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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후작 | |||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3대 부의장 | |||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 |||
<colbgcolor=#29176e>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박영효 朴泳孝 | Park Yeong-hy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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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de09> | |||
창씨명 | <colbgcolor=#fff,#1f2023>야마자키 에이하루 (山崎永春) | ||
출생 | 1861년 6월 12일 | ||
경기도
수원유수부 (現 경기도 수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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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9년 9월 21일 (향년 78세) |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직업 | 정치가, 언론가, 관료 | ||
학력 | 메이지학원 영어과 졸업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 ||
주요 경력 |
내부 대신 궁내부 대신 동아일보 초대 사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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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위호 | 금릉위(錦陵尉)[1] | |
호 |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
||
본관 | 반남 박씨 | ||
자 | 자순 (子純) | ||
종교 | 유교 ( 성리학) → 개신교 ( 감리회) | ||
가족 관계 |
아버지 : 박원양(1804 ~ 1884) 어머니 : 전의 이씨 배우자 : 영혜옹주(1858 ~ 1872) 슬하 2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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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조선귀족 후작 |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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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영효 초상[출처] |
일례로 1894년 동학혁명 이후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 종료를 경축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병사를 위로하고자 1895년 2월 5일(양력 3월 1일) 고종이 개최한 행사에서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선창할 만큼 친일파로 변절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으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김홍집의 명에 의해 역관 이응준이 사괘를 바탕으로 약식을 만들었고 박영효가 4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정식 사용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정안옹주의 10대손이며, 여말선초 대신 박은의 18대손이다. 즉, 박영효는 고종의 실제 혈통상 21촌 조카, 호적상 22촌 형제이다. 배우자인 영헤옹주 역시 22촌 형제가 되나 친가 친척 이외의 친척 간 결혼은 그 조선에서도 금기시되지 않았다.[5]1861년 경기도 수원의 진사 출신 가문에서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무량'이었다가 후에 '영효'로 개명하였다. 12세 때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과 후궁 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인 영혜옹주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에 봉해졌으나[6] 3달 만에 영혜옹주가 사망하면서 홀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7] 이를 딱하게 여긴 고종이 영혜옹주 하가 당시 영혜옹주를 모시러 따라온 궁녀들을 하사해 첩으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8] 그 뒤 여러 번 첩을 들였지만 불화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영혜옹주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이들은 서자가 되어야 하지만 영혜옹주 소생 자녀가 하나도 없는지라 이들은 국가공인으로 적자로 인정받았다. 박영효의 2남의 딸이 이우의 부인 박찬주다.[9]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개화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방지하는 데 주력했다. 이후 갑신정변을 일으킨 핵심 세력들은 부마인 박영효를 제외하고 문과에 급제자들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1882년 8월 8일 제3차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10]
2.2. 개화파의 선두 주자
조선보다 앞서 대외 개방, 근대화를 통해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급진 개화파에 참여했으나 온건 개화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정변 실패로 찬밥 취급을 당해 1885년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 생활에 적응 하지 못해 다시 일본으로 온다. 주동자 중 1명이었던 형 박영교는 청나라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은 10살 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11]일본에 망명하면서 수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과는 사이가 나빠져서 "김옥균에게 갑신정변에 뭐 한 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며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일본에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인기를 누리며 잘 살던[12] 김옥균과는 달리 나머지 동지들은 일본의 찬밥 취급에 박영효는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1885년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 환경에 적응을 못하였고 서재필을 제외하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1888년 도쿄에 위치한 메이지학원 영어과를 졸업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금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초기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오쿠무라 엔신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와 얽히는 관계로 어떤 소설에서는 옳다꾸나 하고 야설을 써놨지만[13]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근거는 없다. 이때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일본의 의도에 따라서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후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면서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같은 급진 개화파 동지인 서광범과 협력해서 김홍집을 바지사장 수준으로 내려버리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당시 친러 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 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 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유길준이 밀고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에 일본으로 2차 망명을 가는데 심지어 그런 후에 을미사변의 배후 조종 혐의까지 받았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 우범선을 쓸만하다"고 추천했다거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지만 정말 명성황후를 죽이자고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일로 고종의 원한을 단단히 산다. 이후 조직된 독립협회의 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의원[14]이나 심지어 고종을 폐위시키고 군주제를 폐지한 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헛소문까지 나왔을 정도.[15] 1900년에는 윤치호 등과 연통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밀정을 조선으로 보냈던 것이 들통나면서 궐석 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는 등 황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듯했다.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때문에 일본 정부에게서 고종이 퇴위당한 뒤 순종의 즉위 시기에 몰래 밀입국하였고 그 상황에서 박제순이나 일본 고문 가토 등과 연통해서 자신에 대한 사면령을 받아내고는 정식으로 귀국한 것처럼 행세했다. 이후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의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 미수한 혐의[16]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가 해제되었으나 상경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때도 다시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몰래 상륙을 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결국 경술국치를 경상남도 마산에서 맞이한다.
2.3. 국권침탈 이후
동아일보 사장 시절 모습 |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임기 중이던 1939년 9월 21일 향년 78세에 노환으로 죽었으며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정실 부인이었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부산 다대포[17]에 명당이 있다고 추천받아 그곳에 처음 운구하여 매장하였으나 이후 자손이 사업실패로 묘소를 팔고 경기도로 이장했다. #1 #2
3. 기타
-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의 부통령으로 거론되었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대통령제 임시정부가 조직된 적이 없다는 연구가 축적되어 학계에서도 공인됐지만 인터넷에는 잘못된 정보가 떠돌아다니는 형편이다.
-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 유공자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애국 단체 등에서 생애 후반의 친일 행적 등을 지적하며 비판을 받아왔다. 결국 친일 행위가 드러나면서 서훈 및 훈장 포상자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이 올려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 704인 명단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 한때 태극기 최초 개발자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정확히 말한다면 박영효는 태극기를 공식 석상에서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지 최초 개발자는 아니며 태극기의 최초 개발자는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태극기를 개발했던 이응준이다.
- 갑신정변 직전에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 장학생들 중에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진사가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로 그 일본 유학 프로그램도 무산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 1932년 개봉한 영화 <개화당이문>에서는 임운학이 연기했다.
4.2. 드라마
- 1981년 KBS2 TV문학관 <횃불>에서는 배우 백준기가 연기했다.
- 1994년 11월 26일자 KBS1 <역사의 라이벌>에서는 배우 김성찬이 연기했다.
[1]
위호는 본관인 반남이 속한 고을인
나주의 별칭인 '금성'에서 따왔다.
[출처]
《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
[3]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는 조선이 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결혼했던 관계로 부마에 봉해지지 않았다.
[4]
일설에 따르면
고종이 박영효를 부마로 선택한 이유가 잘 생겨서라고 한다.
[5]
이런 식으로 친가를 제외한 친척 간 결혼은 연산군, 중종, 고종 등도 있었다.
[6]
기록에 따르면
미소년이라서 왕녀와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 나잇살이 붙기 전 찍은 사진을 보면 확실히 미남상이다.
사진 링크.
[7]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부마이기도 하다.
[8]
영혜옹주의 생모가
숙의 범씨인데 고종이 내린 궁녀도 범씨였다고 한다. 범씨가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기막힌 우연이라 하겠다.
[9]
하지만 박영효의 아들은 전부 박영효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박영효가 친일 부역을 해서 받은
후작 작위를 계승한 것도 박영효의 장손(차남의 아들)인 박찬범이다.
[10]
이때
태극기가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11]
전제정치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는데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
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
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서광범(
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그래서 한동안 박영효의 집안
반남 박씨에서도 '영(泳)'을 '승(勝)'으로 바꾸었다는 근거없는
풍문이 돌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영효는 반남 박씨 중 '오창공파'로 다른 반남 박씨 파와 다르게 '오창공파'는 원래 항렬자가 '승'이 아니라 '영'을 썼으며 갑신정변 이후에도 '영'자 항렬을 썼다. 무엇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59년 전에 출간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12]
일본 정부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도야마 미쓰루,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이 지원을 해줬다.
[13]
저 책의 저자인
신봉승이 대본을 쓴 <
찬란한 여명>에서도 그렇게 묘사된다. <찬란한 여명>에서 박영효 역은
이민우, 오쿠무라 이오코 역은
송윤아였다.
[14]
대통령 추대설과는 달리 진짜로 독립협회는 박영효를 대신으로 추대했다. 물론 이때 박영효는 반역자로 단단히 낙인찍힌 상태였고 이는 독립협회의 몰락을 불러왔다.
[15]
이 소문에서 부통령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은 윤치호.
[16]
사실 별로 근거는 없고 이완용과의 정권 다툼에서 밀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박영효가 고종의 양위를 기뻐하지 않았으니 역적이라고 불렀고 박영효는 이완용이 역적이라고 했을 뿐 죄가 없다고 맞섰다. 이때 박영효가 구속되었을 때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딱히 이완용과 박영효 사이에 차별성은 찾기 어렵다.
[17]
현재 지하철1호선 다대포항역 옆 라파요양병원 자리.
[18]
남산한옥마을 최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청이 널찍한 데다 표지판도 있으므로 찾기는 쉽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집이 아니라 해방 후 옮겨온 것으로, 목재 구조인 한옥은 현대식 콘크리트 구조물에 비하면, 집 전체를 뜯어다 새로 조립하기 수월하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