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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5:30:47

세키부네

1. 개요2. 상세
2.1. 규모
2.1.1. 고바야 부네(小早船)
2.2. 구조
3. 임진왜란기4. 왜란 이후에는?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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関船

일본에서 138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국시대 에도 시대에 걸쳐서 사용했던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중소형 군함이다. 관음포 전투때 적선 30척이 진포대첩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보아 그 시기에 등장했을 것이다. 중세 왜군의 주력 전투함[1]이었다. 한자 그대로 관선이라고도 부른다. 대략 한국사의 조운선들이랑 비슷한 크기의 군함대였으며, 2층 구조를 쌓고 해전에서 백병전과 근접전에 적합하게 건조한 돌격형 충돌함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키부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앞이 매우 뾰족하고 용골이 있어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군함이기 때문에 빠르게 돌진해서 적선에 접근, 왜구나 중세 일본 군인들이 적군함에 올라타서 백병전과 근접전을 하는 군함이었다. 속도가 상당히 빠를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수군이나 고려 수군의 함선이 약 7노트에서 9노트 정도 였는데 조선수군의 함대보다는 약 5~6노트 더 빨랐을 것이다. 한자(관선)를 보면 알 수 있는, 관문( 세토 내해 등 해협)에 배치해두고 다른 배가 오면 달려가서 통행세를 징수하는 게 주요 업무였다.

2. 상세

2.1.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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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택선 좌현으로 도선을 시도하는 배가 세키부네이다.
에도 막부 시기 목할법의 도입 이전에는 같은 군함이라도 군함 크기가 들쭉날쭉이었지만 세키부네의 크기는 주로 36척부터 70척[2] 정도였으며 탑승 인원은 100명 정도 였을것이다. 이는 최대 규격인 20m급에 2층기준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면적이 80평이 채 안된다. 식량과 식수,무장까지 계산하면 1인당 사용면적이 0.5평이 될까말까한다. 갑판까지 포함해서 중형 세키부네의 경우에는 노를 30정부터 60정 정도까지 장착 가능하였고 이보다 더 적은 노를 사용하는 소형의 세키부네는 아래 설명할 고바야라고도 불렀다. 판옥선의 배수량이 대략 80~280t 가량이니, 그보다 훨씬 작았던 세키부네의 배수량은 더욱 작았다.

2.1.1. 고바야 부네(小早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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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노를 14~30정 정도를 부착한 소형 세키부네이다. 주로 척후선이나 연락선으로 사용되었지만 간혹 전투 임무로도 사용이 되었다.

조선에도 비슷하게 방패선, 병선, 창선이라는 보조용 군함들이 있었다. 이쪽은 신기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를 신호용으로 휴대하고 있었으며, 더욱 작은 초소형 군함으로는 사후선이라는 초소형 정찰선도 존재했다.

2.2.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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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화선들이 그렇듯이 첨저선 형태와 쇠못으로 결합된 선체를 사용했다. 또한 삼나무로 선체를 만들었는데 속도는 이 덕분에 빨랐지만 결정적으로 내구도를 약화시킴과 동시에 장애물 위에서 항해가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생겼다. 이런 내구도 덕분에 대포를 거의 탑재하지 못하였다.

좌우현의 방패판은 안택선과 같이 문이 달려있어 도선할 때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안택선, 판옥선과 마찬가지로 격군실과 전투갑판의 이층구조로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높이가 훨씬 낮다.

3. 임진왜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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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과 세키부네 비교도안

세키부네는 중세 일본에서 무척 효과적이고 강력하고 빠른 돌격하여 적함대를 깨부수는 충격전술 전용 군함대였지만, 임진왜란 시기에는 상대한 판옥선이 영주들의 권세를 나타내는 아타케부네에 필적하는 체급에 훨씬 더 강력한 화포들을 다수 탑재하여 접근조차 어려웠다. 세키부네의 비교적 낮은 뱃전 때문에 아래에서 위를 보고 사격하거나, 아예 갈고리를 적선에 걸고 배와 배를 밀착시켜 마치 하나의 배처럼 만든 뒤 공성전을 하듯이 백병전을 치러야 했다. 더구나 해전이 있던 한반도 남부는 암초가 많고 소용돌이가 심한 남해역이었기에, 첨저선인데다 가벼운 세키부네에게는 더 세심한 항해술을 요구하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매우 긴 전쟁으로 공성전이 매우 강력하게 발전했기 때문에[3], 중세 일본 군인들의 주특기인 백병전으로 유도하기위해 세키부네보다 월등히 높은 판옥선에 빠르게 올라타곤 했으며, 그냥 고개돌리고 무작정 퇴각하다가 함대를 다 말아먹은 원균을 논외로 치고, 세키부네에 대응하였던 김완을 시작으로 이억기, 최호 모두 세키부네의 병력에 등선을 허락하여 군함대를 빼앗겼다.[4] 즉, 세키부네는 기동력을 살릴 여건만 허락하면 판옥선을 압도하는 속력을 바탕으로 언제든 판옥선에 접현하여 병력을 올려보내는데 큰 무리가 없는 강력하고 빠른 군함이었다. 게다가 백병전 상황에 일단 돌입하게 되어 높이의 이점을 잃어버리면 육지와 마찬가지로 당시 오랜 전국시대로 백병전에 이골이 난 중세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군에겐 백병전은 어려웠는데, 고성현령 조응도는 나무 베러온 일본군 20명에게 도선을 허락하여 군함을 뺏기고, 조응도가 전사하는 사례도 있었다. 일본군에게 빼앗긴 이 군함은 조선의 수군이 뒤쫒아 함포와 화전으로 태워버렸다..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을 상대하던 세키부네 입장에서는 판옥선에 접근하더라도 타격을 줄 방법이 없었다.[5] 온갖 개고생 끝에 세키부네가 겨우겨우 접현을 성공하더라도, 판옥선의 화포로 쓰인 대장군전이나 천자총통은 세키부네 따위는 통째로 갈아버릴 수 있었다. 또한, 판옥선은 강철검조차 부러트린다는 참나무나 소나무 등 튼튼한 나무들을 이용해서 만들었기에[6], 잘못 부딪치기만 해도 위험할 정도로 일본 군함들과는 튼튼함이 차원을 달리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철의 매우 낮은 품질과[7], 조선이 배를 만들 때 들어가는 나무와 다른 나무의 종류, 일본군이 배를 건조하는 방식 그리고 배 위에 화포를 올리지 않는 일본 군함들의 특징 그리고 판옥선의 이러한 특징들이 맞물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단순히 체급으로만 따져도 훨씬 무거웠던 점은 덤이다.
판옥선을 상대할 때는 얇은 선체를 뚫고 날아온 포탄(과 선체의 파편)에 노잡이들이 쓸려나가며 정지, 이어서 후속탄에 괴멸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이는 임진왜란 초창기에 해당하고 점차 갈수록 새로 건조되는 일본 군선은 상당히 커졌다.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30년 7월 22일
칠천량의 패전을 보고받고 선조가 비변사와 회의를 하면서 일본군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커졌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니 김응남이 그렇다고 하는 모습이다. 다만 해당 문답에서 나오는 배가 아타케부네(안택선)을 말하고 있는지 세키부네(관선)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4. 왜란 이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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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정권에서 아타케부네 건조 금지명령[8]을 내리자 반대급부로 세키부네가 좀더 실질적인 주력함이 되자 장식성은 물론이고 크기까지 이전의 관선들 보다 크기가 훨씬 커지고 화려해지게 되었다.[9] 이런식으로 대형화된 세키부네를 천지환이라고도 부른다. 또는 "고귀한 자리의 군함"이라는 뜻으로 '고자부네' 혹은 '고자센'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자? 또는 군함 위에 영주들의 이나 저택의 알현실을 재현한 화려한 누각을 얹어, '저택을 얹은 군함'이라는 뜻으로 '야카타부네'라 부르기도 했다. # 이렇게 화려하게 개조된 세키부네들은 지방 영주들의 참근교대등 '행군'이나 '행차'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10] 조선통신사 류큐등의 사절의 방문 때도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11] 이런 대형화된 세키부네들은 막부말 근대식 전투함이 등장할 때까지 운용되었다.

5. 매체에서의 등장

안택선만큼은 아니더라도 임진왜란이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작품에는 자주 등장한다.


[1] 안택선은 주로 대장선( 기함)으로 해전에서 주로 투입되었다. [2] 1척을 약 0.3m으로 볼 때 10m에서 20m 정도이다. 참고로 안택선이나 판옥선의 길이가 100척(30m 내외)정도였다. [3] 위의 규모 문단에 나온 이미지처럼 전국시대 당시 세키부네를 탄 군인들이 해전에서 아타케부네를 상대로 공성전처럼 전투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아타케부네는 전근대 일본의 군함 중에서는 그나마 판옥선과 맞먹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대형 군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력이 세키부네였던 만큼 대체로 세키부네끼리의 해전이 훨씬 많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전국시대 당시 아타케부네를 상대로 한 공성전 형식의 해전 경험은 임진왜란 때 세키부네를 탄 일본 군인들이 조선의 판옥선을 상대로 전투할 때 좋은 참고사항이 되었을 것이다. [4] 단, 이때 최고 지휘관이 일본의 명장원균이었다는 점과 야간에 기습공격을 당했던 상황임은 감안하자. [5] 즉, 군함 위에 있는 군인들을 공격할 수 있을 뿐, 군함 자체를 공격할 수는 없다. [6]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목재는 생각보다 상당히 강도가 좋은 물질이다. 부피가 일정이상 되는 나무는 생목상태로도 강철검이 이가나갈정도로 강도가 높아서 날씨가 추워 나무가 수축하는 겨울철의 경우 도끼날이나 전기톱날도 들지 않는 정도다. 특히 잘 건조시켜 가공하면 야구 방망이 정도의 두께로도 강철검으로도 베기가 어렵다. 게다가 함선에 쓰일 정도로 두꺼운 부재를 여러개 모아 만든 함선의 경우 총으로 부재를 관통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일정거리 바깥에서는 방패조차 총탄을 막을 수 있다. [7] 우리나라의 철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광산에서 캔 철광석이지만, 일본의 철은 모래를 걸러 추출한 사철이었다. 당연히 강도에서 차이가 안 날 수가 없었다.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일본도조차도 일본에서 나는 저품질의 사철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또한 사무라이들이 원래 쓰는 장검인 우치카타나 외에 더 짧은 보조용 칼인 와키자시를 함께 차고 다니는 것 역시, 쇠가 워낙 저질이라 칼날이 잘 부러져서 예비용으로 들고 다닌 것이란 말이 있지만 이것은 틀린 말로 일본 무사들이 여러종류의 길이가 다른 칼을 차고 다닌것은 칼마다 용도가 달라서 상황에 따라서 가장 알맞은 용도의 칼을 쓰기 위해서며 이건 일본뿐만 아니라 칼을 전문적으로 쓰던 중세서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잘 부러져서 칼을 2개 이상 차고다닌 것이면 길이가 같은 칼을 여러개 차고 다니면 되지 굳이 용도가 다른 길이가 다른 칼들을 불편하게 여러개 차고 다니면 칼의 조작감만 익숙하지만 않을 뿐이기 때문에 굳이 칼의 길이가 다른 다른 종류의 칼을 여러개 차고 다닐 필요가 전혀없다. [8] 정확히는 500석급 이상의 군함을 건조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당시 아타케부네는 1천석급이 넘어가는 대형 전투함이였다.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 너무나 군사력이 막강해진 지방 영주들의 군사반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9] 물론 여기에는 지방 영주의 군사력 및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도 숨어있었다. [10] 관광상품으로 재현된 것도 있다. # [11] 주로 혼슈 서부와 규슈지역 다이묘들의 군함, 특히 '카와 고자부네'라고 부르는 하천운항용 선박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12] 그래도 안택선은 실제 형태와 어느 정도 비슷하게는 나왔다. [13] 하지만 사실 명량대첩에서는 물살이 세서 왜선들이 가깝게 접근하지 못했다고 하니 딱히 고증에 어긋난 것은 아니다. 한산도 해전에서는 아예 학익진을 치고 돌진하는 왜선에 화포를 쏴대서 승리했으므로 마찬가지로 공성장면은 나올 수 없었을 테고 노량 해전에서는 도망치는 와중이었으니 이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런 장면은 칠천량 해전에서 가장 많이 나왔을 것이다.하지만 누가 미쳤다고 칠천량 해전을 영화로 만들까. [14] 영어로는 Siege Tower Bune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