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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9:37:28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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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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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박문수
朴文秀
<nopad>파일:박문수 분무공신도상.jpg
출생 1691년 10월 28일
(음력 숙종 17년 9월 8일)
(現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
사망 1756년 5월 22일 (향년 64세)
(음력 영조 32년 4월 24일)
봉호 영성군(靈城君)
시호 충헌(忠憲)
본관 고령 박씨
성보(成甫)
기은(耆隱)
붕당 소론

1. 개요2. 생애3. 암행어사 박문수 민담4. 기타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이나,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조선 문관이자 마지막 공신( 분무공신 2등). 술자리에서 시니컬한 조크를 잘 날린다는 평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칭송받는 점은 양반도 군포를 내라고 주장하는 등 백성의 편에서 입바른 말을 잘했었기에 어사직을 단기간 수행하면서도 암행어사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온갖 특권을 누리는 2등 분무공신이면서도 붕당으로는 소론으로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정승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1] 군정(軍政)에 밝아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서 난을 조기에 진압했고 세정(稅政) 등 경륜도 인정받았으며 저서는 《탁지정례(度支定例)》, 《국혼정례(國婚定例)》가 있고 글씨는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에 있는 기념비인《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남아 있다.

2. 생애

박항한(朴恒漢, 1666~1698)의 아들로 증조부는 현종 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이며 당고모가 경종의 장모인 영원부부인 박씨(靈原府夫人 朴氏, 1668~1735)이다. 박문수의 초취는 명성왕후의 종손녀인 김도협의 딸 청풍 김씨이고 재취는 인평대군의 현손녀이다.[2]]의 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생가 고모할머니이다.]

어려서 전염병으로 어머니 경주 이씨를 여의고 6살 때부터 아버지께 글을 배웠으나 아버지도 여읜 뒤로 외가 쪽에 의지하여 자랐다. 외숙인 이태좌(李台佐)[3]는 소론의 중심인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태좌의 재종형 이광좌(李光佐)는 소론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4번 지냈고,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 또한 영의정을 지내는 등, 박문수의 외가는 대표적인 소론의 명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태좌의 집에서 이종성[4]과 함께 글을 배운 박문수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전반적인 정치 노선이 소론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1723년(경종 3년) 33세에 증광 문과[5]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전체 합격자 41명 중에서는 26위이다. 관직 생활 초반기인 이 때 박문수는 당시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집권한 소론과 연잉군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소론은 경종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경종을 지지하였고, 그에 비해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노론은 지속적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하고 대리청정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소론 강경파가 이를 역모라 비판하여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성격이 온유한 경종만이 동생 연잉군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는 연잉군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소론계 박문수가 1724년(경종 4년)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의 관원[6]으로 임명되어 왕세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영조가 가장 총애했던 신하로 성장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소론에 속하나 정확히는 탕평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7] 1724년(경종 4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노론이 집권하자 삭직당했다.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8] 영남 어사로 나가 부정 관리들을 적발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때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해 반란군 진압에 전공을 세웠고[9] 난을 진압한 후에도 홀로 마을에 남아서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영조 6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영조 10년) 진주부사(陳奏副使)[10]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의 먼치킨스러운 면을 볼 수 있는데 과거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과거 급제 후 현재의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에 오를 때까지 걸린 시간은 단 15년이었다.[11]

1738년(영조 14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 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12]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1741년(영조 1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건 사실 불법이었는데 사전 보고없이 경상도의 곡식을 함경도로 운반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문책을 받을 상황이었다. 박문수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건지 내가 처벌 받는 것은 작은 일이나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큰 일에 속한다라고 했다고 한다.[13] 그 후 다시 병조판서를 지내고 경기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14] 1749년(영조 25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었다. 박문수가 호조판서로 있을 때 한 번은 어영대장(노론이었다)에게 어영청에서 꿔간 군량미를 갚으라고 독촉한 적이 있었는데 어영대장이 나름의 논리로 반박하며 임금의 탑전에서조차 첨예하게 싸웠다. 이 때도 영조는 박문수의 편을 들어줬다.[15] 그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등을 거쳐 세손사부(世孫師傅)[16]를 지내고 1752년(영조 28년) 왕세손(王世孫:琔)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영조 29년) 풀려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파일:external/86bb98ada9d69c8881b4bbdba9dd5c0049f87f12ad9bb631c25b223fdb010e22.jpg
말년의 박문수 초상. 일본 텐리(天理)대학 소장

보다시피 굴곡이 심한 관직 경력을 보냈다. 그러다가 1755년(영조 31년) 소론이 주도한 나주 괘서 사건에 휘말려 그와 관련한 옥사에 연루되었는데 영조는 직접 박문수를 불러 안심시키고 여전한 신임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스스로 죄인을 자처한 다음 세수도 빗질도 않으며 집에 틀어박혀 살다가 이듬해인 1756년(영조 3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적이 많은 박문수를 많이 감싸는 편이었는데 오죽하면 경연 자리에서 상례에 과하게 벗어나는 까칠한 농담을 날려대도 "박문수가 아니면 누가 저렇게 바른 말 하겠냐", "원래 쟤 성격이 저런 걸 새삼스럽게 고치겠냐" 따위의 말로 덮어버렸다. 드나들 때 문 닫는걸 깜빡한 것만으로도 잘못이 되어 추고를, 요즘으로 치면 시말서 처분을 당하는 추상같은 경연 자리에서 "임금은 부모고 백성은 아들이라면서요. 아들이 아버지 얼굴 좀 본다고 세상 뒤집어집니까. 코 처박고 아부떠는 것보다 우리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하시죠?"(영조 9년 1월 25일 < 승정원일기>) 등의 직격탄을 마구 날려대는걸 다 받아준 것. 박문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가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해서 세상을 떠난 그 날로 바로 박문수에게 영의정을 추증했으며 그에 대해 이런 말로 안타까움을 표했다.[17] 하기사 행정을 잘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신하를 함부로 숙청하는 것은 역대 제왕들도 하지 않았다.
" 영성(靈城 : 박문수)[18]이 춘방(春坊 : 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자고로 군신(君臣) 중에 비록 제우(際遇)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영조실록》 영조 32년(1756년) 4월 24일.

3. 암행어사 박문수 민담

평생을 백성들을 위해 애쓴 덕분에 여러 암행어사 민담의 주인공이 되어 현대에 와서는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명탐정이나 해결사로 등장하는 모습이 많다.
이 전설에서 동자가 알려준 시제가 '낙조(落潮)'라는 시인데 현재까지 남아있다.
[ruby(落照吐紅掛碧山, ruby=낙 조 토 홍 괘 벽 산)] 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해를 토하고
[ruby(寒鴉尺盡白雲間, ruby=한 아 척 진 백 운 간)] 찬 하늘에 가마귀가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ruby(問津行客鞭應急, ruby=문 진 행 객 편 응 급)] 나루를 묻는 길손의 채찍질 급하고
[ruby(尋寺歸僧杖不閑, ruby=심 사 귀 승 장 불 한)] 절 찾아 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바쁘다.
[ruby(放牧園中牛帶影, ruby=방 목 원 중 우 대 영)] 뒷동산 풀어 놓은 소 그림자 길기만 하고,
[ruby(望夫臺上妾低鬟, ruby=망 부 대 상 첩 저 환)] 망부대 위로 아낙네 쪽(머리) 그림자 나지막하다.
[ruby(蒼煙古木溪南路, ruby=창 연 고 목 계 남 로)] 오래되어 예스런 고목들이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ruby(短髮樵童弄笛還, ruby=단 발 초 동 농 적 환)] 짧은 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온다.
맹꽁이 서당 버전이나 여러 채록에 따르면 초립을 쓴 동자는 마지막 구절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하고 풀피리를 불며 가버렸는데 이 장면을 보고 박문수가 마지막 구절을 "환(돌아가다)"으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일부 구전에서는 채점관들이 시를 보고 "이는 귀신의 시다"라고 하며 불합격시키려다가 마지막 구절만큼은 사람이 썼다고 하여 합격시켰다고도 한다. 이 일화와 이어지는 구술에서는 초립동이 박문수가 억울한 죽음을 풀어준 꼬마 신랑이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박문수가 과거 보러 올라가는 길에 어느 대갓댁에 신세를 졌다. 이날밤 박문수가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누군가 월장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다음날 길을 떠났다가 초립동을 만나게 된다. 급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갓댁에 들르니 저번에 묵었을 때 갓 장가들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며느리의 친정이 경상도라는 말을 들은 박문수는 짚이는 바가 있어 인근 서당을 수소문해 최근에 경상도에서 동네로 올라온 청년을 찾아낸다. 청년은 며느리와 애인 사이였고 며느리가 먼 지방으로 시집을 가자 따라와 신랑을 살해한 것. 그날밤 박문수가 목격한 월장하는 그림자가 청년이었고 살해당한 신랑은 그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게 과거 급제를 도왔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민담치고는 복잡한 플롯. 은혜갚게 하는 신랑이라... 근데 야사라는걸 감안하면 마지막 구절에서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야사대로라면 늦깎이로 성공한 그의 인생 역정을 폄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를 폄하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박문수처럼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게 되어 있다" 정도의 의미니 지나치게 깊게 보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숙박비가 없어 될대로 되란 식으로 귀신들린 흉가에 겁도 없이 묵었다가 귀신의 해골을 수습해주고 신인의 시를 얻었다든가 원한을 풀어주고 보답으로 시나 글을 받아 급제했다는 유형의 설화는 상당히 많다. 민담 속에서 사랑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원래 있었던 다른 민담이 박문수의 것으로 둔갑했을 가능성도 높다.[60]* 12. 능인출판사의 판본에서 도깨비불 사건을 해결한 사건도 나오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박문수가 밤늦게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을이 폐허가 되어 있으며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도 짐을 싸들고 떠나는 흉흉한 광경을 보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된건지 영문을 모르는 박문수는 떠나는 마을 사람들을 잡고 물어보나 다들 아무 대답도 안하자 할수 없이 홀로 이 마을을 둘러본다. 그러던 도중 마을을 순찰하던 순찰 대장과 마주치게 되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 난데없이 맞게 되며 못이기다 못해 자신의 호패와 마패를 보여주어 정체를 밝히게 된다. 결국 기겁한 순찰대장은 박문수에게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며 박문수도 순찰대장의 호쾌함에 도리어 웃으면서 넘어간다. 그뒤 순찰 대장으로 부터 이 마을의 사정을 듣게 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본디 강을 경계로 A.B 두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날부터 A마을에서 도깨비불이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처음에는 단순 소문으로 여겨졌으나 그 도깨비불을 봤다는 목격담이 들려왔고 심지어 그 불로 인해 죽은 사람도 생기자 B마을 사람들은 A마을을 가길 꺼리며 A마을은 사람들이 떠나 빈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들은 박문수는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해야 겠다 싶어 주막에 있던 주모에게 도깨비불이 나타난 후 득을 본 사람이 없었냐며 묻고 B마을의 무당 부부와 A마을에 살고 있는 꼽추 노인이라는 걸 듣게 된다. 그뒤 순찰대장에게 의논하여 내가 불이 날 장소에 숨어 있을테니 몰래 매복해있다가 내 신호를 들으면 포졸들을 이끌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가 비어있던 집에서 불을 내려 기름을 부었으며 그걸 본 박문수는 신호를 보내어 그들을 잡는다. 문초해본 결과 이 무리는 무당 남편과 꼽추 노인이었으며 도깨비불의 소동도 바로 이들이 범인이었다. 알고 보니 무당이 돈을 벌기 위해 도깨비불이 나타난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그 일을 해결해준다는 핑계로 돈을 뜯어내고 있었으며 도깨비불의 소문을 믿기 위해 무당 남편이 꼽추 노인과 짜고 방화를 저지르는 천인공노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해 돈을 뜯어낸 것은 물론 아무 죄 없는 사람들도 죽게 한 그들의 뻔뻔한 행동에 노한 박문수는 그 무당 부부와 노인을 잡아 극형에 처한다.

4. 기타

5. 대중매체



[1] 생전에 오른 관직 중 가장 높은 품계의 관직은 정2품의 병조판서, 호조판서, 우참찬이었다. 대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성격상 오르기를 스스로 꺼렸을 거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여러모로 안정복이나 홍대용과 유사한 케이스. [2] 인평대군의 증손자인 안흥군 이숙 [3]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현손이다. [4] 1692년생으로, 1691년생인 박문수의 외종제이다. [5] 경종이 소론만을 위해 실시한 특별 시험으로 박문수는 이전에 2번이나 과거에 응시했는데 떨어진 전력이 있었다. [6] 설서(說書). 정7품의 관직. [7] 어차피 영조 시절의 소론은 밀려난 강경파 준론과 이광좌 정도만 빼면 다 탕평파였다.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8]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 사서였다. 참고로 사도세자가 아니라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이다. 영조가 즉위하기 전인 1718년생이었고 1724년에 즉위하자마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7년에 사망하고 만다. 사도세자는 1735년생이다. [9] 반란 진압군으로 참여한 군인이 쓴 기록인 < 난리가>에서는 박문수가 병사들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칭찬하고는 일선 병사들의 고름을 직접 빨아 치료해 준 오기에 비하며 아주 높게 평가한다. 병사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충성심을 드높이는데 상당한 수완이 있었던 셈인데 다른 증인도 아니고 당시 토벌군 군인이 직접 작성한 수기인만큼 여기에서 묘사되는 박문수의 어진 품성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훗날의 암행어사 시절 백성들을 사랑한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 [10] 경상남도 진주시와는 상관이 없고 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는 사신 [11] 1723년 과거 합격, 1737년 병조판서 임명. [12]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 [13] KBS 역사저널 그날 - 60화에 관련 에피소드가 나왔다. [14] 이 때 청나라 배들의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막기 위해 전선을 건조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을 조정에 요청했다가 영조에게 퇴짜를 맞았다. " 이순신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혼자서 전선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지, 알아서 돈을 마련해라." 영조가 이렇듯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전체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것은 조선왕조실록/내용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 [15] 물론 어영청에서 호조에 갚아야 할 그 군량미가 바로 임금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재산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탑전에서 이렇게 상례에 벗어날 정도로 말싸움을 벌이면 둘 다 추고되는게 일반적이다. 그만큼 박문수가 거칠게 물고 늘어지기도 했다. [16] 정조가 아닌 일찍 죽은 정조의 형이다. 후일 '의소 세손'으로 추증. [17] 생전에는 소론계였고 그 성격 때문인지 정승 자리에는 올라보지도 못했다. [18] 박문수의 작위 '영성 부원군'에서 따온 호칭. 영성은 박문수의 본관인 고령군. [19] 이유는 모르지만 좌수의 말에 따르자면 문제의 그 승려를 만나 병을 고친 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의학 지식이 아예 없는 돌팔이는 아니었던 모양. [20] 계림문고 판 암행어사 박문수에서는 이 승려는 더 막나가는 행위를 한다. 관찰사 집안과 혼담이 오가는 와중 딸을 본인에게 바치라고 한다. [21] 하지만 너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에 오히려 박문수의 눈에 띄어 범인인 것이 들통나게 되었다. 다만 여기에서는 흙 묻은 옷을 딸의 보따리 안에 집어넣고 빠져나갔는데 관속들은 보따리 안에 뭐가 들었는지 구두로만 확인하고 그냥 보내준다. [22] 이 일화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었는데, 만화 내에서는 이 사기꾼 스님이 '승천 법사'라고 불렸다. 승천 법사가 타 죽은 후 조사관 중 한 사람이 승천 법사가 정말로 승천했네(...)라는 개드립을 친다. [23] 계림문고 판에서는 박문수가 호위역을 하는 시종과 같이 길을 떠나며 '의심은 승천선사의 제자들이 받을 것이다. 그 제자들은 승천선사 사망 사건의 실태 조사 시점에서 손을 씻은 상태였기에 '승천선사의 땅굴을 흙을 이용해 가로막는 작업 중 묻었던 흔적을 지웠다'는 정황증거도 있으며 더하여 이미 승천선사의 속임수까지 모두 알았던 공범들이기도 하다. 더하여 승천선사가 협박을 합당한 치료비를 초과하는 수준의 재물을 갈취하던 음성적 행위에 비해 승천선사가 사망시 승천선사의 재산을 본인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명확한 동기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제자들은 승천선사와 한 패가 되어 무고한 백성들의 재물을 '합리적으로 지급받는 일회성 치료비'가 아닌 '병의 공개를 꺼리는 심리를 이용해 지속적인 벌이수단'으로 사용하던 자들이니 불쌍할 것 없다'는 의미의 발언을 하고 시종은 박문수에게 '정말 잘하신 결정'이라고 동의하며 해당 에피소드가 마무리된다. [24] 천씨 집성촌(集性村, 똑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었다. 그중에서도 본가에 해당하는 천씨 집안이었는데 다른 성을 쓴다는 이유로 그 부자를 못 살게 굴었던 것. 구씨도 있는 집성촌이라는 말도 있으며, 능인출판사 본에서는 구씨, 천씨가 살아서 마을 이름이 구천동이라고 나온다. [25] 능인출판사 본에서는 천씨 부자의 며느리가 달아난 게 이유로 나온다. 자기 며느리가 달아난 것인데 관계없는 그 부자에게 화풀이한 것이다. 대교출판사 본에서는 천씨가 자기 조카딸을 며느리로 삼았는데, 이 며느리의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이 나자 천씨가 그 늙은이의 자식이 밤마다 자기 며느리를 불러냈다는 누명을 씌웠다고 나온다. [26] 여기서 박문수의 능력(?)을 알 수 있는게, 길이 잘 닦인 현대에도 덕유산 자락에서 무주 읍내까지는 자동차로 30분 이상 걸리는 험준한 곳인데도 하룻밤만에 주파했다는 것이다. [27] 참수형을 집행하는 사람. 살인이라는 부담스러운 일을 맡고 있는 상당히 특수한 직업이다. 주로 광대들이 겸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28] 익스큐즈하고 용서해줬다는 식으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랬다면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능인출판사 본도 이 각색본을 따르고 있으며 자신이 어사임을 밝히고 평생 살 수 있는 돈을 주고 다른 곳에 숨어 살되 절대 이 일을 입 밖으로 꺼내면 정말로 처형하겠다고 했다. 아마 아이들이 보는 만화이다보니 천씨 부자를 끔살하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면 너무 잔인해서 순화한 듯. 사실 능인출판사가 출판하는 만화는 이런 장면을 많이 순화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임진록에서는 동래 부사가 사명당이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다고 하자 업신여기다가 처형당하는 내용이 있는데 능인출판사에서는 이 부분을 동래 부사를 하옥시키는 장면으로 순화시켰다. 대교출판사 본에서는 대놓고 처형이라고 쓰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천씨 부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29] 그런데 진짜 죽였다면 이것도 이것대로 문제가 되는데 비록 하늘의 이름을 빌려 죽인 것이며 당사자 다섯명 외에는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일이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위법 행위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생명은 오직 왕만이 박탈할 수 있게 되어있다. 암행어사가 아무리 왕을 대행한거라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탐관오리의 파직조차 어사가 할 수 없고 직무정지 명령 및 파직 의견서를 왕께 올리는 것만 할 수 있었다). 영조가 총애한 박문수니 이런 월권 행위를 해도 봐줬을 수도 있지만 그냥 설화니까 그려려니 하고 진짜라곤 생각하지 말자. [30] 대교출판사 본에서는 아예 '본관도 같은 고령이었다'고 쓰여 있다. [31] 10일 뒤에 있는 아버지의 제사에 쓸 쌀이었다고 한다.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생전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살림에 제사를 위해 마련한 쌀을 대접한 것. [32] 아예 둘이 서로 호감이 있었다고 쐐기를 박는 버전도 있다. [33] 조선시대에는 혼기를 놓친 처녀, 총각의 원한이 하늘에 닿게 되면 나라에 흉한 일이 생긴다 하여, 국가 차원에서 지방관들로 하여금 노처녀, 노총각의 혼사를 촉진시키는 임시 정책을 시행하게 한 적이 꽤 많다. 짝이 없으면 다른 고을에서까지 찾아다 준다거나, 혼례 비용이 없으면 빌려준다거나 하는 정책뿐 아니라 노처녀 노총각이 많은 고을의 수령일 경우 진급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34] 가진게 없어 어쩔 수 없이 모유를 먹인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며 측은지심에 한 것으로 칭찬받아야 할 것인데도 아내를 핍박하고 음탕하다고 몰아붙이며 폭행을 한 것은 남편이 부덕하다는 것. [35] 구전으로 전해지는 설화답게 이본이 여럿 있는데, 여인이 쓰러진 낯선 사내에게 젖을 물리고 선행의 보답을 받는 건 동일하지만 그 사내가 박문수가 아닌 다른 암행어사인 이본도 있다. 금패령이 함경남도에 있는 지명이고 박문수는 영남 암행어사로 활동했다는 걸 보면 본래는 그냥 암행어사 설화였던 이야기가 원본이었다가 박문수 설화로 변이한 사례로 볼 수 있다. [36] 좌수는 향청의 가장 높은 직위로 보통 그 동네의 힘깨나 쓰는 양반이 맡는 자리다. [37] 이 이방은 과거 난처한 일이 생겼을 때 박좌수(당시는 박백정이었지만)에게 도움을 받아서 그 이후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38] 수령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사람이고 이방은 육방관속이라고 지방 관리들 중 하나이면서 이들 중 제일 실세였다. 그런데 수령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온 사람이라 현지 사정에 밝지 못했기에 당연히 이방이 마음만 먹으면 수령을 속이는 것도 가능했다. [39] 좌수로 임명한다는 걸 적은 임명장을 뜻한다. [40] 박문수의 이름을 댄 이유는 양반들이 "좌수까지 했다면 조정에 친척 있을테니 대봐라" 라고 했는데 하필 조정에서 벼슬하던 사람들 중에서 아는 이름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41] 당시는 신언서판이라 하여 외모나 언행, 글을 안다는 것 자체로 어느 정도 신용이 보증되고 사람 대우를 해주던 시대였다. 그래서 대체로 설화에서 박좌수는 출신만 백정이었고 돈을 모은 후 백정일을 그만두고 본인이 글공부도 하고 양반 예절도 배운데다가 본래 외모도 귀티나는 사람이라 박문수나 다른 양반들도 이 사람을 보고 양반 대접을 해주기도 한다. [42] 박문수의 설화를 다룬 어느 소설책에서는 아예 창고에 갇혀 버린다. 그 상태로 며칠이 지나서 굶어 죽을 상황이 되자 겨우 아부해서 좌수가 차려준 음식들을 배터지게 먹고 풀려나게 된다. [43] 현암사에서 출판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이야기 백가지'라는 책에 실린 버전에서는 어사가 출두한 후 숙부님을 모셔오라며 사람을 보냈는데, 백정이 '아니 그놈이 왔으면 마땅히 문안을 와야지 어른을 오라가라 하느냐'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사가 백정에게 '어르신께서 어사또에게 이놈 저놈 하며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양반들도 믿을 겁니다'라며 귀띔을 미리 한 후 짜고 친 것. [44] 청구야담본에서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백정이 미친병을 고치다가 죽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며 은근히 살해협박까지 하는 것으로 나온다. [45] 일부 출판사에서는 진범을 잡기 전 박문수의 착오로 이 사람을 먼저 체포하는데, 실은 점쟁이 노릇을 하려고 장님인 척 하다가 장님 집에 호롱불이 있고, 장님인데 자기 정체를 알았다는 근거로 박문수에게 들켰다고 나온다. [46] 일부 버전에서는 아이들 놀이 도중 잡혔던 내용과 소년의 지혜가 드러난 내용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47] 혹은 또 안심하고 돌아와서 쏘기는 했지만 맞히지는 못했다고 말하자 노인이 그걸로 됐다며 화살을 뽑으라고 말한다. [48] 손님이 왔으니 당연히 대감은 사랑채에 후처는 안채에 있었을 것이다. [49] 옛날 이야기 시리즈에서는 처녀의 아버지가 마을의 자산을 관리하는 아전인데 돈을 잃어버려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하며 여기에서 그냥 돈을 주고 끝낸다. 능인출판사 본에서는 장승이 아닌 미륵 석상으로 나온다. [50] 도자값 얘기가 왜 나오냐면 사또가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들게 하며 800냥어치의 금을 주었기 때문. 한 마디로 내가 준 금값 내놔라는 말. [51] 배달하던 하인을 지나치게 돈을 많이 들고 다니니 수상하다는 이유로 하옥했다. 반대로 임 대감네에서 온 하인은 무사히 성덕수네 집에 도착해 있었다. [52] 관아가 가까웠다면 모를까 아직 멀었기에 관아에 가기보다는 종소리가 나지 않게 해 관아에 정오가 되었음을 알리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53] 참고로 서양 배경으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왕이 내전에서 자신을 적대했던 신하를 '정오 종이 치면 처형하라'라고 명령하자, 그 신하의 딸이 어떻게든 아버지의 처형을 막기 위해 종 추에 몸을 매달고 종이 울리지 못하게 했고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그 딸의 아버지를 사면해 준다는 내용. 출판하면서 이 이야기가 섞여들어간 듯한데 문제는 타종 방식의 차이이다. 서양식 종은 종줄을 잡아당기면 종 안에 매달린 추가 종 몸체를 때려 울리는 방식이 대부분이라 딸이 자기 목숨을 걸고 추를 붙잡는다면 이게 가능한 이야기지만, 동양식 종은 바깥에서 당목으로 때려 울리는 방식이라 몸으로 종을 막아서 안 울리게 하려면 그 모습이 종지기 눈에 보일 수밖에 없으니 종지기가 눈도 귀도 어둡다는 무리수 설정을 둬야 얘기가 가능해진다. [54] 심지어 전말을 들은 고을 사람들이 "저 사람만도 못한놈 혼내주자!" 라면서 막 달려들자 박문수가 급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습니다." 라며 진정시키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 박문수까지 분노할 정도라면 이 탐관오리의 횡포가 엄청나게 심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55] 1990년대 후반 전설의 고향에도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주인공은 어사가 아니고, 천애고아로 자라 동네에 온갖 민폐를 자행하며 삥을 뜯어 먹고 살던 건달. 건달 역은 윤철형이 맡았고, 신비한 노인은 김흥기가 맡았다. 엔딩은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돌미륵에(앞서 말한 신비한 노인) 지극정성으로 빌던 처녀 앞에 건달이 나타나 노인과 만나 모은 돈 3천냥을 건네주고, 그게 인연이 돼 그녀와 맺어지면서 마무리된다. 결과적으로 돌미륵이 처녀의 아버지도 치료해주고 노총각 건달도 혼인시켜준 것(극중에도 김흥기가 맡은 노인이 건달을 보며 상투만 임시로 틀었지 너 아직 총각이지? 장가보내주랴 대사치는 장면이 나왔다). [56] 건달이 준 돈은 3천냥으로 노인이 다른 이들을 도와주고 각각 천냥씩 어음을 받아 3천냥인 것이 전부로 자신이 모은 돈은 없었다. 애초에 건달은 문경새재에서 왈패 짓을 하다가 불륜을 벌이다 발각돼서 안동으로 튀던 중이었고 당시 수중에 있던 돈이 꼭 열푼으로 자신이 술 한대를 닷푼에 먹고 남은 돈으로 노인에게 술을 사주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57] 맹꽁이 서당에 따르면 당시 박문수는 33세였고 그때 과거를 보지 못하면 3년 후인 36세에야 재도전이 가능해서였다. [58] 하지만 실제로는 어차피 경사 때마다 과거를 치렀기에 다음 해에 뭔 일로 과거를 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도 한양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에 한한 이야기라 박문수 입장에서 사실상 다음 기회인 경종 3년에 급제를 못했으면 노론이 득세한 영조 시절이니 급제를 영영 못할 수도 있기는 했다. [59] 이 어른이 당대 소론의 영수이자 박문수의 먼 친척 관계였던 운곡 이광좌라는 얘기가 있다. 백사 이항복의 현손. [60] 박문수와 같은 당색이자 정치 대선배인 최규서도 이런 설화가 있다. 과거보러 가는 중 귀신이 나온다는 한 흉가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말대로 진짜 귀신이 나왔으나 놀라지는 않았다. 귀신은 고려 시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충신으로 이 집은 본래 자신의 무덤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 무덤 흔적이 사라지고 그 위에 집이 지어진데다 부뚜막이 해골 위에 지어지는 바람에 밤마다 집주인에게 나타나 자신의 해골을 수습해달라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모두 놀라서 죽거나 도망갔고 자연스럽게 집은 흉가가 되었다. 다음날 최규서가 귀신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진짜 해골 1구가 있었고 정성껏 장례를 치루었다. 그날밤 귀신이 나타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과거 답안지를 선물로 주고 떠났고 최규서는 그 시로 급제한 뒤 식구들을 지금의 집보다는 나은 곳으로 이주시키고 흉가는 리모델링해서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61] 그래서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구미 모래실의 터줏대감인 백씨들과 서로 누가 더 양반입네 하고 싸웠다나 뭐라나.. [62] 박문수는 소론이고 정약용은 남인. [63] 반면에 정약용이나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활동했던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64] 그 중 절반 이상이 어사 탐정 박문수 수준이다. 애매한 송사 처리와 관련된 일화들 등 다른 암행어사들의 일화도 모조리 박문수의 이름으로 흡수되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예가 진주의 박씨 성을 가진 백정을 삼촌으로 모신 이야기. [65] 포항 영일만에 가재 도구와 관들이 밀려와 해변에 쌓인 것을 보고 사태를 직감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조선 팔도가 가깝지 않았고 함경도는 높은 산맥에 막혀있었단걸 생각하자. [66] 어사라고 하면 모두들 암행어사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신분을 비밀로 하고 암행어사의 일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구휼, 감찰 등을 위해 파견이 될 때가 더 많았으며 파견된 어사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를 감시하는 역할로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딸려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어사와 암행어사는 사실 동격인데 암행어사라고 권한이 더 있는건 아니며 오히려 고생할 확률이 더욱 높다. [67] 위 설화 항목에서 확인 가능. [68] 담당 성우 셜록 왓슨을 맡았기 때문에 박문수가 왓슨 드립을 치고, 기동이가 한 번 더 친다. [69] 계속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