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관련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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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 공신 | 선무공신 |
인물 관련 | 원균옹호론 · 원흉 | |
관련 전투 | 1차 출정(기문포 해전) · 2차 출정(가덕도 해전) · 3·4차 출정(칠천량 해전) | |
가족관계 | 동생 원연 · 동생 원전 · 아들 원사웅 |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전투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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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 |||
1592년 |
<colcolor=#f0ad73,white> 음력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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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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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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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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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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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진주성 전투[朝] | |||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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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성 전투[朝] · 독성산성 전투[朝] | |||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 ||||
1593년 |
1월
|
제4차 평양성 전투[朝明] · 수원 전투[朝] · 성주성 전투[朝] · 벽제관 전투[日] | ||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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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 해전[朝] · 죽주 전투/상주 전투[朝] · 행주 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 |||
전선 고착화 및 국지전 시기, 정유재란 (일본군 대규모 재상륙) | ||||
1593년 |
6월
|
제2차 진주성 전투[日] | ||
1594년 |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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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당항포 해전[朝] | ||
7월
|
거제도 진공작전[朝] | |||
1597년 |
2월
|
부산 진공작전[朝] | ||
3월
|
기문포 해전[朝] | |||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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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해전[朝] |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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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日] | |||
일본군 진격 시기 | ||||
1597년 |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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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전투[朝] · 남원 전투[日] · 황석산성 전투[日] · 어란포 해전[朝] |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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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 해전[朝] · 직산 전투[明] · 명량 해전[朝] · 제1차 석주관 전투[日] | |||
사로병진책,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 ||||
1597년 |
11월
|
제2차 석주관 전투[日] | ||
12월
|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제1차 울산성 전투[日] | |||
1598년 |
7월
|
절이도 해전[朝明] | ||
9월
|
사천성 전투[日] · 제2차 울산성 전투[朝明] · 왜교성 전투[日] | |||
11월
|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 |||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칠천량 해전 漆川梁 海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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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 거제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에 전시된 칠천량 해전 당시 해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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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597년 (선조 30년)
8월 27일
그레고리력 1597년 7월 15일 음력 |
|
장소 |
조선 경상도 칠천량 (現 경상남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해협) |
|
원인 | 관직 욕심에 눈이 먼 원균의 자승자박 | |
교전국 |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승
|
조선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시마즈 요시히로 (대장군) |
지휘관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 |
참가자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토요히사 구키 요시타카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간 미치나가 반 나오유키 이토 스케타카 아키즈키 타네나가 |
참가자 이억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 최호 (충청도 수군절도사) † 배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김완 (조방장) ◎ 배흥립 (조방장) 우치적 (순천 부사) |
|
병력 |
일본전선: 1,000척 (추정) - 세키부네+ 아다케부네: 1,000척 추정 |
조선전선 : 총 163척 - 판옥선: 160척 - 거북선: 3척 조선군: 14,000명 (수군) |
피해 |
세키부네 8척
침몰[2] 전사자: 500명 가토 요시아키 부상[3] |
판옥선 148척
침몰 및
실종[4] 거북선 3척 침몰 최고 지휘관 전사 (추정) 전사자: 7,000명~8,000명 |
결과 | 일본군의 압도적인 승리 | |
영향 | 이순신 복귀 전까지 일본군의 남해안 제해권 장악 |
1. 개요2. 배경
2.1. 이순신이 출병을 거절한 이유2.2. 일본군의 전략 진화2.3. 조선 수군의 약화2.4. 1월, 일본군의 재상륙과 이순신의 파직2.5. 2월, 이순신의 출정 (부산 진공작전)2.6. 3월, 원균의 1차 출정 (기문포 해전)2.7. 6월, 원균의 2차 출정 (가덕도 해전)
3. 전개3.1. 7월 4일, 원균의 3차 출정3.2. 7월 7일, 무리한 항해로 판옥선 손실3.3. 7월 9일, 적의 기습에 판옥선 손실3.4. 7월 11일, 권율의 곤장, 원균의 4차 출정3.5. 7월 14일, 무리한 항해로 체력 낭비3.6. 7월 15일, 경계를 태만하여 기습 허용3.7. 7월 16일 새벽, 야습 피해가 커져 퇴각 결정3.8. 7월 16일 오전, 퇴로가 막혔다고 착각해 자폭
4. 이후 전개5. 평가6. 대중매체6.1. 1986년, 사극
조선왕조 오백년6.2. 1992년, 다큐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6.3.
임진록 26.4. 2004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6.5. 2014년, 영화
명량6.6. 2015년, 드라마
징비록6.7. 2017년, 게임
벽람항로
7. 전시관[clearfix]
1. 개요
정유재란 당시였던 1597년 7월 16일 새벽, 경상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해협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막다른 해협으로 함대를 몰아넣고, 함대를 스스로 불사르고, 육지로 병력들을 내려 흩어지게 해 모두 학살당하게 한 패전.[5] 당대 특정 지역의 최강의 군대가 아군의 전술적 실패 때문에 절반 가량이 몰살당하고[6] 이와 동시에 소강 상태 수준이던 전쟁을 대놓고 대규모 전쟁으로 가속화시킨 사례는 전혀 없다는 점, 바로 뒤에 이어진 전투가 인류사 전쟁사 최대 기적이라는 점 등 여러 요소들로 인해 인류 전쟁사 전체에서도 최악의 졸전으로 평가받는다.[7]후폭풍은 엄청났다.[8]
- 1월 12~14일 일본군의 부산 재상륙부터를 정유재란으로 보기도 하나, 양측은 이전과 똑같이 대치 및 국지전만 있었다. 하지만 7월 16일 이 해전으로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부터 일본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즉 정유재란의 시작이 된 전투다.
- 조선군의 바다 방어선이 뚫림으로써, 전라도가 왜군에게 장악당했다.[9]
2. 배경
2.1. 이순신이 출병을 거절한 이유
이순신은 선조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칠천량에 출병할 수 없음을 밝혔다. #- 적의 정보가 진짜 정보인지 거짓 정보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방향으로 출병하는 것 자체가 병법에서 말하는 사지(死地)였다.
- 대마도는 동남풍이 자주 부는 곳인데 동남풍이 불게 되면 이게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순풍이지만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역풍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살, 조총, 함포를 발사하면 어느 방향으로 잘 날아가고 어느 방향으로 잘 안 날아가는지만 생각해도 답은 뻔하다. 이 전투에 출병해서 싸우게 되면 조선 수군만 탄약을 뒤집어쓴다. 게다가 이동 시간도 넘사벽인데 일본군이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7시간, 반면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박 2일이다. 차이가 매우 크다.
- 거제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토 기요마사를 공략하자니 거제도 남단은 온통 암초 천지였다. 여기 있다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으면 전멸을 피할 수 없다.
- 가덕도 방향으로 이동하자니 이미 거긴 일본군이 대량으로 주둔하고 있어서 일본군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격이다.
-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부산에 도착한 이후였다. 이순신은 이걸 알고 있었지만 선조는 모르고 있었다. 선조의 명대로 했다간 잡지도 못할 가토 기요마사를 쫓아가느라 일본군에게 패배할 판국이었다.
2.2. 일본군의 전략 진화
일본 수군도 바보는 아니어서 '왜 자꾸 조선 수군에 패하는지'를 분석해 반영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훨씬 크고, 화포/총통 발사가 주력이며, 제자리 선회가 되며, 장갑이 견고하다. 따라서 판옥선 1척당 세키부네 5척은 붙어서 화포/총통을 무력화하고 백병전을 벌여야 한다.
- 세키부네는 첨저선이고, 판옥선은 평저선이다. 세키부네가 더 빠르므로 거리를 살살 벌리며 전투를 피하면 판옥선의 노꾼들을 지치게 할 수 있다. 대신 세키부네는 이동의 곡률반경이 커서 내해에서의 싸움은 불리하므로, 내해에서의 해상전은 피하고 외해에서의 해상전은 할 만하다.
- 조선 수군에 맞설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형 선박인 아타케부네를 다수 건조하였다. 아다케부네는 판옥선에 대항하기 위한 선박이었으며 히데요시는 조선(造船) 전문가인 구키 요시타카에게 군선 설계를 맡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다이묘들에게 기한을 정하고 건조 척수를 할당하여 군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 조선 수군은 조선군 중 최정예로, 해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다. 수군 대 수군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육군과 합동해서 움직여야 한다.
- 낮에는 육지-해안으로 피해 싸움을 피하고, 어둠을 틈타 밤에 기습하도록 한다.
- 해안지역에 많은 감시병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활동을 손바닥 보듯이 하던 예전과는 달리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 초량목을 봉쇄한다. 부산포 해전 때는 어이없이 여기가 열려 있어 조선 수군이 장사진으로 들어와 부산포의 일본선박들을 격멸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초량목만 지키면 부산포의 함선들도 보호하고, 조선 수군은 절영도(현 영도구)의 외해에서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안골포-웅포-가덕도 등에 왜성들이 촘촘히 건축된 것이 이순신에게도, 후임 원균에게도, 조선 수군의 7차례 부산 공략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왜성을 힘들여 공략해봐야 일본 육군이 쉽게 다시 차지하여 소모적이다. 또한 왜성들을 공략하며 순차적으로 부산포도 치자면 시간이 허비되는데, 그 동안 왜성의 일본군들이 부산포에 알려 부산포가 대비하게 된다.
- 1592년 9월 1일, 이순신의 부산포 해전은 안골포-가덕도가 비어 있었기에, 조선 수군이 숙박하여 쉬어가며 부산포를 타격할 수 있던 것이었다.
- 1593년 2월 10일, 이순신의 웅포 해전은 안골포 일대에 상륙전까지 감행했으나 왜성을 뺏진 못 하고 반신불수를 만드는데 그쳤다.
- 1594년 10월 1일, 이순신의 장문포 해전은 안골포-가덕도 맞은편 거제도에 조선 수군의 정박 거점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군을 직접적으로 몰아내진 못 했으나, 결국 조선 수군의 압박을 못 이긴 일본군은 거제도 주둔을 포기한다.
- 1597년 2월 10일, 이순신의 부산진공작전은 바로 그 거제도 장문포에서 출발해 안골포-가덕도를 패싱하여 절영도에 정박지점을 잡고 부산포를 때렸다.
- 1597년 3월 9일, 원균의 기문포 해전은 졸전으로 유명하지만, 거제도 쪽에 왜군이 오는 것에 대한 극렬한 반발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전투가 졸전이 되면서 이후 일본군이 슬금슬금 거제도를 침범하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된다.
- 1597년 3월 29일, 원균은 육군으로 안골포-가덕도를 공략해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나, 당시 육군 능력상 무리였다.[10]
- 1597년 6월, 원균이 안골포-가덕도를 때렸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 1597년 7월, 기문포 해전의 여파로 거제도도 일본군 세력권에 들어가고, 안골포- 가덕도 공략도 실패했으니 부산을 치고 싶으면 칠천량과 옥포에 정박하며 멀리 외해로 힘들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2.3. 조선 수군의 약화
갑오년(1594)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수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로 인해 임란 개전 후 최대 2만 명 이상이던 병력이 을미년(1595) 봄에는 4천1백여 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특히 이때 사망자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첫해 해전에서 승리를 경험했던 전투력이 높은 병력들이었다.[11]- 수군은 태반이 역질에 죽어 선사(船師)가 외롭고 허약하니 적을 소탕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선도 운용하기 어렵다.[12]
- 노직(盧稷)이 아뢰기를, “연해에 전선(戰船)이 비록 많으나 만약 배를 부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운행하여 수전(水戰)을 독책(督責)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수군(水軍)의 번가포(番價布)를 경강(京江)에 사는 노젓기에 능숙한 사람에게 주어 격군(格軍)을 삼아야 합니다.”[13]
당시에는 협상 시기라 큰 교전이 없어서 눈에 띄는 변화를 감지하기 힘들었으나 이 영향은 장문포 해전 때부터 서서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이와는 반대로 일본군은 전술 교리가 향상되고 요충지를 점령하여 곳곳에 요새를 만들고 대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수군의 움직임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임진년 때처럼 적극적인 공세를 함부로 펼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편, 수군의 병력 부족 문제는 정유년(1597) 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병력을 충원하는 과정에서 동년의 3월 기록에 따르면 호남 지방이 수군을 징발하는 문제로 잡상인의 통행마저 없어져 기존 도로망이 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칠천량 해전 한달 전인 6월 중순에 와서야 인력 충원을 어느 정도 완료하였으나 이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인원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의 수군이 보여준 승전에 고무된 나머지 강화 교섭기 동안 위기를 맞은 조선 수군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이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부산 앞바다 출전의 무리한 강요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인들이 조선 수군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2.4. 1월, 일본군의 재상륙과 이순신의 파직
편지가 오고 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던 시대이므로 사건의 전후관계에 유의. 조선 조정 중심으로 정리. 참고문헌12월 27일, 조선 조정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2일에 부산왜영에 큰 불을 내 가옥 1천호, 화약창고 2개, 군량 2만6천섬, 왜선 20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다음날, 제찰사 이원익의 선전관인 김신국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군관 정희현이 부산왜영을 기습한 공인데, 이순신의 군관이 물건 운반으로 부산에 도착해 이를 파악해 전달했고,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매우 격노했고, 류성룡조차 이순신을 '게을러진 것'이라 평했다.
1월 1일, 조선 조정에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편지를 전했으며, " 가토 기요마사의 7천 군사가 12월 4일 대마도에 도착했다. 바람에 따라 거제/기장/서생포 중에 상륙할 것이다. 조선 수군을 거제도로 옮겨만 두어도[14] 상륙에 압박을 주어 그가 태합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거짓이 되어 오만함이 벌받게 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나 고니시가) 조선 정부와 계속 협상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15] 1월 2일 비변사 회의를 통해 선조는 이순신에게 명령하기로 결정하고, 1월 3일 새벽에 명령서 전령이 출발했다. 1월 6일, 명령서가 한산도로 왔을 때, 이순신은 부재중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공무로 여수에 있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 남해도에 정박해 있었다. 명령서는 늦어도 1월 10일 이전에 이순신에게 도착했고, 이순신은 답변으로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나아가 주둔해서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벌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만일 지휘할 일이 있거든 다시 알려주십시오"라 했고, 조정에 이 편지가 도달하자 모두 장하게 여겼다.[16]
1월 12~14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410척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재상륙했다. 이를 정유재란의 시작으로 보곤 한다.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이 (이 때까진 가토가 넘어온 사실까진 모른 채) 다시금 한산도를 직접 찾아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응하지 않았다.
1월 19일, 조선 조정에 김응서의 장계가 올라왔다. 1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나 고니시는 가토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그가 며칠 내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다. 제발 수전에 능한 조선 수군이 가토를 해상에서 없애달라.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주었다는 것. 선조/조정은 이순신에게 공격을 명령한다.
1월 21일, 조선 조정에 도체찰사 우의정 이원익의 '1월 12~14일, 일본군 재상륙' 보고가 도착했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 조정에 원균의 "내가 삼도수군통제사였으면 가토를 잡고 일본군 재상륙을 막았다"는 보고가 도착했다.[17]
1월 23일, 조선 조정에 김응서의 보고가 도착했다. 1월 13일에 요시라가 "가토가 이미 도착했다. 어째서 조선 수군이 그냥 놔두었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이 출정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이제 끝났다"고 극언하며 격노했고, 이 날부터 이순신 책임론이 불거진다. 1월 27일,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탄핵을 논의했다. 원균을 전라병사에서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은 유지시키기로 했다.
2월 1일, 조선 조정에 이순신의 보고가 도착했다. 1월 19일 선조의 출정명령에 대한 답변서로,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이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출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타이밍이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어, 사헌부는 통제사 이순신을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2월 4일, 타이밍이 더더욱 불난집에 부채질로, 이덕형이 이순신의 "원균이 조정을 속였다. 열두살 아이를 멋대로 군공에 올렸다"던 주장의 확인 결과, 원균의 자식의 나이는 18세고, 활쏘고 말타는 재주도 있어 군공에 올리기에 적합했다. 이로서 이순신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다. #
2월 6일, 마침내 선조는 이순신의 압송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면 반역을 저지를지도 모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오는 것도 검토하라고 했다. #
2.5. 2월, 이순신의 출정 (부산 진공작전)
2월 9일, 도원순 권율, 경상우병사 김응서, 통제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등은 200척(그 중 판옥선은 63척, 나머지는 소선)의 조선 수군을 한산도에서 출발시켜 거제도 장문포로 이동시켰다.2월 10일 2월 20일 권율이 올린 장계
- 해뜰 무렵 거제도 장문포에서 배를 띄웠다. 안골포는 왜적 1천명, 선박 40척이 있었고, 가덕도는 왜적 5백명, 선박 20척이 있었으나, 이들을 패싱했다.
- 부산 다대포에 도달한 뒤,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3명의 군관을 보내 " 가토 기요마사의 군을 부산포로 유인하여 조선군+고니시군이 함께 그를 참살하자. 그가 오지 않는다면 고니시가 가토의 처소로 조선군 사신을 안내한 뒤, 조선군 사신이 그를 엄습해 죽이는 걸로 하자. 조선 수군은 부산 초량목에서 대총통 1발을 발사해 도착했음을 알리겠다"라고 정보를 미리 전달했다.
- 미시(오후 2시경), 200여척의 조선 수군은 초량목도 지나 부산포로 진입해 당시 1000척에 달하던 일본 배들과 마주했다. 이후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이순신은 "열병(閱兵)했다"고 표현하고, 원균은 "진퇴(進退)하며 병위(兵威)를 과시했다"고 표현한다.[18][19]
2월 11일 2월 28일 원균이 올려 3월 20일 도착한 장계
- 이순신 통제사의 대장선이 썰물 때 부산포 쪽에 밑창이 땅이 닿아 하마터면 일본군에 사로잡힐 뻔 했다. 안골포만호가 빠르게 노를 저어 배를 붙여 연결해 끌고 나왔다.[20]
- 밤중에 나주판관 어운급이 불조심을 하지 않아서 적진 코앞에서 기계와 군량을 태웠다.
2월 12일 3월 2일 이순신이 올려 3월 20일 도착한 장계
- 이순신 함대가 돌아오는 길, 초경(初更, 저녁 7시쯤)에 웅포(웅천 원포) 근처에 잠시 물을 구하러 정박하자, 왜군 19명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안골포로 잡혀갔다.
- 이순신은 극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상륙 공성전을 벌였다.[21] 원균은 이 가덕 전투를 '우리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고 별로 이익이 없는' 전투였다고 보고한다.
- 이 소식이 부산포에도 알려지자, 협상파 고니시가 급히 요시라를 직접 가덕도까지 보내어, 사과하고 협상하여 양측의 포로들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다.
2월 26일 3월 12일 선조-김명원-윤근수의 대화
- 가덕도에[22] 선조가 (2월 6일에) 보낸 선전관이 새 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을 대동하고 도착하였고, 통제사직의 인수인계를 시킨 뒤,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했다. 이로써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이 임명되었다. 원균은 통제사 이순신이 힘겹게 키워 온 판옥선 134척, 거북선 3척, 병력 1만 7천 명, 군량미 9914석, 벼 500섬, 화약 4천 근[23], 각 전선에 탑재된 총통 제외한 여분 총통 300자루, 건조작업이 진행되던 새로운 판옥선 48척 등을 인수인계받았다.
- 일본 측의 소 요시토시가 가토 기요마사의 군이 많이 온다고 알려왔다.[24]
- 원균은 양측의 포로 협상도 마무리된만큼 한산도 통제영으로 수군을 후퇴 결정하였다.
- 원균은 (제해권이 압도적이고,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 안골포/가덕도/부산포의 일본군까진 조선에 친화적이니) 부산 절영도에 적이 없어 진주를 검토한다고 조정에 제안했다. 하지만 선조와 김명원은 부산 절영도는 (안골포/가덕도/부산포 일본군이 배반하여 울산의 가토와 협공하면) 포위되기 쉽다며 그 계획은 반대했다.
2월 27-28일
- 요시라는 중립지역인 거제 지세포에서 포로를 건네주겠다고 했으나, 2월 27일에 그냥 견내량의 조선 수군 진영에 직접 보내주었다.
- 원균은 한산도에 돌아오자마자 앞서 이순신이 작전에 대한 의견과 본인에 대한 충언을 듣는 창구로 사용했던 운주당이라는 별당을,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거처하면서 이중의 울타리로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 원균은 또한 곧바로 전라남도 보성에 있는 숙부 안중홍을 찾아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숙부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적과 싸우게 되면 편전, 장전, 칼, 곤봉을 사용하면 될 것" 등의 망발을 하자 숙부 안중홍이 크게 탄식했다.
2.6. 3월, 원균의 1차 출정 (기문포 해전)
자세한 내용은 기문포 해전 문서 참고하십시오.3월 9일, 거제도 기문포에 일본군 3척이 정박하자, 원균이 첫 출정하여 이들을 몰아냈으나 18명을 죽인데 반해 140명이 죽은데다, 처음으로 판옥선도 빼앗기는 등 엄청난 졸전의 승리(?)를 했다.
3월 25일, 같은 날 원균과 도원수 권율은 '승전'이라고 보고했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응서는 '졸전'이었다고 장계를 올렸다.
2.7. 6월, 원균의 2차 출정 (가덕도 해전)
4월 1일,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나면서 선조로부터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1~3월 동안 작성을 중단했던 난중일기를 다시 날짜 단위로 집필하기 시작한다. 4월 3일 수원, 4일 평택, 5일 아산에 이르러 모친상을 치르나 종군 명령을 따르느라 발상을 하지 못 하고 길을 재촉받는다. 이후 19일 아산을 출발하여 공주, 21일 논산, 22일 완주, 23일 임실, 24일 남원, 26일 구례, 27일 순천에 이르렀다. 각지의 현감 등이 전 통제사였던 이순신을 백의종군임에도 각별히 대우한다. 순천에 이르르자 권율이 이순신을 각별히 대우하고, 이억기도 서신을 보내오고, 각 군관들은 원균의 '망녕되고 전도된' 수군의 실시간 상황을 인수인계 및 전달하며 조언을 구하기 시작한다. #4월 19일, 조선 조정에 원균이 3월 29일 올린 장계가 올라왔다. #
- "안골포-가덕도, 죽도, 부산포 4곳에 일본군이 있다. 안골포-가덕도 2곳은 3-4천도 되지 않아 육군으로 치면 섬멸이 쉽다. 그 뒤에 우리 군사가 전진해서 장수포(長藪浦)[25]에 진을 치면 거제 내해는 우리 것이 된다. 그 뒤 날마다 부산포를 때리면 일본은 지쳐 철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 "하지만 이렇게 서로 대치 상황해서 한해한해 지나가면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고, 부산-울산을 일본의 영토로 영원히 넘겨줘야 할수도 있다. (농번기 이전에) 나라 전체에 총동원령을 내리면 정병만 추려도 30만은 될 수 있다. 날이 가물어 땅도 단단해 말이 달리기도 쉬운 4~5월 중 안골포-가덕도를 육해군이 동시에 때려야 합니다. 7-8월 장마철엔 육전도 해전도 힘들 것입니다"[26]
- " 고니시 유키나가, 요시라는 거짓으로 우리를 속여 시간을 끌려 할 뿐이니 무시해야 합니다"
4월 22일, 비변사가 원균의 장계를 평가했다. #
- 비변사는 "안골포는 육군이 포위협동이 쉬우나, 가덕도는 상륙전이라 피해가 클 것"[27], "30만을 4~5월까지 소집하는 것은 불가능", "다만 4~5월에 안골포를 치자는 것은 타당한 요구로 보이니, 도체찰사( 이원익)와 도원수( 권율)에게 판단을 일임해 가능하면 진격하라고 하는게 좋겠다" 라고 분석해 올렸다.
- 선조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시험하여 보는 것은 허락한다"고 했다.
4월 30일,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덕도에 주둔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측 기록에 따르면 4월에 일본 병선 수천 척이 대마도에서 부산을 향하고 있을 때, 조선 수군 수백 척이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진격해서 가로막고자 했는데, 이 때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 조선 수군이 결국 거제도로 되돌아갔다고 한다.[28] 하지만 조선 수군의 4월 출정 기록은 없다[29]. 애초에 조선 수군이 수백척에 달하지도 않으므로, 와키자카가 일부 조선 정찰선 등을 두고 과장된 보고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곧이어 5월 초 도도 다카도라의 일본 수군이 부산에 도착했다.
5월 8일, 조선 조정에 도원수 권율의 보고가 올라왔다.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 때문에 조선 수군이 고단한 것은 원균의 주장과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내용이었다. #
5월 8일, 이순신에게 군관들이 찾아와 격노를 쏟아낸다. 원균이 온 서리에게 곡식을 사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놓고 그 아내를 강간하려 했다. 그러나 그 아내가 기를 쓰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래고래 소리쳐서 원균을 망신을 줬다. 원균이 이에 격노해 온갖 꾀로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를 서울로 가는 길로 또 올렸다는 것.
5월 12일, 권율은 조선 수군에 의한 공격을 강조하는 장계를 올렸는데 이는 그간 경험으로 육상에서와 달리 조선 수군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균은 이전 장계에서 육상에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선제공격을 전제로 했던 만큼, 특히 수군 단독의 공격에는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원균 자체의 역량 문제이기도 했으나 조선 수군은 당시에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온전하게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일본군 역시 대응책을 충분히 준비했던 만큼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를 두고 비변사가 전략을 제시한다. 수군을 3등분 하여 절영도까지 오가며 계속 강습 타격하는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일본군이 군량미 및 군인이 넘어오기 곤란해질까 두려워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전략이었다. 다만 이는 수군이 한산도~부산포 사이의 중간 정박 지점이 고착화되어 일본 육군의 습격을 받을 수 있어 이뤄지지 않았다. #
5월 28일, 하동현감마저 이순신을 찾아와 원균의 하는 짓이 엄청 미쳤다며 날이 저물도록 토로했다.
6월 10일, 도체찰사로 나가 있는 우의정 이원익이 전략을 제시하여 받아들여진다. 수군을 2등분하여 절반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키고, 절반을 이끌고 부산포 쪽을 강습하면, 안골포-가덕도가 부산포로 나간 선박들의 배후를 치려 해도 한산도의 군세가 이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 #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 병력 5천 명까지 지원하며 압박을 넣었다.[30][31] 우의정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 등이 종사관 남이공을 원균에게 보내어, 견내량을 지키면서 부산포를 강습하라 명했다.
6월 12일,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권율에게 보고하러 와서 이순신에게도 중군장 이덕필이 정찰해 온 적진의 상황을 전달한다. "부산의 일본군은 창원으로, 서생포(울산)의 일본군은 경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32][33] 이순신은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경상수사(배설), 가리포첨사(이응표), 녹도만호(송여종), 여도만호(김인영), 사도첨사(황세득), 동지 배흥립, 조방장 김완(金浣), 거제현령(안위), 영등포만호(조계종), 남해현감(박대남), 하동현감(신진), 순천부사(우치적)에게 편지를 써서 (지휘권은 없지만) 방책/조언을 전달했다.
6월 17일, 권율이 원균이 올린 장계를 이순신에게 보이며 불만을 토로한다. 장계로 "수군과 육군이 함께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후에야 수군이 부산으로 진군하겠다"고 뻗대고,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불화중인데, 원 수사는 '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 "일을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고 평했다. 이순신도 "이른바 양심이 없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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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19일, 원균의 2차 출정도[34] |
6월 18일 6월 28일 도달한 권율의 장계
- 권율이 도체찰사에게 3차례, 원균에게 1차례 독촉하여 수륙병진을 요청하는 원균을 수군 단독출전하게끔 했다. 조선 조정은 육군 5천 지원을 약속했으나, 이 날까지 이원익이 주도해 진주 제석산성에서 보내 온 육군은 1천에 불과했다. 이를 수륙병진까진 아니어도 상륙전 등으로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 원균이 한산도에서 함대 100여척을 이끌고 2차 출정을 나섰다.
- 저녁에 거제 장문포에서 숙박했다.[35]
6월 19일 6월 19일 작성해 6월 29일 도달한 이원익의 장계
- 오전에 안골포를 학익진을 이루고 입장했으나, 해안 절벽에 적들이 잠복해 있기도 하고, 암석들 사이에 기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일본군 배 2척이 나와 싸움을 걸어왔고, 조선수군이 포탄과 화살을 쏟았음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이 전진해 일본군 배에 붙자, 일본군들은 헤엄쳐 해안으로 도망갔고, 조선군은 이 2척을 빼앗아 가져왔다.
- 곧이어 가덕도로 공격을 갔으나, 안골포의 적들이 앞질러 도우러 왔다. 조선수군이 거의 모든 적선을 포착하자, 일본군은 모든 배를 버리고 작은 섬[36]으로 숨어 들어갔다. 조선수군이 일본군 배들을 섬멸한 뒤 작은 섬에 추격해 들어가자 일본군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 조선수군이 양 진지를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오후에 돌아가려 하자 안골포 방면에서 일본 수군이 나오자(이는 부산쪽에서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다카하시 무네마스의 원군이었다) 아군이 다시 돌아서 접전했다. 일본군은 배꼬리를 둘러싸기도, 좌우를 협공하기도 하며 비처럼 조총을 쏘아댔다. 판옥선을 1척 빼앗겼으며, 조선수군은 방패에 의지해 화살을 쏘며 퇴각했다.
- 날이 저물어 양측 군이 떨어진 뒤 확인해보자, 병졸들은 하나도 중상이 없었으나 지휘관들에 일본군이 집중공격했음을 알게 되었다. 평산포만호 김축은 눈 아래 탄환을 맞았고, 보성군수 안흥국은 뇌에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
- 칠천량에서 1박 숙박하고 한산도로 돌아왔다.
2차 출정에 대한 평가
- 6월 26일, 비변사는 수군을 원균의 본대, 배설의 경상우도 부대, 이억기의 전라우도 부대, 최호의 충청도 부대 넷으로 나누어, 한산도-견내량을 지키면서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서로 관측-교대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
- 6월 28일, 조선 조정에 권율도 해당 전략이 유효하다고 보았다. "이런 식으로 교대하여 해상을 장악하면, 적들이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이라 했다. #
- 6월 29일, 이 무렵 대마도에 일본군이 대거 모여, 6-7월 동남풍이 불 때 재상륙을 노리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원익은 원균에게 조선 수군이 계속 부산까지 해로를 왕래하여 상륙을 곤란하게 저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37]
- 7월 10일, 비변사는 다시 관측-교대 전략을 제시했고, 이번엔 선조도 수군에게 명령하기로 한다. 하지만 후술하듯 이 전략은 조선 수군에 전달되지 못 한다. #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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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14일, 원균의 3·4차 출정도[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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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16일, 칠천량 해전 전개도[39] |
3.1. 7월 4일, 원균의 3차 출정
7월 4일, 원균이 함대 100여척을 이끌고 3차 출정을 나섰다.[40]7월 5일, 칠천도에서 1박했다. 이 날 비가 내렸다(난중일기 기준).
7월 6일, 옥포에서 1박했다.[41]
3.2. 7월 7일, 무리한 항해로 판옥선 손실
7월 7일- 날이 밝기 전 가덕도 말곶(강서구 성북동 고직말. 가덕도의 서북쪽)을 돌아 다대포에 이르렀다.[42]
- 부산 다대포에 이르니 일본 수군 배 8척이 있었다. 일본군은 여태처럼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다. 조선 수군은 8척을 바다로 끌고 나와 불살랐다.
-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했는데, 하필 때마침 대마도에서 일본의 보급선 1000척이 오던 중이었다.
- 조선 수군은 외해로 추격했으나, 일본 배들은 빠른데다 흩어져 달아나기에 섬멸할 수 없었다.
- 그런데 외해에 적합하지 않은 평저선인 판옥선들이 풍랑에 표류하여 판옥선을 12척 상실하게 된다.[43]
- 5척은 두모포(오늘날 부산 기장군 죽성리)에 착륙해 전멸했음을 이 날에 파악했고, 7척은 서생포(오늘날 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착륙해 전멸했음은 16일에야 파악한다.
- 부산포에서도 500여척이 나와서 1000척에 호응하려 하자, 조선 수군은 퇴각하기로 한다.[44]
3.3. 7월 9일, 적의 기습에 판옥선 손실
7월 8일, 중간에 숙박을 했다.[45]7월 9일, 숙박지에서 전투가 발생했는데 군졸들이 겁을 먹어 화살 하나도 쏘지 못 했다.[46] 전투 결과 8척의 배가 손실되었다.[47]
7월 10일, 원균이 한산도에 오자마자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를 위해 사천 곤양으로 향한다.[48]
3.4. 7월 11일, 권율의 곤장, 원균의 4차 출정
7월 11일- 권율은 원균의 보고를 듣고 분노하여 곤장을 친다.[49][50][51]
- 원균은 이 날 한산도 통제영으로 돌아온 뒤, 그 날로 전군을 4차 출정시켰다.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언했지만 묵살하고 진행했다.[52]
7월 12일, 3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칠천량에서 1박 했다.
7월 13일, 3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옥포에서 1박 했다.
3.5. 7월 14일, 무리한 항해로 체력 낭비
7월 14일 점심경,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한다. 그러나 조선 수군보다 속도가 빠른 일본 수군이 살살 거리를 벌리며 대결을 회피하였고, 원균은 이들을 홧김에 추격하였으나, 전선의 운용이 어려운 노군들의 탈진 지점에 이르러서야 복귀를 결정한다.7월 14일 저녁경,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 도착한다. 물을 싣기 위해 400명을 보냈는데, 가덕도에 있던 타치바나 나오츠구의 군의 기습을 받자, 원균은 그 병사들을 전부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53]
7월 14일 이른밤, 조선 수군은 거제도 북쪽 영등포에 정박하려 한다. 하지만 해소실기에 따르면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었다' 즉 정박하기에 만만치 않은 일본군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 수군은 또다시 노를 저어 칠천량으로 이동한다.
7월 14일 늦은밤, 조선 수군은 꼬박 24시간을 노를 젓고 이제야 칠천량에 도착해 휴식(오침)을 취하게 된다. 3차 출정 때부터 따지면 장장 11일간 330km나 노를 저은 것이다. 배설은 "칠천량은 육지로 움푹 파인 형세에다, 양 옆이 산등성이로 시야가 차단되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어려워 이 곳에 정박하면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원균이 이를 묵살했다.[54]
3.6. 7월 15일, 경계를 태만하여 기습 허용
7월 15일 아침, 전날밤 전투를 치른 거제 영등포와 가덕도에 있던 일본 수군들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긴급보고한 것이 창원의 일본 육군 좌군, 부산의 일본군 수군 등에게 닿았다. 하필 이 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앞서 한달전부터 요시라를 통해 조선군에 미리 흘려왔듯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전군이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하려던 날이어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군이 출병하려던 참이었다. 일본 육군 좌군(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돌격대장)은 이 보고를 받고 창원에서 고성 방면으로 상륙 차단을 위해 진격을, 수군( 토도 타카토라가 이끌고,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돌격대장)은 김해죽도/부산/가덕/안골포에 흩어져 있던 전군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향했다.7월 15일 낮, 오침을 자고 일어난 원균은 지금까지의 경과로 의욕을 잃고 좌절하여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55]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7월 15~16일 내내 비가 내리다 말다 오락가락했다.
7월 15일 밤 10시경, 일본 수군의 야습이 시작되었다. 희득의 해상록에 따르면, 겨우 작은 배 2척이 조선 수군 한복판에 접근할 때까지 조선 수군은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며, 일본 수군이 대포 2발을 쏘자 조선 수군은 당황해 닻줄을 끊어 우왕좌왕 함대 간 충돌이 일어났다. 군량선 4척에 불이 났으며 조선 수군 함대가 기습을 당해 배가 불탄 적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조선 수군의 절반이 도망갔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 하지만 김완은 기습해 온 적선이 단 2척뿐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즉 지휘권이 반쪽이었고, 그 반쪽마저 항명이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첫 기습은 5척이므로, 3척이 곧이어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이 제정신이었다면 이렇게 피곤한 때야말로 주위를 더욱 철저히 경계하라고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수군 지휘부는 아무것도 몰랐다. 즉 일본군이 조선 수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소리다! 군대에서 초병을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고,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원균 말고도 이억기나 최호 같은 개념인들도 있었으나 이런 실수를 할 위인들이 아님에도 경계망이 뚫렸다는 것도 뭔가 이상한데, 난중일기에서 좌수영 본영의 진흥국이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에게 찾아와 원균이 못되게 군다고 이야기했음을 감안하면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막대한 불이익을 주었고, 이 때문에 이억기나 최호 등의 명령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수도 있다.[56]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기습 공격으로 당황한 채로 교전하여 싸움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3.7. 7월 16일 새벽, 야습 피해가 커져 퇴각 결정
7월 16일 오전 0~3시경,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따르면, 일본 수군이 추가 도착했다. 비거도선(작은 선박) 10척이 전선 사이를 뚫어 휘젓고, 병선 5~6척은 진 바깥 복병선을 둘러싸서 불을 질렀다. 원균은 놀라서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게 하며 변을 전군에 알리는데, 적의 배가 충돌하고 총탄이 날아드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했다.7월 16일 오전 3~5시경, 김완의 해소실기( 용사일록)에 따르면, 일본 수군이 대거 도착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는 도도 다카도라의 선발대로, 50척 가량이었다.
7월 16일 5경[57]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나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라고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58]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 라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해소실기』 《 용사일록》 출처
『해소실기』 《 용사일록》 출처
7월 16일 오전 4~6시경, 일본 측 정한휘보 권4 30면에 따르면,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가 뒤이어 도착했다. 그는 거함에 뛰어 올라 몇 사람을 참수했고 조선 수군이 그를 공격하려 했다. 요시아키의 조가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조선) 배를 빼앗았다. 다만 요시아키는 다른 별선에 뛰어오르려다 발을 헛디뎌 바다에 떨어졌다. 즉 일본 수군은 돛대를 사다리로 백병전을 발휘했다.
이 시점까지 새벽의 분전 중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김완은 함선이 점령당하자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자 원균은 각 수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전 수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전력을 유지했다.
3.8. 7월 16일 오전, 퇴로가 막혔다고 착각해 자폭
7월 16일 오전 6~8시경, 해소실기에 따르면 조선 함대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원균을 따르지 않은 절반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산도를 향했다. 이 방향으로 간 함대는 배설 등 훗날 이순신에게 무사히 합류하는 함대다. 하지만 원균은 주력 함대를 막다른 골목인 진해만과 춘원포[59]로 지휘한 뒤, 배를 불사르고 지상으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서 여태 이순신이 힘들여 쌓아놓은 판옥선들을 제대로 교전 한번 해보지 않고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말았다.[60]- 7월 22일, 당시 현장에 있던 선전관 김식에 따르면, 도도 다카도라의 선봉대(50여척)가 3-4겹으로 에워쌓으며 형도(刑島, 오늘날 견내량 입구의 '싸리섬') 등 여러 섬에도 일본군을 배치해 위협했다. 즉, 도도는 원균에게 견내량이 막혔다고 착각하게끔 하여, 일본 본대가 와서 전멸하느니 배를 버리도록 속이는 것이 주 목적이었고 원균은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배설 등은 견내량이 막혀있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강행돌파를 결정했으나 의외로 견내량은 막혀있진 않았던 것이다.[61] #
- 7월 22일, 당시 병조판서를 맡았던 이항복에 따르면,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로 패인을 분석했다. #
- 정상적으로 원균이 지휘권을 가진 지휘관이었다면 경계근무에 실패했더라도 새벽까지 기습해 온 상대는 소수임을 파악하고 견내량이 막힌 것도 아니므로 한산도 방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반대로 지휘권을 완전히 상실한 지휘관이었다면, 중간지휘관들이 한산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지휘관들의 재량은 빼앗아 놓고, 본인은 그 지휘권으로 군대의 과반을 사지인 진해만/춘원포로 몰아넣어 배를 버리도록 지휘했다.
-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의 함선은 급격히 불어난다. 시간상 건조해선 이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칠천량 해전 당시 도망쳤던 전선들이 점차 합류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즉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고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명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점차 합류하면서 도망쳤던 죄로 처벌받은 기록이 있다. 칠천량 해전에서 1년만인 절이도 해전 때 함선이 85척이므로, 이 85척이 칠천량에서 견내량 돌파를 선택한 조선 수군의 숫자로 볼 수 있다.
7월 16일 오전 7~9시경, 원균이 셀프로 판옥선들을 없애버린 이후에야 1천 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 본 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했다.[62]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이 시점에 절반의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간 뒤였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63] 일본 수군 본 함대는 상황을 파악한 뒤 진해만/춘원포[64]로 진격해 육지로 도망중이던 조선 수군들을 학살했다. 이 날 전사자가 워낙 많이 나서 칠천도에 딸린 작은 섬에 '혈도(血島)'란 이름이 붙었다.
4. 이후 전개
일본군의 전라도 공략전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8월 이전까지만 서술한다.4.1. 조정
이 문단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기반한다. 조명연합군 육군의 준비과정은 직산 전투에 정리한다.- 7월 22일
- 선전관 김식이 패전을 보고했다. #
- 선조가 패전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
- 충청과 전라에 남은 배가 없는가 → 류성룡 "없습니다"
- 한산은 왜 지키지 못 했는가 → 류성룡 "야습을 당했고, 낮엔 육지에 일본군이 가득"
- (본인 책임 회피) "한산을 지켰어야 했는데 출병을 독촉해 패배를 초래",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에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 지경에 이르러",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도원수 권율이 독촉했기 때문에 패배가 있게 된 것"
- 명 육군 1만3천명으론 일본 육군 10만을 방어가 불가능하므로 추가파병을 요청했다.
-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8월 3일에 전달되었다. #
- 7월 25일
- 7월 26일
- 권율이 21일 올린 장계가 도착했다. 사량진/창선도 등의 흩어진 대선 18척, 전라선 20척을 이순신이 수습중이라고 알려왔다. #
- 7월 27일
- 사간원이 수군 수습상황을 알아보러 사람을 파견보냈다. #
- 7월 28일
- 7월 29일
- 일본군의 전라도 공략전이 보고되었다. 비변사는 현 조선 수군으로 견내량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
- 8월 4일
- 비변사는 일본 수군이 한강까지 올 것으로 보고, 강화도의 해로를 방비할 것을 제안했다. #
- 8월 5일
- 도체찰사 이원익이 전투과정의 공과를 따져 원균/배설/배흥립을 처벌해야 한다 했다. 비변사가 배설은 아직 배를 숨기고 있어 처벌을 미루고, 원균은 행방이 묘연하므로, 배흥립만 처벌하자고 하였다. #
4.2.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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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 9월 15일, 이순신의 함대 재규합 |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本道)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이항복, <백사집>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이항복, <백사집>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경상우도 정리
- 7월 18일 (이하 난중일기의 기록)
- 이순신에게 이덕필/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고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통곡했다.
- 권율이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도리가) 없다"고 오전 10시가 되도록 둘이 마음(대책)을 정하지 못 했다. 이순신이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에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권율이 매우 기뻐했다.
- 7월 21일
- 거제현령 안위(安衛),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여나믄 명, 칠천량에서 도망쳐 온 군사와 백성들 중 울부짖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이순신이 우후 이의득(李義得)에게 패전경과를 묻자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 하였다.
- 배를 띄우고 거제(한산도) 앞바다를 돌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늦게까지 이야기했다.
- 7월 22일, 오전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합류해,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65] 밤늦게야 이들은 사천 곤양으로 돌아갔다.
- 7월 23일, 배가 하나도 없으니 수군을 폐지하고 권율의 육군에 합류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배설이 12척을 숨겨놓았다는 말을 굳게 믿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반박 장계를 올린다.
- 7월 25-26일, 권율이 황여일 종사관을 보내 수군의 재건과정을 문의했고, 이순신은 황여일과 함께 남해현령, 진주목사를 만나 함께 회의한 뒤 돌려보냈다.
- 7월 29일, 이순신이 군사훈련을 점검했는데, '모두 말도 없고, 활과 화살도 없고, 아무 쓸 데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라고 평했다.
전라좌도 정리
- 8월 3일, 이른 아침에 선조가 보낸 선전관 양호가 도착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받았다. 그 길로 진주를 떠나[66], 하동 섬진강 길을 따라, 석주관을 지나, 구례에 도달했다. 이후 경상우도에서 그러했듯 전라좌도의 사람과 물자를 서쪽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한다.
- 8월 5일, 곡성 옥과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이순신도 남녀들이 부축하며 걸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울었고, 백성들도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다' 하며 울었다.
- 8월 7일, 순천으로 가는 길에 석주관 전투의 패배로 피난민이 더 늘었다. 이순신이 병마사로부터 말 3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 8월 8일, 순천에 와 보니 이미 성의 백성들은 피난했고, 병마사 이복남이 부유창의 물자는 다 태운 뒤였다. 관사의 곡식과 군기는 태우지 않고 남아 있어, 이순신이 이를 책망하려 기억해둔다.
- 8월 9일, 낙안군에 이르니 다섯 리에 걸쳐 백성들이 환영하였다.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군수 고봉상이 병마사의 허술한 처사를 비난했다. 곳곳의 관청과 창고들을 일본에 안 뺏기려 불을 질러 없애놓아, 길의 관리와 마을사람들이 눈물을 가누지 못 했고, 이순신 일행에게 술을 다투어 바치려 했고, 이순신이 받지 않으려 하자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 8월 12일, 거제현령 안위, 발포만호 소계남이 배설의 PTSD 증상을 보고한다. 이순신은 배설을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라고 평했다.
- 8월 13일, 우후 이몽구가 전라좌수영 여수본영의 물자를 하나도 실어오지 않았기에 곤장 80대를 쳐서 엄히 혼냈다. 이 날 하동현감 신진이 찾아와 3일에 이순신이 진주를 떠나자마자 군기가 해이해져 병마사가 각 진영과 물자를 뺏기지나마 않으려 불질러야 했다고 전해, 통탄했다.
- 8월 17일, 장흥에 도착했으나 이미 다들 피난하여 무인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훔치려던 것을 잡아다 호되게 혼냈다. 배설이 이 날 배를 보내야 하는 약속을 어겼다.
수군을 재건하다
- 8월 18일, 이순신이 회령포(장흥군 회진면)로 가서 배설을 찾았으나 배설이 멀미를 핑계대자 굳이 보지 않았다. 배설이 일러준대로 여기에 배설이 숨겨 놓은 12척의 판옥선이 있었고, 이로서 (기존 1척 포함) 13척의 수군이 재건되었다.
- 8월 19일, 회령포에서 전선의 물품을 피난민에게 사사로이 준 자를 곤장 20대를 쳐 벌했다. 배설의 "업신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고 평했다.
- 8월 20일, 진을 회령포에서 이진(해남군 이진리)으로 옮겼다.
- 8월 24일, 진을 어란포(해남군 어란리)로 옮겼다.
- 8월 25일, 당포의 보자기가 소를 훔쳐 탈영하려 '적이 쳐들어 왔다'며 분란을 일으키기에 목을 베어 효시하자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 8월 27일, 이 날에야 배설과 만났다. 10일 전 배를 보내지 않은 것을 문책했다. 그리고 이 날 밤 어란포 해전이 발생했다.
4.3. 일본군
일본군은 너무 뜻밖의 대승을 거둔데다, 조선 수군이 함대의 절반이나 견내량 너머로 보존해 돌아갔으므로, 당연히 한산도로 돌아가 견내량을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주변 지역을 정찰하며 조선 수군의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 이순신은 이 짧고 소중한 반달 가량의 시간 동안 경상우도의 각 고을에서 서쪽 전라도로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물자를 옮길 수 있었다.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뿔뿔이 와해되어 사라졌고, 한산도 통제영도 스스로 태워 없앴음을 알게 되자 즉시 당초 계획대로[67] 전군을 우군과 좌군으로 편성, 8월부로 대대적인 서진, '전라도 공략전'에 나서게 된다. 원균의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전라도 전체 뿐만 아니라 한양 이남이 모두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선조는 명나라에게도 육군을 요청하고 이순신에게도 수군을 폐지한 뒤 권율의 육군에 합류하라 하지만, 명나라도 반대했고, 이순신도 반대하며 한 유명한 말이 바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다.[68]
- 일본군 육군 : 우군은 8월 7~16일 고령 전투,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 등을 거치고 전주부성으로 합류했다. 좌군은 8월 3일에 이순신이 있던 곳에 도착했으나 놓치고, 8월 7일 석주관 전투, 8월 12~15일 남원 전투. 전주부성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북진하여 9월 7일 한양 코 앞 직산 전투에서 조명연합군과 팽팽하게 대치한다.
- 일본군 수군 : 8월 1~7일 진주~사천곤양~석주관을 따라 좌군 보급, 8월 중순 여수 전라좌수영 파괴, 8월 27일 어란포 해전으로 이순신과 조선 수군 발견, 9월 7일 벽파진 해전으로 추격해 명량에 초라한 13척의 조선 수군과 마지막 보루 전라우수영[69]이 있음을 확인했다.
일본 육군은 수륙병진을 대기하고, 일본군 수군은 9월 16일 보름의 물살을 따라 조선 수군의 마지막 보루인 명량 앞바다로 나아갔다.
5. 평가
5.1. 원균에 대한 평가
(중략) 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부체찰사 한효순이 이 문제를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해결해보려 했지만 미처 조처를 취하기 전에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
―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 《선조실록》 34년(1601년) 1월 병진
―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 《선조실록》 34년(1601년) 1월 병진
당대 조선왕조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주석을 달아 맹렬히 비판했다.
― 사신(史臣)은 논한다[70].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자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
― 《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1598년) 4월 2일 두 번째 기사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1598년) 4월 2일 두 번째 기사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 박문수, 《 조선왕조실록》 영조 71권, 26년 7월 3일 세 번째 기사
― 박문수, 《 조선왕조실록》 영조 71권, 26년 7월 3일 세 번째 기사
아군의 행동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적진 한가운데를 들이침에도 적정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여 왜선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하고, 그 때문에 일본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허용하고, 제대로 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수륙 양쪽의 협공을 허용하는 등 전투 과정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니 전쟁을 또 일으키기 전에 당연히 새로운 전술을 연구해서 올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패턴을 눈치채면 전략을 바꾸었다. 그런데 원균은 이순신이 어찌 하는지 잘 보면서도 적을 분석하고 전술을 연구하지 않은 듯하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엄밀히 '일본의 증원군의 부산 증원' 시점은 1월이었다. 하지만 칠천량 해전이 정유재란의 첫 대규모 전투다. 또한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의 전선이 하삼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실패했던 수륙병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왜군이 한양을 노릴 수 있게끔 됐다. 한 마디로 정유재란 초반의 국면을 결정지은 전투이다. 이 수륙병진은 임진왜란 때도 시도되었던 작전인데, 실제로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올라간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에게 '우리 수군이 곧 서해로부터 10만 명이 당도할 것입니다. 이제 조선의 임금은 어디로 가시려나이까?' 하는 글을 보내서 겁을 주기도 했다. 실제로 했다면 순식간에 전쟁을 끝낼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선조에게 글을 보내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이 완전히 조선 수군에게 들어왔기에 불가능해진 작전이었다. 이후 이 작전은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괴멸되자 정유재란 초기의 왜군의 핵심 전략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5.2. 권율에 대한 평가
1597년 11월 4일, 사헌부는 '(칠천량 해전의 원인 중 하나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도원수는 상황을 봐가야 했다. 그런데 경솔하고 부질없게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독촉했다가 6년 동안 어렵게 만들어온 수군을 무너뜨리고 호남을 내어줬다.' 하는 요지로 판했다. 이에 선조는 한창 전쟁 중인데 논하는 바가 지나치다고 기각했다. #1601년 1월 17일, 전쟁이 끝나자 선조가 정반대로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원균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니 도원수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며 원균을 옹호하며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5.3. 배설에 대한 평가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친 것은 다른 경우였다면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이 경우에는 최고 지휘관과 지휘부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고, 전 병력이 사분 오열되어 각개 도주하는 상황이었기에 배설이 휘하 전선을 이끌고 퇴각한 것은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배설이 그나마 명량 해전 당시 12척이라도 투입할 수 있는 배를 남긴지라 되려 재평가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기록된 명량 해전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후 수습된 조선 수군의 80여 척이 넘는 판옥선 대부분 역시 수색 소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전투에서 배설은 자기 휘하의 챙길 수 있는 전함은 최대한 온전하게 챙겨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량 해전 당시 참전한 판옥선의 소속이 제각각인 점이 그 근거이다. 즉 배설이 직접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 외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함선은 최대한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복직한 이순신이 싸우러 나갈 배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배설은 퇴각하면서 한산도에 있던 물자들을 일본군 손에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태우는 등 그냥 도주가 아니라 상당히 능동적인 군사적 액션을 보여주었다. 난중일기 8월 13일에 전라 좌수사 시절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오던 측근이었던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오며 병장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난중일기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이 이몽구를 처벌하라는 유지를 갖고 온 것을 생각하면 배설의 행동은 전술적으로 옳은 행동이었다. 퇴각시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물품(식량, 무기, 자재)을 폐기하는 기초적인 전술이다. 이후에도 이몽구가 멀쩡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연말에 전사한 걸 보면 처벌은 받았어도 참형과 같은 극형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선 아직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엄한 처벌을 주문한 듯하다.조정에서 탄핵을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처형인지는 알 수 없다. 이몽구는 1605년에는 원무공신 2등에 추증, 복권되었다.
첨언하자면, 칠천량 해전 때 배설의 함대만 유일하게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고,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 습격 때 최초로 응전한 장수도 배설이었다. 그러나 배설은 명량 해전을 앞둔 상황에서 탈영해[71]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붙잡혀 처형되었다. 다만 이때의 배설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기에[72] 여러 정황상 배설의 도망은 무조건 비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배설 문서 참조.[73]
6. 대중매체
6.1. 1986년, 사극 조선왕조 오백년
5부 임진왜란 중 46회에 아주 간략히 나왔다. 평상시엔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 안하냐고 대들던 다혈질로 나왔던 원균이 정작 권율이 출전 명을 내리자 출전 못한다고 버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나온 태도 변화인 만큼 원균 명장론을 내세웠던 이 작품이 가진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원균을 용장처럼 묘사해놓다보니 정작 칠천량 해전 때 머뭇거린 이유가 설명이 안되어 있다. 정작 전투 장면은 그냥 원균이 배타고 나가는 장면에서 해설로 때워버리면서 임진왜란을 다룬 다른 사극들과 마찬가지로 원균이 전사한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했다.6.2. 1992년, 다큐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신승수 영화 감독이 나래이션을 한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묘사하고 있는데 원균이 권율에게 얻어터진 후 출진은 했으나 밤에 쳐 자다가 갑자기 왜군에게 불화살로 기습을 당했다. 이후 원균은 우왕좌왕하며 전투조차 못해보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마치 샌드백처럼 실컷 두들겨 맞기만 했다. 이후 배를 모두 잃은 원균은 육지로 도망쳤다가 육지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2명 정도 베더니 3번째 왜병에게 살해당해 전사했다. 명대사는 "장군, 배 한 척에 불이 났사옵니다."[74]6.3. 임진록 2
임진록 2/시나리오에서 일본군의 여섯 번째 시나리오로 등장한다. 칠천량 해전을 일본의 시선에서 체험해볼 수 있다. 닌자를 이용하여 적의 기지를 점령하고 적군을 섬멸하는 게 목표이다.6.4. 2004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1회 ~ 92회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그동안 이순신을 모함하고 자신이 떵떵거리며 주장했던 논리에 의해 선조와 권율 등에게 두들겨맞고 부산진으로 쫓겨나다시피 출정하게 된 이후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던 원균이 김완·이억기·우치적의 충언을 받아들여 견내량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지만, 곧바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게 된다. 와키자카는 "지금 이 모습을 이순신이 봤어야 하는데"라고 말한 뒤 포격전은 일본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백병전으로 조선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도는 거북선의 사각지대인 돛대로 사다리를 놓고 침입하는 왜군을 지휘하면서 "이걸로 메구라부네의 생명도 끝이 나겠군"이라 말하며 조롱한다.
결국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조선 함대는 일본 함대의 기습 포격을 받아 거북선을 포함한 상당한 전선을 잃었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돌격을 시도하는 판옥선에 일본군이 침입하면서 결국 조선 수군은 백병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며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75] 이억기를 시작으로 작중에서 감초 역할을 했던 여러 군관들, 병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하나하나 집중적으로 연출되어,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조선 수군이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지는지 시청자에게 실감나게 묘사되었다.
그나마 마침내 자신이 틀렸고 이순신이 옳았음을 깨닫고 늦게나마 갱생한 원균이 전사하기 직전에 우치적 등에게 이순신의 충직한 부하가 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조선 수군이 더는 분열하지 않고 이순신 휘하에 완벽히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손실이 워낙 컸기에 이 정도 성과는 아무래도 좋을 지경이다. 작품 외적으로는 마지막에 원균이 사망하는 장면을 지나치게 열혈적으로 묘사하여 대중들로부터 원균을 지나치게 옹호했다는 비판도 들었다. 그래도 원균이 "내가 틀리고.. 이순신이 옳다는 것" 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은, 둘을 더 이상 라이벌의 위치에 올려 놓지 않고 원균이 이순신의 아래임을 보여주는 적절한 묘사가 되었다. 애초에 불멸의 이순신 자체가 여러가지 통찰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장면 말고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 자체가 이 '통찰'의 집약체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꼬득이면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예견하는 묘사가 있는가 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대드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세키가하라 전투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본작에서는 내레이션을 통해 칠천량 패전으로 인해 하삼도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사실을 짤막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서기 1597년 정유년, 그 8월의 전황은 처참했다.
7월 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삼도연합수군을 칠천도 앞 춘원포에서 대파한 일본군은 즉시 전군을 우군과 좌군으로 편성, 대대적인 서진을 감행, 전라도 공략전에 나서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우군은 양산, 밀양, 합천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남원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좌군은 고성, 사천, 구례 등을 점령한 후 역시 남원으로 향했다.
결국 1597년 8월 16일, 남원성마저 함락시키고 이제 전주성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7월 16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삼도연합수군을 칠천도 앞 춘원포에서 대파한 일본군은 즉시 전군을 우군과 좌군으로 편성, 대대적인 서진을 감행, 전라도 공략전에 나서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우군은 양산, 밀양, 합천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남원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좌군은 고성, 사천, 구례 등을 점령한 후 역시 남원으로 향했다.
결국 1597년 8월 16일, 남원성마저 함락시키고 이제 전주성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6.5. 2014년, 영화 명량
직접적인 전투 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전후의 전멸한 판옥선들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꽤 자주 거론된다. 이 과정에서 잡혀온 탈영병 오상구는 자신의 동료들이 칠천량에서 모두 죽었다며 울먹거리지만 이순신은 그걸로 할 말 다했느냐고 묻고 직접 환도로 목을 쳐버리고 군사들에게 군율은 지엄한 것이다라고 일갈. 이를 지켜보던 배설은 출전에 대한 반대를 접는 대신 거북선을 불태우고 병사들에게 탈영을 선동하다가 직속부하인 안위의 활에 맞아 죽는다.6.6. 2015년, 드라마 징비록
48화에서 아주 간략하게 다룬다. 전반적인 해전의 묘사나 원균이 죽는 장면 등은 전혀 안 나오고 그냥 내레이션 처리. 정유재란이 시작된 후 등장인물들이 칠천량에서 패했다고 언급만 하는 정도다.6.7. 2017년, 게임 벽람항로
국내4서버의 명칭이 옥계인데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그 지역이다. 아래의 기타에 옥계 마을이 언급된다.7. 전시관
7.1. 2013년, 거제 칠천량해전공원
|
거제 칠천량해전공원 |
거제시 안내페이지, 거제해관광개발공사 안내페이지
어두운 역사를 접근하여 패배도 기억하자는 의미의 공원이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인 이순신의 파직 과정을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아 하옥됐다는 기존 통념이 아닌 실제 사실을 충실히 설명한다. 원균이 기문포 공격, 안골포 공격 과정에서의 공과도 다루고, 출진 과정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여 이해를 돕는다. 다만 칠천량 해전을 '조선 수군이 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모두 궤멸당했다'는 오류가 있다. 상술했듯 공원이 위치한 칠천량 해역에서의 전투 이후로도 춘원포로의 후퇴와 일본군의 추격전이 있었기 때문.
7.2. 2018년, 평택 원릉군기념관
2018년 4월 14일, 임진왜란의 영웅 원균, 기념관에서 되살아나칠천량 해전에 대해, "원균은 수륙병진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의 억지로 눈물을 머금고 출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가 원균옹호론에 기반해 만들었기 때문.
위 문장만 보면 틀린 바는 없다. 하지만 이순신이 건재할 때 수군만으로도 공략가능하다고 제안한 것이 원균이었다. 그의 기획대로 수군만으로 기문포, 안골포, 가덕도를 들이박았으나 일본군은 다시 그 빈자리를 채웠다. 그래서 이순신과 같이 수륙병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으나 당시 조선은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이 나름 고심하여 '함대를 나누어 한산도를 지키면서 부산포를 왕복하면 적의 보급이 곤란해져 굶주릴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제멋대로 이를 '전군을 출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가 소멸시킨 것이 원균이다. 그것도 3차 출정을 마치고 곤장맞고 이틀만에 홧김에 4차 출정을 하여, 장병들을 11일간 330km나 항행하는 강행군을 시켜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이 원균이다.
[1]
전사하지 않고 생존했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원균 항목 참조.
[2]
배설의 전과
[3]
화살에 맞았다.
[4]
배설이 지휘해서 탈출한 12척 외에 절반 정도는 독자적으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나, 개별로 흩어져서 탈출하였기에 사실상 실종.
[5]
후술하겠지만 기초적인 야간 사주경계와 퇴각로 정탐 정도만 해도 있을 수 없는 결과다. 불과 3년 전 원균이
장문포 해전에서 사주경계와 퇴각로 정탐으로 공을 세운 바도 있어 미스테리하다. 경계명령은 내렸으나 무려 11일간 300km 이상의 대장정을 해서 병사들이 야간 불침번조차 못 서고 골아떨어질만큼 체력을 떨어질만큼, 원균의 무리한 항행과 공적 욕심이 원인이 되겠다. 당시 원균의 행각을 보면 불이 잘 붙을 환경을 고의적으로 조성하고 일부러 불을 지른 뒤 휘발유를 듬뿍 부은 격이었으니, 농담이 아니라 원균이 이순신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이순신이 공적과 함대를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아군 전력에 대한
사보타주 차원으로 일부러 저랬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저 가정을 통해서야 원균의 행적이 어느 정도 아귀가 맞게 될 정도로 칠천량 해전 당시 원균의 행각은 인류의 두뇌로는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6]
진짜로 당대 최대, 최강의 군대가 몰살당한 경우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살수대첩도 있지만 이조차 상대군 장수(
아르미니우스/
을지문덕)가 하늘이 내린 인물 수준이라 몰살당한 거지 아군이 트롤짓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7]
세계 전쟁사에서 원균과 비교할 만한 무능하고 포악한 장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개전에 모두 관여한 주제에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 패전만 거듭하다가
영국군의 진공이 무섭다고
탈영하여
임팔 작전보다 더 많은 아군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대장으로 승진한
기무라 헤이타로 정도밖에 없으며, 심지어 그 기무라조차 버마 방면군이 이미 임팔 작전 과정에서 처참히 몰락한 상태였다는 최소한의 옹호라도 가능하다. 물론 기무라는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되고 사형당하며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8]
본 해전의 결과만 정리. 이후
이순신이 귀환하여 벌인
어란포 해전,
벽파진 해전,
명량 해전 등의 결과는 각 해당 문서들에 정리.
[9]
충청도까지 넘어갈 뻔 했지만, 다행히
직산에서 조명연합군 육군이 이를 저지했다.
[10]
명군과 합세해도 힘들다. 당시 명군은 무력시위를 제외하고는 부산 일대 왜군을 압박할 의지나 능력은 없었다. 이들은 왜군 10만이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구원하지도 못했다.
[11]
『이순신 평전』, 책문, 2012, pp. 214-237
[12]
『선조실록』 권52, 27년 6월 28일(을해)
[13]
『선조실록』 권72, 29년 2월 2일(기해)
[14]
물론 이 말만 믿고 내해의 요새 한산도의 통제영을 외해에 드러나 있는 거제도 옥포에 배치하고 하염없이 일본군 상륙을 기다리는 것은 바보짓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첫 승리이자 조선의 첫 승리인
옥포 해전이 정확히 이렇게 거제 외해의 옥포에 정박중인
토도 타카토라의 선박들을 습격해 몰살시킨 전투다.
[15]
고니시와 가토는
센고쿠 시대부터 원수지간인 것이 조선 일본 양국에 이미 유명했다. 고니시 입장에선 가토가 죽는 것도 이득이었고, 안 죽더라도 상륙을 못 해 벌 받게 돼서 이득이었다. 반대로 가토가 상륙해서 이순신이 벌을 받아도 이득이니, 고니시 입장에선 100% 이익만 보는 장사였다.
[16]
1596년 10월 ~ 1597년 3월
난중일기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의 1597년 1월 중 날짜가 미정인 부분에 이런 답변내용이 있다. 장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1월 23일 이순신 책임론이 불거지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17]
애당초 요시라의 '며칠 내'라는 구체적 정보는 11일이었고, 가토의 상륙은 12~14일이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산도에서 가덕도~다대포까지 나아가는데 3일은 걸리므로. 게다가 속도가 빠른 일본 선박을 평저선 중심의 조선 수군은 잡긴 어렵고 상륙만 저지하고 대마도로 돌려보내는 데에 그친다. 즉 이 보고는 무리한 모함이었다.
[18]
2017년, 소설가 송우혜는 이순신 함대가 밤이면 절영도에 정박하고, 해가 뜨면 부산포를 때리는 전투를 2월 12일까지 사흘간이나 벌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19]
하지만 부산포에선 전투가 없었다고 해석하는게 더 타당하다. 이순신/원균/일본측 모두 전투기록이 없다. 가토가 당시 부산포에 없었고, 고니시가 조선군 측에 좁은 부산포에서 200척vs1000척 간에 서로 혈전을 벌이기보단 후방 추격을 하지 않을테니 돌아가달라고 협상을 걸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군이 무사한 귀환, 그리고 목표였던 가토도 없는데다, 협상-평화파 고니시군과 무리해 싸우지 않고자 이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20]
이 부분의 신뢰도는 매우 낮다. 원균은 이순신을 매우 질투하여 폄하하고 모함하는 데 혈안이 된 작자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짓말일 확률이 매우 높다.
[21]
웅포 해전,
장문포 해전에 이어 3번째 상륙전이다.
[22]
이 시점까지 양측이 가덕도에서 2주 넘게 대치하며 외교 줄다리기가 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23]
이 화약은 조선 육군이 임진년~계사년 2년 내내 생산한 화약(3600근)보다 많다.
[24]
이는 고니시가 자꾸 조선 수군을 낚아 부산까지 열병하게 하여, 조선수군을 피로하게 하고 그 군세도 파악하기 위한 간계로 볼 수도 있다.
[25]
안골포-가덕도보다 더 동쪽인, 오늘날 창원시 용원동 일대.
[26]
이는
웅포 해전,
장문포 해전을 겪으면서, 조선수군이 적진을 초토화는 시켜도, 결국 깃발꽂고 진지장악은 육군이 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기 때문이다.
[27]
가덕도는 2월 부산 진공작전 당시 이순신도 상륙전에 실패했다.
[28]
『정한위략(征韓偉略)』 卷四, 二十三.
[29]
6월 18일 출병을 '드디어 출병'이라고 표현했으므로 더욱 정확하다.
[30]
이순신이 통제사일 때는 병사를 지원한 적이 없었고 전술했던 대로 오히려 수군 소속을 육군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조의 총애를 듬뿍 받는 원균에게는 지원을 못 해줘서 안달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도원수 권율 휘하의 병사들을 수군 소속으로 보내준 일이 있었다.
[31]
또한 이는 조선 육군이 1.2만, 수군이 5천 남짓이었음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32]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통해 이보다 이전부터 6~7월 호남진격설을 흘렸다. 실제로 6월이 원래 목표였으나, 준비 부족으로 7월 15일부터 일본군이 움직였다.
[33]
원균은 3월부터 안골포-장수포를 수륙병진한 뒤에 수군의 본진을 삼으면 된다고 무리한 작전을 주장했지만, 이렇게 부산의 일본군 본진이 움직여 창원까지 와 버려 해당 작전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원균은 수군 단독작전인 2차 출정을 마음 먹는다.
[34]
6월 19일 하루 동안 안골포, 가덕도, 그리고 앞 바다에서 3차례 교전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칠천도에서 숙박했다는 점이 훗날 3/4차 출정과 같다.
[35]
직전의 기문포 해전과 강력한 항의로 거제도 쪽의 일본군 세력이 없었고, 그 덕에 진격시 장문포 숙박이 가능했다.
[36]
가덕도 옆 눌지왜성이 있는 눌지도
[37]
이 제안대로 7월 8일, 원균은 절영도에서 상륙하려는 일본 수송선단 수백척을 외해로 내쫓았다. 하지만 판옥선을 잃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38]
거북선문화재연구소가 4차 출정만 정리한 지도는 다음과 같다.
[39] 일본 수군은 칠천량 외질포를 야습해 정신을 빼놓는 와중에, 견내량의 섬들에 횃불을 켜서 '견내량이 막혔다'는 착각을 유도했다. 원균은 이를 보고 절망하고 판옥선들을 일본에 넘기지 않고자 가장 가까운 춘원포로 들어가서 배들을 전소시켰다. 반면 배설은 견내량을 강행돌파하려 했으나 견내량에 일본 수군은 없었다. 배설은 이후 통제영을 전소하고 퇴각하여 훗날을 기약한다. [40] 조선 수군이 당시 182척 가량이므로, 전군을 둘로 나누어 82척으로는 기문포/안골포/가덕도의 일본군을 위세로 눌러 거제 내해 퇴각로를 확부해두고, 100척으로는 다대포/부산포를 강습/압박하는, 비변사/권율이 제안한 '나누어 순회' 안을 현실적으로 해석한 전략이었다. [41] 원균이 두 차례 출정으로 때렸음에도 거제도 북부가 일본군의 강력한 영향력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외해의 중립적인 포구 중에서 정박지를 삼은 것이고, 거제도 북부의 영등포에서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즉각 보고해도, 외해를 돌아 그냥 한산도로 귀환한 것일 수도 있어 망설이게 된다. [42] 난중일기 7월 16일 (을미), 세남(世男)의 보고 기준. [43] 원균이 보유했던 전선이 182척인 걸 감안하면 이 전투까지 무려 7.6%를 까먹은 것이며, 전투병력 + 비전투병력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원균은 2천여명을 자기 손으로 수장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 판옥선에 타고 있는 병력이 정예 병력인 걸 감안하면 조선 수군 입장에선 매우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44] 난중일기 7월 14일 (계사), 김억(金億)의 보고 기준. [45] 절영도에서 한산도까지 하루만의 이동은 불가능하기 때문. 4차 출정 때와 같이 오는 길에 들렀던 칠천도의 외질포에서, 항해가 멀고 피곤했던만큼 이틀(8~9일) 숙박을 결정했을 것이다. [46] 선조실록 7월 22일 노직의 보고 기준. [47] 이순신의 난중일기 7월 15일 (갑오), 이덕필(李德弼)의 보고 기준, 3차 출정은 총 20척이 손실되었다. 즉 절영도 앞바다에서 표류로 잃은 12척 외에, 9일의 전투로 8척을 잃은 것. 즉 4차 출정에서 칠천량에서의 대패는 이처럼 예견되어 있었다. [48] 이 무렵 권율이 사천 곤양에 있었음은 난중일기(정유일기 7월 8일)로 증명된다. [49] 이순신도 웅포 해전에서 지휘를 따르지 않은 판옥선 1척의 자침, 장문포 해전에서 후방 탐망선 3척이 기습당하는 등 손실은 있어왔다. 하지만 원균은 무려 판옥선 22척을 적진에 헌납했으니, 당연히 권율이 분노할 수 밖에 없다. 장병들이 배를 불사르고 죽음을 각오해서 망정이지, 일본에 항복했더라면 그대로 일본군이 화포를 완비한 판옥선 22척이 늘어났을 수 있는 아찔한 일이었다. [50]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따르면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뒤 곧 도로 보내었다고 서술한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칠천량까지 후퇴한 7월 15일에 권율이 고성으로 불러 곤장을 치고 돌아가게 했고, 바로 그 날인 8월 7일에 해전이 일어났다고 하는둥 신뢰도가 낮다. 여러 자료를 고루 참고한 선조수정실록은 난중잡록과 같이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점을 출진 직전으로 서술했다. [51] 원균의 아들인 원사웅까지 같이 곤장을 맞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을 하는 쪽은 KBS 프로그램 <역사에의 초대>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그 프로그램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 [52] 6월 26~28일 비변사와 권율이 대담했듯, 당시 조정과 권율은 원균에게 함대를 나누어 부산포를 교대로 오가라고 요구했지, 전군을 출정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원균도 방금 다녀온 3차 출정을 정확히 이렇게 시행했다. 그런데 막 백여km의 3차 출정을 다녀와 피곤한 조선 수군에게 원균이 바로, 그것도 '전군' 출정 결정은 비이성적인 명령이었다. 이로서 조선 수군은 견내량과 거제 내해를 지킬 후속부대를 남겨두지도 않고, 피로에 찌든채 출정하게 되었다. [53] 이는 2월 13일 이순신이 부산 진공작전 후 복귀 시 가덕도에서 초동이 죽자 극대노하여 공성전을 벌이고 요시라의 사과까지 받아낸 것과 너무나도 상반된다. 다만 2월엔 5백명 남짓만 있었지만, 이 시점엔 일본 수군이 정식으로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300km의 항해로 너무 지쳐 수면이 필요한 상태에서 전투로 가덕도에 발이 묶이면 전군이 안골포/가덕도/부산포의 포위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54] 이순신의 1592년 부산포 해전, 1594년 장문포 해전 때는 물론이고, 원균의 2, 3차 출정 모두 정박했던 곳이다. 경계를 제대로 시행한다는 전제 하에 원균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55]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김완이 쓴 해소실기에 내용이 있다. [56] 이순신은 통제사 복직 후 서해 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정박할 때마다 탐망선을 띄웠다. 그 덕에 어란포의 왜선을 확인한 뒤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고, 그날 밤 더 많은 전선으로 일본군이 습격을 했는데도 막아내었다. 워낙 전과가 찬란하다 보니 부각되지 못하는 감이 있는데 이순신은 싸움보다는 적의 동태와 전망을 살피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이러한 사전 정보를 충분히 수집한 후 아군이 100% 이긴다고 확신하는 전장에다가만 함대를 출진시켰다. 즉 23전 23승이라는 전과는 치열한 정보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다만 여건상 그렇지 못한 명량 해전과 왜교성 전투의 경우도 있었다. [57] 오전 3~5시 [58] 경계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고 싶어 안달이냐.'라며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 [59] 추원포라고도 한다. 크게 두 곳으로 추정하는데 현 지명 통영시 광도면 황리(우세설)와 현재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 설이 있다. [60] 이렇게 함대 간 작전 전달이 어려운 야간-새벽녘에 기습하여 적군을 갇힌 협곡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한 뒤 궤멸시킨 일본 수군의 전략은, 노량 해전에서는 반대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똑같이 갚아 주었다. [61] 견내량이 실제 막혔다 해도 원균이 배설이 내린 결정처럼 견내량을 돌파하자고 명령을 내려야지, 육지로 도망을 결정한 것은 원균 용장론의 완벽한 반박이 되는 사례다. [62] "가토 기요아키는 약간 뒤에 도착했는데, 전투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 정한휘보 [63]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 있다가 지속적으로 이순신에게 합류해, 조선 수군은 명량 해전 때 대선 13척, 이듬해 절이도 해전 때 대선 85척 + 소선 85척이 된다. [64] 춘원포는 오늘날 통영시 황리 일대다. 이곳에는 원균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전하는 전 원균묘가 남아 있다. [65] 하지만 배설은 판옥선 12척을 숨겨두었다고 할 뿐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러서야 이순신에게 이를 인계한다. [66] 바로 이 날 오후에 진주 굴동에 일본군 육군 좌군이 들이닥쳤다! [67] 고니시가 앞서 5월중에 '여름 6~7월 중 전라도로 진격' 정보를 조선 측에 흘린 바 있다. 이는 조선 조정을 안달나게 하여, 원균이 무리하게 출정을 하게끔 압박하기 위한 간계였다. [68] 이걸 답한 7월 23일에 이순신은 배가 없었다. 바로 전날 합류한 배설이 12척을 숨겨두었다고 주장했으나, 8월 18일에 실제 회령포에서 보여줄 때까진 그것이 거짓일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 합류를 거부했으니 일종의 도박이었다. [69] 명량 바로 뒤의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25-2에 우수영 본진이 있었다. [70] 이 글을 쓴 사관(기록관) 본인을 뜻한다. [71]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지휘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배설이 자발적으로 먼저 떠났다고 묘사했으나, 배설 같은 고위 지휘관의 탈영은 지휘 혼란 이상으로 아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이니 이건 억지로 배설을 미화한 것이다. 어떤 인물이든 공은 공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봐야지 과오를 미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72] 현대로 치면 PTSD라 할 수 있는 증세들을 보였다. 실제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전쟁터에 오래 있다 보면 걸릴 수 있어 마냥 겁쟁이라고만 매도할 수 없다. 여기에 선조가 내린 교지에 예를 표하기를 거부하는 등,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등에서 무리한 공격론만 강요하여 대패를 초래한 선조에 대해서 크게 불신감을 가진 듯한 모습을 보인다. 배설보다 더 심하게 당하고도 선조의 교지에 꼬박꼬박 예를 표하고 배설한테 꼽주는 이순신이 비정상으로 보이겠지만 난중일기에 본인이 쓴 내용[76]에서 보이듯이 이순신은 자신을 전라 좌수사로 발탁한 선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었고 해당 시점에서는 예전 같지는 못했겠지만 선조의 은혜를 입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충성심을 아예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73] 물론 배설의 탈영 자체는 도원수 권율이 격노하여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을 정도의 사안이니 비판을 아예 피할 수는 없으나, 그 조선 조정조차도 적전도주라는 중죄를 저지른 배설을 사후 원종 1등공신에 봉하여 그 공이 작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다. [74] 원균의 부장이 자고 있는 원균을 깨우면서 한 말이다. [75] 당시 일본의 주력 전선이었던 세키부네는 설계 및 제작법상의 한계로 뱃머리에 2문 정도의 화포를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안택선은 크기가 커서 좀 더 많은 화포를 실을 수 있었지만 판옥선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근접전으로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나, 포격이 준 피해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39] 일본 수군은 칠천량 외질포를 야습해 정신을 빼놓는 와중에, 견내량의 섬들에 횃불을 켜서 '견내량이 막혔다'는 착각을 유도했다. 원균은 이를 보고 절망하고 판옥선들을 일본에 넘기지 않고자 가장 가까운 춘원포로 들어가서 배들을 전소시켰다. 반면 배설은 견내량을 강행돌파하려 했으나 견내량에 일본 수군은 없었다. 배설은 이후 통제영을 전소하고 퇴각하여 훗날을 기약한다. [40] 조선 수군이 당시 182척 가량이므로, 전군을 둘로 나누어 82척으로는 기문포/안골포/가덕도의 일본군을 위세로 눌러 거제 내해 퇴각로를 확부해두고, 100척으로는 다대포/부산포를 강습/압박하는, 비변사/권율이 제안한 '나누어 순회' 안을 현실적으로 해석한 전략이었다. [41] 원균이 두 차례 출정으로 때렸음에도 거제도 북부가 일본군의 강력한 영향력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외해의 중립적인 포구 중에서 정박지를 삼은 것이고, 거제도 북부의 영등포에서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즉각 보고해도, 외해를 돌아 그냥 한산도로 귀환한 것일 수도 있어 망설이게 된다. [42] 난중일기 7월 16일 (을미), 세남(世男)의 보고 기준. [43] 원균이 보유했던 전선이 182척인 걸 감안하면 이 전투까지 무려 7.6%를 까먹은 것이며, 전투병력 + 비전투병력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원균은 2천여명을 자기 손으로 수장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 판옥선에 타고 있는 병력이 정예 병력인 걸 감안하면 조선 수군 입장에선 매우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44] 난중일기 7월 14일 (계사), 김억(金億)의 보고 기준. [45] 절영도에서 한산도까지 하루만의 이동은 불가능하기 때문. 4차 출정 때와 같이 오는 길에 들렀던 칠천도의 외질포에서, 항해가 멀고 피곤했던만큼 이틀(8~9일) 숙박을 결정했을 것이다. [46] 선조실록 7월 22일 노직의 보고 기준. [47] 이순신의 난중일기 7월 15일 (갑오), 이덕필(李德弼)의 보고 기준, 3차 출정은 총 20척이 손실되었다. 즉 절영도 앞바다에서 표류로 잃은 12척 외에, 9일의 전투로 8척을 잃은 것. 즉 4차 출정에서 칠천량에서의 대패는 이처럼 예견되어 있었다. [48] 이 무렵 권율이 사천 곤양에 있었음은 난중일기(정유일기 7월 8일)로 증명된다. [49] 이순신도 웅포 해전에서 지휘를 따르지 않은 판옥선 1척의 자침, 장문포 해전에서 후방 탐망선 3척이 기습당하는 등 손실은 있어왔다. 하지만 원균은 무려 판옥선 22척을 적진에 헌납했으니, 당연히 권율이 분노할 수 밖에 없다. 장병들이 배를 불사르고 죽음을 각오해서 망정이지, 일본에 항복했더라면 그대로 일본군이 화포를 완비한 판옥선 22척이 늘어났을 수 있는 아찔한 일이었다. [50]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따르면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뒤 곧 도로 보내었다고 서술한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칠천량까지 후퇴한 7월 15일에 권율이 고성으로 불러 곤장을 치고 돌아가게 했고, 바로 그 날인 8월 7일에 해전이 일어났다고 하는둥 신뢰도가 낮다. 여러 자료를 고루 참고한 선조수정실록은 난중잡록과 같이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점을 출진 직전으로 서술했다. [51] 원균의 아들인 원사웅까지 같이 곤장을 맞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을 하는 쪽은 KBS 프로그램 <역사에의 초대>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그 프로그램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 [52] 6월 26~28일 비변사와 권율이 대담했듯, 당시 조정과 권율은 원균에게 함대를 나누어 부산포를 교대로 오가라고 요구했지, 전군을 출정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원균도 방금 다녀온 3차 출정을 정확히 이렇게 시행했다. 그런데 막 백여km의 3차 출정을 다녀와 피곤한 조선 수군에게 원균이 바로, 그것도 '전군' 출정 결정은 비이성적인 명령이었다. 이로서 조선 수군은 견내량과 거제 내해를 지킬 후속부대를 남겨두지도 않고, 피로에 찌든채 출정하게 되었다. [53] 이는 2월 13일 이순신이 부산 진공작전 후 복귀 시 가덕도에서 초동이 죽자 극대노하여 공성전을 벌이고 요시라의 사과까지 받아낸 것과 너무나도 상반된다. 다만 2월엔 5백명 남짓만 있었지만, 이 시점엔 일본 수군이 정식으로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300km의 항해로 너무 지쳐 수면이 필요한 상태에서 전투로 가덕도에 발이 묶이면 전군이 안골포/가덕도/부산포의 포위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54] 이순신의 1592년 부산포 해전, 1594년 장문포 해전 때는 물론이고, 원균의 2, 3차 출정 모두 정박했던 곳이다. 경계를 제대로 시행한다는 전제 하에 원균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55]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김완이 쓴 해소실기에 내용이 있다. [56] 이순신은 통제사 복직 후 서해 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정박할 때마다 탐망선을 띄웠다. 그 덕에 어란포의 왜선을 확인한 뒤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고, 그날 밤 더 많은 전선으로 일본군이 습격을 했는데도 막아내었다. 워낙 전과가 찬란하다 보니 부각되지 못하는 감이 있는데 이순신은 싸움보다는 적의 동태와 전망을 살피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이러한 사전 정보를 충분히 수집한 후 아군이 100% 이긴다고 확신하는 전장에다가만 함대를 출진시켰다. 즉 23전 23승이라는 전과는 치열한 정보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다만 여건상 그렇지 못한 명량 해전과 왜교성 전투의 경우도 있었다. [57] 오전 3~5시 [58] 경계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고 싶어 안달이냐.'라며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 [59] 추원포라고도 한다. 크게 두 곳으로 추정하는데 현 지명 통영시 광도면 황리(우세설)와 현재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 설이 있다. [60] 이렇게 함대 간 작전 전달이 어려운 야간-새벽녘에 기습하여 적군을 갇힌 협곡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한 뒤 궤멸시킨 일본 수군의 전략은, 노량 해전에서는 반대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똑같이 갚아 주었다. [61] 견내량이 실제 막혔다 해도 원균이 배설이 내린 결정처럼 견내량을 돌파하자고 명령을 내려야지, 육지로 도망을 결정한 것은 원균 용장론의 완벽한 반박이 되는 사례다. [62] "가토 기요아키는 약간 뒤에 도착했는데, 전투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 정한휘보 [63]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 있다가 지속적으로 이순신에게 합류해, 조선 수군은 명량 해전 때 대선 13척, 이듬해 절이도 해전 때 대선 85척 + 소선 85척이 된다. [64] 춘원포는 오늘날 통영시 황리 일대다. 이곳에는 원균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전하는 전 원균묘가 남아 있다. [65] 하지만 배설은 판옥선 12척을 숨겨두었다고 할 뿐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러서야 이순신에게 이를 인계한다. [66] 바로 이 날 오후에 진주 굴동에 일본군 육군 좌군이 들이닥쳤다! [67] 고니시가 앞서 5월중에 '여름 6~7월 중 전라도로 진격' 정보를 조선 측에 흘린 바 있다. 이는 조선 조정을 안달나게 하여, 원균이 무리하게 출정을 하게끔 압박하기 위한 간계였다. [68] 이걸 답한 7월 23일에 이순신은 배가 없었다. 바로 전날 합류한 배설이 12척을 숨겨두었다고 주장했으나, 8월 18일에 실제 회령포에서 보여줄 때까진 그것이 거짓일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선조의 육군 합류를 거부했으니 일종의 도박이었다. [69] 명량 바로 뒤의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25-2에 우수영 본진이 있었다. [70] 이 글을 쓴 사관(기록관) 본인을 뜻한다. [71]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지휘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배설이 자발적으로 먼저 떠났다고 묘사했으나, 배설 같은 고위 지휘관의 탈영은 지휘 혼란 이상으로 아군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이니 이건 억지로 배설을 미화한 것이다. 어떤 인물이든 공은 공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봐야지 과오를 미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72] 현대로 치면 PTSD라 할 수 있는 증세들을 보였다. 실제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전쟁터에 오래 있다 보면 걸릴 수 있어 마냥 겁쟁이라고만 매도할 수 없다. 여기에 선조가 내린 교지에 예를 표하기를 거부하는 등,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등에서 무리한 공격론만 강요하여 대패를 초래한 선조에 대해서 크게 불신감을 가진 듯한 모습을 보인다. 배설보다 더 심하게 당하고도 선조의 교지에 꼬박꼬박 예를 표하고 배설한테 꼽주는 이순신이 비정상으로 보이겠지만 난중일기에 본인이 쓴 내용[76]에서 보이듯이 이순신은 자신을 전라 좌수사로 발탁한 선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었고 해당 시점에서는 예전 같지는 못했겠지만 선조의 은혜를 입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충성심을 아예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73] 물론 배설의 탈영 자체는 도원수 권율이 격노하여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을 정도의 사안이니 비판을 아예 피할 수는 없으나, 그 조선 조정조차도 적전도주라는 중죄를 저지른 배설을 사후 원종 1등공신에 봉하여 그 공이 작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다. [74] 원균의 부장이 자고 있는 원균을 깨우면서 한 말이다. [75] 당시 일본의 주력 전선이었던 세키부네는 설계 및 제작법상의 한계로 뱃머리에 2문 정도의 화포를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안택선은 크기가 커서 좀 더 많은 화포를 실을 수 있었지만 판옥선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근접전으로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나, 포격이 준 피해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