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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英男
1563년( 명종 18) ~ 1598년( 선조 31)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관.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사수(士秀).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이영남은 1563년 충청도 진천현 산정면 기지리(현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 기지마을)[1]에서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지낸 이사종(李嗣宗)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4년( 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163위로 급제하였다.개전 당시에는 원균의 아래에서 경상 우수군 권관으로 활동했으며, 정유재란 당시에는 가리포 첨사로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었다. 임란 초기에는 원균 휘하에 있었으나 전라 좌수영에 와서 이순신에게 원균의 뒷담화를 하거나[2] 임진왜란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연합 작전을 벌이자고 간곡히 요청할 때 이영남을 다섯 번씩이나 전라 좌수영으로 보냈던 것을 보면 이순신과 가까웠던 듯 하다.
1598년 노량해전에는 가리포 첨사로서 참전했다. 이순신이 전사한 뒤 잔적을 소탕하던 도중 자신도 역시 전사했다. 1621년(광해군 13)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산정면에 있으며 고금도 충무사에는 이순신과 함께 모셔져 있다.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중화산동 예수 병원 근처에 그를 모시는 선충사 사당이 있으며, 양성 이씨 후손들이 제를 지내고 있다.[3]
3. 대중매체에서
1962년 영화 '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엄창섭이 연기했다.1971년 영화 '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김석훈이 연기했다.
맨 왼쪽 인물이 이영남( 유태웅 분)이다.
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분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장군이셨습니다....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분도, 장군이셨습니다!
진정으로 장군을 닮고 싶었습니다....!
노량에서 이영남의 유언
바로 장군이셨습니다....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분도, 장군이셨습니다!
진정으로 장군을 닮고 싶었습니다....!
노량에서 이영남의 유언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유태웅이 연기하였다. 전 국민에게 가리포 첨사 이영남을 알린 일등공신. 혈기방장한 젊은 무장으로 묘사되며 작중의 등장인물들 가운데서도 인기가 높았다. 배우의 발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슴다체를 자주 쓰는 것처럼 들린다..[4]
원균이 경상우수영에 부임하면서부터 등장한다. 원균의 전속부관격 인물로 그와 비슷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처음에는 원균과 죽이 잘 맞아 상관을 충실히 보좌한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원균이 이순신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만 거부당하자 좀처럼 출전하지 않는 이순신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자신이 직접 전라좌수영으로 건너가 읍소 반 협박 반으로 이순신에게 지원 확답을 이끌어낸다.[5] 이 장면에서 좌수영의 여종이 '좌수사 나으리가 계속 저 부탁을 거부하셔야 저 '잘생긴' 분이 계속 오실것이라며 깔깔대는데, 작중 설정상 젊고 훤칠하며 장래가 유망한 장수임을 강조하는 듯 하다.
원균과 성향이 비슷하긴 하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제멋대로 하려는 원균과 달리 충분히 설득하면 이해하는 타입인 것이 그와의 차이점이다. 부하가 죽든 말든 무조건 돌격이나 외치고 보는 원균과 달리 책임감이 강하고 전우를 아끼는 모습을 보이며,[6] 원균이 이순신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려 전공에만 집중하고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졸장부 짓을 반복되자 점점 불만이 쌓이더니 결국 아끼던 부하가 전사하자 폭발하여 원균과 거하게 충돌한다. 심지어 윤두수의 꼬드김을 받고 이순신의 지휘권을 박탈하려는 원균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때 원균이 대노해 이영남을 베려 했으나, 자신도 잘한 것은 없기에 어차피 죽을 거 왜놈과 싸우다 죽으라고 넘어간다. 그 후 여러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공을 세우며 몇년 뒤 장흥부사로 승진한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또 한 번 충돌한 끝에 결국 사직서를 쓰고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직하자 가리포 첨사로 제수되어 명량 해전과 절이도 해전, 왜교성 전투, 노량 해전까지 참전한다.
노량해전이 방영된 마지막 화에서 전사한다. 여기서 어느 정도 각색되어 위험에 빠진 이순신을 구하다[7]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치명상을 입고 동귀어진을 시도하는데, 뒤늦게 구출되나 상기한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여기서 이순신이 직접 그의 눈을 감겨주며, 본작에서 이순신 자살설을 어느정도 채용했기에 자신의 갑옷마저 벗어 이영남에게 덮어준 이순신은 곧 이영남의 뒤를 따르게 된다.
[1]
#
[2]
난중일기 1593년 3월 2일의 기록 -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 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
[3]
출처(위키피디아)
[4]
다만 중후하게 묘사돼서 마치 부자 사이를 보는것 같았던 주인공 이순신이랑은
배우끼리 동갑이다. 게다가 이쪽이 수개월 위다.
[5]
원균이나 이영남처럼 성격이 급한 쪽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이런 것이었지만, 이순신은 나름대로 출정에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
첫 화부터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고립된 황세득을 구출하러 가겠다고 따지다가 이순신에게 제지당한다.
[7]
관음포에 몰린 왜군이 이순신의 대장선으로 돌파를 시도하여 근접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