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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洪裕陵대한제국 고종과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洪陵), 순종과 두 황후의 무덤 유릉(裕陵)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일단 능원은 따로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홍유릉으로 합쳐 부른다. 소재지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이름을 따서, 때론 '금곡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각 왕릉은 아래 목록 참조.
이 외에도 엄밀히 홍유릉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바로 곁에 영친왕· 이방자의 묘로서 조선 왕릉[1]의 격식으로 조성한 영원(英園), 그리고 회은황세손 이구의 묘인 회인원(懷仁園)을 포함한 2기의 원(園) 및 의친왕· 의친왕비가 합장된 의친왕묘와 덕혜옹주묘를 포함한 왕자녀의 묘 2기, 그리고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묘, 삼축당 김씨묘, 귀인 장씨묘, 의친왕의 첩인 수관당 정씨묘, 수인당 김씨묘를 포함한 후궁의 묘 5기가 홍유릉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어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 묘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대한제국이 선포 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남북한 모두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유일한 황제릉(皇帝陵)이기도 하다.[2]
조선왕릉 중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었기 때문에 다른 왕릉에 비해서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홍유릉 근처에 광해군묘가 있는데 이쪽은 폐위된 까닭에 왕릉이 아니다. 또 광해군묘보다는 멀지만 같은 남양주 안에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묘소도 화도읍에 있는데 원래 서울 공덕동에 있던 것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비록 부자관계지만 실제로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불참하였을 정도였는데 을미사변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왕릉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왕조 이후의 시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유일한 왕릉이다.
2. 홍릉(洪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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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합장릉 형식의 황제릉.
명성황후 사망시엔 서울시 청량리에 안장했으나 고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전하여 같이 안장했다. 유릉과 더불어 석물과 침전 등을 황제릉의 형식으로 구성[3]했는데, 그렇다고 중국 황제릉 형태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고 기존 한국 왕릉 특유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명나라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孝陵)의 묘제를 참고했다.
3. 유릉(裕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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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효황제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 고종의 홍릉옆에 있다. 홍릉과 더불어 홍유릉으로 많이 불리는 편이며 드물게 한 봉분에 세 사람을 같이 모신 것이 특징.[4]
홍릉과 마찬가지로 순명효황후 민씨 사망시엔 양주 용마산(현 서울 광진구 능동[5]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안장해 유강원(裕康園)이라 했으나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비였던 민씨를 황후로 추존해 유릉(裕陵)으로 높여졌다. 순종 사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 근처로 이전하여 함께 안장했으며,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 사망하자 3명의 부부가 함께 안장됐다.
4. 홍릉과 유릉 명칭 비화
왕실의 예법에 따르면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면 일단 별도의 능호를 사용하며, 국왕이 승하한 후 왕비와 함께 합장할 때 새로이 올린 국왕의 능호를 따르게끔 되어있었다. 가령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경우 1600년 승하한 의인왕후에게 유릉(裕陵), 1608년 승하한 선조에게 목릉(穆陵), 1632년 승하한 인목왕후에게 혜릉(惠陵)이라 능호를 올렸지만 최종적으로는 선조의 능호인 목릉을 따랐다.그런데 고종의 경우 명성황후는 이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먼저 비명에 갔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문을 닫은 상태였으며, 더군다나 일제는 한일합방 조약을 맺을 때 '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왕공가궤범 200조의 규정을 만들어서 대한제국 황족이 이후에 죽더라도 새로운 능(陵) 또는 원(園)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아둔 상태였다. 따라서 이 규정을 따른다면 고종의 무덤은 일반 백성과 같은 '묘'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에 조성된 능들은 이 규정의 해당사항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을 옮겨서 합장하는 방식을 취하면 이를 피할 수가 있었다. 즉 고종의 경우는 명성황후의 무덤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던 '홍릉'에 고종이 안치되는 식이다. 이는 왕이 뒤늦게 사망하면 새로운 능호를 올리던 원래 예법과 약간은 어긋나더라도 일단은 새로 능을 만든 게 아닌지라 규정(왕공가궤범 200조)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이왕가(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를 일본 천황가 보다 아래지만 화족보다 높은 지위로써 우대할 것을 경술국치 때 보장했다. 그래서 이왕가 내부적인 방침에 일제가 세세하게 간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고종과 순종의 능이 예법에 맞게 조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앞서 1897년 청량리에 조성된 명성황후의 홍릉을 남양주 금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고종황제와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홍릉이 완성됐다. 마찬가지로 1926년 승하한 순종 또한 1905년 용마산[6]에 먼저 조성돼있던 순명효황후의 유릉을 남양주 금곡 홍릉 옆으로 이전하면서 동시에 합장하는 형태로 지금의 유릉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장된 후 비어진 홍릉 자리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과 그녀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장남인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이 조성되었다. 현재도 '구 홍릉' 지역으로 흔히 '홍릉로'란 도로명이 있으며, 홍릉 수목원이 위치하고 있다.
5. 원(園)과 묘(墓)
5.1. 영원(英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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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영원(英園) |
5.2. 회인원(懷仁園)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의 차남이자,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회은황세손 이구가 안장된 무덤. 한동안 위 사진처럼 봉분만 남아 있었으나, 문화재청의 심의(2021년)를 거쳐 지금은 원(園)의 격에 맞게 주변에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
5.3. 의친왕묘(義親王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과 그의 부인 의친왕비 김씨(이름 김덕수)가 안장된 무덤.
5.4.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막내(고명)딸인 덕혜옹주의 무덤.
5.5. 귀인장씨묘(貴人張氏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의친왕 이강의 생모인 귀인 장씨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1911년 고양군 둑도면 모진2리[7]로 이장하였고, 1965년에 서삼릉 능역 내로 이장하였으며, 다시 2009년에 홍유릉능역 내로 이장하였다.
5.6. 광화당묘(光華堂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자 이육의 생모인 광화당의 묘이다.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5.7. 삼축당묘(三祝堂墓)
조선왕조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의 묘이다.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5.8. 수관당묘(修觀堂墓)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건의 생모인 수관당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5.9. 수인당묘(修仁堂墓)
의친왕의 측실이자 이우, 이주, 이곤의 생모인 수인당의 묘. 2017년 10월 현재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6. 교통편
- 경춘선 금곡역[10]에서 올 때: 23번 버스 환승 / 도보(15분 소요)
- 중앙선 도농역이나 청량리역 쪽에서 올 때 버스[11]: 1-4, 23, 30, 65[12], 330-1(좌석버스), 1330-2, 1330-3, 1330-4, 1330-44(직행좌석버스)
- 경춘선의 배차간격이 상당히 길고 서울 동북부 지역 외에서 상봉역까지 접근하기 어려우니 가급적 경의중앙선을 이용하기 바람.
- 기타 버스노선: 168(시내버스)[13], 땡큐61, 땡큐88-1, 땡큐99(마을버스)[14][15], 1000, 1100, 1200(직행좌석버스)[16]
7. 기타
홍유릉 권역의 입장료는 2020년 기준 1,000원이다. 그 외 영원 이하 다른 황실 일원들의 무덤은 무료입장이다. 그리고 남양주시민에 한해 50% 할인이 적용된다.홍유릉 주변 산책로는 금곡동 주민들이 자주 찾는 운동코스이다. 매년 8월 15일에는 정기적으로 걷기 대회도 열리고 있다.
고종 황제가 대한천일은행( 우리은행 전신)의 설립을 지시했고, 고종의 7남인 영친왕이 천일은행 2대 은행장을 맡았다는 인연 때문에 매년 1월 1일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우리은행 은행장 등 우리금융그룹 고위 임직원들이 이 묘원을 참배한다. 우연인지 아닌지 홍유릉이 위치한 금곡동은 거주/유동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우리은행 지점이 계속 영업중이었다.(2022년 철수 및 무인화기기만 남음)
홍유릉 앞 경춘로와 면한 땅에 한때 '목화웨딩홀'이라는 예식장 건물이 있었다. 인근 평내호평 및 다산(도농.지금) 일대의 개발 전에 잠시나마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나 몰락 이후로는 영업만 종료되고 흉물로 방치되다 철거되고 '이석영광장'과 'REMEMBER 1910'이라는 기념관 겸 카페가 조성되어 있다. 건축 당시부터 문화재 구역에 예식장이 건설되었다는 자체가 논란이 생겨 웨딩홀 폐업 이후 매입하여 리모델링하거나 철거하자는 주장이 주민들과 시민단체 등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9년에 시 주도로 해결해서 나온 결과물이 우당 이회영의 형이자 출생지가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인 독립운동가 영석 이석영 선생 및 독립운동을 기리면서 시민 휴식공간도 겸한 광장인 것.[17]
[1]
영친왕은 대한제국 '황제'였던 적이 없고 생전에 황태자 전하, 이왕 전하까지만 올랐기 때문에 왕릉도 황제의 격이 아니라 고종 이전의 조선왕릉들처럼 제후왕의 격식으로 영원을 조성했다.
[2]
한국사에서는 대한제국 이전에는
삼국시대나
발해까지는 천자/제후로 구분되는 중국식 묘제와 관련없이 토착적인 묘제를 유지하였고,
통일신라나
고려는
외왕내제를 하고 왕릉의 형식에 있어서도 중국 황제릉 능원의 형식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긴 했지만 대한제국처럼 대내외적으로 공히 제국을 선포하고 황릉 형식을 완전하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3]
기존의 제후국 방식으로는 참도 양옆으로 석물을 배치할 수 없었으며, 제사를 지내는 전각 또한 정자각의 형태로 세워졌다. 그러나 홍릉부터는 황제국의 형식을 따라 참도 양옆으로 문무인 석상과 기린, 사자 등의 동물을 조각한 석상을 배치했으며, 전각 또한 침전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4]
이러한 방식을 동봉삼실이라 하며 조선의 왕릉 가운데 유일한 형식이다.
[5]
능동(陵洞)이란 지명이 여기서 유래됐다.
[6]
광진구 '능(陵)'동의 유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천장하였으므로 당연히 지금은 능이 없다.
[7]
현재의 서울 광진구 화양동
[8]
원래는 9남이나 이건이 일본으로 귀화하는 바람에 문중들에 의해 사실상 제명되며 실질적으로 8남이다. 실질적인 장남은 흥영군 이우.
[9]
큰아들이 황실수장인 이상협.
[10]
참고로 이 역은 사릉과도 연계된다.
사릉역보다 가까우며 사릉역에는 직접 사릉으로 연계되는 버스노선이 없기 때문.
광해군묘도 가는 방법은 동일하며 연계 노선은 64번 마을버스.
[11]
시내버스중 65를 뺀 나머지는 금곡동 주민센터 하차(마을버스 포함), 65 포함 상급노선들은 홍유릉앞 정류장 하차. 능으로 가는 입구는 금곡동 주민센터 옆에 있다.
[12]
마석 방향 한정. 청량리 방향은 금곡동 구 종점 및 양병원 경유로 거리가 있다.
[13]
덕소역,
양정역 연계
[14]
덕소역 연계
[15]
마을버스의 경우 번호는 틀리나 경유지 대부분이 동일하다.
[16]
잠실역 연계. 1100번은 잠실역 경유 강남역, 신사역까지 운행.
[17]
다만 해당 예식장의 건립 및 철거를 억지로
조선총독부 건물에 억지로 대입하려 한 홍보문구, 공간 활용의 미흡, 특색 없는 전시 등 문제점이 많고 무엇보다 금곡동 주민들이 박물관을 원하지 않았다. 문화재 규제는 엄격히 하면서 발전은 없고, 심지어 스포츠나 교육(도서관 등) 인프라마저 미비해서 다른 남양주 시민들도 비판하는 지경. 사실 매입 과정에서도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조광한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