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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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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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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color=#f0ad73,white>
음력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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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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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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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전투/상주 전투[朝] · 행주 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전선 고착화 및 국지전 시기, 정유재란 (일본군 대규모 재상륙)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日]
1594년
3월
제2차 당항포 해전[朝]
7월
거제도 진공작전[朝]
1597년
2월
부산 진공작전[朝]
3월
기문포 해전[朝]
6월
가덕도 해전[朝]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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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진격 시기
15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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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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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병진책,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7년
11월
제2차 석주관 전투[日]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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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전투[日] · 제2차 울산성 전투[朝明] · 왜교성 전투[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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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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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시기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장소 조선 경상도 웅천현 안골포[1]
원인 남해안 재해권 확보 및 장악을 위한 두 번째 결전[2]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어영담
무의공 이순신
김완
신호
정운
배흥립
김인영
이언량
송희립
나대용
황세득
우치적
이영남
이운룡
기효근
황정록
윤사공
가안책
송응민
최천보
이응화
박이량
손윤문
최도전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병력 판옥선 56척
거북선 2척
안택선 21척
세키부네 15척
고바야부네 6척
피해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
함대 피해 없음
수천명 이상 사살[3][4]
안택선 니혼마루 반파
( 대장군전 피격)
20척 침몰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영향 조선 수군의 부산 제외 남해안 제해권 완벽 장악
1. 개요2. 전투의 전개 및 경과3. 니혼마루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 초기 1592년 임진년 ( 선조 25년) 7월 10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진해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수군 정예함대 42척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2. 전투의 전개 및 경과

1592년 임진년 ( 선조 25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한산도 앞 견내량 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주력 함대 73척을 격파한 뒤 가덕도로 향하던 중 진해 안골포에 일본수군의 전선 40여 척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7월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 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여 협공을 하도록 지시한 뒤,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 때 일본군의 전선들은 모두 42척으로 그 중 각각 3층과 2층으로 된 큰 배( 안택선)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해 떠 있었는데, 이는 지휘관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함대였다.[5] 특히 이 중에는 일본 수군 최대의 함선 안택선이 있었다.

그러나 안골포 포구의 지세는 좁고 수심이 얕아서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므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왜선들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왜적들은 먼저 출동했던 73척의 왜선 중 59척을 한산도 앞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깨부수고 불태우며 왜적들을 참살했던 탓에 형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올라갈 속셈으로 험한 곳을 차지하고 배를 매어 두고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계획을 변경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교대로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일본군을 공격토록 하자 마침내 일본군 병사들도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장수를 정하여 매복시킨 다음 급히 함대를 이끌고 달려와 합세하면서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일본군의 대응 사격에 전사 19명, 부상 114명 이라는 이전까지 이어져 온 해전 중 조선 수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는 기록이 있다.[6] 물론 왜군의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다.[7][8]

일본군은 사상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큰 배로 옮겨 가면서 구키 요시타카가 자신의 기함이었던 안택선을 방어벽으로 삼아서까지 총력전을 펼쳤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전투에서 20척을 잃고 많은 전사자[9] 를 낸 채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버려진 적선을 모두 불태우면 고립된 적군이 백성을 해칠것을 우려하여,[10] 적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후에 견내량파왜병장에서 밝히길, 남은 적선들을 모두 태워 버리면 일본군은 육로로 귀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숨어있던 안골포 백성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한산도 대첩처럼 수색 섬멸이 불가능한 점도 있었다. 구키 요시타카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복귀하는데 성공하는데, 마치 하늘이 도운줄 알았다고 한다.

이 날의 전투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을 격멸한 빛나는 전과로서 의의를 가지며, 연이어 패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움츠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주저앉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왜 준사가 이 때 투항해 왔다고 《 난중일기》에 기록한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전사자 19명은 김봉수, 김두산, 강필인, 임필근, 장천봉, 배중지, 박응귀, 강막동, 최응손, 필동, 김말손, 정춘, 상좌, 귀세, 말련, 박무년, 이기동, 김헌, 맹수 등이다.

3. 니혼마루

파일:external/pacific.valka.cz/nihon_maru1592.jpg
안골포 해전 당시 구키 요시타카 아타케부네(니혼마루) 와 조선수군 거북선의 대치 상상도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 관련 문서



[1]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2] 첫 번째 결전은 한산도 대첩이다. [3] 250명은 조선수군이 직접 확보한 수급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다. [4] 250개의 수급은 노량해전을 제외한 이순신의 해전중 최대의 전과다. 절이도 해전 당시에도 100급을 넘지 못했다. [5] 본래 계획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함께 충무공에 대적하는 것이었으나,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먼저 박살이 났다. 그래서 후방에서 대기하던 구키와 가토가 한산도에서 제대로 박살난 와키자카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향하던 중 안골포에서 조선 수군을 마주친것. [6]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해전 양상이었던 수성전이 아닌, 안골포에 숨어있던 잔여병력을 공격하는 공성전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한산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의 뒤를 추격하여 궤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발견한 것이라 충분한 휴식과 보급이 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피로도가 높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수성하는 일본군의 지휘를 맡은 구키 요시타카는 해적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점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7]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이순신의 전술을 감안하면 그 이순신조차 일정 부분 불리함을 떠안고 싸웠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8] 그럼에도 벤 수급은 250여구였고 익사한 자는 헤아릴 수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일본군 군함도 20여 척이 박살났으니 누가 봐도 완벽한 패배였다. [9] 250여 명의 수급 외에 헤아릴 수 없는 익사자라는 일본군의 피해 규모를 보고한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에 있다. [10] #난중일기 임진년 양력 8월 16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11] 혹은 상부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때의 증거 자료로 쓰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 이런 물건을 던져대는 놈들에게서 진 건 내 잘못이 아니다! [12] 2017년에는 구키 가문의 후손의 동의 하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기도 했다. ##. [13] 3원 28수 중 하나로 현재의 게자리에 위치한 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