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06 19:40:27

어영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90deg, #330d0d 0%, #a52a2a 10%, #a52a2a 90%, #330d0d)"
{{{#!wiki style="margin: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52a2a><tablebgcolor=#a52a2a>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이순신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colbgcolor=#fff,#1c1d1f>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남해 관음포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시전부락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용모 · 창작물
평가 관련 기록 · 평가 · 의문점
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파일:이순신 서명.svg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

魚泳潭
1532년(중종 27) ~ 1594년(선조 27) 4월 9일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참전했다. 본관은 함종(咸從)[1]. 자(字)는 경유(景游)이다.

2. 생애

어영담은 1532년 내금위(內禁衛) 소속의 적순부위(迪順副尉:정7품 무관의 품계) 행 충무위 부사맹(行忠武衛副司猛:종8품) 어심(魚深)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이 어디인지는 불명이나 경상도 함안군에 거주했다고 한다.

무예에 능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일찍이 여도진 수군만호(呂島鎭水軍萬戶:종4품)에 특채되었고, 1564년( 명종 19) 식년시 무과에 병과 3위(전체 제11인)로 급제했다. # 진해 등 여러 진관(鎭管)의 막료(幕僚)로 있으면서 해로(海路)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양(光陽)현감으로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수로 향도(水路嚮導)로 활약, 옥포 해전 합포 해전· 당항포 해전·율포 해전 등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94년 4월 9일 전염병에 걸려 한산 통제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장남 어응해(魚應海)와 차남 어응린(魚應麟) 등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어응해는 슬하에 아들이 없었고, 어응린은 함종어씨세보에 자식에 대한 사항이 전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첫째 작은아버지 어침(魚沉)의 두 아들 어영수(魚泳洙)와 어영기(魚泳沂) 또한 아들이 없었고, 둘째 작은아버지 어혼(魚渾) 또한 슬하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호군공파는 어영담의 아들 대에서 절손되었다.

3. 평가

인물평을 깐깐하게 했던 이순신이 대단히 높이 평가한 인물이다.[2]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 어영담에 대해 "경상, 전라 두 지역의 변장으로 임명되어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계책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하며 "호남의 한 고을이 이제까지 보전된 데는 이 사람이 한몫하였습니다"라고 그의 능력과 공적을 높이 샀으며, 어영담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날인 1594년 4월 초9일 일기에는 "이 애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라고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운과 더불어 이순신이 가장 신뢰하고 아꼈던 부관 중 한 명이었던 셈이었으며 어찌 보면 이순신을 다룬 창작물에서 이순신의 '작전참모', '정보참모' 포지션으로 각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인 셈이다. 물길을 잘 알았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휘하에서 함대기동을 짜고 지휘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외관직만 맡을 정도로 행정 면에선 돋보이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이순신이 어영담의 부실 행정을 눈감아주고 그의 장점만 일부러 띄워준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행정 면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과 행정 능력이 부실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며, 물길을 읽어 계책을 내는 데에는 굉장히 탁월했던 모양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순신이 어영담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의 장기를 적극 활용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임진왜란 수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이순신 함대가 보여준 현란하고 정교한 기동은 어영담의 공적이 매우 컸을 것이다.

4. 대중매체

어영담 : 지 몸 하나 건사치 못해, 진 중에 누를 끼치는 못난 부하를 어찌 그리 애달파 하십니까.
이순신 : 내 그대에게 짐 지운 바가 많아 단 한시도 편할 날이 없어 그리 된 것을, 이 죄를... 다 어찌 씻는단 말입니까.
어영담 : 죄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장군.
이순신 : 어 현감님...
어영담 : 저 먼저 저세상에 가 물길이나 잘 봐두고 있겠습니다. 그 곳은 전란이 없는 곳일 것이니, 후일 오셔서 소장과 함께, 그저 한가로이 낚시나 하시며 옛날 얘기나 하고 지내십시다...
- 불멸의 이순신 86회, 전염병으로 사망하기 직전 이순신과의 대화.


[1] 호군공파(護軍公派) 16세 영(泳) 항렬. [2]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어영담 정도로 이순신이 높이 평가했던 인물은 정운 정도밖에 없다. [3] 설정상 김완이 이 때 어영담의 휘하 권관이었는데 좌수사의 명에 따라 포작들을 처형했던 바 있다. 이순신의 임관(任官) 요청을 처음에 거절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