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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족사
전계대원군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에서 출생했다. 철종의 혈통은 매우 특이한데 위에서부터 따져보면 철종은 숙종의 서자인 영조의 서자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군의 서자[1]이다. 즉 직계 조상 4대가 모두 서자 출신이다. 게다가 선왕 헌종보다 항렬이 한 단계 높아서 원래는 종법상 왕위에 오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적자는커녕 남자 왕족 자체가 거의 씨가 말라 없던 때라 서자고 항렬이고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조선 초기라면 왕위는 커녕 평생 대궐 구경이나 한 번 할까 말까 했을 그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철종마저 또 아들을 보지 못하면서 결국 다음 왕위는 철종과 혈통상 무려 17촌이나 되는 고종이 잇게 된다.[2][3]정조 재위기인 1786년(정조 10년),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권신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철종의 친부인 이광(사후 전계대원군)을 비롯해 식구들이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 거기서 은언군은 순조 때 신유박해 등을 이유로 사사당하지만 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무려 40년 넘게 살았고 1830년(순조 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 향교동 사저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듬해 1831년(순조 31년) 3남 철종, 이원범이 태어난다. 두 형은 아버지가 유배지에 있을 때 태어났으나[4] 철종은 한성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유배도 끝났으니 몰락한 종친 신분일지언정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서 대우 받으며 그럭저럭 살았다.
이후 10살 때 아버지가 죽은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헌종 10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 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이 일로 이명은 사약을 받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 형 이욱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작은 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강화도에서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이원범은 왕족이 아닌 일개 평범한 백성으로 살고 있었다.
2.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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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KBS 〈역사실험 - 왕이 된 나무꾼, 철종 그는 어떻게 왕이 되었나〉 |
헌종이 사망한 시점에서 왕족 남성을 찾으려면 사도세자대 까지 올라가야 했는데 철종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에게는 정조 말고도 아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이고 이 은언군에게는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철종의 아버지 이광(사후 전계대원군)이었다. 조선에서 종친의 서얼은 장본인까지만 종친으로 인정했고, 서얼의 자녀는 대군의 손자일 경우에만 한정하여 예외적으로 종친으로 인정해줬다. 따라서 은언군의 서자인 이광의 자녀들은 원칙적으로 종친의 범주에 들 수 없었으며, 이원범의 아버지인 이광 자신은 종친이긴 했어도 상계군 사건으로 역적 집안이 되어버린 탓에 봉군(封君)될 수 있는 종2품까지 승진할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 당시에 '종친'의 범주에서는 더이상 선왕의 양자로 들일 수 있는 왕족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고, 결국 생물학적인 혈통이 우선시된 것이다.
즉위 전날에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덕완군으로 봉해졌다. 상술했듯 이원범은 원래 종친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곧바로 왕이 될 수 없었기에, 왕자로 입적하면서 종친 신분으로 전환한 뒤에 즉위하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즉 절차상의 문제이고 이후 종법상 영조의 5세손이라 종친 신분은 아니었던 고종도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일가족이 모두 복권됐는데 작호가 없었던 아버지 이광은 전계군(全溪君)에 봉해졌으며 곧이어 왕의 친부이기 때문에 대원군이 더해져 전계대원군이 됐다. 작은 형 이욱은 영평군, 큰 형 이명은 1858년(철종 9년)에 회평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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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강화도행렬도(江華島行列圖)〉. 북한 평양 소재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
이후 영의정 정원용과 주민들의 설득과 이해로 결국 임금이 타는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7]
2.1. 오해
세간에 철종의 즉위와 관련한 오해들이 많이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안동 김씨가 헌종과 가까운 왕손들을 제치고 다루기 쉬운 일자무식인 철종을 옹립했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철종이 왕이 된 것은 그가 헌종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효종 - 현종 - 숙종까지는 외아들로 이어졌고, 숙종은 6남( 경종, 영조, 연령군 등)을 두었으나 영조를 빼고는 아들을 남기지 못했거나 일찍 죽었다. 영조는 2남( 효장세자, 사도세자)을 두었으나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해 후손을 이어간 건 사도세자뿐이었다. 사도세자에게는 5남( 의소세손, 정조, 은신군, 은전군, 은언군)이 있었는데 의소세손, 은신군, 은전군은 후사 없이 사망했다. 이어 후계를 이은 정조에게는 2남( 문효세자, 순조)이 있었는데 문효세자는 일찍 죽었고 순조도 외아들 효명세자만을 두어 다시 아슬아슬해졌다. 그런데 효명세자가 즉위도 하기 전인 21세에 일찍 사망하면서 6세였던 외아들 헌종이 즉위했으나 헌종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20세에 사망하면서 정조 때부터 간신히 이어온 정조계 혈통이 끝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다 보니 당시 남은 가까운 왕족이라곤 오직 은언군의 자손(친손자)들뿐이었던 것이다. 이원범은 비록 서손이긴 해도 영조 - 사도세자의 진짜 유일한 직계 후손이라 남은 왕족 중 헌종과 촌수가 그나마 가장 가까웠다.
이 시점에서 은언군의 친손자들, 그러니까 철종과 같은 입장의 왕족은 철종 말고도 철종의 이복형 이욱[8], 그리고 철종의 사촌형이자 은언군가의 종손인 익평군도 있었다. 특히 익평군은 종법상으로는 은언군가의 종손이어서 서열이 가장 높았고 당시 26살의 어엿한 성인인 데다 왕족으로서의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다. 나이로 보면 이욱 역시 22살의 성인이었다. 그런데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이 둘을 제치고 제대로 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리버리한 나이 어린 19세의 이원범을 굳이 다음 왕으로 택한 후 수렴청정을 행했다. 안동 김씨들이 쉽게 다루기 위해 옹립했다는 추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왕자가 아닌 왕손이 임금이 되려면 먼저 선왕의 양자로 반드시 입적해야 했는데 이욱과 익평군은 각 집안의 종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9] 게다가 익평군은 원래 풍계군[10]의 친자인데, 은언군 종가를 잇기 위해 상계군[11]에게 양자로서 입적한 상태였다. 따라서 익평군이 왕위를 이으려면 선왕( 순조)의 양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미 양자로 입적한 상태에서 다시 입적을 보내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12]
반면 야사에서 철종 대신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꼽히던 인물로 알려진 이하전이나 이하응의 경우, 생물학적 혈통을 따지면 오히려 이원범보다 더 멀었다. 이하전은 덕흥대원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이 은신군(정조의 이복 동생)의 양자로 들어가서 그렇지 실제 혈통은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철종의 사촌이라던 이인응(경평군 이세보) 역시 실제로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이었다가 철종의 큰아버지 풍계군에게 입적한 경우이고, 그 시기도 철종 즉위 이후였다. 그러니 이하전, 이하응, 이인응은 혈통이나 법통(종법) 면에서 절대 철종을 제치고 왕이 될 수 없었다. - 순원왕후 김씨와 신정왕후 조씨가 힘겨루기를 하다가 순원왕후가 이겨서 어거지로 철종을 등극시켰다?[13]
- 실상을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위에도 나왔듯 철종의 왕위 계승 자체는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는 형태였다. 무엇보다 순원왕후는 당시 명실상부한 왕실의 최고 큰어른으로 신정왕후 조씨는 힘겨루기는커녕 그녀의 말에 감히 토 달지도 못했다. 조선 후기에, 그것도 왕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큰 반례로 철종이 죽을 때인데 철종은 신정왕후 조씨[14]에게 옥새를 맡겼고, 철종 사후 왕이 된 고종은 신정왕후 조씨의 결정으로 왕이 되었는데 이 때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김씨가 살아있었고 김좌근, 김우근 등 안동 김씨도 당연히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힘겨루기로 왕이 결정되었다면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을 함부로 왕으로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 안동 김씨가 철종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순원왕후가 억지로 자신의 양자로 삼아 친아들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로 만들었다?
-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앞뒤가 바뀌었다. 철종이 헌종이 아닌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이라 순원왕후가 본인의 양자로 들인 것이다.[15] 양자는 아들과 같은 항렬의 일가 친척 중에서 들인다.[16] 위에 언급했듯이 철종은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의 7촌 재종숙이다. 재종숙이면 아저씨뻘이고, 아저씨뻘은 당연히 아버지와 같은 항렬이란 뜻이다. 설령 철종이 헌종과 같은 항렬이거나 아래 항렬이어서 신정왕후나 효정왕후의 양자로 입적되고 순원왕후는 철종의 할머니뻘이나 증조할머니뻘이 되었다 하더라도 왕실의 제일 큰 어른인 순원왕후가 살아 있는 이상 수렴청정은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하는 것이고,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순원왕후가 철종을 순조의 양자로 들임에 따라, 철종은 족보상으로 전임 국왕인 헌종의 숙부(아버지의 동생)가 되었다.
철종 옹립 배경에 관한 루머들이 많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믿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봤듯이 철종의 즉위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 절차와 과정에 큰 하자는 없었다. 다만, 저런 루머가 나돌 정도로 철종 시기 안동 김씨들의 세도가 정말 극에 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가 생기긴 했다. 철종은 헌종의 7촌 재종숙뻘[17]이라서 항렬이 한 세대 높다는 것이었다.[18] 당시 철종이 즉위할 경우 종묘 제례 때 자신보다 항렬이 하나 낮은 헌종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19]
이 문제가 구체화된 형태가 기유예론(己酉禮論)이었다. 임금이 제사를 받들 때 선왕의 호칭과 자신의 호칭을 말해야 하는데, 헌종과 철종을 왕실 족보(선원록)대로 숙질 관계로 칭할지, 그냥 즉위 순서대로 부자 관계에 준하여 칭할지가 관건이었다. 전자를 따를 경우 철종은 헌종의 제사를 받들 때 " 황질(皇姪, 훌륭하신 조카)께 고합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호칭이 다소 우스운 건 둘째치고 조천(祧遷)[20][21] 정통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에 이 문제는 의외로 꽤 민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천과 관련된 신해조천의(辛亥祧遷議) 예송이 불거졌다. 철종의 경우 즉위 순서대로라면 진종( 효장세자 추존), 정조, 순조, 익종( 효명세자 추존), 헌종에 이은 왕이었으므로 5대 전 임금인 진종은 조천되어야 했다. 추존 왕이었기에 불천위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진종은 왕실 족보(선원록)상 철종의 증조부였다.[22] 해서 당시 영의정이었던 권돈인은 족보상의 4대조인 고조부까지는 조천을 하지 않는 게 예법에 옳다고 주장했다.[23]
그러나 안동 김씨 쪽에서는 이제 막 즉위한 임금으로 하여금 ' 제왕가는 승통(承統)을 중히 여기는 법'이라는 논리를 펴게 하여 진종을 조천시켰다. 사실 권돈인의 주장대로라면 ' 진종- 정조- 순조-철종'의 계통이 완성되니, 철종과 항렬이 같은 익종과 그 아들 헌종은 붕 떠 버리게 되므로 매우 위험한 문제였던 것. 그래서 당시 조야는 안동 김씨의 여론전에 힘입어 대부분 조천에 찬성했다.[24]
이 예송으로 권돈인은 물론이고 그의 배후로 지목된 추사 김정희 등이 유배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즉위 초기 안동 김씨 세도의 세력 과시 성격도 있어 보인다.
3. 치세
자신이 안동 김씨 세력이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조차도 또 다시 안동 김씨를 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결국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 철인왕후를 왕비[25]로 삼고 김문근은 국구(國舅, 왕의 장인어른)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철종은 즉위 시점에 이미 19세의 청년이었던 데다가 여러모로 공부한 바도 있었고, 즉위 후 제법 군왕다운 위엄을 보였기에 수렴청정 3년 차인 1852년(철종 3년)부터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철종이 직접 친정(親政)을 시작했다.[26] 특히 어릴 적부터 서민들의 민생고를 직접 눈으로 본 철종은, 초기에는 여러 개혁 정책들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 도 가문들의 반발과 비협조에 부딪혀 대부분이 불발되고 만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순조 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철종은 딱히 제왕학을 교육받지 않아 현실 정치에 어둡고 정통성 면에서도 좀 꿀렸으며, 무엇보다도 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정치적 친위 세력이 부족했기에 국정 장악이 쉽지 않아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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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철종~고종기의 농민 봉기를 나타낸 지도.[27] |
따라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했고 결국 굶주린 민심이 폭발하여, 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 등지에서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 임술민란)'라 한다. 이때 조선 조정은 대책은커녕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의욕을 보인 것은 임금인 철종 혼자나 다름없었다.[28] 임술농민봉기가 터졌을 때는 " 우리 백성들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를 외치면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제법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나, 안동 김씨와 그들의 나팔수 정원용 등이 " 환곡제도가 수백 년을 이어 내려왔는데 이제 와서 없애자니 애석한뎁쇼? 급하게 없앴다가 부작용이 나면 어쩔까요?"라고 반대하며 슬슬 시비와 딴죽을 걸었고, 그 사이에 농민 봉기가 대부분 정리되자 "어떻게든 되겠지" 식으로 얼버무리며 흐지부지 되었다. 이러한 혼란 와중에 '말세론'이 면면히 퍼졌고, 교주 최제우가 창시하고 만민 평등을 제창한 ' 동학(東學)'이 등장한다.
그 외에 철종 때 일어난 사건 중 하나로 종계변무 사건이 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에서 태조 이성계를 고려 말의 권신이자 간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써놓자 조선에서 이를 고치려 노력한다. 이후 큰 줄기의 일은 선조 때 해결되었으나, 뒷일이 철종 대에 다시 불거진 것이다. 즉, 청나라의 어느 학자가 쓴 서적[29]에 이런 잘못된 내용이 나온다는 것. 때문에 당시 사행사로 중국에 가 있던 윤치수가 전사(典事)를 보내어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한다.[30] 하지만 청나라의 반응은 "그런 미미한 서적에 대해선 우리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런데 윤치수는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이 책을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철종은 위에서 보듯 길고도 아름다운 시호[31]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하지만 " 청나라 관리들도 모르는 책을 윤치수는 어떻게 구했을까?" 하는 부분에서 또 다른 의문을 사기도 한다.
여담으로 중국에 보내는 연행사에 왕족인 경평군 이호를 임명했는데, 이에 대해 숭실대 하정식 교수는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사행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되자 왕족을 직접 보내 정보를 얻어 보려고 노력한 것' 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20대 애송이 왕족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세도 정치가들에게 쉬운 일이었으며 오히려 경평군을 통해 중국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만 가지게 되었다. 이후 경평군은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들에 의해 유배된다.[32][33]
4. 개혁 시도
상기한 바와 같이 철종은 강화도에서 살았던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임술민란의 수습을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개혁 기관을 설치하며 세도가의 횡포와 삼정 문란을 저지하려 했다.[34] 이 과정에서 철종이 직접 창덕궁 인정전에서 직접 관리와 유생들의 상소문을 받기도 했고[35], 이를 바탕으로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이라는 개혁안을 만들기도 했으나, 3개월만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세도가의 반발과 압박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한 채[36] 삼정이정청을 폐지하게 된다.결국 철종은 현실의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개혁의지도 충분했으나, 기본적으로 바로 그 문제의 근원인 세도가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꼭두각시 임금이고 정통성이 매우 취약한만큼 왕권이 약하며, 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세력이 너무 부족했다.
5. 요절
나중에 가면 철종은 자신이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 세력들의 꼭두각시 왕으로 실권이 없어 스스로 왕다운 왕이 아니라는 허탈감[37]과 복잡한 궁중 예법에 질려버렸고, 국정에 대한 의욕까지 잃어버려 여색과 술로 시간을 때운다.[38][39] 그러다보니 농사로 다진 체력이 급속히 무너져버렸고 재위 말기부터는 잔병치레로 골골하다가[40] 결국 1863년(철종 14년) 음력 12월 8일, 33세라는 한창 나이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41][42][43] 그의 죽음에 안동 김씨는 혼란에 빠졌으며, 모두 후계 문제에만 정신이 팔려 왕의 죽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철종은 중전과 여러 후궁들 사이에서 5남 6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어릴 적에 죽었고, 철종 승하 당시에는 후궁 숙의 범씨에게서 낳은 영혜옹주만이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영혜옹주마저 훗날 개화파의 거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박영효와 혼인했지만, 혼인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14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44]
결국 철종의 사망을 끝으로 효종부터 내려 오는 조선의 모든 직계 왕통(直係王統)은 단절됐다. 그래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차남 명복을 익종 대왕의 아들로 입적시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다. 사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철종과는 혈통상 남과 다를 바 없다. 이 둘은 인조에서 갈라져 나오는데 촌수로 무려 17촌[45]이다. 최초로 '방계 승통'한 선조가 정통성 문제로 불안했지만[46] 그도 선왕이었던 명종과 3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47] 앞에 선조의 예도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정통성 문제는 더 심해졌다. 효종은 적자임에도 동복형제이자 장자인 소현세자가 있는 둘째여서 정통성 문제로 고통을 많이 받았다. 이를 송시열과 송준길을 위시한 산당에게 인정받고자 재위기간 대부분을 보냈으며, 승하 이후에는 예송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철종은 대한제국 개창 이전에 승하한 마지막 조선 임금이어서 그런지 마지막 타이틀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데, 먼저 전통적 방식대로 실록청에서 정식 편찬된 《 조선왕조실록》은 철종의 실록이 마지막이다. 그 뒤의 《 고종실록》과 《 순종실록》은 경술국치 후에 일제에 의해 편찬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 고종실록》과 《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 철종실록》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은 편에 속하는데,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정치가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죄다 빼버려서 내용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철종 12년( 1861년) 3월 27일 ~ 4월 23일의 기사는 2쪽 분량일 정도이다. 이어지는 5월 한달치 기사는 1쪽도 안 된다. 사실 《 철종실록》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기의 실록인 순조실록과 헌종실록도 이전까지(태조~정조)의 실록에 비해 기록이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시절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여러 신하들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했던 승정원일기가 완역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의 황제로부터 시호를 추증받은 마지막 조선의 왕이기도 하다. 철종이 청나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는 '충경(忠敬)'인데, 공교롭게도 수백 년 전 고려의 원종이 원나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와 같다. 그리고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마지막으로 재위 중에 승하한 임금이자 조선왕조 존속기간 중 마지막으로 국상(國喪)을 치른 임금이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의 예릉(睿陵)으로 중전 철인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 조선왕조실록》, 중국 측으로부터 받은 시호와 마찬가지로 철종의 예릉 역시 전통적인 조선 왕릉 형태로 조성한 마지막 왕릉이다.
[1]
이광의 본부인 최씨가
1840년(헌종 6년) 사망했는데 철종은
염씨 소생으로 1831년생. 정실 사망 전에 계실을 들이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데다가 사후 추증도 본부인 최씨(민진용의 역모 때 사사된 이명(
회평군)의 모친) 일가만 추증하려던 것을 철종의 생모 염씨 일가도 추증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분명 서출이 맞다.
[2]
그나마 고종은
서자가 아니고
인조의 적자인 3남
인평대군 이후로 계속 적출로만 이어진 방계 왕손이긴 했다.
[3]
17촌 관계인 고종과는 나이가 21살 많다.
[4]
1830년(순조 30년),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려났을 때 두 형들은 4살(이명), 3살(이욱)이었으니 큰 차이는 없었다.
[5]
정조의 아버지를 생부인
사도세자로 보지 않고
왕실 족보(선원록)에 따라 양부인 큰아버지
효장세자로 본다면 이원범은
헌종의 9촌 재재종숙이자 순조의 7촌 조카가 된다.
[6]
한편, 이원범 위로는 작은형 이욱이 있었지만(큰형은 역모로 이미 사망), 대체로
양자로 입적해 '나가는 집안'의 '남은 장자'는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므로 둘째가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원범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역시
장남이 아니었던
선조와
효종,
영조,
고종이 있다. 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자세한 건 아래 각주로.
[7]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즉위한 후 강화 유수가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집을 지어 확장했다고 한다. 이 궁은 지금도
강화도에 남아 있는데 용흥궁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8]
다만,
이욱은 소갈증(
당뇨) 환자였기에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장남이 입양가는 경우들도 꽤 있었다. 일례로
흥선대원군의 형들인
흥녕군과
흥완군의 양자는 동생
완림군과
흥친왕의 장남이었다.
[10]
은언군의 넷째아들이자
은전군의 양자
[11]
은언군의 장남
[12]
물론 이것도 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일례로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된
선조는 원래
덕흥군(명종의 이복형)의 아들이지만, 왕이 되기 전에는
복성군(명종의 이복형)의
양자였다.
[13]
가령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만 하더라도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의 갈등을 그린 내용이 나온다.
[14]
철종이 죽을 당시
신정왕후 조씨는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죽고
왕실의 최고어른인
대왕대비가 되어 있었다. 즉, 철종은
왕으로 즉위할 때
순조의 아들로 양자 입적되었기 때문에 철종은
효명세자의 동생이 된다. 그렇기에
효명세자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는 철종에게는 법적으로
형수가 된다.
[15]
마찬가지로 철종 다음의
고종은 철종 바로 아래인
헌종과 같은
항렬이었기에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물론 정석대로라면 바로 전 왕인 철종의 아들로 입적되어야 하긴 하다.
[16]
이보다 약 백년 뒤
이승만이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것이 논란이 된 것도 이승만과 이강석의
항렬이 아들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손자뻘이다.
[17]
혈통상 7촌이고, 앞 각주에서 언급했듯
영조가 세손(훗날의
정조)을 그의 친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요절한 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았으므로 왕실 족보상으로는 9촌 사이가 된다. 물론 철종을
순조의 양자로 삼으며 헌종과 철종의 사이는 족보상 3촌으로 확 줄게 되었지만 여전히 숙질 관계다.
[18]
나이는 오히려 헌종이 4살 많았다.
전계대원군이 당시 47세란 너무 늦은 나이에 철종을 얻었기 때문이다. 헌종계가
종가라 세대 진행이 빨랐기 때문이란 의견도 있지만, 전계대원군이 사촌
순조보다 오히려 5살 더 많은 것을 보면 그 이유는 아니다. 사실
은언군도 32세에 전계대원군을 낳았으나 정조가 순조를 무려 39세 때 낳았기 때문.
헌종이 태어날 때는 아버지
효명세자가 19세, 할아버지
순조가 38세였고, 순조보다 5살 많았던
전계군이 47세[48]에 철종을 낳았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역전된 것.
[19]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조선 왕위 계승 종법상
다음 왕은 원칙적으로 선왕의 아래 항렬이나 같은 항렬에서 나와야 하는데, 철종은
헌종보다 나이는 적어도 한 항렬이 높았기 때문에 철종의 즉위는 이 원칙을 어긴 것이었다.
조선왕조 종법제에서 철종처럼 후임왕이 이전왕보다 항렬보다 높았던 사례는 조선왕조 최악의 흑역사인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단종 →
세조사례밖에 없다.
[20]
조선의
종묘 제도상 임금은 자신의 4대조 신위까지만 정전에 모신 후, 5대조부터는 신위를 업적에 따라 영녕전으로 옮기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조천이라고 했다.
[21]
사실 조천은 재위 기간이 짧거나, 사후 추존된 왕에만 해당되는 이야기. 어지간한 왕의 신위는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지지 않고 종묘 정전에서 지금까지도 모셔지고 있다.
[22]
철종의 혈통상 증조부는
사도세자(장조)지만,
정조가
임오화변 이후
효장세자(진종)의
양자로 들어갔고, 철종 본인은
순조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족보상 '진종-정조-순조-철종'이 된다.
[23]
참고로 족보상 고조부인
영조는
1782년(정조 6년)에 진작에 세실(世室), 즉 불천위로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5대조로 따지든 4대조로 따지든 의미가 없었다.
[24]
이 때문에 당시
종묘 5묘제는
태조를 1묘,
정조를 2묘,
순조를 3묘,
문조(효장세자/익종)을 4묘,
헌종을 5묘로 간주했다. 이후
고종 즉위 후에는 즉위 순서대로
순조를 2묘,
문조를 3묘,
헌종을 4묘, 철종을 5묘로 간주했다.
[25]
출처: 《
철종실록》 3권, 철종 2년(
1851년, 청 함풍(咸豊) 원년) 9월 25일 (정축) 1번째기사.
#.
[26]
출처: 《
철종실록》 3권, 철종 2년(
1851년, 청 함풍(咸豊) 원년) 12월 28일 (기유) 1번째기사.
#.
[27]
다만,
홍경래의 난은
순조 재위기(순조 11년,
1811년)에 일어났다.
[28]
출처: 《
철종실록》 4권, 철종 3년(
1852년, 청 함풍(咸豊) 2년) 10월 22일 (기해) 1번째기사.
#.
[29]
정원경(鄭元慶)이 저술한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約編)》이다.
[30]
출처: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월 8일 (을묘) 1번째기사.
#.
[31]
당시에 추가된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32]
안동 김씨의 전횡에 질렸는지 "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 라는 발언을 했다가
안동 김씨의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철종은 처음에는 작호만 박탈하자고 했지만 결국
안동 김씨 세도의 압박을 견딜수가 없어 유배보내야 했다. 출처: 《
철종실록》 12권, 철종 11년(
1860년, 청 함풍(咸豊) 10년) 11월 12일 (신묘) 2번째 기사.
#
[33]
한편
왕족을 연행사로 임명한 것은 철종뿐만이 아니었고,
숙종 역시
삼번의 난을 전후한 시기에 왕족들을 파견한 사실이 확인된다.
[34]
출처: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1862년, 청 동치(同治) 원년) 6월 10일 (신유) 2번째기사.
#.
[35]
출처: 《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1862년, 청 동치(同治) 원년) 6월 12일 (계해) 1번째기사.
#.
[36]
사실 폐지할 때 쯤에는
삼정의 문란 저지를 위한 삼정이정청이 정작 세도가의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는 등 문제가 심했다.
[37]
단, 사면 문제에 한해서는 신하들의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시켰다.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
1840년, 헌종 6년
사망)을 대간 + 대신이 반대했음에도 사면시켰고,
정조 대에
대리청정을 반대하다가 죽은
홍인한 역시 처음에는 신하들이 반대하자 물러났다가
1858년(철종 9년),
원자가 탄생하자 이 분위기에 편승해 사면했는데 때가 때인지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철종 초반기에
안동 김씨의 압력으로 죽인 조병현도
1853년(철종 4년)에 사면시켰다. 이때도
안동 김씨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38]
비슷한 테크를 탄 왕으로
신라
효공왕이 있었다. 궁 밖에서 자라다 소환되어 왕이 되었지만 권력을 상실한 꼭두각시 신세와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국가는 이미 파멸해가고 있었기에 절망한 나머지 여흥에 빠졌다. 하지만
효공왕은 철종보다 더 비참한데 이로 인해 그의
후궁들이 신하에게 살해되는 수모를 겪어도 처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신이 살해될까봐 두려워하는 처지였다. 철종은 그래도
안동 김씨들도 자기들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는 말을 곱게 따라주기라도 했다.
[39]
또한, 철종의 경우, 뇌물 문제 등에 대해서 직접 문제를 꺼내는 등 신하들한테 눈칫밥 먹이면서 제지할 정도는 됐으니
효공왕 등 완전히 꼭두각시 신세였던 왕들보다는 사정이 그나마 좋았다.
[40]
특히
1861년(철종 12년)부터 앓아눕기 시작해 정무도 겨우 결재할 정도였다.
[41]
출처: 《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
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8번째기사.
#.
[42]
전임 왕
헌종이 워낙 단명해서 그렇지 철종도 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임금이다.
[43]
확실히 철종이 단명할 일생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철종 바로 위인 서자 형인 영평군은 무려 소갈증(당뇨)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73세의 꽤 장수한 나이로
사망했는데, 동생 철종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도 구한말의 상당기간동안 살아있던 셈이다. 철종의 직업(?)이
왕이었음을 감안하면 그정도는 무리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 왕들과 비슷한 환경이었다면 50대는 찍고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44]
출처: 《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872년, 조선 개국(開國) 481년) 7월 4일 (병술) 1번째기사.
#.
[45]
철종은
인조의 차남인
효종의 7대손, 고종은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의 8대손이다.
[46]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다.
[47]
실제로
흥인군,
흥선군계가 싫다고 해도 어차피 왕위 계승을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으로 올라가서 계승자를 찾아야 하거나 철종인 원범의 서형인 이욱의 아들들로 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욱은 아들이 없었고 결국 뒷날
고종 대에 가서 양자를 들이게 된다. 그리고
효종의 직계후손들은 이미 단절된 상황에서[49]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들로 가야하는데 그나마 가깝다해도 멀긴 하다. 그나마
인조의 아들들의 후손이면서 그래도 양자로
은신군의 아들로 들어온
남연군의 후손들이 그나마 제일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