자총통 이상으로 거의 쓰이지 않았다. 기록상으론 소수의 홍이포를 보유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 표류한 서양 배에서 노획한 걸로 추측되며, 그마저도 제대로 쓰이지 않아 녹여서 다른 총통을 만들었다. 직접 제작했단 기록은 영조 때 2문이 전부다. 순조 때 발간된 융원필비를 봐도 천, 지, 현, 황 브라더스는 있지만 홍이포는 없다. 후기 조선의 주력 화포는 어디까지나 불랑기포였다.

사실 당시 조선이 호란 이후 개항기 전까지 그렇다할 군사 충돌도 없었고, 화약생산량도 서구 제국(諸國)과 비교해서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운영할 여건이 부족했다. 서구가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전과 비교해봐도, 프랑스가 화약을 16세기 연간 500톤을 생산했고 식민지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에는 그 배인 1200톤으로 늘어났다.[33] 반면에 동시대 조선은 연간 화약 생산량이 2500여근으로 약 1.5톤이 한계였으며 군기시에서 보관하던 화약 또한 20여톤 정도였기에 본질적으로 어마어마한 화약을 먹어대는 대형 화포류를 꾸준히 개발하고 유지할 여력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1] 정말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다.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터리에서 실제로 미사일 드립을 쳤는데, 사실 미사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넓은 의미 / 현대적 미사일 병기 출현 이전에는 투사무기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딱히 틀린 건 아니다. 히스토리 채널 ancient super navies가 원 에피소드이며, 자막 버전은 Technology Korea - a Powerful Battleship Of The 16th Century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입장에서는 대함 미사일이었을 물건이다. 그래서 박물관에서는 가끔 이를 단순 간지용 장식품으로 착각했다가 실제 전장에서 쓰인 무기라는 것을 알고 놀라는 관광객도 있다. [2] 주철포는 비교적 저렴하지만 취성이 약해 크기를 키우기 힘들어 오랜기간 청동포와 함계 쓰였으며, 특히 제강/가공 기술이 미진하던 동양에서는 19세기까지 주철포를 생산하기 어려웠다. 더해 조선 후기에 가면 주석이 고갈되어 순동을 써 무게만 4배 가까이 뛰는 유물도 출토되는등 부족한 재원이 큰 영향을 끼친것. [3] 당시의 화약의 순도나 조합비로 인한 현대의 흑색 화약과의 성능차를 생각해서, 현대 흑색 화약을 당시 화약 넣던 양의 1/3만 넣고 쏜 것이니 실제 위력은 비슷한 것이다. 이 이상 넣었다간 포신이 터질 위험이 크다. [4] 여기에는 드라마를 위한 이유도 있다. 실제 주력 화포인 지자총통이나 현자총통은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다. 현자총통의 경우 포신의 크기만 따지면 현대의 보병용 60mm 박격포와 비슷한 수준. 드라마에서는 대구경 화포 특유의 위압감을 표현해야 하는데 이런 크기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5]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 55화 비잔티움 제국의 최후편에서 오스만 제국의 청동대포를 설명할 때 임용한 박사는 "어지간한 나라는 화약값도 못댄다." 하는 대사로 과거 화약이 매우 비쌈을 에둘러 표현했다. [6] 사실 중세 화포는 동서를 불문하고 화력이 문제가 아닌, 명중률과 사거리의 문제였다. 화력 자체는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다. 사실 중세시대에는 방어력이 필요하다 싶으면 철갑으로 도배하는 시대였다. 바꿔 말하면 화약 무기에게 철갑을 확실하게 관통 - 파괴하는 위력을 요구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7] 다만 이 소구경의 기준이 동아시아와는 많이 달랐는데, 야전용으로 주로 쓰인 팔코넷이나 후대의 야전포들이 100~400kg 대로 크다고 낭비로 여겨졌던 천자총통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야포의 조상격인 컬버린만 해도 당연히 천자총통보다 압도적으로 컸다. 유럽의 화포가 소구경이라는건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으로 대구경에 집착한 오스만 제국의 대포들에 비교해서이고, 동아시아와 비교하면 훨씬 대형이었다. 당시 화약재료중 하나인 염초(초석)의 세계 3대 산지가 중국, 인도, 남미(태평양연안)다. 당연히 명,청에게 화약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만들기 쉽다. 이들은 조선으로의 염초수출을 통제해 조선은 염초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에대한 조선의 노력결과물이 신전자취염초방언해이다. 다만 명과 청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홍이포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대형 화포는 공성전 등 필요에 의해 소수나마 꾸준히 사용되었다. [8] 완구에 사용되는 석환은 단석이라 불린다. [9] 포탄이 포신 내에서 깨지면 파편들이 끼이면서 포신에 심각한 무리를 주고 심하면 포 자체가 폭발할 수도 있다. 군대에서 총기 손질 잘하라고 하는 이유도 총열 내부에 끼인 화약 찌꺼기 때문에 위험하니까 그런건데 포탄 정도쯤 되면 말할 것도 없다. [10] 포도탄의 예시지만,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기함 부상테르 함이 영국 기함 빅토리 함의 카로네이드 포에서 발사된 포도탄을 선수에 맞았는데, 포도탄들이 선수부터 후미까지 진행 방향의 모든 것들을 싹 쓸어 버려 순식간에 무력화되었고 기함을 잃은 프랑스 함대 전체가 아노미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제대로 맞았을 시의 그 엄청난 위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11] 기술력과 운용법 등의 한계로 인해 기본적인 명중률, 파괴력, 유효 사거리 등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발사 시 들어가는 장약의 양을 늘리거나 구경을 키우는 방식으로 위력을 보강하다 보니 단순 운동량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비슷한 예시로 플레이트 메일을 뚫을 정도의 화력을 가진 머스킷 탄환의 운동량은 현대의 5.56mm 탄의 운동량을 훨씬 능가하지만, 이는 관통 성능 면에서 불리한 둥근 형상의 탄두로 어떻게든 플레이트 메일을 뚫기 위해 장약량을 늘리다 보니 나온 결과이다. 실제 대인저지력을 따진다면 당연히 5.56mm 탄이 압도적으로 우수하다. [12] 단, 수조규식은 남아 있는 조선 수군의 교본이 별로 없어서 참고 자료로 자주 쓰이기는 하나 임진왜란 당시에 쓰여진 책은 아니기 때문에 이순신이 살아 있을 당시의 교전 거리가 어땠는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3]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3년에 쓰였다. [14] 화포를 쏠 때에는 그냥 화포 뒤에 흙을 파내고 단단하게 다진 뒤 고정해서 쏜다고 되어 있다. [15] 일본 수군은 대형 화포를 잔뜩 실은 조선 수군에 비하면 실은 무기가 조총과 냉병기밖에 없어서 군함이 몹시 가벼웠고, 설계상으로도 화선 한선보다 내구도는 떨어지지만 속도 면에서는 더 유리한 편이다. [16] 시도에서 그친 이유는 이때 총사령관이었던 청나라 장수 샤르후다가 러시아 배에 실린 모피를 탐낸 나머지 화공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때 병사들이 적선에 올라탔다가 화공 금지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머뭇거리는 사이, 선실 내로 피신했던 러시아군 일부가 반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결국 화공을 허용하는데, 이를 두고 신유는 바로 불을 놓았으면 일방적으로 이기고 끝났을 전투를 쓸데없이 욕심 부리다가 안 죽어도 될 우리 군사들이 죽었다며 분노한 기록을 남겼다. [17] 조선군은 백병전에서 일본군보다 한참 못 미쳤지만, 그 일본군이 대형 포탄 + 소형 총통, 조총, 화살 세례 + 산탄 사격으로 넝마가 된 상태라면 조선군은커녕 생전 처음 창 잡아본 사람이라도 죽이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게 뻔하다. [18] 그 이후로도 군함의 충각 사례가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 단발성 이벤트에 가까웠지 아예 본격적인 주 전술로서 충각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19] 포도탄은 기병이 접근하거나 근거리에 보병대가 진을 치고 있을 때 포병들이 발악하는 형식으로 많이 써먹었다. [20] 나폴레옹도 장군 시절, 프랑스의 수도 파리 거리에서 난동을 일으킨 폭도들을 진압할 때에 포도탄을 근거리에서 퍼부은 일로 유명하다. [21] 일단, 손잡이가 달려있다! 게다가 무게 중심이 가운데 쏠려있고, 둥글둥글한 모양 때문에 운반하기가 쉬웠다. 근접전에서 쓰기가 매우 좋은 모양이다. [22] 컬버린은 당시의 사격 제원표가 남아있지 않아서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나폴레옹 시대의 롱건은 사각을 6도로 사격할 때 구경에 따라 2km ~ 2.5 km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 거리에서는 명중률을 기대할 수 없었다. [23] 함수와 함미에 2문 ~ 4문 정도 탑재하며 추격전에서 상대방 군함의 돛을 공격하여 속도를 떨어트리기 위한 용도로 탑재하는 함포다. [24] 초기에는 시험적으로 5급 프리깃을 개조해서 카로네이드 포를 탑재했으나 롱건을 탑재하지 않으면 짧은 사거리가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는 주무장이 6 파운드 롱건과 9 파운드 롱건이었던 등급외 함과 6급함들만 12, 24, 32 파운드 카로네이드를 주무장으로 탑재했다. [25] 프리깃이 점점 대형화되면서 주무장이 9 파운드 롱건에서 12 파운드 롱건을 거쳐 18 파운드 롱건으로 바뀌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18 파운드 롱건을 주 무장으로 하는 프리깃이 주력이 되었다. [26] 구경이 30 파운드일 경우 30 파운드의 화약을 사용했지만 60 파운드일 경우에는 40 파운드만 사용하는 등 경험적으로 최적의 화약 사용량을 찾아내었다. [27] 포신의 내부와 포탄 사이의 간격 [28] 이런 흐름에서 나온 무기 중의 하나가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만든 레더 캐논(Leather Cannon)으로 포신을 극단적으로 얇게 만들고 그 주위를 가죽으로 둘둘 말아 보강한 초경량 대포다. 당연히 내구성 문제로 금방 사라지고 만다. [29]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육상용 장비는 해상용으로 전환할 때 큰 문제 없이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반면에 해상용으로 개발한 장비는 육상에서의 운용을 위해 크기와 무게를 줄이기 위한 추가 개발을 해야 한다. [30] 물론 건조 비용이 엄청나다 보니 영국은 이 함을 건조하기 위해 건함세를 걷었고, 이는 많은 반발을 사서 다른 여러 문제들과 합쳐져 내전이 일어나 결국 찰스 1세가 목이 잘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31] 1629년 한해에만 서광계가 400문, 양광총독 왕존덕이 500문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2] 현재 남아있는 천자총통의 무게는 각각 300kg과 400 kg 1,2세대 3세대 천자총통의 무게는 1209근 대략 700kg 융원필비 참조, 홍이포는 1.8 톤이다. 당시 청동은 비싸서 제작하는 비용도 홍이포가 훨씬 많이 들었을 것이다. [33] 유럽에서 화약이 대규모로 쓰이게 된 것은 남아메리카 인도에서 대규모의 초석 광산이 발견되어 들여오기 시작한 이후다. 인도의 초석은 당연히도 영국이 많이 썼고 남아메리카의 초석은 스페인이 들여와서 유럽에다 팔았는데 중간에 영국이 방해하면서 유럽에서의 화약값도 싼 편은 아니었다. 방해없이 초석을 조달했던 영국만이 병사들에게 실탄 사격 훈련을 시킬 정도로 넉넉하게 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