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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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이치 전투 梨峙 戰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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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이치 전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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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592년 (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양력 8월 14일) 혹은 음력 8월 중하순[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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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조선 전라도 진산군 외곽 이치 (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산 79-34 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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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일본군의 전라도 진공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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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세)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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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지휘관 권율 (광주 목사) 황진 (선봉장) 황박 (후군장) † 권승경 (기병장) 공시억 (편비장) 위대기 (편비장) 노인 (경계부대장) 소황 (병참 운량사) 소제 (병참 운량사) |
지휘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군) |
병력 | 조선군: 1,500 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조선의 승리 | |
영향 | 일본의 후방 전선 안정화 실패 및 보급난 심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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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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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첩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지는 않지만 만일 이치가 뚫렸다면 그대로 조선군의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점령되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되면 전라좌우수영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해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지게 되므로 임진왜란 그 어느 대첩 못지 않게 그 의의는 실로 크다. 사실 나머지 두 대첩인 제1차 진주성 전투나 한산도 대첩도 이치 전투와 전략적 의미가 동일하다. 곡창지대 호남을 사수해 조선의 보급로를 유지하고 이순신의 수군과 권율의 육군이 후방 교란의 부담없이 왜군과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며, 전라도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호남,영남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 보급을 하여 병력열세를 극복한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공유한다.
국내에서는 어째서인지 임진왜란의 판도가 뒤집어 질 수도 있었던 매우 중요한 전투였지만 주목받지 못한다. 이치 전투의 장군 권율이 이후 행주대첩이라는 레전드 활약을 또 하는 바람에 묻힌 감[5]이 있는듯한데, 막상 권율은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 죽기 전 사위인 오성 이항복에게 이치 전투가 행주대첩보다 더 중요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로 이치 전투에서 왜군의 후퇴가 없었으면 행주대첩도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지어 이 전투에서 일선에 나서서 크게 활약한 장수도 황진인데 그 활약상 또한 대중들에게 큰 인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2. 배경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 전적지 위치도[6] |
이 전투를 알기 위해선 우선 왜란 초기 전라도 군의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월 27일 경상감사 김수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은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병력 5천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 구원에 나섰다. 4월 30일 곽영은 경상 우방어사 조경(趙儆), 군관 정기룡과 함께 금천역에서 교전을 벌여 수급 30여급을 얻고 5월 4일 전라도로 귀환했다. 이와 별도로 조방장 이유의(李由義)는 도순변사 신립에게 합류하기 위해 2천 명 남짓한 군사를 이끌고 북상했으나, 충청도 연산에서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에 따라 후퇴했다.[7]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평양으로 몽진하는 한편 보덕 심대(沈垈)를 이광에게 파견해 근왕병을 모으게 했다. 이보다 앞서 이광은 이미 전라도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근왕병 모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 부사 고경명에게 근왕을 권하는 격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도내에 유서를 돌리고 경상도에도 격문을 보냈다. 그리고 5월 1일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러나 충청도 공주에서 선조의 파천 소식을 접하자 이광은 근왕병을 해산시키는데, 장성현감 백수종, 고선현감 신경희, 광주 목사 권율, 전 첨사 백광언(白光彦)이 싸울 것을 건의했으나 듣지 않았다. 모여든 이들이 실망하고 인심은 몹시 흉흉하여 불안해지니 사람들은 앞으로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뜩이나 4월 30일 선조가 한양을 떠나 몽진길에 오르는 파천으로 민심이 급격히 이반된 상태였다. 왕조 국가에서 파천은 불가피하다지만 유교적 절대왕정인 조선에서 임금이 전란에 파천하자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경상감사 김수가 그랬듯 개전 이전 전쟁 준비로 도민들을 꽤나 들볶았던 전라감사 이광은 근왕을 포기한 일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때마침 근왕을 독려하는 조정의 교서가 도착하자 재차 근왕병을 모집해 나섰다. 전라도만이 온전히 보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근왕병 징집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각 고을에 할당된 군사들 숫자를 채우기 어려워 무리하게 징집하자 반발이 일어났다. 게다가 정여립 사건으로 지역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유림들이 대거 사라진 영향도 컸다.
순창과 옥과의 병사들이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이라는 인간들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순창 군수 김예국(金禮國)은 홀로 도망쳐 이광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기에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이 이끄는 부대가 전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공격받아 와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원, 구례, 순천의 군사 8천여 명도 전주에서 와해되었고 이광의 군관 옥경조(玉景祚)가 도망가는 병사들을 죽이며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또한 광주, 나주, 전주의 군사들이 용안에서 다들 도망가는 바람에 광주 목사 권율, 나주 목사 이경록, 전주 부윤 권수가 이들에게 소리치며 말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이광은 최원에게 전라도에 남아 반란을 진압케 한다. 최원이 남원 판관 노종령과 함께 순창에 도착했을때, 순창 군수 김예국이 조인을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한 후였다. 1592년 12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팔도의 일을 전라도가 다 맡아서 하느라 피폐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자신의 마음은 이미 죽고 형체만 남았다며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하였다.
근왕에 나선 이광은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과 경상감사 김수까지 합친 삼도근왕군이었다. 당시 경상도는 함락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목상으로만 모집해서 경상도 80명, 충청도 8천 명, 전라도 4만 명에 달하는 삼도근왕병이였다. 5월 26일 전라도 근왕군은 타도 근왕군들과 합류하여 삼도근왕군이 완성됐다. 숫자는 충분했으나 실전 경험이나 훈련도는 떨어지는 근왕군은 6월 5일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군과 교전했다. 아침밥을 짓던 도중 기병 수십 기에게 기습을 당하자 제대로 반격 한번 못 해보고 전장 공포에 휩쓸려 전면 패주했다. 이 사건이 용인전투이다.
이광은 6월 15일 전라도로 귀환했는데 이와 거의 동시에 전라병사 최원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김천일의 의병 2천 명과 함께 북상했다. 수만의 병력을 동원한 근왕에 2번이나 실패해 군사들이 대거 흩어진 상황에서 2만 2천을 더 차출해 보낸 탓에 당장 전라도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크게 줄었다.
왜군은 한양을 점령했으나 선조를 잡는 데는 실패하자 장기전에 대비해 전라도 지역을 장악할 필요를 느끼고는 5월부터 전라도로 칼끝을 돌렸다. 전라도 공격을 맡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우선 휘하의 승장 안고쿠지 에케이에게 전라감사를 자칭케하며 경상 우도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안고쿠지 군은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벌어진 곽재우 의병대와의 교전에서 패해 물러났다.
왜군의 공격을 감지한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을 금산에,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남원판관 노종령(盧從齡)은 팔량치(八良峙)[8]에, 곤양군수 이계정(李繼鄭)은 육십령(六十嶺)[9]에, 장흥부사 장의현(張義賢)은 부항령(釜項嶺)[10]에, 마지막으로 조방장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冬乙巨旨)[11]에 배치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6월 17일 무주 경계에 출현한 고바야카와 군은 6월 22일 금산의 제원에 도달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금산 군수 권종(權悰)[12]은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해,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금산을 점령한 고바야카와 군은 진안과 용담을 함락한 뒤 전주로 향하기 위해 남하했다. 무주에 왜군이 나타나자 팔량치를 지키던 이유의 노종령, 육십령을 지키던 이계정이 모두 도망쳤다. 여기에 남원부사 윤안성(尹安性)도 남원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광은 노종령을 붙잡아 곤장을 친 후 남원으로 돌려보냈다.
웅치에는 김제 군수 정담, 동복 현감 황진, 나주 판관 이복남, 전 전주 만호 황박이 방어선을 구축했고 금산 함락 소식을 듣고 남하한 고경명 의병대가 연산에 주둔했다. 곽영군은 고경명의 의병대와 합류해 금산 공격을 위해 나섰고 황진은 남쪽 장수 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 7월 5일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7월 7일, 왜군이 웅치로 밀어닥쳤다. 하루 종일 벌어진 교전 끝에 정담이 전사하고 이복남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에 방어선을 쳤다. 7월 8일, 때마침 황진의 군사가 합류해 교전을 벌였고 간신히 왜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13]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나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고경명 의병대가 금산의 왜군을 공격했으나 7월 10일 참패했고 고경명, 유팽로 등은 전사했다. 이것이 1차 금산 전투이다. 무려 6700명[14]의 의병 부대와 이들과 함께한 전라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와해되면서 전라도 군민은 한층 부족해진 병력으로 왜군의 2차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아래 알려진 시기 문제까지 고려하면, 조헌이 영규의 병력과 합쳐서 약 병력 1300-1500여 명을 말아먹은 제2차 금산전투도 이치 전투 이전 시기에 포함된다. 이 전투 두 번을 합쳐서 병력 8천 명 중 상당수가 날아가는데, 이에 따라 이치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은 총합이 2천 명이 채 안된다.
조선군 중에서 이 전투에 참가한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과 호남절의록에 근거하자면 권율, 황진, 황박, 권승경, 공시억, 위대기, 노인, 소황, 소제, 양응원, 신여국, 최희열, 김율, 박흥남, 박기수, 김엽, 김두남, 정사준, 양재현, 정충신, 김제민, 정봉수, 정홍수, 양대박, 나덕명, 최호, 김익수, 김경립, 김율, 김여숙 등이며, 이 중 양재현은 전사했고 정봉수는 당시 선전관으로 선조를 호송한 출신과 이름이 같은 병자호란 때 활약한 의병장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3. 전개 및 결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웅치 전투 이후 본대를 이끌고 이치로 진군하자 전주에 입성했던 권율은 황진과 함께 이치로 이동하여 목책과 장애물을 설치해 방어전을 준비한다.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부대를 2개 부대로 나누어 교대로 공격하면서 조선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했다. 일본군 부대가 장애물 지대를 통과하자 조선군은 화포로 일본군을 타격하고, 목책에 가까이 오자 화살과 돌 세례를 퍼부었다. 일본군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조총 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권율은 방어진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격려하였는데, 전투를 피하고 숨어있는 병사를 발견하면 몰래 그 병사의 군모에 표시를 한다음 일본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할 때 그 병사를 잡아 목을 베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군 전력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하고자 권율은 황진과 편장 공시억, 위대기에게 일부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당황하여 공격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황진의 활약이 눈부셨다. 황진은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샀던 일본도 2자루를 휘두르며 일본군을 베고 다니고, 상대가 멀리 있으면 강궁으로 적을 사살하였다. 일본군이 황진을 포위해 참살하려했으나 황진의 무용에 당해내지 못했고 결국 조총으로 일제사격을 가해 황진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다시 사기가 올라 조선군을 맹렬히 공격했고 결국 목책 일부가 무너져 내부로 일본군이 진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황진의 부상으로 사기가 주춤한 조선군은 사기가 더 떨어졌고 방어진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권율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잡아 즉결처분하면서, 몸소 일본군에 돌격하여 적병을 베며 사기를 독려했다. 한편으론 예비 병력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다시 방어진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오후 4시가 되도록 일본군은 조선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여기에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가 금산성으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들어오면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철수를 결정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말았다.
3.1. 논란
일반적으로 이치 전투는 7월 8일 웅치 전투와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알려졌다. 이는 선조수정실록과 임진전란사의 영향이다. 선조수정실록은 그 달에 있었던 일들을 긁어 모아 1일자로 적어두었는데 거기에 이 두 전투가 나란히 실렸다. 게다가 전산화가 되지 않아 사료를 분석할 때 무작정 책 펴놓고 읽어야 했던 1960년대 저작인 임진전란사가 두 전투를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서술하면서 그런 인식이 굳어졌다.금산과 이치 사이의 진산이 아닌 연산에 고경명 의병대가 7월 2일부터 주둔하였으나, 진산과 연산은 25 km 정도 떨어졌고 대둔산의 험한 줄기로 가로막혀 이치 전투에 고경명의 부대가 참전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고경명은 전라도 방위가 아니라 근왕을 외치면서 한양 공격을 위해서 북상을 시도했다가[15] 다시 금산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이치 전투가 벌어진 때를 두고 여러 사서가 서로 다른 시기를 전투개시 시점으로 기록하여 콕 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다. 확실한 사실은 웅치 전투와 같은 날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조에 7월 20일 왜군이 진산으로 내려와 관사를 불태우고 금산으로 돌아갔다고 적고 뒤에 전라도 관군의 병력 집결 현황 등 다른 내용을 적은 뒤에 다음 기사를 실었다.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이치 전투를 기록한 내용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기사를 근거로 이치 전투 개시 시점을 7월 20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또한 난중잡록 기사가 전해들은 내용을 후에 모아 적은 것임을 감안해 황진행장에서 황진이 이치에 배치되었다고 기록된 7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였으리라 추정하는 연구자도 있다.(곽호제, 2000년, 壬辰倭亂期 倭峙大捷의 意義와 再檢討, 충남사학)[16] 하지만 이는 난중잡록에서 왜군이 진산 관아를 불살랐다는 기사와 이치 전투를 연달아 벌어진 사건으로 본 것이다. 난중잡록 기사는 조경남이 체험한 것 이외의 부분은 전해듣거나 본 것을 한데 몰아 적은 게 많기에 진산 방화와 이치 전투도 연이은 사건이라 단언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선조수정실록에선 웅치 전투와 함께 7월 1일 기사에 실었으니 자세한 일시는 불명이나 어쨌든 7월에 일어났다고 적은 것이다. 웅치 전투에 참전했고 이치 전투에서 전사한 황박의 후손이 조상의 행적을 정리해 펴낸 죽봉황공유적(竹峯黃公遺蹟)에선 이치 전투와 황박이 전사한 시점을 8월 28일로 기록했다.[17] 권율의 행장과 행적을 담은 만취당실기(晩翠堂實記)에 실린 이치주첩서(梨峙奏捷書)에는 고경명과 조헌이 이미 순절했다 적어 2차 금산 전투가 벌어진 8월 18일 이후의 일로 기록했다. 조익의 포저집(浦渚集)에 실린 황진행장에선 7월 10일에 이치에 도착해 공시억, 위대기, 황박과 며칠간 지키다 왜군이 공격해 오자 교전을 벌였다고 적었다.
오희문이 전란을 피해 피난하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쇄미록(瑣尾錄)에선 광주 목사에서 나주 목사로 전임된 권율이 7월 15일 나주에서 장수로 향하다 7월 17일 태인군에 있던 이광의 부름을 받고 그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9일 기사에 7일부로 전라도 각지의 관군이 금산성 탈환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는데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 기사에 적힌 내용이다. 작전은 중간에 중지되었으나 일부 관군은 공격을 강행해 8월 9일 금산쪽으로 나아갔다 패배, 남평 현감을 비롯한 전사다 500여 명을 내었다. 쇄미록은 역공에 나선 왜군을 8월 17일에 격퇴한 전투가 이치 전투라 적었다. 이는 후대의 기록인 만취당실기와도 일치한다.[18]
권율이 전라감사 겸 전라순찰사로 승진한 기록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선조실록에서 권율이 전라감사 겸 순찰사로 임명된 때가 7월 22일인데, 만약 그전에 이치 전투가 있었다면 실록 기사엔 간략히 쓰느라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 쳐도 개인기록에는 이치 전투의 공으로 승진했다는 기술이 있을 법하다. 그런데 실록의 해당 기사는 물론 사위 이항복이 지은 권율의 유사와 묘비명, 최립이 지은 권원수행주비, 신흠이 지은 신도비명 어디에도 권율이 이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전라감사가 되었다는 대목이 없다. 권율이 전라감사로 임명됨은 이치 전투와 무관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권율의 묘비명을 비롯한 개인 기록에 이치 전투 승전과 승진이 관련있다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으며 참전자인 권율과 황박의 기록을 담은 만취당실기와 죽봉황공유적. 전라도 장수에 연고가 있었고 피난생활을 하기도 했던 오희문의 쇄미록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8월 중하순이 가장 유력하긴 한데, 이 기록들이 전투와 시차가 있고 다른 기록을 확실히게 논파할 만한 근거를 갖추지도 않아서 단언할 수가 없다.
사실 시기 문제는 이 전투의 규모 문제와도 연결된다. 가능성은 낮지만 웅치 전투와 동시에 일어났느냐, 아니면 양차 금산전투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라 코바야카와가 동원 가능한 병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국어 위키는 이치, 웅치 전투가 동시기에 일어났다고 파악하고 웅치를 공격한 안코쿠지 에케이의 1대 1만 명, 이치를 공격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2대 2천 명으로 기술하였지만[19] 이치와 웅치 전투가 별개, 그것도 상당한 시차를 둔 전투라면 이치에 사단급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행주에서 무려 10배 병력차를 극복한 대승을 거둔 권율 본인이 직접 "이치가 행주보다 더 힘들었지. 애들도 약해터졌는데 병력차도 열 배나 됐었고."고 말 할 지경인데(화포 전력 차이가 있긴 하지만) 코바야카와가 고작 연대급 병력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임진왜란에 투입된 왜군 장수 중 코바야카와는 일본 내에서의 평가가 가장 높은 장수 중 하나[20] 인데, 전략적 식견이 높았던 그가 전라도로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4. 권율의 증언
권율의 사위 이항복이 쓴 문집 <백사집>에 의하면 권율은 이치 전투를 자신에게 제일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말했다. 잡아낸 적은 행주대첩이 더 많지만, 행주 대첩은 이치 전투에 비해 본인의 직급이 높아서[21] 병사들을 통제하기가 쉬웠고, 전라도의 장병들이 모두 본인의 휘하였으며, 왜병들 역시 전쟁 초기에 비해 기세가 꺾인 상태에서 싸웠으니 이치 전투보다 공을 세우기 쉬웠을 뿐이었다고 밝혔다.아닌 게 아니라 권율에게 이치가 행주보다 여러모로 여건이 더 열악했다. 이치에서는 얼마 전 용인 전투에서 대패한 탓에 사기가 낮았고, 병사들도 막 징집되었으며, 권율 본인도 문관에서 막 지휘를 맡아 권위가 높지 않았다. 반면에 행주에서는 권율의 부대는 독산산성 전투 등 연이은 승리로 사기가 높고, 병사들도 이런 전투들을 치른 정예이며, 행주는 호리병 지형이라 화력집중이 쉬웠던 데다가, 권율 본인도 여러 전과에 지위가 높아져서 명령체계가 더 잘 먹혔다. 또한 행주대첩의 승리는 규모가 크지만 한양 탈환이 더 용이해졌을 뿐 눈에 띄는 영향을 주지 못햇지만, 이치전투 승리는 전라도가 왜군에게 함락됨을 막았다. 실제로 이치 전투로 왜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길이 차단되어 의병들의 성장과 반격, 이순신의 불패 신화가 계속될 수 있었으니, 전쟁의 진행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다.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체로 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항복, <백사집> 잡기에 수록된 권율의 말
대체로 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항복, <백사집> 잡기에 수록된 권율의 말
5. 창작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웅치 전투와 연결되어서 묘사한다. 웅치의 방어선이 뚫린 뒤 권율이 이끄는 부대가 이치에서 왜군을 맞아 상대하는데, 고지대에서 화포를 쏘아 공격한 뒤 백병전을 벌이고, 황진이 이끄는 별동대가 왜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여기에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금산을 공격하면서 왜군이 패퇴하는 것으로 나온다. 작중에선 전투가 음력 7월 8일 한산도 해전과 같은 날 벌어진 것으로 설정하여 조선군이 육지와 바다 양 쪽에서 모두 승리한 것으로 묘사했다.게임 임진록에서는 조선군 캠페인 3번째 임무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야전이 아닌 수성전의 형태로 전투를 진행하게 된다.
금산역사박물관에서 이치대첩의 현장을 메타버스 공간으로 복원하면서 온라인 특별전을 진행했는데, 이 시기에 맞춰 '이치대첩'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금산군의 유튜브 페이지를 빌려 유튜브 상에서 상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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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
해유령 전투 (1592. 5. 16.) |
정암진 전투 (1592. 5. 24.) |
이치 전투 (1592. 7. 8.) |
우척현 전투 (1592. 7. 10.) |
주장 | 신각 | 곽재우* | 권율 | 김면* | |
전투 |
청주 전투 (1592. 8. 1.) |
북관 대첩 (1592. 9. 16. ~ ) |
진주 대첩 (1592. 10. 6.) |
행주 대첩 (1593. 2. 12.) |
|
주장 | 영규* | 정문부* | 김시민 | 권율 | |
* 의병장 | }}}}}}}}}}}}}}} |
[1]
2차
금산 전투가 음력 8월 18일에 일어났는데 이치전투가 그전일 수도 그 이후일 수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전이라는 편린이 남아있으나, 당사자들은 그 이후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기록자가 오해한 것을 그대로 기록한 부문이 난무하기에 추가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2]
한산 대첩,
진주 대첩, 이치 전투
[3]
황진의 행장에 의하면, 일본 승 화안(和安)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인 이성구에게 자신들이 전쟁 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4]
현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복수면, 진산면 일대. 금산군은 1962년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소속이 바뀌었다.
[5]
이는 단순한 후대의 평이 아니라 당대에도 조선백성들이 한양탈환의 핵심이었던 행주대첩을 더 쳐주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6]
금산에서 곧장 전주로 넘어오는 길에 있는 별 표시가 이치 고개(배티재),
용담호를 통해 진안을 거쳐 들어오는 길에 있는 별 표시가 웅치 고개(곰티재)
[7]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지휘하던 병력은 동쪽 산줄기로 빠져 나가거나 아예 강을 건너 도주한 수백 혹은 수천의 패잔병을 남기고 전멸했다.
[8]
전라북도 남원시와 경상남도 함양군 사이에 있는 높이 513m의 고개.
[9]
전라북도 장수군과 경상남도 함양군 사이에 있는 높이 734m 고개.
[10]
전라북도 무주군에 있는 높이 680m의 고개.
[11]
위치 미상.
[12]
권율의 사촌형이다.
[13]
황진이 안덕원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포저집과 계곡집,
고대일록 인명록에 언급된다.
[14]
임진왜란 초기에 등장한 단일 최대규모의 의병이다.
고경명 문서에도 있지만, 전라도에서도 고경명의 기가 막힌 패전 이후로 절반 규모의 병력도 모을 수 없었다.
[15]
전라병사 최원의 군대와 김천일의 의병은 이미 북상한 뒤였다.
[16]
고경명 군과 싸우자마자 진산으로 달려내려갔을 리는 없을 테니 일단 7월 10일은 아니다.
[17]
2차
금산 전투 이후이다.
[18]
이 기록이 맞는다면 2차
금산 전투 불과 하루 전에 이치전투를 치른 것이 된다.
[19]
말도 안 되는 추정이다. 본대가 어떻게 별동대보다 적단 말인가.
[20]
벽제관 전투에서도 활약했으며, 이후 오대로에 올라가는 거물이었다.
[21]
권율은 이치 전투 때는 광주 목사, 행주대첩 때는 전라도 순찰사였다. 행주대첩 이후에 선조는 권율의 무공을 높이 사서
도원수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그 나라 최고의 장군임과 동시에, 전쟁 중 전투행정에서 왕을 일시적으로 대리하는 자리이니, 장군 겸 국가원수 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