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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362호 | ||
서울 연산군묘 서울 燕山君墓 Tomb of King Yeonsangun,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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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17길 46 (방학동, 제실 행랑채)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
면적 | 14,301㎡ | |
지정연도 | 1991년 10월 25일 | |
제작시기 | 1506년 | |
위치 |
공식 홈페이지
[clearfix]
1. 개요
燕山君墓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조선 왕조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과 배우자 폐비 신씨(거창군부인 신씨)가 안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에서 1.3km 떨어져 있으며, 가장 쉬운 접근은 130번, 1167번, 노원15번 버스를 타고, 연산군, 정의공주묘역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2. 역사
조선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이 재위 후기의 폭정으로 인해 관민의 원성과 반발을 사게 되면서 결국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축출되어 폐주가 되었고, 군(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을 가서 2개월 후인 그 해 11월 사망하게 되면서 그곳에 묻혔다가 1513년 연산군의 아내 폐비 신씨의 청이 받아들여져 경기도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1]에 대군 신분의 예우로 이장되었다.[2]폐비 신씨는 1488년 왕세자인 연산군과 혼인하여 왕세자빈이 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고, 1537년에 사망하고 나서 연산군묘 옆에 안장되었다.
3. 형식
역대 임금과는 달리, 재위 도중 반정으로 폐위되었고 '군( 君)'으로 강등됨에 따라 재위한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묘소 명칭을 '연산군릉(陵)'이 아닌 '연산군묘(墓)'로 지정하였다.[3] 따라서 대군의 예우로 묘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통상적인 능침의 형태보다 소략한 것이 특징으로, 봉분과 담장, 묘비 각 1쌍, 혼유석과 망주석 각 1쌍, 장명등 1쌍, 향로석 1좌, 재실은 갖추어져 있으나, 능에 세우는 석호, 석양, 석마, 사초지, 무인석 등은 없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월인 '정덕팔년이월 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폐비 신씨의 비석 앞면에는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가 새겨져 있다. 이 연산군묘 묘역에는 연산군묘와 폐비 신씨의 묘 외에도 그 앞에 총 3기의 묘가 더 자리잡고 있는데, 가운데 줄에 있는 묘는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의 묘이며, 맨 앞 줄에서 왼쪽의 묘는 연산군의 사위인 능양위 구문경, 그리고 맨 앞 줄의 오른쪽의 묘는 구문경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의 묘이다.
4. 사적 제362호
조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과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의 묘이다.
연산군은 9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성종 대의 평화로움이 그대로 이어졌다.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해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만들어 단속하였고,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비융사를 설치하여 철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생산하는 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 성종실록 편찬 중 김일손 등 사림이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생모 폐비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화 이후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하여 사치와 향락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졌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묘는 쌍분의 형태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거창군부인의 묘이다. 처음 연산군묘는 유배지에 조성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묘의 상설은 왕자묘제의 형태로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묘표석 등을 배치하였다.
그 밖에 연산군묘 앞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와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구문경)의 묘가 있다.
연산군은 9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성종 대의 평화로움이 그대로 이어졌다.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해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만들어 단속하였고,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비융사를 설치하여 철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생산하는 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 성종실록 편찬 중 김일손 등 사림이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와 갑자사화(甲子士禍, 생모 폐비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화 이후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하여 사치와 향락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졌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비에서 폐위되었다.
묘는 쌍분의 형태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거창군부인의 묘이다. 처음 연산군묘는 유배지에 조성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묘의 상설은 왕자묘제의 형태로 문석인, 장명등, 망주석, 묘표석 등을 배치하였다.
그 밖에 연산군묘 앞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와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구문경)의 묘가 있다.
5. 기타
역대 조선의 임금들이 안장된 조선왕릉 들과는 달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문화재에는 등록되지 않았다.[4] 묘 앞에 작은 관리소가 있고 관람료는 무료. 또한 연산군묘 입구에서 좌측 골목길로 약간만 걷다 보면 연산군묘 재실을 볼 수 있다.이 묘 주변에는 북한산 둘레길 코스가 조성되어 있고 주변은 주택가이다. 또한, 묘역 앞에 방학동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5] 연산군 내외가 여기에 묻히는 것까지 지켜본 나무인 셈.[6] 그리고 연산군묘의 근처에는 정의공주 가족의 묘와 김수영 문학관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왕릉이 훼손된 묘는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나 당시 연산군묘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한양 밖 외지에 있어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의 묘가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에 의해 파헤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연산군묘 남쪽으로는 원당샘공원이란 작은 동네 공원이 있는데, 여기에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네모난 구조의 연못에 가운데에는 원형의 작은 섬이 만들어져있다. 어떻게보면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천원지방 구조의 연못은 정식 왕릉에만 있는 구조물이다. 어떠한 의도로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덤 주인과 연계해본다면 상당히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1]
후에
경기도 양주군에서
서울특별시
도봉구로 편입되었다. 원당이라는 이름은 연산군묘 바로 앞에 위치한 원당샘이라는 조그만 약수터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
원래 여기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봉토였는데 세종의 명으로 의정궁주 조씨(태종의 후궁)의 봉사손이 되면서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처음으로 자리하게 됐다. 이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폐비 신씨의 요청을
중종이 들어주면서 연산군 가족의 묘가 함께 자리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3]
조선의 임금들 중 묘로 격하되어 안장된 임금은 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과
광해군뿐이다. 한때는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묘로 격하되어 안장되었으나
숙종 때 복위되어 그의 무덤도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4]
광해군묘도 세계문화유산에는 지정되지 못했다.
[5]
은행나무 앞의 안내판에는 수령이 550년이라고 적혀있다.
[6]
여담으로, 이 나무는 나라에 불행한 일이 닥칠 것임을 예언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