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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21:45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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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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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개화파
急進開化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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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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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
권동진 김옥균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서재창 서재필 신응희 유길준* 유혁로
이규완 이도재 정난교 정병하 홍영식
대한제국
(1897 ~ 1910)
고영희 권동진 권중현 민영달 박영효
박중양 송병준 서재필 신응희 안경수*
양한묵 오세창 유길준* 유혁로 윤치호
이규완 이도재 이준 이재극 정난교
* 온건개화파로 보는 시각도 있음.
조선의 붕당
(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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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甲申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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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갑신정변 주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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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갑신정변 · 정각 14조와 내각 개편 · 삼일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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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내각
( 갑오개혁 을미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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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상공부대신 엄세영 김가진 정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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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부대신 서광범 서광범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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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대신 김윤식 김윤식 김윤식
학부대신 박정양 이완용 서광범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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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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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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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고영희 권중현 민상호 박제순 송병준
이근상 이근택 이완용 이재곤 이지용
이하영 임선준 장석주 조중응 조희연
조민희 한창수
찬의
강경희 권봉수 김만수 김사묵 김영한
남규희 민상호 박경양 박승봉 박제빈
박중양 염중모 유맹 유정수 윤치오
이건춘 이겸제 이재정 이준상 정인흥
조영희 조희문 한창수 홍승목 홍종억
부찬의
고원식 구희서 권태환 김교성 김낙헌
김명규 김명수 김준용 김필희 김한규
김한목 나수연 민건식 민원식 박제환
박희양 서상훈 서회보 성하국 송지헌
송헌빈 신우선 신태유 어윤적 엄태영
오재풍 오제영 윤치오 이도익 이만규
이봉로 이원용 이항직 정동식 정병조
정진홍 조병건 조재영 조제환 조원성
최상돈 한동이 허진 홍우철 홍운표
홍재하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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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고희경 권중현 민병석 민영기 박영효
송병준 이하영 윤덕영 이윤용
부찬의
김현수
칙임 참의
김영진 김영한 김한목 남규희 민상호
민영찬 민형식 박승봉 박이양 박기양
박상준 박승봉 박의병 박제빈 박중양
백인기 상호 서상훈 신석린 신응희
어윤적 엄준원 염중모 유맹 유성준
유정수 유혁로 이건춘 이겸제 정진홍
조민희 조진태 조영희 조희문 한상룡
한진창
주임 참의
강병옥 고원훈 권태환 김갑순 김교성
김기태 김명규 김명준 김상설 김상섭
김연상 김영무 김정태 김준용 김창한
김필희 김현수 나수연 노창안 박경석
민건식 민영은 박기동 박기순 박봉주
박이양 박제환 박종렬 박흥규 박희양
방인혁 서병조 선우순 송종헌 송지헌
신석우 신태유 신창휴 심준택 심환진
안병길 양재홍 오재풍 오태환 원덕상
유기호 유빈겸 유익환 유흥세 윤치소
이강원 이근우 이기승 이도익 이동우
이만규 이병렬 이병학 이택규 이택현
이항직 이흥재 이희덕 장대익 장도
장상철 장응상 장직상 장인원 전석영
정동식 정란교 정병조 정순현 정재학
정태균 정호봉 조병건 천장욱 최석하
피성호 한영원 한상봉 한창동 허명훈
홍성연 현은
참의
구연수 김윤정 김춘희 김한목 김희작
남규희 민병석 박기순 원응상 윤갑병
윤정현 장헌식 정건유 현기봉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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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민병석 윤덕영 이윤용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서규 김영진
김윤정 남궁영 민상호 박두영 박상준
박영철 박용구 박중양 서상훈 신석린
어담 엄준원 염중모 유정수 유진순
유혁로 윤갑병 이겸제 이범익 이진호
장헌식 정교원 조경하 조성근 조희문
주영환 최린 한규복 한상룡 한진창
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 강번 고일청 김경진 김기수
김기홍 김도현 김두찬 김병규 김사연
김상설 김상형 김상회 김신석 김영택
김정석 김정호 김종흡 김진수 김창수
김한규 김한목 김한승 남백우 노영환
문종구 민병덕 박기석 박종렬 박보양
박봉진 박철희 박희옥 방의석 방태영
서병조 서병주 석명선 선우순 성원경
손재하 손조봉 송지헌 신희련 안종철
오세호 오태환 원덕상 유승흠 유태설
이경식 이교식 이근수 이근우 이기찬
이기승 이동우 이명구 이방협 이승우
이병렬 이선호 이은우 이종섭 이충건
이진호 이택규 이희덕 이희적 인창환
장대익 장석원 장직상 장헌근 정관조
정란교 정대현 정석모 정석용 정해붕
조병상 주영환 지희열 최남선 최양호
최연국 최윤 최윤주 최준집 최지환
최창조 하준석 한영원 현준호 현헌
홍치업 황종국
참의
강필성 김병원 김성규 김제하 박상준
어윤적 유만겸 유성준 진희규 홍정철
}}}}}}}}}
[ 1940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1000><bgcolor=#062861><-5> 고문 ||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 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란교 정연기 진학문
최린 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집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 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
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룡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한정석 현준호 황종국
참의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
||
†- 재직 중 사망.
}}}}}}}}}}}}}}}}}} ||
조선귀족 후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3대 부의장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colbgcolor=#29176e>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박영효
朴泳孝 | Park Yeong-hyo
<colcolor=#ffde09> 파일:박영효 초상.jpg
창씨명 <colbgcolor=#fff,#1f2023>야마자키 에이하루 (山崎永春)
출생 1861년 6월 12일
경기도 수원유수부
(現 경기도 수원시)
사망 1939년 9월 21일 (향년 78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직업 정치가, 언론가, 관료
학력 메이지학원 영어과 졸업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주요 경력 내부 대신
궁내부 대신
동아일보 초대 사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일본 제국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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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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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위호 금릉위(錦陵尉)[1]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 반남 박씨
자순 (子純)
종교 유교 ( 성리학) 개신교 ( 감리회)
가족 관계 아버지 : 박원양(1804 ~ 1884)
어머니 : 전의 이씨
배우자 : 영혜옹주(1858 ~ 1872)
슬하 2남 1녀
작위 조선귀족 후작
비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개화파의 선두 주자2.3. 국권침탈 이후
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파일:박영효.jpg
박영효 초상[출처]
조선 정치가, 갑신정변의 주역, 개화파이자 조선의 마지막 부마.[3][4]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망명하였고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변절한다.

일례로 1894년 동학혁명 이후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 종료를 경축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병사를 위로하고자 1895년 2월 5일(양력 3월 1일) 고종이 개최한 행사에서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선창할 만큼 친일파로 변절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으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사용한 사람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김홍집의 명에 의해 역관 이응준이 사괘를 바탕으로 약식을 만들었고 박영효가 4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정식 사용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정안옹주의 10대손이며, 여말선초 대신 박은의 18대손이다. 즉, 박영효는 고종의 실제 혈통상 21촌 조카, 호적상 22촌 형제이다. 배우자인 영헤옹주 역시 22촌 형제가 되나 친가 친척 이외의 친척 간 결혼은 그 조선에서도 금기시되지 않았다.[5]

1861년 경기도 수원의 진사 출신 가문에서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무량'이었다가 후에 '영효'로 개명하였다. 12세 때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 후궁 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인 영혜옹주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금릉위'에 봉해졌으나[6] 3달 만에 영혜옹주가 사망하면서 홀몸이 되었다. 부마는 재혼을 못 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평생 홀아비 인생을 12살 나이에 예약한 셈.[7] 이를 딱하게 여긴 고종이 영혜옹주 하가 당시 영혜옹주를 모시러 따라온 궁녀들을 하사해 첩으로 삼도록 하였다고도 한다.[8] 그 뒤 여러 번 첩을 들였지만 불화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영혜옹주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이들은 서자가 되어야 하지만 영혜옹주 소생 자녀가 하나도 없는지라 이들은 국가공인으로 적자로 인정받았다. 박영효의 2남의 딸이 이우의 부인 박찬주다.[9]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고 1882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개화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처음으로 김옥균과 관계를 맺었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방지하는 데 주력했다. 이후 갑신정변을 일으킨 핵심 세력들은 부마인 박영효를 제외하고 문과에 급제자들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1882년 8월 8일 제3차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10]

2.2. 개화파의 선두 주자

조선보다 앞서 대외 개방, 근대화를 통해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급진 개화파에 참여했으나 온건 개화파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서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한 민씨 일가 사람인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는 정권 탈취를 시도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주동자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정변 실패로 찬밥 취급을 당해 1885년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 생활에 적응 하지 못해 다시 일본으로 온다. 주동자 중 1명이었던 형 박영교는 청나라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은 10살 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11]

일본에 망명하면서 수차례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같은 망명자 김옥균과는 사이가 나빠져서 "김옥균에게 갑신정변에 뭐 한 거 있나? 나랑 홍영식이 다 했지..."라며 디스를 날리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부터 일본에 자리를 잡아서 나름 인기를 누리며 잘 살던[12] 김옥균과는 달리 나머지 동지들은 일본의 찬밥 취급에 박영효는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1885년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 환경에 적응을 못하였고 서재필을 제외하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1888년 도쿄에 위치한 메이지학원 영어과를 졸업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금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초기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오쿠무라 엔신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와 얽히는 관계로 어떤 소설에서는 옳다꾸나 하고 야설을 써놨지만[13]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근거는 없다. 이때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일본의 의도에 따라서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후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분류되면서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같은 급진 개화파 동지인 서광범과 협력해서 김홍집을 바지사장 수준으로 내려버리는 등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삼국간섭 이후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당시 친러 정책으로 가던 내각의 흐름을 친일 내각으로 되돌리고자 왕비 암살을 모의하다가 걸린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유길준이 밀고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에 일본으로 2차 망명을 가는데 심지어 그런 후에 을미사변의 배후 조종 혐의까지 받았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 우범선을 쓸만하다"고 추천했다거나 하는 정황이 포착되지만 정말 명성황후를 죽이자고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일로 고종의 원한을 단단히 산다. 이후 조직된 독립협회 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의원[14]이나 심지어 고종을 폐위시키고 군주제를 폐지한 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헛소문까지 나왔을 정도.[15] 1900년에는 윤치호 등과 연통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밀정을 조선으로 보냈던 것이 들통나면서 궐석 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는 등 황실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는 듯했다.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때문에 일본 정부에게서 고종이 퇴위당한 뒤 순종의 즉위 시기에 몰래 밀입국하였고 그 상황에서 박제순이나 일본 고문 가토 등과 연통해서 자신에 대한 사면령을 받아내고는 정식으로 귀국한 것처럼 행세했다. 이후로 을사조약의 주범인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들어갔으나 고종의 양위에 개입한 대신들을 암살 미수한 혐의[16]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가 해제되었으나 상경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때도 다시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몰래 상륙을 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결국 경술국치 경상남도 마산에서 맞이한다.

2.3. 국권침탈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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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장 시절 모습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8년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인촌 김성수 등과 함께 경성방직 창립에 기여해 1935년까지 초대 사장을 지냈다. 1920년 4월 <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초대 사장이 되었으나 1920년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요 사건을 <동아일보>가 게재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조치를 당하자 사임하였고 1922년 경희궁 내 전각인 황학정을 철거해 등과정 터로 옮기는데 앞장섰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격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1932년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932년 조선방송협회 초대 부총재도 맡았다.(총재는 없었다.)

1939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가 임기 중이던 1939년 9월 21일 향년 78세에 노환으로 죽었으며 작위는 손자 박찬범이 계승했다. 죽은 뒤 고작 3개월 동안 부부였으나 평생 정실 부인이었던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는데 후에 후손들이 화장하였다고 한다. 부산 다대포[17]에 명당이 있다고 추천받아 그곳에 처음 운구하여 매장하였으나 이후 자손이 사업실패로 묘소를 팔고 경기도로 이장했다. #1 #2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4.2. 드라마



[1] 위호는 본관인 반남이 속한 고을인 나주의 별칭인 '금성'에서 따왔다. [출처] 《조선귀족열전》(朝鮮貴族列傳) [3]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는 조선이 망한 뒤인 일제강점기에 결혼했던 관계로 부마에 봉해지지 않았다. [4] 일설에 따르면 고종이 박영효를 부마로 선택한 이유가 잘 생겨서라고 한다. [5] 이런 식으로 친가를 제외한 친척 간 결혼은 연산군, 중종, 고종 등도 있었다. [6] 기록에 따르면 미소년이라서 왕녀와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 나잇살이 붙기 전 찍은 사진을 보면 확실히 미남상이다. 사진 링크. [7]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부마이기도 하다. [8] 영혜옹주의 생모가 숙의 범씨인데 고종이 내린 궁녀도 범씨였다고 한다. 범씨가 흔한 성씨는 아니므로 기막힌 우연이라 하겠다. [9] 하지만 박영효의 아들은 전부 박영효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박영효가 친일 부역을 해서 받은 후작 작위를 계승한 것도 박영효의 장손(차남의 아들)인 박찬범이다. [10] 이때 태극기가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11] 전제정치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는데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 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 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서광범( 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그래서 한동안 박영효의 집안 반남 박씨에서도 '영(泳)'을 '승(勝)'으로 바꾸었다는 근거없는 풍문이 돌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영효는 반남 박씨 중 '오창공파'로 다른 반남 박씨 파와 다르게 '오창공파'는 원래 항렬자가 '승'이 아니라 '영'을 썼으며 갑신정변 이후에도 '영'자 항렬을 썼다. 무엇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59년 전에 출간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12] 일본 정부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김옥균을 높이 평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도야마 미쓰루,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이 지원을 해줬다. [13] 저 책의 저자인 신봉승이 대본을 쓴 < 찬란한 여명>에서도 그렇게 묘사된다. <찬란한 여명>에서 박영효 역은 이민우, 오쿠무라 이오코 역은 송윤아였다. [14] 대통령 추대설과는 달리 진짜로 독립협회는 박영효를 대신으로 추대했다. 물론 이때 박영효는 반역자로 단단히 낙인찍힌 상태였고 이는 독립협회의 몰락을 불러왔다. [15] 이 소문에서 부통령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은 윤치호. [16] 사실 별로 근거는 없고 이완용과의 정권 다툼에서 밀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박영효가 고종의 양위를 기뻐하지 않았으니 역적이라고 불렀고 박영효는 이완용이 역적이라고 했을 뿐 죄가 없다고 맞섰다. 이때 박영효가 구속되었을 때 배탈이 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약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딱히 이완용과 박영효 사이에 차별성은 찾기 어렵다. [17] 현재 지하철1호선 다대포항역 옆 라파요양병원 자리. [18] 남산한옥마을 최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청이 널찍한 데다 표지판도 있으므로 찾기는 쉽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집이 아니라 해방 후 옮겨온 것으로, 목재 구조인 한옥은 현대식 콘크리트 구조물에 비하면, 집 전체를 뜯어다 새로 조립하기 수월하기에 가능했다.