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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00:23:04

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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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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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종류의 승자총통 사진의 모델은 선조 시기에 개발한 후기형 버전이다.
1. 개요2. 개발사3. 구조 및 운용법
3.1. 구조3.2. 운용법
4. 종류
4.1. 중구경 개인총통4.2. 대구경 개인총통4.3. 기병들의 총통
5. 발사체
5.1. 대형 관통 화살5.2. 철환 및 소형화살 사격5.3. 근접 파편사격
6.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7. 역사적 전투력과 묘사
7.1. 전투영상: 조선초기의 대규모 교전 묘사7.2. 목적변경: 화승총 전래 이후의 평가7.3. 번외편: 승자총통의 복수
8. 현대의 평가9. 미디어10. 여담11.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에서 사용한 핸드 캐논의 일종인 개인화기. 대량의 철환을 장전하여 산탄총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용하거나, 소수의 철환을 장전하여 소총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용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 피령목전(皮翎木箭; 대형 화살)을 장전하여 방벽을 깨는 등 대물 사격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사용했던 일총통, 이총통, 삼총통을 가늘고 길게 다듬어낸 형상을 하고 있으며[1], 구조적으로는 다른 국가의 핸드 캐논과 큰 차이는 없다.

조선의 다른 화포 규격이 천자문의 글자 순서[2]로 분류되는 것과 달리, 승자총통의 이름에 들어가는 이길 승(勝) 자는 천자문에 없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왜 '승자'가 붙었는지 알 수 없다.

선조 초기 여진족과 대결한 니탕개의 난에서 개인화기로서 화기가 없이 원시적 무장을 한 여진족을 상대로 큰 활약을 했으나, 이후에 벌어진 임진왜란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조총에 비해 원거리 교전에서 불리한 면을 많이 보여주면서 이후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조총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보병용 개인화기로서는 도태되었다.[3]

여기에 수군은 조총의 손잡이 + 탄환을 3개씩 장전하는 산탄 사격을 결합한 소승자총통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수군은 1593년 조총을 모방한 정철총통을 만들어 쓰기 전까지 이 소승자총통을 주력 개인화기로 삼았다.

애석하게 사극에서는 위험성이나 소품, 예산 등의 문제로 거의 등장한 적이 없는 비운의 무기이기도 하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등장한 적은 있다. 사극이 아닌 재현 다큐멘터리로 확장하면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행주대첩 편에서도 등장한다. 징비록(드라마)의 경우 깔끔하게 정철총통 도입 후엔 그냥 조총을 운용하는 걸로 묘사했고 변이중 화차가 등장하는 등 타 사극과는 다른 모습이 나온다.

2. 개발사

원래 조선군은 초기부터 다양한 개인화기를 운용했다. 중국이나 중동, 유럽 등지에서의 핸드 캐논 개발사와 유사하게, 대포를 축소해서 개인화기로 쓰고자 하는 시도가 일찍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 전기에 사용하던 개인화기는 흔히 생각하는 총과는 탄환의 개념이 살짝 달랐는데, 주로 철환보다는 화살형 발사체를 쏘는 데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총통으로 철환을 쏜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4], 뒷쪽을 총통 규격에 맞게 잘 깎아서 끼우면 발사체가 흘러내릴 염려 없이 발사가 가능했던 화살형 발사체와는 달리 철환은 약간만 밑으로 기울여도 탄환이 흘러내릴 염려가 있었고, 날개깃을 통해 탄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화살과는 달리 철환은 마구잡이로 날아간다는 점[5] 등을 고려하여 잘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은 주적인 왜구나 여진족을 상대로 야전을 벌이기보다는 성벽 위에서 수성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래쪽을 노리고 쏴야 할 때가 잦았고, 이런 상황에서는 흘러내릴 염려가 있는 철환보다는 잘 흘러내리지도 않고, 굳이 아래를 직접 조준하지 않더라도 안정적인 곡사 사격으로 얼마든지 아래쪽을 타격할 수 있는 화살형 발사체가 더 선호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종(조선) 대에 화약과 총통류가 일본에 유출되는 사고가 터지고[6], 경무장한 소규모 약탈자들이던 여진족들이 밀수를 통해 철갑을 입고 조직화되는 등 적들이 날로 강성해지자 조선 역시 기존의 개인화기로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고 화약과 총통류의 개량에 돌입했다.

기존에는 자체적인 개량만을 해왔으나, 중종~명종 대에 들어서는 외국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을 많이 보여준다. 주로 왜관을 통해 화약 관련 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인을 회유하거나, 일명 '황당선'이라고 불린 중국 밀수선을 잡아들인 후 화약 관련 기술이 있는 자를 색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때 일본 쪽에서는 기존보다 훨씬 뛰어난 품질의 화약을 만들어내는 기술[7]이 전수되었고, 중국 쪽에서는 개인화기에서 철환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및 노하우[8]가 전수되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서 나온 것이 바로 승자총통이다. 승자총통과 같은 신식 개인화기의 개발 자체는 화약이 일본에 유출된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성종 대인 것으로 보아 아무리 늦어도 최소한 중종(조선) 대부터는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신식 개인화기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화된 시기는 명종 대에 벌어진 을묘왜변이지만[9], 그 결과물인 승자총통은 이후 선조 대에 들어서 나타나게 되었다.

최초 개발자는 선조 때에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金墀)이다. 한 번에 철환 15개와 피령목전(皮翎木箭)을 발사하며 사거리가 600보에 달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개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록에는 1583년에 처음 보이며, 실물 유물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1573년(선조 6)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이전에 이미 개발된 듯하다. 광해군 대에 쓰여진 화기도감의궤에 따르면 이때 김지는 대, 중, 소 총 3가지의 승자총통을 개발했다고 하며, 실제로 소승자총통 등은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승자총통은 니탕개의 난 토벌뿐만 아니라 1588년(선조 21) 여진 정벌 당시에도 큰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3. 구조 및 운용법

3.1. 구조

길이는 대략 50~60cm, 무게는 3kg~5kg 정도이다. 비싼 청동합금으로 만들어서 안정성이 높았다. 포신에는 죽절이 나 있고 약실에는 심지를 넣는 부분이 있다. 장전 방식은 핸드 캐논답게 심지를 이용하여 매우 원시적이었다. 뒤쪽에 끼우는 나무 손잡이의 길이는 70~80cm 정도로서, 포 본체와 결합하면 길이가 110~200cm 내외에 달했다. 포 본체에 따로 소켓식 결속부가 있기 때문에 합치면 짧아진다.

3.2. 운용법

승자총통 방포에 대한 사료 영상이 지나치게 모자라다는 점을 한탄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10]
본격적인 장전 및 방포 과정은 1:15부터이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제작한 승자총통 장전 절차
기존 총통류에 쓰이던 격목이 토격으로 바뀌었다는걸 제외하면 기존 총통과 발사 과정의 유사성이 많다.

승자총통은 비록 조총에게 밀려난 무기이기는 하나, 운용법이 조총과 100% 일치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오오즈츠 같은 대구경 조총과 흡사한 면도 있었다. 당시 조선에 이라는 개념 자체가 따로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11] 승자총통의 목적은 적병의 갑옷을 관통하여 타격을 입히는 식으로 활의 연사력 대비 부족한 펀치력을 보조하고, 피령목전 등 화살 형상의 대형 발사체를 활용하면 방패나 운제, 누각 등 대형 목표물에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종합적인 무기체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승자총통이 일방적인 화승총의 하위호환 개념이라고 보기는 힘든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총에게 밀려난 것은, 애매하게 만능인 승자총통보다는 확실한 성능 하나에 집중한 조총이 실질적으로는 전쟁터에서 더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승자총통의 산탄 사격이 근접전 한정으로는 막강했지만, 그 외의 모든 거리에서는 가늠자와 방아쇠의 조합으로 명중률이 높았던 조총에게 밀렸다. 피령목전으로 보병 혼자서 상대방의 대형 구조물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건 좋으나, 이미 천자총통 등 그 목적에 훨씬 적합한 대구경 화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던 조선군의 입장을 감안하면 그 장점이 과연 균형 잡힌 조총을 배제하고서라도 가져야만 하는 장점이었을지는 의문이다. 이는 한국군이 모든 소총수에게 유탄발사기를 지급하지 않고, 적은 수의 유탄수를 따로 두고 그 이상의 간접 사격 화력은 박격포를 통해 제공하는 교리를 짜는 이유와 동일하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핸드 캐논류는 위급시 폴암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조선 초기에 개발된 핸드 캐논들 역시 그 모양이나 설계상 급박한 상황에서 철퇴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현대전에서도 급하면 헬멧, 야삽, 주먹 등을 동원해 싸우니, 화력이 제한적이었던 중세에는 근접무기의 효용도 필요했다.

다만, 총에 가까운 후기형 승자총통들은 내구성이 약해서 철퇴로 쓰면 금방 구부러졌다. 또한 승자총통을 비롯한 여말선초의 총통들은 값비싼 청동합금(당연히 철보다 비싸다)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철퇴로서의 용법을 주로 사용하기보단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으로 쓰는 정도로 추측한다. 아예 대놓고 철퇴로서의 용도를 겸하게 만든 것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들어온 핸드 캐논인 쾌창. 이 쾌창은 아예 재질부터 청동합금이 아니라 쇠로 만들어졌으며, 사용법도 중근거리에서 장전해 놓은 산탄을 한 방 쏜 뒤 돌격해서 근접병기로 쓰는 것이다.

4. 종류

4.1. 중구경 개인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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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자포 (위) / 5연자포 (아래)

3연자포, 5연자포. 10연자포도 있었다. 주로 수레, 화차, 성벽에 매달아서 쏘았다. 총신을 하나씩 뒤로 넘기거나 분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사용한 포신을 빼서 재장전했다고 한다.[12]

4.2. 대구경 개인총통

일종의 원시적인 로켓 런처와 비슷하며, 원거리에서는 화살 모양의 대형 발사체를 쐈다. 근접 상황에서는 다수의 철환으로 근접한 적의 방진을 타격하는 대형 샷건처럼 사용했다. 국궁이나 조총의 화력이 부족할 때 이를 훌륭하게 보완해줄 수 있었기에 이후에도 화승총에 밀려나지 않고 근대적인 개수를 거친 후기형들이 개발되었다.
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CP0208312321_f00001.gif }}} ||
사진은 중백자총통이다.
총길이가 98cm에 달하는, 대형총통과 개인화포의 사이에 있는 개인화기였다. 탄환은 5발씩 넣고 쏘았으므로 효율은 떨어졌으나 위력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부터 명나라에서 도입하여 시험과목으로도 편성했을 정도로 중요한 화력지원무기가 되었다. 편곤처럼 명나라에서 수입했지만 조선군에서 더욱 강조하면서 다양한 개조형이 나왔던 무기 중의 하나이다.

4.3. 기병들의 총통

기병들이 사용하기 위한 초소형 개인총통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효율성은 그다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기병들의 총통은 조선 중기에는 이미 신기전과 함께 신호용으로나 사용되는 신세였다. 삼혈포, 쌍안총, 신제총통 같은 종류가 있다. 잘 쓰지 않아서 상태가 좋지 않은 유물만 몇 점 남아있다.

화승총 도입 이후에는 조총의 개머리판을 단축한 마상총이 등장하고 조선 기병들에게 보급되면서 대체되었다. 그렇게 궁기병이 남아있던 조선 기병도 1700년대로 들어서자 다들 총기병으로 대체되었다.

5. 발사체

승자총통 및 조선 전기의 핸드캐논의 사격법은 종류에 따라서, 크게 3가지로 특화되어 있었다.
  1. 방패 파괴용 대형 화살 1개를 쏘는 바주카 방식.
  2. 1~5개의 쇠구슬 혹은 소형화살 4~8개를 넣어서 소형타겟을 살상하는 화승총과 비슷한 방식.
  3. 10~20발의 소형 쇠구슬을 넣어서 블런더버스처럼 근접하여 파편 충격을 주는 방식.

5.1. 대형 관통 화살

보병이 쏘는 화살 모양의 발사체이다. 총류탄을 생각하면 그 운용법을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다. 세전/피령전/총통전으로 발사하는 화기에 따라서 명칭과 종류가 다양했다. 개인화포에서 화살을 쏨으로서 핸드 캐논의 화력(화약량)을 온전히 사거리로 돌리는 운영법인 만큼, 기록을 보면 대구경 개인총통에서 쏘는 피령전의 사거리는 최대 600보,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480M 이상에 달하는 종류도 있었다. 화약 에너지가 대부분 사거리로 전환되는 만큼, 비거리 자체는 동 시대의 화승총보다 길었던 경우가 많다.

대인 살상보다는 주로 방패 같은 적의 구조물을 파괴하는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편차 사격이나 곡사 따위를 해야 하는 관계로 조준이나 반동제어가 어렵고, 표준 규격이 없고 장인 개인의 감에 의존하는 전근대 사회의 특성상 화살 모양 발사체의 규격이 들쭉날쭉했으므로 에너지 효율이 심각하게 분산되는 문제가 있었다. 즉, 개인화기로서의 신뢰성은 철환 사격보다 비효율적이고, 탄두의 파괴력은 대형총통에서 발사하는 대장군전의 위력에 비교해서 부족한 발사법이었다. 물론, 현대의 바주카 혹은 RPG-7처럼 보병들의 특수화기로서는 쓸만했으나, 일반 병사들의 메인 전투 화기로서는 약간 비효율적인 기능이었다.[18]

그럼에도 보병 혼자서 들고 다니는 소화기만으로도 원거리에서 적의 구조물을 파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조선 중기까지는 특수화기 개념으로 존속되었다. 그러나, 철환 사격으로도 살상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발전이 계속 이루어지자, 구조물 파괴 역할은 이전보다 강력한 대형 탄환을 1~300m 내외까지 발사하는 대형 화승총과 유사한 방식으로 결합된 후기형 소형 총통으로 발전했다.

5.2. 철환 및 소형화살 사격

쇠구슬 3~5개 혹은 소형 화살 4~8발을 발사하여 일반적인 개인화기처럼 보병과 기병 같은 소형 타겟을 살상하는 매우 일반적인 운용법이었다.

요컨대 화승총 등장 직전의 개인화기들의 주력 사격법이었다. 살상거리는 30~50m 정도였다. 또한, 조선시대의 개인화기 중에서도 포신이 1m에 달하는 대구경 개인화기들도 이런 일반적인 사격법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것들은 외국의 대형 화승총인 오오즈츠와 월건(Wall-gun)을 상회하는 위력으로 훨씬 다양한 탄종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조선군이 임진왜란에서 양산형 화승총의 효율성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대형 조총에는 평범한 반응을 보인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무기의 신뢰성과 명중률 등등 여러 분야에 있어서는 화승총이 훨씬 유리했기에 이러한 사격 방식은 조총의 도입 이후 도태되었다.

5.3. 근접 파편사격

조란환 10여발 이상, 대량의 화약을 넣어서 완벽하게 근접전에 올인하는 방식이다. 화약과 탄환을 많이 넣으므로 충격력은 강력하지만, 유효 사거리가 20m 이하라서 사실상 근접한 적의 방진에 파편을 끼얹는 방법에 가깝다. 현대인들의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보면 터무니 없이 사정거리가 짧지만, 이런 근접 파편사격은 갑옷을 입은 보병, 기병의 대열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서 중세시대에 널리 쓰인 방식이었다.

다만 다수의 쇠구슬들이 비거리가 짧고 불확실했으며, 훨씬 폭장력이 약한 조총으로도 충분한 관통력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오버파워라서 효율성은 떨어졌다. 다만, 수성전에서는 어차피 공격 측에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동안 방어자 측에서 근접전에 집중한 화력을 쏟아붓기 쉬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육상 전투가 수성전이었던 임진왜란 때까지는 유용하게 잘 쓰였다.[19]

6. 무기 역사에서의 가치

조총의 등장 이후의 개인화기, 즉 의 가장 큰 목적은 보병 제압이다. 승자총통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부터 사용했던 화포를 소형화해서 보병끼리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승자총통은 임진왜란에서 총으로서 편의성 및 정확도를 어느 정도 달성한 조총을 만났다. 덕분에, 화약무기의 설계이념이 이룬 발전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패배를 달성했다. 무기 발전의 역사에서 총의 가치를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유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승자총통은 핸드 캐논 사이에 걸친 무기의 마지막 도달점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이런 승자총통에도 장점은 있었다.
  1. 갑주를 입은 보병들과 인마를 충격으로 무너트리는 샷건+폴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2. 대형 승자포들은 화살탄을 이용한 원거리 타격, 대형 샷건식 운영을 통해서 조총보다 파괴력이 뛰어났다.
  3. 수레에 여러 대를 싣어서 화차를 만들거나, 성벽 같은 지형지물에 장착하여 수비용 무기로서 응용이 가능했다.
  4. 나름 늘씬한 외형으로 운반이 쉽고, 유사시 균형 잡힌 철퇴로서 사용하기에 편리했다.

현대 연구가들에게서도 조총 이전의 핸드 캐논이 가진 미덕으로만 평가하면 그럭저럭 잘 다듬어진 형태라고 평가받는다. 3종류 가량의 발사법으로 각 상황에 맞춘 운용을 고려하고, 급박하게 전쟁이 터진 직후에 농성전이라도 그럭저럭 이길 수 있게 만들었던 무기라는 것이다.[20]

이라는 무기의 발전사에서 보면 결국 시대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한 구식 무기였지만[21], 당시 한정된 기술과 경험을 가진 조선군의 역량으로는 최선의 결과물을 뽑아낸 것이며 최소한 밥값은 해냈던 무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사자들도 전쟁 도중에 화기를 조총으로 교체하는 타당한 행동을 보였다.

7. 역사적 전투력과 묘사

7.1. 전투영상: 조선초기의 대규모 교전 묘사

이시애의 난 중 발생한 만령 전투에 대해 묘사한 국립진주박물관의 영상
승자총통으로 대표되는 고려 말과 조선 전기의 개인용 총통은 화승총이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의외로 세련되고 강력한 무기체계였다. 때문에, 핸드 캐논의 전성시대였던 조선 초기에는 지금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위의 영상에서 1:20~1:40까지는 바주카포 형태처럼 사용하는 대형 화살을 쏘아서, 적의 방패를 파괴하는데 전술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1:45 부터는 연발식 총통 화차가 등장하여 장거리 지원 사격을 하면서, 적이 전력을 유지할 수 없도록 다연장 화력 투사를 하는데도 사용되는 묘사를 볼 수 있다.

참고로, 위의 만령 전투는 현실에서 조선군과 조선군 양쪽이 개인총통을 운용했던 대규모 화약 전투였다. 영상을 정독하면 카탈로그와 전술적인 운용을 알 수 있는데, 당시에는 이시애의 반란군과 세조의 진압군이 무려 수백개의 핸드 캐논[22]을 동원하여, 바주카 형태, 화차 형태 등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술적으로 응용하였다. 바주카 형태의 사용법으로는 적의 방패를 깨부수고, 화차 형태의 사용법으로는 뚫는 것이 막막한 방어진에 대규모 원거리 포격을 하여 적이 진영 자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도록 몰아붙이는 등등, 화력덕후 기질을 보여주는데 잘 사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7.2. 목적변경: 화승총 전래 이후의 평가

임진왜란 당시 승자총통과 조총의 장단점을 다룬 국립진주박물관의 영상

임진왜란 개전 초기 진주성 전투 이치 전투 등에서는 승자총통이 크게 활약했다. 조선이 만성적으로 화약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자총통 이상급의 대형 화포만 가지고 수만 명의 일본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활이나 투석구만 가지고 성벽으로 기어 올라오는 갑옷 입은 수만 명을 저지한다는 것도 어려운 이야기다. 실제로 행주산성에서는 행주 대첩 당시 수많은 일본군이 승자총통과 그를 활용한 화차 공격에 곤죽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일본군 총대장이었던 우키타 히데이에가 승자총통을 활용한 화차에게 공격당해 벌집이 되어 죽다 살아나기까지 했다. 진주성에서도 일본군 조총부대가 승자총통에 조기에 무력화되어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다.[23]

이렇듯 승자총통이 무조건 조총에 비해 뒤떨어졌던 것은 아니며 산탄 사격이라는 특성상 근접전에서는 더 유리한 면이 있었고, 이 때문에 공격 측이 성벽을 기어오르느라 근접 사격전이 자주 펼쳐졌던 수성전에서는 상당히 널리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유용하다는 이유로 산탄총이 널리 쓰였다고 해서 군대의 제식 소총을 산탄총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듯이, 특정 상황에서만 확실한 우위를 가지고 전반적으로는 조총에 비해 사용하기 불편했던 승자총통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24]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도중에 2만 정의 조총 명나라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했고, 순식간에 전국의 주력부대에게 보급했다. 조선시대의 사용자들도 보병에게 어설픈 다목적 무기를 지급하는 것보다는, 그냥 개인 병사끼리의 살상력이 높은 화승총을 지급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일본군이 위력적으로 생각했던 대형조총(오오즈츠)에 대해서는[25] 선조실록에서 수군은 이미 포가 많아서 쓸모없을 테니 육군에나 좀 더 만들어줘라고 말하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즉, 일본군이 위력적으로 생각했던 대형 화승총은 당시 대구경 화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던 조선군으로서는 그다지 특별한 무기가 아니었다. 조선에서 화승총에게서 얻은 교훈은 편리하고 뛰어난 개인용 전투 무기를 최대한 많은 병사들에게 보급할 수 있어야 전쟁에서 이긴다는 깨달음이었다.

여담으로, 조선과는 반대로, 일본은 임진왜란 동안 조선에서 대형 화포의 위력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왜란 도중에도 조선군이나 명군으로부터 노획하거나 서양으로부터 수입하는 등 나름대로 화포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많이 보여줬으며,[26] 1611년에 들어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처음으로 일본제 화포를 주조하기에 이른다. 이후 일본제 화포는 오사카 전투에서 첫 데뷔전을 치른다.[27]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개전 후의 조선에서는 불과 1년여 시점에서 조금이나마 승전을 거두는 상당수의 조선 주력부대가 화승총을 운용하는 상태였다. 심지어는 전쟁 후반에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조선의 정규군 대부분이 화승총으로 무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당장 노량 해전에서도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모두 조총을 운용했고 배에 사다리를 놓는 근접전으로 가면서 상호 조총을 난사하고 칼싸움을 하는 등 개싸움이 벌어졌으며 이순신도 이 때 조총 사거리에 들어와버려 결국 전사했다.[28]

참고로, 승자총통의 '위력이 약해서' 버려졌다는 잘못된 군사적 교훈이 퍼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화기의 성능=위력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승자총통 등의 핸드 캐논식 총통은 화약이 조총보다 더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화력 자체는 조총보다 더 강력했으며, 산탄을 사격할 경우 근접전에서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원화기와 개인화기 사이에 걸친 무기라는 애매한 활용법 때문에 화승총에 비하면 보병의 기본무장으로는 비효율적이었다.

다만 어쨌든 위력 하나만큼은 확실히 조총보다 우월했기에 조선의 핸드 캐논식 총통들은 임진왜란 이후 바주카 오르간 건 방식으로 개량되어서 화승총과 함께 사르후 전투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지원화기로서 공존했으며, 구한말 서양 열강의 침략 당시에도 지원화기로서 활약했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 기록에도 승자총통과 유사한 핸드 캐논식 총통이 등장한다. 동조총(銅鳥銃), 동소총(銅小銃), 승자동포(勝字銅砲)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현재 남아있는 승자총통 유물 중에는 임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강칠 교수의 저서 '한국의 화포'에 실려있는 사진/실측자료를 보면 기술적인 차이를 화력의 향상으로 메꾸기 위해 총에 두른 죽절과 약실이 더 두꺼워지고, 총 자체도 약간 크고 튼튼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29] 이렇게 생긴 모양이었다.
승자총통의 장점 및 조총과의 비교와 단점에 대한 영상.
개화문부터 폐화문까지의 과정 때문에 장전속도에서 조총이 밀리긴 했지만.[30]
역으로 승자총통은 지화식 화기인 탓에 타이밍 조절과 움직이는 표적을 계속 조준하는 것에 실패해서 명중률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천자총통, 현자총통 같은 대형화포에 비하면 인기가 밀리는 편이고, 대중매체에서도 거의 등장한 적이 없어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이상 승자총통은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31]

현대에 제조되는 사제총기들의 원리가 승자총통이나 대조총과 비슷하다. 사제총기들의 경우 정규군의 제식화기보단 당연히 위력이 떨어지지만 위력만큼은 상당히 강한 편이라서 경찰 관계자들도 압수하고 쏴 본 뒤 놀라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만큼 연사력은 떨어지지만, 한국처럼 경찰이 리볼버식 권총을 사용하는 국가들은 그러한 원시적인 총기만으로도 상당한 위협이 되는 편. 당장 아베 신조를 암살한 사제총기 역시 연사력은 떨어져도 위력은 강했다.

7.3. 번외편: 승자총통의 복수

위처럼, 화승총에 당해본 이후에는, 조선군에서도 개인화기로서 성능이 떨어진다며 조총을 순식간에 전병력에게 양산하면서 밀려난 개인화기이다. 하지만, 위력과 살상력 자체는 전혀 나쁘지 않았고, 특히 근접전에서 산탄을 발사할때의 위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백병전을 차단할 수 있는 판옥선 화차에서는 잘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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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개인화기로서는 쓸모없어진 승자총통 40문을 장착하여 만들어낸 화차 전투마차인 변이중 화차의 모습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도태되어 가는 구식 무기를 현명하게 재활용한 사례에 가깝지 승자총통이 조총에게 우위를 점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란 이후 조선이 승자총통 등 핸드 캐논식 총통을 원래의 용도인 보병용 소화기로서는 도태시킨 뒤 지원화기로 용도를 변경하고, 조총 위주로 편제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만 봐도 당대 사람들이 조총이 더 유용했다고 판단한 것을 알 수 있다.

8. 현대의 평가

현대전에서는 전 세계의 모든 군대가 돌격소총 제식 소총으로 사용한다. 산탄총, 유탄발사기, 중기관총 등 화력만 놓고 보면 돌격소총을 아득히 뛰어넘는 보병용 화기는 넘쳐나지만, 그 이유로 돌격소총이 아닌 다른 화기를 제식 소총으로 도입하는 군대는 없다. 위력만큼은 상당했던 승자총통이 조총에게 밀려난 것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

위력 자체는 훌륭했기에 지원화기로서는 꽤 유용했고, 상황에 따라서는 조총을 이긴 경우도 꽤 많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보병용 소화기라는 개념과 목적에서 조총에게 확실히 밀렸다. 군에서 사용하는 보병용 소화기는 단순히 위력만 강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명중률, 범용성, 제작 및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 사용자의 숙련도에 따른 성능의 차이, 사용 난이도 등 종합적으로 모든 면을 다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승자총통은 가늠자나 가늠쇠, 개머리판 등 정확한 조준에 필요한 필수적인 부품들이 없었기 때문에 명중률이 낮았으며, 방아쇠도 없어서 사수가 원하는 타이밍에 즉시 격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32] 이 때문에 조총에 비해 명중률 면에서 많이 불리했다. 그리고 승자총통은 구조적으로 대형 화포와 같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구리가 많이 소모되는데, 구리는 전근대나 현재나 매우 비싼 물자였기 때문에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다. 여기에 위력이 강한 만큼 화약을 많이 소모하는데, 한반도는 염초가 바닥에서 솟아나는 인도나 유황이 풍부한 화산지대를 가진 나라들과는 달리 자연 환경에서 자체적으로 화약 재료가 나오는 곳이 없기 때문에 조선은 존속 기간 내내 화약 부족에 허덕여야만 했다. 반면 조총은 제작 과정에 들어가는 구리의 양, 한 번 발사할 때 필요한 화약의 양 모두 승자총통보다 훨씬 적었다.

결국 승자총통 등 핸드 캐논을 써서 조총을 이긴 사례들은 그 전투를 지휘한 사람들의 역량이 뛰어났거나[33], 혹은 그 전투가 벌어진 장소가 승자총통에게 유리한 환경을 강요할 수 있었던 곳이었던 경우[34]가 대부분이었다.

즉 승자총통은 강력한 위력에 조총에게 꿀리지 않는 상당한 사거리, 소승자총통 한정으로는 가늠자와 가늠쇠, 조총과 유사한 목제 몸통 등 사실상 핸드 캐논에서 화승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상까지 갖추는 등 여러모로 핸드 캐논으로서는 대단한 완성도를 자랑했으나, 결국 핸드 캐논에서 그쳤기 때문에 이미 화승총이 등장한 이상[35] 군용 무기로서의 수명은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록 핸드 캐논이 구식이기는 했으나 완전히 도태되지는 않았던 시대에 나타난 덕분에, 조총에게 밀려나면서도 어느 정도는 제 몫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9. 미디어

10. 여담

임진왜란 기록에는 조총 쇼크가 반드시 등장하는데, 과거에는 사극에서 "조선에는 총이 없어서 처음으로 총을 보고 놀랐다!" 라는 잘못된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은 초기부터 핸드 캐논과 갖가지 화포들을 양산하여 배치한 국가였다. 즉, 임진왜란 당시의 조총 쇼크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북방에서 널리 활약하면서 이보다 좋은 개인화기는 없다고 자신했던 승자총통을 비롯한 핸드 캐논식 총통으로는 일본군의 조총부대에게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여기서 오는 충격이라고 해석해야 정확하다.

이는 일본군이 처음 진입한 경상도가 조선 입장에서는 최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가까웠다는 점도 한몫했는데,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가 확 줄어들면서 남쪽에서는 군사적 위협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도 삼포왜란, 을묘왜변 등이 터지긴 했으나, 이때 들어온 왜구들은 정규군이 아니다 보니 소수의 기병 돌격에도 무너질 정도로 오합지졸들이어서 여전히 남쪽 지방을 최전선 취급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들어온 일본군은 숫자부터가 수만 명이었고 다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정예 보병들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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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김씨 묘 출토 승자총통
1574년에 사망한 연안 김씨 여성의 묘에 3문이 부장품으로 묻혀있는게 발견됐다. 하나는 장전된 상태였고 보존상태는 모두 좋다. 물론 옷이나 자기, 베개 같은 평범한 부장품도 같이 있었다. 여기서 해당 묘에서 발굴된 승자총통과 복식에 대해서 볼 수 있다.

문제는 묘역이 형성된 시기가 김지가 승자총통을 제작한 시점과 비슷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막 실전배치되기 시작한, 민간인이라면 구하기도 힘들었을 최신무기를 부장품으로 묻은 셈이다. 대체 어떻게 구해서 왜 묻었는지는 미스터리. 게다가 화약 대신 숯가루가 장전돼있었다고 한다. 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 책자에서는 요괴를 쫒기 위한 벽사용으로 묻은 걸로 추정했다.

11. 관련 문서



[1] 총신이 길면 그만큼 명중률이 올라가기 때문에 이런 형상으로 개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 천-지-현-황…으로 나뉜다. [3] 군용 장비에서 완전히 도태된 것은 아니고, 화차에 실려서 총알 세례를 퍼붓는 용도로 쓰이는 등 원래의 용도를 잃고 다른 용도로 바뀌어 나간 것에 가깝다. [4] 대구경 총통들은 조선 전기부터 철로 만들어진 대형 포탄을 잘만 쏴댔고, 핸드 캐논식 총통 역시 철환을 쏘려면 쏠 수는 있었다. [5] 15~16세기에 사용된 원시적인 개인화기들은 총신 내부에 강선도 없었고, 비비탄 총알마냥 동그란 형상 때문에 탄환이 약간만 멀어져도 무분별하게 흩어졌다. 특히 승자총통을 비롯한 핸드 캐논류 화기들은 총신이 조총을 위시한 화승총에 비해 훨씬 짧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더 심했다. [6] 이때 유출된 화약무기를 두고 이후 을묘왜변 당시 왜구가 화약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된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는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이 쏜 총을 조총으로 추측하는 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당시 일본은 아직 다이묘들도 조총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왜구들이 다이묘들보다 앞서서 최신 병기로 무장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보는 추측도 있다. [7] 명종 10년 5월 21일 갑인 1번째 기사 - 비변사가 아뢰기를, "일본(日本)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가지고 온 총통(銃筒)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도 또한 맹렬합니다.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그의 원대로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8] 탄환을 여러 개 집어넣어 산탄 사격을 가해 탄막을 형성하는 식으로 떨어지는 명중률을 보완하는 것이다. [9]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은 기존의 왜구와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머릿수부터가 수천 단위로 많아봐야 수백 단위로 나타났던 과거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많아졌으며, 기만작전을 펼치거나 깃발을 활용해 조직적인 명령 전달 체계를 갖추는 등 여러모로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유사하게 정규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보다 조선 측에서 더 심각하게 여긴 것은 왜구가 화약무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을묘왜변 이전까지는 일본의 화약 관련 기술이 아예 없거나 부족했기 때문에 왜구들이 냉병기로만 무장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군이 압도적인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나, 이때부터는 상황이 바뀌면서 조선군의 화력 우위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10] 실제 승자총통의 다큐멘터리는 유튜브에서도 셋이나 찾아볼 수 있으나 정작 실제 운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방포 실험한 영상은 없고 끽해야 화력실험이 고작이었다는 점에서 한탄할 만한 점이긴 하다. 단, 제작자 역시 사료 부족의 한계로 일부는 추측으로 때운 부분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1] 애초 그 銃이라는 단어가 총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화기를 다 싸잡아 총통으로 일컫고 구경 별로 천자/지자/황자/승자 등으로 나눠 개인화기와 공용화기를 구분했다. [12] 비슷한 무기로 서양의 오르간 건개인 화기용으로 개발된 덕 풋 피스톨이 있다. [13] 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6월 11일 신유 3번째 기사에서는 고(故) 병사(兵使) 김지(金墀)가 새로 만든 승자총통(勝字銃筒)이 지금 북방의 사변에서 적을 물리칠 때 많은 힘이 되고 있으므로, 상이 그에게 증직(贈職)을 명하고 또 그의 아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는 니탕개의 난이 아직 진행 중일 때인데, 김지를 고(故), 즉 사망한 것으로 적고 있다. [14] 명종 10년, 을묘왜변이 발생하기 20여 일 전 시점의 명종실록을 보면 평장친이라는 왜인이 지극히 정교한 총통과 맹렬한 화약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황상 이 총통이 조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5] 1~3알이라고 적은 이유는 기록마다 장전하는 총알의 개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화기도감의궤에서는 1발을 장전한다고 되어 있는 반면 화포식언해에서는 3발이라고 되어 있다. [16] 임진장초, 1593년 8월 장계 [17] 9월 14일(10월 8일). 종일 비가 오고 큰 바람이 불었다. 홀로 장대의 창가에 앉았으니 생각이 천갈래 만갈래다. 순천부사가 들어왔다. 정철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하였다. 온갖 연구를 하여 이제야 새로 총을 만드니 왜의 총보다도 나았다. 명나라 사람들이 와 진중에서 시험사격을 해보고는 정밀하기가 왜총보다 낫다고 말하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미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내에서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좋겠기에 순찰사와 병사에게 공문을 돌리고 견본도 보냈다. 난중일기, 1593년 9월 14일 [18] 중세의 기술력으로는 화살 형태의 포탄이 쇠구슬보다는 훨씬 뛰어난 성능이 발휘되었음에도 잘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경제적인 비효율성과 낮은 공업기술 때문에 오차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화살 형태의 포탄은 화포에서 쏠 수 있는 특수한 화살이라서 쇠구슬과 달리 대량생산이 어렵고 일일이 구경에 맞추어서 잘 깎아야 했다. 그런데, 핸드캐논은 고정된 타겟이 아니면 잘 맞지 않는 무기였으므로 결국 살상용으로는 근접해서 발사해야 했으며, 경제적으로 훨씬 저렴하고 위력이 일정한 쇠구슬에 비해서 근접전에서는 차이가 별로 없었다. 때문에, 화살 형태의 포탄은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그나마, 조선은 산악지형이 많아서 비거리가 뛰어난 포탄의 수요가 높았고, 워낙에 저격을 사랑한 국가였으므로 화살 포탄을 일일이 깎아서 만들만큼 평화시대의 여유가 있어서 이런 사용법이 오랫동안 유지된 케이스였다. [19] 유럽 군대도 방어전에서 종종 사용한 방식이다. 강선총이 대세가 된 남북전쟁 시기까지 활강식 머스킷에 작은 탄환 여러개를 넣어서 충격력을 극대화 했다. [20] 심지어 공성전에서도 500명 가량의 기병대를 대동하여 마상궁술로 지속피해를 입히고, 쌍자총통과 함께 폭약통인 질려통 등 화기들을 들고나와 결국 일본군 탄약고까지 날려버린 조선 관군-의병 연합군이 이겼다. [21] 시간이 지나 서구권은 15세기 말에 화승총을 도입했으며, 그 이전에도 주류는 아니었지만 원시적인 방아쇠와 개머리판을 도입하여 승자총통보다 구조적으로 더 진보된 핸드 캐논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은 그냥 승자총통이랑 비슷했지만 서구권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역시 16세기 중반쯤부터는 다들 화승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물론 조선은 지정학적 환경상 서구권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타국과 일대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22] 영상에서 언급한 기록상으로만 양쪽이 최소한 1,000개는 될법한 개인화기를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덤으로 반란군 진압이 끝나고 북방에 재보급해준 구조물 파괴용 대형화살(차중전=세전=피령전)들은 대략 5,000발인데, 시대상을 감안했을때는 몇천명 정도의 전투 규모에 비해서 양측의 조선군들이 사용했던 개인화기의 비율 및 전술적인 사용법이 굉장히 체계적이다. [23] 김시민 장군은 성 내외를 둘러보던 중 시체더미 속에서 죽은 척 하고 숨어있던 일본 조총병의 저격에 의해 전투 4일째에 순국하였다. 대중매체의 묘사처럼 전투가 한참일 때가 아니었다. [24] 이 때문에 조선군은 임진왜란 당시 보병용 소화기에서는 일본군보다 불리했으나, 대신 천자총통 같은 대구경 화포나 화차로 대표되는 강력한 지원화기 등을 통해 오히려 일본군을 화력으로 압도하기도 했기 때문에 '화력이 밀려서' 전세가 기울어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당시 일본군이 전국시대를 통해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동아시아 최정예 보병들이었던지라 군사들의 숙련도 차이 때문에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25] 화포를 도입하지 않은 일본은 이 대조총을 화포 대용으로 사용했다. [26] 이 때문에 왜란 초기가 지난 이후에는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일본군이 군함에서 화포를 쏘았음을 언급하기도 한다. [27] 임진왜란 당시까지 일본의 화포는 소수의 포르투갈 컬버린등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 인신매매가 유행했는데, 다이묘(주로 간사이 지역 영주들이었다)들은, 히데요시가 세수확보에 악영향을 준다고 여겨 일본인 매매 금지령을 내려 대신 조선인을 잡아 팔기 전 까진 총 50만명의 일본인들을 서구 노예상에게 팔아치웠다고 한다. 당시 일본 여자 10명 = 화약통 1개로 교환되었다. [28]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원래 아군이 일본군의 조총 사거리에 들어오기 전에 조란환 등을 이용하여 일본 군함의 승조원들을 대량살상하여 조총으로 인한 피해를 원천 차단했으나, 노량 해전은 어두운 시간대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툭하면 야습을 거는 사극 속 묘사와는 달리 횃불 말고는 아무런 광원이 없는 전근대의 밤은 정말 칠흑같이 어둡기 때문에 기본적인 진형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서 야간에는 교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노량 해전은 그 몇 안 되는 전근대의 야간 전투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100% 살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29] 임란 이후의 재래식 소형화기들은 일본 대조총의 영향을 받아 조총이나 서양 핸드캐논과 유사한 개머리판을 장착하여 일반적인 보병의 화력 지원용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한말 신미양요 당시 미합중국 해군의 기록에도 조선군이 징겔(아시아의 핸드캐논류를 서양에서 부르던 이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30] 단 영상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구식 화약병기의 장전 과정은 큰 차이가 없고 속도는 개인 기량의 의존도가 큰 탓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31] 조선왕조 500년 같은 1980년대 1990년대 사극에서는 등장한 적이 있었다. 오히려 외환위기 이후로 등장이 뜸한 편인데, 최근에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간만에 등장했다. [32] 소승자총통은 가늠자와 가늠쇠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 역시 방아쇠가 없어서 한계가 있다. [33] 1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김시민이 승자총통을 든 병사들이 포함된 군사 1천 명으로 거창의 일본군을 격퇴한 적이 있다. [34] 행주 대첩 당시 행주산성은 그 근처의 환경적 특성상 일본군의 공격 루트가 매우 좁은 곳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덕분에 승자총통의 산탄 사격의 위력이 극대화되었다. [35]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이 화승총을 도입하기 쉬운 상황은 아니긴 했다. 동아시아에서 자체적으로 방아쇠가 달린 화승총을 만들어낸 사례는 없으며 중국이나 일본이나 서양인과 접촉하면서 화승총을 도입한 것인데,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서양 식민 거점으로부터 가까웠고 일본은 대만에서 출발하면 난세이 제도를 따라 자연스럽게 규슈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동남아시아, 대만의 식민 거점에서 출발한 유럽 배가 가기에는 너무 북쪽이었고, 난세이 제도처럼 길잡이 역할을 할 섬도 없었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접근하기 대단히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조총을 일찍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36] 심지어 이건 도화선 구멍이 여러 개라서 시간차 6연발 발사가 되는 더욱 미친 물건. [37] 총통이 3개가 묶어져 있는 총통이다. 조총의 조상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